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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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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일 15시 54분 등록

원래 작년까지 마치기로 했었는데 계속 미루다보니 이날까지 미뤄왔네요. 하지만 요번 주에는 어설프게나마 초고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고심이 많았던 "피아니스트"편이 완성되었어요. 일단 한 번 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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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는 데일 듯 뜨거웠다. 나는 10년 전 지중해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미리 준비해간 돌고래 튜브에 바람을 넣었다. 스칼라 데이 뚜르키란 터키인들의 계단이란 뜻이다. 시칠리아의 레알몬테 해변과 석회암 벽면이 만나는 곳으로 그 벽면이 계단처럼 되어 있다. 특별히 터키인들의 계단으로 불리는 이유는 오래 전 그곳에 터키인들이 자주 침입했기 때문이란다.`

 

일행은 덮쳐오는 파도에 몸을 맡겼다. 파도가 올 때온다! 온다!” 를 외치자 옆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시칠리아노들도 함께온다! 온다!”를 외치며 파도에 몸을 맡겼다. 나는 그것이 웃겨서 그들을 향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들도 나를 보며 웃었다. 구리빛으로 그을린 피부가 모래알처럼 반짝였다.

 

해변가에서는 아이들이 앉아 하얀 바위를 작은 돌로 문질렀다. 회색 물감처럼 석회암이 녹아 나오면 몸에 정성스레 발랐다. 내가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자 선뜻 옆 자리를 내어주었다. 알고 중학생 즈음 되었을까? 아까 물가에서 같이 놀던 무리가 알은 체를 하며 가세한다. 이마에 한 두 가닥 내려온 금발 머리가 어느 새 말라 있었다. 한 소년이 자신의 수고로 얻은 석회를 내 팔에 정성스럽게 발라주었다. 내가 부드러운 감촉에 감탄하자 소년의 눈에 자부심이 차올랐다. 지중해의 녹색과 해변가의 호박색이 뒤섞인 눈이다. 서양인들은 동양인의 나이를 잘 가늠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아마도 소년들은 내가 자신들의 또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나에게 연신 "벨라, 벨라"를 외치며 서로 관심을 끌어보려고 안달이었다. 바다 바람에 내 밀짚 모자가 휙 날아갔다. 시칠리아의 소년들은 서로 경주라도 하듯이 해변가를 달렸다. 그리고 물가에 떨어진 모자를 안타까워하며 툭툭 털어내곤 나에게 수줍게 건네었다. 나에게 가루를 발라주던 아이다. 나는 이 부끄럼 많은 개선장군에게 "그라찌에"를 외쳤다. 모자를 잡으려고 하자 소년은 장난을 치면서 이리 저리 모자를 내 빼더니 결국 직접 내 머리 위에 모자를 씌워 주었다.

 

루까.”

 

금발 소년은 엄지로 앞가슴을 가르켰다. “마리오” “빠올로” “자코모아이들은 갈매기떼처럼 재잘됐다. 금발 아이는 까불대는 친구들을 두 팔로 막아섰다.

 

, 최 린.”

 

나는 내 이름을 말하며 장난스레 악수를 청했다. 소년은 나의 내민 손을 손등부터 그러쥐었다. 좋은 손이다. 마르고 크고 긴 손가락. 짧은 내 손을 한 번에 쥘 수 있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소년은 앞장서서 어딘가로 향했다. 나는 당황하여 슬쩍 손을 뺐다. 소년이 뒤돌아보았다.

 

쏘리, 벗 아이 헤브 투 고.”

 

“Bevande! Bevande!(음료수, 음료수요!)”

 

소년은 다시 내 손을 잡으려 하였으나 나는 양손을 공중에서 휘휘 저었다. 그리곤 터키인의 계단을 가르켰다. “난 이제 저기 보러 갈게. 즐거웠어!”

 

나는 쌩긋 웃었고 소년은 반대의 표정을 지었다.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손으로 누른 채, 나는 무리를 등지고 걸었다. 아까의 두근거림이 가실 때쯤 누군가 등을 콕콕 찔렀다. 아까의 그 소년이다. 그는 내 손에 차가운 소다캔 하나를 불쑥 쥐어주곤 시무룩한 표정으로 뒤돌아 뛰어갔다.

