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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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산방에서 오 리쯤 떨어진 곳에 ‘산막이 옛길’이라는 길이 있습니다.
제주 올레길에서 비롯한 길 열풍이 이곳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생겨난 관광지입니다. 괴산댐을
감싸 안은 산을 따라 왕복 십 리가 넘는 길이 조성되었습니다. 댐에는 관광객을 위한 배도 들어왔는데
길 열풍과 함께 빼어난 경관을 즐기기 위해 찾는 관광객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마을 입구의
길이 막혀서 서울의 교통체증을 방불케 하는 풍경이 빚어지곤 합니다.
얼마 전 그 ‘산막이옛길’이 있는 산 정상에 산불이 났습니다. 밤 열 시쯤 사이렌이 울리고
마을 이장이 다급하게 방송을 했습니다. “…… 마을 주민 여러분은 연장을 챙겨 들고 속히 현장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불이 난 숲은 백오산방의 숲으로부터 2km쯤
떨어져 있지만, 결국 이 숲과 하나의 줄기로 이어져 있는 곳입니다. 순간
나는 고성산불이 떠올랐습니다. 그 불처럼 확산된다면 이 숲뿐만 아니라 마을 역시 화마에 휩싸일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불이 관측되는 가장 가까운 곳까지 서둘러 차를 몰고 갔습니다. 한 쪽에 군수와 몇몇 공무원, 경찰, 그리고 평소 자주 뵙는 마을 어르신 몇 분이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 몇 명과 면의 의용소방대원 몇 명이 선발대로 출발했는지 저 멀리 산중턱에 손전등 몇 개가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상황을 파악한 뒤 이후 모인 몇 명과 함께 배를 이용해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지점까지 이동한 후
산불이 난 산의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가파른 산을 오르는 내내 셀 수 없이 많은 반딧불이들의 푸른
빛이 숲 속을 떠돌고 있었습니다.
불이 난 지점에 가까울수록 매캐한 연기가 짙어졌습니다. 다행이 발화지점인 산 정상의 바람은 댐 주변을 흐르는 빠른 바람과 달리 느리고 간헐적이었습니다. 1ha 정도의 숲을 태우고 있는 산불은 다행이 기선을 내어주었습니다. 산불은
우리 마을 반대쪽, 그러니까 산 너머 마을에서 올라온 주민과 산불진화요원들, 그리고 먼저 올라온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만든 차단선 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새벽 두 시쯤, 바람도 거의 멎은 시간에 민간인들은 철수를 했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헬기를 이용해 잔불을 진화하겠다는 공무원의 전언을 듣고 나 역시 일행들과 함께 현장을 떠났습니다. 불은 관광객이 등산 중에 버린 담배꽁초에 의해 발화했을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재발화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잔불도 잘 정리가 된 모양입니다.
다음 날 외부 강의를 위해 마을로 내려가던 중에 동네 형님이
새로 이사온 사람과 무언가 불편한 이야기를 나누는 현장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차가 막혀 지나갈 수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듣게 된 이야기의 요지는 이사온 사람이 밭에 펜스를 치는 것에 대해 동네 형님이 자제를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새 귀촌자가 농로에 붙어 있는 자신의 사과 밭에 펜스를 치고 있었는데, 농로에
바짝 붙여서 철망으로 펜스를 쳐놓으면 농자재를 싣고 차가 다니기 어려우니 가급적 치지 않거나 치더라도 길에서 좀 멀리 쳐달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나는 두 분의 대화를 다 듣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저녁에 보니 펜스는 농로에 최대한 가깝게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새로 귀촌한 땅 주인도 사정이 있어 그렇게 펜스를 설치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체제의 법은 그것을 사유재산권으로 엄밀하게 보장하고 있으니 규칙상에도
하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며칠 전 산불 진화현장에서 공교롭게도 우리 마을로 귀촌한 세 집
가운데 누구도 보지 못했습니다. 1차 집결지에는 여든 살이 가까운 어르신들이 가장 먼저 도착해 계셨습니다. 손에는 모두 갈퀴나 삽을 들고 산을 오르지 못하는 노구를 한탄하고 계셨습니다.
국유림에 발생한 산불의 진화에 대한 법적 책임은 국가에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주민 대부분이 가파른 산을 오른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귀촌자들은 아직 도시의 셈법에 익숙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골과 자연에서는 그 셈법만으로는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고, 공동체 역시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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