-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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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시는 분의 연세가 아흔 가깝다고 들었습니다. 수년을 요양원에 계셨으니 넉넉하지 않은 자식들의 사정도 힘겨웠을 것입니다. 상주인 동네 형님으로부터 장자는 어머니보다 앞서 오래 전에 세상을 떴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맏상주가 된 그는 쉰 살을 넘긴 노총각으로 당뇨와 합병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는 마을입구에 살면서 백오산방 근처와 다른 곳에 남의 농토를 빌려서 작은 규모로 마늘과 감자, 옥수수 농사를 짓는 분입니다. 그는 올라올 때 마다 거의 매번 나의 오두막에 들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차를 타드리곤 했습니다. 배운 것이 많지 않으신 형님은 말투가 투박하지만, 퇴비 많이 써서 농사지으라는 당부를 하다가 당신 집안 사정 이야기를 할 때는 알 수 없는 분노를 비추기도 했습니다.
앞서 세상을 떠난 형을 대신하여 오늘은 그가 맏상주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 장례식장에 갔을 때도 그는 예의 그 투박한 과묵으로 나를 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과 얼굴 표정에는 여태 보지 못한 감정이 금새라도 터질 듯 그득차 있었습니다. 오늘 그의 얼굴은 심상치가 않습니다. 다가가 어깨에 손이라도 얹으면 절대 눈물을 보일 것처럼 생기지 않은 그가 아이처럼 울지는 않을까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장지는 나의 오두막에서 400m쯤 떨어진 양지바른 밭 가장자리입니다. 상여는 당연 나의 산방으로 닿는 길을 거쳐 오르다가 제법 깊은 계곡을 건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장지에 닿을 것입니다. 비슷한 연세의 동네 할머니들이 마을입구에서 상여를 떠나 보내며 서럽게 곡을 합니다. 요령소리의 특별한 박자와 만가로 풀어내는 고인 생전의 애닯은 삶이 절묘하게 섞이면서 할머니들의 곡은 오열로 바뀝니다. 물리적으로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웃 할머니들이 또래와 나누는 별리의 슬픔이 하도 깊어서 만가의 후렴을 부르는 내 가슴도 젖어오는 느낌입니다.
상여는 산방으로 오르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노루재에서 멈췄습니다. 요령잡이의 의지인지, 아니면 상여의 앞머리에 선 상두꾼 형님들의 의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상두꾼 모두의 발이 제자리 걸음을 합니다. 잠시 뒤에 상여를 내려놓으라는 신호가 옵니다. 요령은 계속해서 울고 만가의 가사 속에서는 맏상주인 그 노총각 형님만을 열외로 하고, 차례차례 다른 자식과 며느리를 보자고 읊조립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노루고개 넘어서면 다시오기 어려우니 자식얼굴 모두 보자… 며느리들 얼굴도 만나고 가자…” 가사 속에 녹여서 호명된 이들 모두는 상여 앞으로 나와 노자를 놓고 말없이 절을 합니다.
다시 요령잡이가 몸을 돌려 앞장을 서고 우리 상두꾼들은 박자를 따라 상여를 메고 출발합니다. 이윽고 산방으로 오르는 길과 장지로 향하는 갈림길을 지나 작은 계곡에 이르러 상여는 다시 멈춰섭니다. “이제 가면 못 오나니, 사위들 얼굴 모두 보자… ○○조카도 보고가자…” 요령잡이는 이미 순서를 준비라도 한 듯, 망자가 되어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불러 절하게 하고 있습니다. 살아서 다 나누지 못한 별리의 정을 떠나는 길 위에서라도 나누게 하는 이 과정이 없다면, 보내는 이들의 상실감은 더욱 크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통해 누군가를 보내야 하는 것은 상실 중에 가장 큰 상실입니다. 어찌 보면 상실은 무언가를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하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그림, 아직 다 나누지 못한 사랑을 평생 이룰 수 없는 그리움으로 품고 살아야 하는 것, 그것이 상실의 맨 얼굴인지도 모릅니다. 장지가 지척입니다. 이제 곧 맏 상주 그의 상실감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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