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땠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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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달간 나의 주말의 90%는 동네 커피전문점에서 보낸 시간이
대부분이다. 매주 주어진 지적 RACE 수행을 위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택한 주말 사무실이었다. 이번 주 과제는 ‘솔로몬
탈무드’이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책에서 이런
저런 좋은 글귀를 뽑아내고 있다. 6시간 정도 작업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시간. 매장 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음악을 들으며 주변에 대한 신경을
끄고 과제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세 명이 눈에 띈다.
대학생을 보이는 젊은 여자, 아빠와 엄마로 보이는 두분.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려온다. 분위기가 꽤나 흥미롭다.
그들은 직장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취업을 앞둔(또는 잠재적 취업준비생일지도 모를) 딸을 위해 아빠와 엄마가 자신들의
직장 생활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직급에 따라서 어떤 대우를 해줘야 하는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 엄마는 상사에게 어떤 식으로 어필을 했었는지,
아빠의 회사에서 PM(PROJECT MANAGER)를 선발해서 일하는 과정에 벌어진 마찰과
어려움, 그의 탈퇴(퇴직?!)
등 경험에 바탕을 둔 CASE들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
‘솔로몬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인들의 기본적인 교육철학과 방법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교육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던 차에, 내 주변에서도 그런 교육을 하고 있는 예를 찾아낸 것이다 (샐리의 법칙이다). 그들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고 있었고, 대화를 하며 서로의 감정 주고받는 교감과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CASE를 들려주며 딸이 스스로 곱씹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탈무드를 같이 읽고 난 뒤 바로 실습해 보는듯한 모습이었다.
저들은 현대 사회에서도 보기 어려운 소수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아이에게 직장에 대해 조언한다고 해봐야, ‘영어는 무조건 해야 하고, 인턴쉽 해보면서 간접경험 하는게 중요해. 첫번째 직장이 중요하니 심사숙고하고…..’ 등의 대략적인 법칙을 알려주는 정도가 대부분이지 저들과 같이 구체적인 CASE(협상, 인사고과, 퇴직, 고객과의 마찰 등)를 제시하며 설명해주는 부모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샤무엘 울만이 말하는 ‘청춘’의 향기가 나는 ‘젊은 가족’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사이사이 미소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과거 우리 사회의 교육은 일방적이었고, 결과지향적이었다. 피교육자가 택할 수 있는 목표들도 다소
한정되어 있었다. 국영수를 잘해서 내신을 잘 받고, 책을
많이 읽어 수능점수 잘 받아,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성공한 교육이었다.
개인의 성향이나 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SKY 같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에
취업하거나 또는 조금 더 좋은 직업, 즉 변호사나 의사, 검사, 치과의사가 되면 금상첨화였다. 좋은 직장과 생활의 안녕이 우선이었지, 자신의 적성이나 직업관은 차후 문제였다.
요즘은 한 술 더 뜬다. 교육열이 대단하다. 그런데 그 모양새가 조금 이상하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때야 하고 영어 할 줄 알아야 한다. 중 고등학교 입학 전에는 선행학습이 필수처럼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졸업을 해 대학에 입학하면 치열한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3.5 이상의
학점을 따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토익 900점 달성, 공모전, 봉사활동, 해외연수 등, 소위
말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게 움직여야 한다. 이 과정의 문제는 교육열만 대단하고
교육에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 즉 에너지가 더 많아 졌을 뿐 정작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왜’이다. 초등학교 입학해서 대학교 졸업까지 20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즐기지도 못하고 있다. 20년의 시간을 투자했음에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무엇을 원하는지도,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하는 지에
대한 생각이나 구체적인 실행방안 조차 없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정해진 시간에 눈에 보이는 고지만 넘어가면
된다는 교관의 지시와 구령에 맞춰 행군하는 군인들과 흡사하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고지점령이다. 우리들의 목표도 역시 오직 대학입학과 취업이다. 그 목표에 ‘왜’는
녀석은 없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 안으로 들어가봐도 난감한건 마찬가지이다. 학생을
성적 순으로 일렬종대 시키는 천편일률적인 학생평가, 그로 인해 동기를 잃을 대로 잃은 학생들은 학교분위기와
교육시스템에 실증이 내고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 학원에서 미리 학습한 내용으로 학교수업을 들을 필요
