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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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여행이란, 그저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회포를 풀고 우애를 돈독히 하는 것 이상의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지나치게 많은 수확물을 안겨주었고 그 결과물을 동료 연구원들과 나누기 위해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사실 1년의 연구원 생활 동안, 많은 책을 읽고 나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졸업 여행을 떠나는 시점에서 나는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연구원을 시작할 무렵의 내가 훨씬 사상면에서 자유롭고 겸허한 듯 보일 정도였다. 성공에 대한 욕망은 광물의 속성을 띈 채 시퍼렇게 광채를 번쩍였다. 나는 어둡고 이글거렸다. 최근에 그림을 하나 그렸는데, 역시 새였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그린 아브락삭스를 생각하며 그렸다. 그러나 그 새는 아브락삭스가 아니었다. 선과 악을 모두 아우르는 신이 아니라, 그 새는 그저 새였다. 나는 비상하고 싶었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서. 프리즘이 무지개를 흡수해서 레이저처럼 강력한 단 한줄기 빛을 만들었고 그 빛이 새의 심장을 관통했다. 새는 전기기에 화답하는 기계처럼 비상했다. 깃털의 선을 따라 피를 둑둑 흘리면서. 새는 검은 희말라야의 상공을 날았는데 그 공간은 그저 어두워서 폭풍우치는 우주 같았다. 그 세계 역시 새였다. 그냥 멋지다고만 생각한 채 침대옆 벽에 걸어두곤 잊어버렸다. 49% 미완성인 것은 알았다. 그러나 근본적 오류는 인지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행을 떠났고 나는 씽크 탱크들과 장자암을 올랐다. 사소한 일정이었지만 "무언가를 하든지 아니면 남아 있으라"는 조건에서 늘 "하는 쪽"을 강박적으로 선택해온 터라 웨버님을 따라 올랐다. 나는 웨버님을 우상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목표지향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뾰족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질투하였다. 탑, 성, 크리스마스 트리, 산... 나에게 없는 속성이라 여겨졌으므로. 그의 뒤를 따라 산을 오르면서 나는 참 되지게도 등산을 싫어하는데 또 여지없이 이 산을 오르고 있으니... 라며 나의 망각적 속성을 한탄했다. 그것이 나의 무발전을 되풀이하는 예시처럼 생각됐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인생이란 무엇일까? 인생이란... 인생은 나는 것이 아니라 산을 오르는 것이다. 나는 잊고 있던 내 그림을 생각했다. 오류는 자명했다. 새다. 새가 잘못 되었다. "나도 이제 날고 싶어" 라든가. "아이 빌리브 아이 캔 플라이" 이런 것, 다 소용 없는 짓이었다. 나에게는 날개가 없다. 나는 직립 보행할 두 다리만 있는 동물 아닌가? 왜 허황되게 날려고 하는가? 나에게는 날개가 없다. 나는 두 다리가 있을 뿐이다.
정상에 오르자 목이 탔다. 막 읽고 있던 <지상의 양식>이 생각났다. 지드가 예찬했던 삶에 대한 목마름... 산 위에는 절이 있었지만 턱에 닿도록 지쳤던 나는 물 마시기를 포기하였다. 대신 수돗가를 지분거리기로 하던 찰나, 웨버님과 세린이 나를 불렀다. 위로 더 올라와. 나는 속으로 "제길"을 읊조리곤 겨우 계단 몇 개를 반동으로 올랐다. 절에 시주할 연꽃과 쌀을 파는 아주머니가 정수기에서 물을 떠다 주었다. 정말 맛있었다.
최근에 <성공 방정식>이란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는 성공에 운이 얼마나 큰 작용을 하는가를 적나라하게 직시하라고 충고했다. 그리고 자신이 해당되는 분야의 운빨 영향력을 방정식으로 분석해주었는데, 이 자체는 맞는 말이었으나 "운이 크게 작용하는 분야"에서만이 천문학적인 성공이 가능하며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소위 운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 분야는 큰 매력이 없는 듯 착시현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제는 결국 "운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찌할 수 있는 분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운의 성공률을 높이는 노력 역시 역량 강화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로지 나는 것이 아니라 오르는 것이다.