 

터키인의 계단은 현기증이 날만큼 밝은 흰 색이다. 계단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 있다. 높이, 조금 더 높이... 나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푸른색에 눈이 시리다. 포말들이 말처럼 내달리고 그와 같은 눈동자를 지닌 아이들이 한철을 나고 있었다. 신화의 아이들이 살아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이었으리라. 나에게 음료수를 내밀었던 루까도 다시 바다에 뛰어 들었을까? 그가 있을 만한 곳을 쳐다보고 싶었으나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만히 노란 소다캔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식어버린 냉기. 따각 하는 병따개 소리에 흰거품이 부글부글 솟아났다. “어엇 – “ 당황하여 입을 가져가는 순간, 가차 없는 바람이 다시 모자의 챙을 낚아챘다. , 이 모자만은 절대 안돼! 나는 고집스럽게 모자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얀 허공에 발이 닿았다. 떨어지는 건가? 순간 바닥을 바라보았으나 온통 흰 빛이었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공간으로 비상했다.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잃었으나 찰나였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을 뜨기도 전에 허겁지겁 손을 모아 쥐었다. 설마 어디 부러지진 않았겠지? 사람들의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의식이 돌아오는 중이었다. 눈을 뜨고, 굉장히 낯익은 감정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쪽팔림.

 

Are you OK?” 어디선가 어설픈 영어가 들린다. 나는 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빛이 눈꺼풀을 뚫었다. 나는 실눈을 뜬채 반사적으로 감싸쥔 두 손을 물끄럼히 바라보았다. 소다캔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 ...”

 

습관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이던가? 머리부터 생땅에 곤두박질치는 그 순간에도 나는 손을 감싸쥐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럴 필요 없잖아? 허탈하게 손을 배 위에 내려놓았다. 누군가가 내 양손을 잡았다. “괜찮니?” 한국말이었지만 우리 일행은 아니다. 나이 든 여인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내 손을 다독이듯 쓸어내졌다. 멀리서 들것을 가지고 오는 무리가 보인다. 나는 내 손목을 잡는 여인을 마다하고 일어섰다. “괜찮아요.” 차라리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서 뇌진탕으로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군중들을 헤치고 나는 터키의 계단을 내려왔다. 무대를 내려왔다.

 

마치 그 날처럼

무대를 달려 내려왔다. 울면서. 박수가 간간히 터져 나왔다.

연민은 야유보다 고통스러웠다.

목을 맬 곳 외에

매달릴 곳은 없었다.

 

나는 실패한 피아니스트였다.

 

 

 

 

시칠리아 미칠리아 5. 피아니스트

 

"모두들 아시다시피, 헤라는 제우스의 아내죠. 제우스의 정실, 아내의 계보를 따지면 헤라는 3번째 부인입니다. 그 외에 무수히 많은 정부들이 있었지만 헤라가 정식으로 세번째 부인이며 마지막 부인이었죠. 보통 그녀가 암소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암소는 굉장한 미인을 상징한답니다. 여신을 묘사할 때 그 앞에 항상 붙어 있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벽의 여신이라 하면 장미빛 손가락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죠.“

 

가이드는 헤라 신전 앞에서 설명을 해나갔다. 그가 서있는 올리브 나무 아래를 제외하고 그늘을 찾기는 어려웠다. 지중해의 태양은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울 기세였다. 실종된 나래 언니를 찾기 위해 내가 맡은 곳은 아그리젠토의 신전의 계곡이었다.

 

나는 헤라 신전에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그래, 나래언니를 찾을 때는 찾더라도 나 역시 관광은 해야 하지 않겠어? 붉은 색의 원주들을 카메라 앵글에 가지런히 담으면서, 나는 죄책감을 억눌렀다. 헤라 신전은 많지 않은데 그 중 하나가 신전의 계곡에 가서 제일 처음 볼 수 있는 것이다. 헤라 신전은 기원전 5세기에 지어졌다. 원래는 34개의 열주로 되어 있었는데 현재 25개의 열주가 잘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잘 지키고 서 있다.

 

헤라는 질투의 여신이었다. 그는 자신의 남편 제우스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여인들을 제거하였다. 그런데 헤라에게 변변한 자식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녀의 자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오히려 그녀의 양아들인 헤라클레스이다. 바로 이 신전의 반대편에 헤라클레스의 신전이 있다.

