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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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그의 가족이 카페에 왔다. 신촌에서 함께 공연을 보고 저녁을 먹었다고 했다. 지방 근무 중인 그는 주말부부이자 주말아빠다.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진학하는 아이들의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했다며 많이 아쉬워했다. 그의 아내와 두 딸은 친구사이처럼 보였다. 익숙한 그림이었다. 딸들은 떠먹는 피자를 먹었고 주말부부와 나는 맥주를 마셨다.
내 또래인 부부와 나눈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았다. 두 딸의 엄마, 아빠였고 딱 그만큼 함께 산 부부였고 어느 날 갑작스레 부친을 떠나보내야 했고 고된 밥벌이를 하며 꿈을 안고 살아가는 닮은꼴이었다. 어제와 내일이 아닌 오늘의 이야기만으로도 할 말들은 차고 넘쳤다. 척하면 딱하고 알아먹는 대화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어졌다. 새삼스레 좋았다.
이틀 후, 주말부부도 아닌 우리는 잠깐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은 변해 있었다. 낯설었다.
기름기 쫘악 빠진 푸석한 피부, 먹물기 완전 빠진 멍한 눈빛, 핏기없이 퉁퉁 부은 손은 누렇게 물이 들었고 손톱엔 찌든 때가 남아 있고 주먹도 쥐지 못했다. 손가락은 구부렸다 펴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불내인지 기름내인지 모를 묘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군데군데 불판에 덴 자국이 벌겋게 남아서 말을 하고 있었다. 험하게 살아가고 있노라고.
엄마라면 마음 짠한 눈물 줄줄 흘리며 울었을 텐데 아내인 나는 눈물이 나진 않았다. 미안하긴 했다. 남편이 새로운 일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일 처자식 때.문.에. 의 바로 그 마누라니까. 그러니까 미안하긴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라는 변명 아닌 변명거리가 눈물보다 반응속도가 빨랐다. 남편 못지않은 상처, 마누라도 있노라고.
당신은 눈에 보이기라도 하지, 나는 보이지도 않는 상처가 얼마나 많은데, 했다. 남편이 일없이 쉬었더라면 나았을까. 몸보다 맘이든 영혼이 망가지진 않았을까.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면 몸의 상처를 택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불쌍한 남편, 마누라는 참 나쁜 년이다. 짧은 만남의 순간, 요따위 계산기나 돌아가다니. 고약하고 사나운 못된 머릿속이 얄궂다.
우리도 주말부부인 그들과 닮은꼴인 줄 알았는데. 서로 돕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줄 알았는데.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줄 알았는데. 20년 가까이 함께 한 익숙한 편안함이, 그 긴 세월이, 그 편한 감정이, 그 바른 마음이, 그래서 사랑인 줄 알았는데. 착각했나 보다. 남편의 낯선 모습 앞에서 겨우 미안한 게 다라니. 어쩌면 좋을까. 세상에나. 미안해라.
이게 내 사랑의 실체였다.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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