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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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일 년 만에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10년도 넘은 기억이지만 나는 그와의 첫 만남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기자였습니다. 그의 말투와 표정과 행동에서는 기자다운 건조함과 적당한 무례함이 배어 나왔습니다. 그는 만나자 마자 대뜸 “김대표님은 꿈이 뭐예요?” 라고 물었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 질문이 내 삶을 이 숲으로 이끈 기폭제였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날 그가 던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3년여 동안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느라 버거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후 나는 그 답을 찾아 숲으로 스며들었고 지금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내게 아주 가끔씩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의 전화는 늘 자정 근처의 시간에 울렸고 한결같이 취중이었습니다. 내가 조직을 떠날 마음을 품고 있을 때 그도 기자직을 버렸습니다. 큰 기업의 엔터테인먼트 사업부문을 맡아 자리를 옮겼고 그는 그것을 좋아했습니다. 높은 연봉과 근사한 대우를 즐기며 왕왕 내게 질펀하게 술을 사기도 했습니다. 조직에서 그의 임무는 수익을 낼 수 있는 좋은(?) 영화를 발굴하여 투자하고 그 수익을 극대화하여 소속한 기업에 되돌려 놓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조직을 떠나 스스로 삶의 겨울을 맞았을 때 그의 삶은 봄날이었습니다. 흥행작에 투자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잔뜩 술에 잠겨 있습니다. “지난 3년간 나는 엉망이었습니다...
“김 대표님, 아니 외람되게 형님! 나 더는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듭니다. 이제 꼭 내려갈 겁니다. 뵙고 싶습니다. 형님의 이야기를 들어야 앞으로의 날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해줄 수 있는 위로가 듣는 것 외에 별로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침묵 뒤에 나는 나무가 겨울을 맞이하고 건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연에는 겨울이라는 시간이 배치되어 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여서 우리 삶에도 종종 겨울이라는 시간이 찾아 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겨울이 찾아 온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겨울을 맞았는데도 자신의 삶에 꽃이 피어나기를 바란다. 고통이 거기에 있다. 겨울을 맞아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고, 겨울이 온 것을 알지 못한 채 지나온 봄날처럼 여전히 꽃피기를 바라는 데 우리의 불행이 있다. 나무를 봐라! 겨울이 오기 전 그들은 가장 붉거나 노랗거나 저다운 빛으로 잎을 물들인다. 우리는 그것을 단풍이라 부르고 그 가없는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하지만 단풍은 실은 나무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두어들이는 모습이다. 이제 곧 성장을 멈춰야 하는 시간을 맞으려는 의식이 나무들의 단풍이다. 그들은 마침내 봄날부터 피웠던 모든 잎을 버려 겨울을 맞이한다. 벌거벗는 의식이다. 우리는 그것을 낙엽이라 부른다.”
그가 가만히 묻습니다. “나무들은 발가벗고 뭘 하나요? 그냥 멈춰있는 건가요?” 내가 나직이 답합니다. “나무들은 나목(裸木)이 되어 자신을 지킨다. 겨울엔 오로지 자신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소비도, 생산(인간으로 치면 무모한 모색)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목은 무언가를 생산하려는 시도를 멈춘다. 당연히 소비도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한다. 간결해지는 것이고, 가벼워지는 것이다. 어쩌면 다만 버티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에는 그렇게 버티는 것만이 가장 큰 희망이고 수행인 시기가 있다. 남쪽 볕 좋은 땅에는 매화 피었다는 이야기를 오늘 들었다. 그들의 꽃은 꽃눈을 뚫고 핀 것인데 그 꽃눈은 도대체 언제 만들어졌을까? 알면 놀랄 거다. 그것은 매화나무가 지난 여름에 이미 만들어 가을과 겨울 동안 고이 지켜낸 것이다. 많은 것을 버려 겨울을 맞으면서도 매화는 그렇게 자신의 꿈과 희망만은 지키고 보듬었던 것이다. 나무는 늘 겨울을 인정하며 그 때에 겸허하다.”
그분 이야기에 왈칵 눈물이 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분의 봄이 빨리 찾아와주기를 멀리서나마 응원보냅니다.
겨울 나무처럼 자신을 지켜야 하는지 자신을 깨끗히 비워내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요즘 선생님의 글을 만나게 되니 무척 반가워 감히 댓글 달아봅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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