없어진 그들이 수업시간에 부족한 잠을 보충하거나, 저녁에 있을 학원수업 예습을 하는 건 예삿일이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인생의 선배이자 선생님인 사람들에 대한 학생들의 존경심은 찾아보기 어려워졌으며, 반대로 학생에 대한 선생님의 배려, 이해, 존중 또한 찾기가 쉽지 않다. 이는 일방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편엔 개인화되고 핵가족화된 가족의 모습 속에 무미건조해진 학생들이 있다. 점점
더 높아지는 삶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부모들, 부모와 같이 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가정(인성)교육과
가족(사람)간 사람들의 정은 그 이상으로 줄어들고 있다. 다른 한편엔 점점 더 불확실해 지는 현대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더 안정적인 직업을 찾고자 한 결과로 선생이라는
직업을 택한 과정이 있다. 모든 선생님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생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사회적 책임을
가진 ‘교사’라는 직업을 택하고 수행함에 있어 직업정신에
대한 고민은 둘째이고, 직업의 안정성이 첫째였던 것이 작용했을 것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취업을 우선으로 하지 직무나 직업관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위에서
언급한 ‘왜’의 부재가 초래한 결과이다. 이 모든 책임의 상당부분은 과거와 현재의 교육체계, 그리고 그런
교육체계를 알게 모르게 지원한 사회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일단, 교감과 배려와 존중의 감정이 형성되어야 한다. 이들은 선생과 학생이기 이전에 사람과 사람이며, 형(누나) 와 동생의 관계이다.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용역을 제공하고 제공받는, 회사와 고객 같은 관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관계로 발전해야 한다.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 선생은 자신의 경험과 주관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이끌어야 하고 학생들도 그런 선생을 단순히 선생이
아닌 인생의 선배이자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해온 인간으로 바라 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고
창작활동이나 음악활동 같은, 함께 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단순히 교실과 책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둘째로 현대의 교육은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들여다보면 각자 다양한
개성을 가진 학생들인데 어째서 한가지 척도인 성적, 점수로만 그들을 판단할 있단 말인가. 또한 그들이 살아갈 삶 또한 한결같지 않을 것인데 어째서 우리 사회는 그 엄청난 기회비용을 지불하게 하면서
일류대학에 들어가길 암묵적으로 강요하는가. 그렇게 틀에 맞춰 가르치고 평가하고 이끌다 보면 결국 그들은
똑같은 사회적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그 틀은 결국 핏빛바다,
레드오션이 될 것이다. 공부는 잘하지만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해 결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는 학생보다는, 국영수 성적은 별로지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고, 이를 직업선택과 사회기여에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는 뚜렷한 주관을 가진 학생들을
만들어내는 것 우선이다. 이는 결국 그들이 속한 사회와 더 나아가 이세상을 바꾸는 혁신적인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의 교육은 물고기를 잡아다주는 교육이 아닌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육이어야 한다. 즉, 주입식이 아닌 사고식이 되어야 한다. 대화하고 질문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스터디 조직이 좋은 예일 수 있다. 다들
알다시피 이제 정보는 넘쳐난다. 세상의 수많은 정보는 내 손안에 있다.
내 눈앞에도 있고 내 귀에도 있다. 그 수많은 정보와 지식을 알려주고 외우게 해봐야 암기와
정보의 축적에 있어서는 스마트폰을 못 따라가는 우리다. 이제 지식을 외우고 뱉어내는데 땀을 흘려야 할게
아니라, 그 지식들을 활용하고 재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창조할 수 있는 사고형 인간이 되는데 힘써야
할 때이다. 인간의 두뇌는 컴퓨터의 발전속도를 못 따라갈 것이며, 잘해야
컴퓨터만큼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은 인건비와 유지비가 더 저렴한 컴퓨터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21세기는
사고의 시대이고 창조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 시대 속에 잘 융합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 또한 생각하고
창조하는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이는 혁신적으로 변화된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그림이다.
하늘이 도와준 것일까. 현대의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칼럼 방향을
못 잡고 있던 차, 과거의 교육의 단점과 핀란드와 같은 선진교육을 벤치마킹 한 현대의 교육을 이야기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그 가족이 나타났다. 그들에게는
대화가 있었고, 경험이 있었고, 교감이 있었고, 웃음이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부모의 이야기가 끝난 뒤 딸이 ‘단군신화’를 다소 비틀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화기애애한 대화 분위기를
이어갔다는 것이다. 단 세 명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우리가 고민해야 할 새로운 교육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