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지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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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나라 때 장군 이릉은 역전의 용사다. 그는 별동대 5천을 거느리고 흉노의 본진을 유린하며 장렬한 전투를 벌이지만 흉노의 정병 8만에게 포위되었다. 어쩔 수 없이 투항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한의 조정을 들끓게했다. 누구도 이릉을 비호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토벌대의 총수는 당시 한무제의 총희인 이희의 오라비인 이광리였는데, 이릉에게 책임을 묻지 못한다면 이릉을 사지에 몰아넣은 사령관 이광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이릉을 매도했고 그의 투항을 성토했다. 그때 바보 같은 사람 하나가 이릉의 전과와 인품을 들어 옹호한다. 무제는 격로하고 그는 가장 치욕적인 형벌을 받게 된다.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남자의 생식기가 거세된 것이다. 이 형벌을 받으면 가장 비겁한 자도 자결을 선택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 용감한 인물은 가장 치욕적인 대목에서 자결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았고, 치욕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남기게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와 사기 열전은 이렇게 쓰여졌다.
봄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사마천을 생각합니다. 그의 책은 가장 대표적인 '발분저서'(發憤著書)입니다. 발분이란 뜻은 '마음으로 통하려 하지만 아직 얻지 못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 속에 꼭 막혀 응어리진 분(憤)이 있으나 이를 펴지 못하여 참을 수 없어 뻗쳐오른 에너지가 써내려간 책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마천의 '사기열전'는 역사서지만 동시에 문학서입니다. 문학은 득의가 아니라 실의에서 나옵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유복한 환경 속에서 문학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욕망이 꺾이고 꿈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을 때, 슬픔과 격노, 격정과 눈물이 터져 나올 때, 그것이 글이 되고 시가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옛사람들은 이것을 불평즉명(不平則鳴)이라 불렀습니다. 불평이 있으면 운다는 뜻이지요. 당나라의 시인이며 문장가였던 한유가 한 말을 잠깐 들어 보지요.
"무릇 물건은 화평함을 얻지 못하면 운다. 초목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면 운다. 물은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움직이면 운다.....금석은 소리가 없으나 치면 운다. 사람의 말 또한 그러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있은 후에야 말하게 되니, 노래에 생각이 담기고 울음에는 품은 뜻이 있다. 무릇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함이 있기 때문이다"
봄새가 짝짓기 열중하여 시끄럽고, 꽃은 다투어 피어 뜰에 향기 가득한 봄날, 생각합니다. 삶에 아쉬움이 없으면 삶은 시가 되지 못하고, 유복하기만 하면 그 행복은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경영은 바라지 않았으나 찾아온 실패에 울고, 잡은 듯 했으나 놓쳐버린 기회의 상실에 울고, 좌절된 욕망에 울지만, 포기하지 않고 발분(發憤) 하는 것입니다. 뜻하고 계획한 일이 풀리지 않고 맺혀 있을 때, 포기하지 마세요. 삶은 끝까지 살아 남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겨울이 막아두었던 꼭 막힌 통로로 봄의 에너지가 폭발하듯 피어오른 것이 바로 꽃입니다. 나무의 발분, 그것이 바로 꽃이니 삶의 꽃이 피어날 때, 그 삶은 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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