 

[참 이해할 수 없단 말이야…]

 

언젠가 준이 나에게 말하였다. "나는 왜 헤라클레스가 "헤라의 영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 모르겠어. 헤라는 헤라클레스를 미워했잖아? 그래서 헤라클레스에게 거의 불가능한 12개의 과업을 달성하라고 시킨 것이고헤라클레스가 이 과업을 모두 성공시켰을 때, 내가 헤라라면 자신의 의도가 실패해서 화가 났을 것 같은데?"

 

나는 준의 말을 듣고 웃었다. 그 때 내가 무슨 답변을 했던가? 신이 된 인간. 나도 신이 될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 여기가 바로 헤라클레스 신전입니다.”

 

가이드는 내 의식을 깨우려는 듯 크게 외쳤다. “안타깝게도 8개의 열주만 남아 있는데요, 헤라 신전이 잘 보존된 것에 비해 대조적이죠. 헤라클레스는 사실 헤라의 정식 아들이 아니죠."

 

그렇다. 헤라클레스의 비극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한다. 서자라는 것. 알크메네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알크메네와 제우스 사이에서 생긴 아이가 바로 헤라클레스다. 알크메네가 만삭이 가까울 무렵 제우스는 그녀에게 축복을 내린다. “네가 낳은 아이가 이 나라에서 가장 빨리 태어나는 아이라면 그 아이가 이 지역을 다스리게 될거야.” 이 축복의 말을 전해 듣고 화가 난 헤라는 머리를 굴린다. 그의 사촌 중에는 겨우 어머니 뱃속에서 일곱 달 밖에 안 된 아이가 있었다. 헤라에게는 여러 딸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해산의 딸이었다. 여인들은 이 해산의 여신이 팔을 벌려 주어야만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헤라는 딸을 시켜 알크메네가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하게 했다. 그 사이에 칠삭동이가 먼저 태어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에우리스테우스이다. 그는 헤라클레스에게 예정되었던 권력을 대신 획득하여 군주가 되었다. 헤라클레스의 불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헤라는 에우리스테우스를 통해서 헤라클레스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과제를 낸다. 그것이 바로 12가지 과업이다.

 

"이번 콩쿨은 잘해야 해."

 

"."

 

"저번처럼 떨면 안돼. 저번처럼 떨면 안돼. 알지? 너 연습 많이 했잖아."

 

"."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노가 가장 위대한 악기이고 피아노를 잘 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이었다. 나에게 어떤 재능이 보였던 것은 분명할 것이다. 피아노 선생은 연주에서 또래에게서 없는 위엄이 느껴진다고 칭찬하였다. 엄마는 나의 재능을 발전시키지 못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매일 연습이 이어졌다. 불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엄마의 결연함, 주변의 칭찬 속에서 나는 거장의 길을 확신했었다.

 

그러나 하나, , 랭킹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습을 게을리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더욱 암담하였다. 처음에는 교수법이 문제라고 생각하여 과감하게 선생님을 바꿨다. 음악가가 집안에 없는 것이 콩쿨에 불리한 점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다. 이민을 갈까? 그러면 승산이 있을까? 부모님의 얼굴이 어두워져 갔다. 점점 피아노가 두려워지기 시작하였다. 조금씩 실패를 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아노를 포기한다는 것. 그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지난 세월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었다. 예술가의 길에서 밥벌이의 전선으로 내던져지는 순간. 나는 한 계단 아래로 인생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언니! 언니야? 나야 나!"

 

[… S. 잘 지내지?]

 

", 그래! 언니, 지금 어디에 있어? 우리가 언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수화기 뒤의 그녀가 낯설게 웃었다. "그래? 미안 미안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나는 나래언니의 "어쩌다보니" 라는 말이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괘념치 않기로 하였다. 무엇보다도 그녀와 통화가 되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넌 지금 아그리젠토란 말이지?]

 

", 언닌 지금 어디에 있어?"

 

[그럼 내가 아그리젠토로 갈게, 우리 오늘 저녁에 만날까?]

 

"그래! 그럼 언니가 이쪽으로 오는 거지?"

