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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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이 눈에 잘 안 들어오고, 글도 써지지 않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글을 쓰기를 바라면서, 둘 다에 부담을 갖고 있구나. 머리와 어깨에 힘이 들어갔구나. 마음은 부담이 가득하고 정신은 경직되고 몸은 긴장했구나.’ T. S. 엘리엇의 시 한 구절이 나비처럼 가슴으로 날아듭니다.
“부담이 커지면 글이 비틀리고 갈라지다가 깨어지네.
긴장이 심해지면 미끄러지고 굴러 떨어지기도 하지.
불명료하여 썩어버리는가 하면
한 자리에 조용히 머무르지도 않지.
비명소리, 고함소리, 웅성거리는 소리가
늘 공격을 가해오네.”
부담과 긴장이 뭉치면 놀 수 없습니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둘이 먼지처럼 작아 보이던 어릴 적 어느 날이 뭉게구름처럼 떠오릅니다. 그때 참 신나게 놀았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놀고 싶었고, 언제 어디서든 놀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되돌아보면 신기한데 그때는 당연한 게 놀이였습니다. 가끔 친구들과 함께 놀던 그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럴 때면 그 시절이 기억나는 그 장소, 그 친구들과 함께 했던 곳을 찾아갑니다. 그 곳의 그 집 앞 계단에 앉아 그 시간을 회상합니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늘 걱정이 앞서고, 잘 되는 시나리오 보다 그와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먼저 떠올립니다. 지금도 그렇고 어릴 때도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놀 때는 그런 생각 안 했던 것 같습니다. 놀 때의 마음은 비관도 낙관도 아닌 텅 비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텅 비어 있어서 단순했던 것 같고, 단순했기에 잘 놀았던 것 같습니다. 이 마음 상태를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스티븐 나흐마노비치가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에서 말한 ‘노는 마음’,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상태”가 이 마음에 대한 가장 절묘한 설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승인 무문(無門)의 아래와 같은 시구를 지금은 머리로 이해하지만 그때는 온 몸으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봄에는 수많은 꽃, 가을에는 밝은 달,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는 흰 눈.
잡념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모든 계절이 다 좋은 계절인 것을.”
그래요, 사계절이 놀기 좋은 날이었어요. 언제 어디서든, 낙관했든 비관했든지 간에 그런 생각 없이 놀았지요. 온 세상이 노는 곳이었고 온갖 것들이 놀 것들이었습니다.
부담과 긴장은 놀이와는 안 어울립니다. “기쁨에 매달리는 이는 삶의 날개를 부러뜨리고 말지만 날아가는 기쁨에 입 맞추는 이는 영원의 해가 떠오르는 곳에 살게 되네.”,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입니다. 좋은 책들은 많고, 쓰고 싶은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책과 글쓰기에 매달리기보다는 그것들에게 입 맞추듯 다가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구야, 놀자!”처럼 책과 글쓰기를 불러봅니다.
“책아 놀자, 읽으면서 놀자. 글쓰기야 놀자, 쓰면서 놀자. 우리 함께 놀자!”
내게 노는 마음을 상기하게 만든 책은 스티븐 나흐마노비치가 쓴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입니다.
*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저, 이상원 역,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에코의서재, 2008년
* 홍승완 트위터 : @SW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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