이튿날에는 또 다른 산을 올랐다. 경주 남산이었는데 90%의 길은 완만하였으며 정상에 도달하는 10%의 길이 네 발로 올라야 하는 가파른 돌산이었다. 마치 사람들의 성취 분포 그래프를 보는 듯했다. 나는 오르는 동안 맥주 한 캔을 받아서 마셨다. 이 캔을 웨버님께 권하자 그는 사양하며 들고 있던 물병을 보여주었다. "나는 정상에서 한껏 목마를 때 이 물을 마시고 싶어." 단순한 말이었으나, 나는 완전히 이해되었다. 어제의 나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했다. 평소 고민해오던 과정(순간)과 결과의 방정식의 해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순간의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당장 해소해서는 안 된다. 쾌락은 길러져야 한다. 최고의 과실을 따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참을 수 있고 고통의 "순간"조차도 쾌락으로 치환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 있다. 쿠키 실험인데, 아이들에게 당장 쿠키를 먹으려면 한 개를 먹을 수 있고, 두 시간 뒤에는 두 개를 먹을 수 있다고 설명해준다. 아이들은 당장 한 개를 먹기도 하고, 두 시간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기다리기도 한다. 이들 두 부류의 아이들을 추적 관찰한 결과, 후자의 경우가 인생에서 성취율이 월등히 높았다.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쾌락을 말할 때 목마름을 수차례 언급한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젖은 물잔을 바라보는 열병 환자처럼 생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과정과 결과가 화해하는 지점이며 성공 방정식의 해가 종결되는 지점이다. 나는 연구원 졸업 여행에서 이 해를 얻었다.
결코 사부님과 팔팔이 없이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쓰고나니 오로지 웨버님에 관한 내용밖에 없네요.ㅋㅋㅋ 은연 중에 웨버님을 정말 닮고 싶었나봅니다. 늘 야망이 너무 커서 한번에 소화하지 못하는 고로 좌절만 하며 지냈던 것 같네요. 하지만 한 발 한 발 산을 오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고. 원래 등산을 정말 싫어하는데 어찌됐든 오르다보니 저에게 예상되지 않았던 끈기와 오기가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 많이 회복되었어요.
연구원 생활 1년 동안 제 정신을 고양시킨 게 신체적 등산이었다니 좀 아이러니가 있긴 한데...;;; 하여간 그렇습니다.
후회가 없도록 남은 연구원 생활을 최선을 다해 마무리하고 싶고, 책도 꼭 써낼 겁니다. 반드시. 저는 변화할 수 있어요!@,@
웨버님 닮을 거예요!!!
세린아 넌 핵심을 정확히 아는구나. 그래 정상에서의 풍광은 감동적이었지. 더 높이 오를 수록 더 찬란한 풍광이 예고되어 있고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즐거움일 것이야!
하지만 아직 나는 너무 부족하네. 글은 들쑥날쑥하고 노력의 프로토콜은 완성되질 않았고(이건 언제 완성되나?) 난 너만 쳐다보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느낌이다. 네가 솔직히 많이 부럽다. 일하는 수완이라든지. 나는 생각보다 나사가 많이 빠져 있다.ㅎㅎㅎㅎ 인지가 행동으로 변화하는 데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요되는 것 같다. 내가 이제껏 실패하고 있는 걸 보면.
일단 오르기로 한 것이 내게는 큰 수확이다. 과거야 어찌되었든 일단 한 발 오르면 어제보다는 좀 더 높아있을 것이고 그러면 과거를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에게 아직 많은 시간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자.
너는 나에게 누구보다 큰 영감을 주는 존재란다.^^ 같이 산을 오르자구!
오빠는 최고의 알파니스트야. 오빠와 나는 닮은 점이 있는데, 그건 자기 자신을 학대한다는 거지.-_- 항상 채찍질만 하는 모델이 더 높은 성과를 낸다는 연구 결과도 있긴 하지만 늘 긍정적인 것은 아닌 것 같아. 무엇보다도 인생이 엄청 우울해지는 듯. 오빠는 결코 당장의 쿠키를 먹는 사람이 아니야. 오빠는 누구보다도 독한 사람이고 역량이 있는 사람이야. 그걸 스스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내가 얻은 해라는 것이 "산을 오르듯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라면, 오빠는 진즉에 해답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하물며 일상을 떠나 이루고 싶은 것이 산을 오르는 것임에야!
그리고 내가 글에서는 등산 중에 "맥주캔" 따는 것이 "정상에서의 목축임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듯 썼는데, 사실 나는 에트나에서 마신 한 모금의 와인을 결코 잊을 수가 없네. 산을 오르면서 낭만을 생각해내는 창의성을 배웠어. 삶을 예술로 사는 방법이랄까? 오빠가 등산 내내 무지막지한 짐을 뻘뻘 등에 지고 올라와준 덕분에 우리는 산에서 술도 마시고 간식도 먹고 웃기도 했구나! 정말 고마운 일이야.^^
날개가 있으면 반드시 날게 되리라! 멋진 말입니다. 콩두 언니의 확신이 저에게 큰 힘이 되네요. 하지만 저에게 날개가 있다는 망상이 그 동안 저를 괴롭혀왔던 것 같아요.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에 대해 콩두 언니에게서 많이 배웠습니다. 인간에게 날개가 없다고 천사보다 후진 것이 아니듯이, 내 생을 온전히 후회없이 쓰고 가는 데 스승과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구요. 그래도 아직 많이 부족하고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_-);; 일단 방법은 알 것 같습니다. 저의 해라는 것은 "진리의 해"가 아니라 "방법의 해"라고 할 수 있죠. 일단 오르는 것. 사람의 두 발로.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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