 

콜… 그녀는 흔쾌히 약속 시간과 장소를 정하곤 전화를 끊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래언니와 통화가 된 사실을 알린 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소 이 언니가 나와 친하게 지낸 탓일까? 그녀가 내 전화는 받았다. 아무래도 내가 편하게 느껴진 것이겠지. 나는 나래언니가 나의 너그러움을 믿어준 것 같아 뜻밖에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저녁이 되어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녀가 말한 레스토랑 앞에서 기다렸다. 멀리 신전의 계곡이 보였다. 산등성이에 하나 둘 들어본 불빛. 어두운 가운데 오로지 신전들만이 유령처럼 따뜻하게 빛나 보였다. 그 때, 멀리서 더욱 유령처럼 언니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마치 그리스 여신과도 같은 흘러내리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니 붉은 와인빛의 드레스다. 그녀가 겸연쩍은 듯, 그러나 환하게 웃었다.

 

"오래 기다렸어? 그 동안 정말 미안했어. 오늘은 내가 쏜다!"

 

그녀는 나와 함께 신전이 보이는 고급 노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탁 트인 조망으로 멀리 신전들이 도깨비불처럼 타올랐다. 저기가 헤라클레스 신전, 여기는 콜코르디아 신전…! 그 위로 신들이 이리저리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자 나래는 자신이나 찍어달라며 테이블 바로 옆의 돌난간에 팔꿈치를 기댄 채 예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 표정이 웃겨서 풋 -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가 주문한 와인이 글라스에 또로록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호방하게 잔을 부딪쳐 왔다. 아무 근심이 느껴지지 않는 그녀 특유의 웃음 소리. 찰랑거리는 크리스탈 귀걸이. , 나도 예쁜 드레스를 입고 올걸 그랬어.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될 줄이야.

 

", 그런데 언니그 동안 도대체 어디 어디 있었던 거야, 왜 연락이 안됐어?"

 

", 휴대폰 충전하기가 좀 쉽니? 오늘도 겨우 겨우 연락이 된 거야."

 

"그 동안 어떻게 지냈어?"

 

"좀 고생하긴 했는데, 내가 누구냐? 완전 즐겁게 보냈지. 너 들으면 깜짝 놀랄걸?"

 

우리는 봉골레 파스타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취기가 너무 일찍 든 탓일까? 나의 얼굴이 발그레 떠오르는 것을 본 나래는 무엇인가 즐거운 생각이 났는지 나의 팔을 잡아 끌었다. "야야, 우리 저기 신전 가보지 않을래?"

 

"? 나 아까 낮에도 다녀왔는데…"

 

", 밤에 봐야 제 맛이지. 지금쯤 사람도 없고어쩌면 신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아마 거기에 난간으로 막아뒀던 것 같은데…"

 

넌 그래서 안되는 거야언니는 찡긋 윙크를 했다. 그 난간이 얼마나 허술한데 그래우리 둘 정도 들어가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우리 추억 하나 만들어야지? 우리는 취한 채로 신전으로 갔다. 과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마치 농장의 서리꾼들처럼 몸을 낮춰 조심스럽게 난간을 넘어갔다. 그리고 헤라 신전. 심장 박동이 가슴벽을 두드렸다. 붉은 계단에 조심스럽게 발을 올려놓을 때가 되어서야 가슴은 달리기를 멈추었다. 달에 처음 닿은 암스트롱의 발자국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내가 드디어 불경죄를 저질렀다. 여신이여 노하소서. 끓어오르는 죄책감, 그리고 쾌감! 나는 두려운 만큼 환희에 들떠서 원주를 부둥켜 안았다. 내가 감히 여신의 의지를 범하였나이다설마 내 무게로 쓰러지진 않겠지? 나와 나래는 몸을 낮춰 신전에 등을 기댄 채 드러누웠다. 뜨거운 빛의 색깔 덕분일까? 그리 차갑지 않았다. 하늘의 별빛이 황홀하였다. 시칠리아로 넘어오는 페리에서 본 별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떠 있다. 나는 손을 들어 북두칠성을 그렸다.

 

"저기 북두칠성에서 이렇게 다섯뼘을 그리면 카시오페이아 자리까지 갈 수 있어."

