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iw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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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삼십 여 년 전의 일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한다. 고전문학 시간이었다. 당시 문과 반 학생들은 국어 외에 고문을 추가로 공부해야 했다. 30대 중반의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종종 수업 시작 처음 10분 정도는 수업과는 상관없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예기하곤 했다. 대부분 삶의 교훈적인 예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날도 그랬다. 그때였다. 누군가 큰 소리로 “선생님, 이젠 그만 하시고 진도 나가죠 “ 라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순간 우리 모두의 시선이 소리 난 쪽으로 향했다. 놀랍게도 그 친구는 전교 1,2 등을 다투던 애였다. 선생님은 순간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달아올라 “야, 넌 기본이 안 된 녀석”이라며 호되게 야단을 쳤고 그 친구도 그에 질세라 “ 선생님, 수업시간에 진도는 안 나가고 딴 예기만 하면 어떡합니까? 하며 맞받아 쳤다. 결국, 그 날 수업은 흥분을 참지 못한 선생님이 중간에 교실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으로 끝났다. 참고로 그 친구는 ‘SKY대’는 갔지만 자신이 그토록 원했단 S대는 가지 못했다.
한때 ‘전인교육’ 운운하며 교육혁신을 부르짖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쏙 들어갔다. 사실, 지성, 정서, 그리고 사회성이 조화된 인간으로 교육을 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다. 매 정권마다 교육개혁의 중요성을 예기하지만 어디서부터 ‘메스’를 댈지 엄두를 내지 못한다. ‘올바른 교육’하면 대부분 탈무드에 기초한 유대인 교육방식을 거론한다. 질문과 토론위주 교육, 인성과 적성을 중시한 교육, 어떤 대학 또는 어떤 회사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중시하며 자율과 자립을 강조하는 유대인 교육을 다들 선망한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는 그것을 모방할 여건이 안되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묻지마 대학졸업’ 의 비정상적인 사고가 바뀌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다.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며칠 전에 숲 생태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땅 바닥에 낮게 수줍게 피어있는 이름 모를 들풀, 그리고 쭉 뻗은 나무들을 보면서 인간들은 겸손과 감사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소나무가 생장하는 방법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분리되어 암꽃은 자가수분을 방지하기 위해 수꽃 위에 위치한다고 한다. 수꽃이 위에 있으면 꽃가루가 암꽃에 떨어져 자가수분이 이루어져 유전적으로 열성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면 근친상간이 되는 것이다. 바람을 매개로 다른 소나무의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닿으면 수분이 되고 수정이 이루어 지게 된다. 이때 소나무는 나중에 솔방울이 되는 솔씨가 발생하며 약 18개월 동안 씨앗을 품는 다고 한다. 혹한의 겨울을 견딘 씨앗이 봄이 되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바닷가 근처의 소금기 많거나 바위틈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들풀은 꿋꿋이 피어난다. 나무는 봄이 되면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겨울 눈을 깨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그 꽃의 향기와 색깔에 곤충과 새들이 찾아온다. 그 새와 곤충은 꽃가루를 묻히고 꽃의 수정을 도와준다. 새들은 꿈틀거리며 나오는 애벌레를 잡아 새끼한테 먹이를 갖다 준다. 무더운 여름에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이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나무, 풀, 곤충, 새들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들풀을 통한 강인함과 겸손, 나무를 통한 인내와 감사, 곤충과 새들을 매개로 한 수정을 통한 공생과 협력, 꽃들의 피고 짐에 따른 열정과 순응을 배운다. 아이들은 숲 속이나 공원을 찾아가 인성과 감성을 키우고 성인은 그 속에서 겸손과 무욕, 인내와 희생을 배우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 . 이처럼 자연에서 배우는 산 교육이 진정 참교육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