 

"저게 카시오페이아다 그치?“

 

"응 그런 것 같네. 여왕의 의자."

 

"카시오페이아가 안드로메다의 엄마지, 그치?"

 

"그것 까지는 잘 모르겠는데그런가?"

 

맞아. 나는 유식함을 드러낸 것이 기뻐서 빙그레 웃었다. 카시오페이아는 에티오피아의 왕비였다. 그녀는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 공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는데, 이 자랑이 지나친 나머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버렸다. 딸 안드로메다와 바다의 요정의 아름다움을 비교했던 것이다. 포세이돈은 에티오피아에 큰 재해를 일으켰다. 신탁에서는, 안드로메다를 괴물 고래에 산 제물로 바치면 포세이돈의 노여움이 풀릴 것이라고 하였고 카시오페이아는 어쩔 수 없이 안드로메다를 해안에 사슬로 묶어 놓았다.

 

"그리고 안드로메다를 페르세우스가 구해 주었지."

 

"알어 알어, 그 내용은. 기집애 잘난 척은."

 

"히히."

 

"하여튼 엄마들이 말썽이야. 여기 헤라 여신이나 카시오페이아 여왕이나. 엄마들이 기가 드세니까 자식이 다 제대로 크질 않는 거야."

 

나는 나래 언니의 말에 웃던 입꼬리를 내려놓았다. 그런가? 나의 엄마가 문제였을까? 내가 눈을 질끈 감고 악기에서 손을 내려놓기로 결심했을 때,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품에 안아든 꿈은, 예전에 죽어 있었다고... 직시하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했을 뿐이라고. 나는 임용 고시에 매달렸다. 다행히 수학 선생님이 될 수 있었고 그럭저럭 앞가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실의 기억은 내 인생에 큰 구멍 하나를 만들어 놓았다. 뻥 뚫려버린 큰 공허. 그 곳을 통해 세상을 보면, 내가 포기했던 예술가의 세상이 있었다. 내가 무대를 떠날 수 없도록 붙드는 청중들의 환호, 앵콜, 눈물...! 그리고 객석의 두 번째 줄에서 관객들 사이에서 기립 박수를 치는 빛나는 표정의 엄마.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소리야."

 

"내가 널 위해 안 해준게 뭐가 있니?"

 

엄마의 말은 전적으로 옳았다. 나는 왜 그녀의 바람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나는 누운 채로 카메라의 렌즈를 열었다.

 

얼마나 노출해야 별빛이 찍힐까?”

 

그래서야 찍히겠냐? 그냥 눈에 담아. 별은 늘 하늘에 떠 있으니까.”

 

나는 옳은 소리라고 생각하며 카메라에서 눈을 뗐다. 그리곤 하릴 없이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레스토랑에서 보이던 이 신전이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나는 나래 언니의 사진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바로 뒤 테이블에 앉은 여인. 낯이 익다. 검은 원피스에 진주 귀걸이. 회색빛이 도는 머리카락. 사진 속에서 그녀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다. 터키인의 계단에서 내 손을 어루만지던 그 동양 여인이다.

 

[귀한 손인데조심해야지. ]

 

그녀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구면인가?

 

그 때 어디선가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의 비행이 들킨건가? 몸을 일으켜서 주변을 살펴보니 남자 대 여섯 무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경비인가? 나는 몸을 움추렸다.

 

"음악 하는 사람들 같은데?"

 

나래언니는 한 무리의 손에 들린 악기들을 확인하곤 화색이 돌았다. 사람들은 신전 주변에서 대열을 대충 정비하곤 앉아서 아무 곡이나 시작할 태세였다. 언니는 어느 새 그들 무리 사이로 끼어들어 그들과 대화를 하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즉흥 재즈 공연이 벌어졌다. 악사들은 새로운 멤버의 영입으로 즐거운 듯 연신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 사람들 정말 멋지지 않니? 여기 저기 다니면서 순회 공연하는 팀인가봐."

 

"응 그래…"

 

", 너무 멋져! 특히 저기 저 팔에 문신한 남자, 나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 언니하고 아까 대화 많이 하더라."

 

나래언니는 내 두 손을 잡고 한 번 빙그르르 턴을 돌려주었다. 나는 불안감에 휩싸여 그녀가 하는대로 턴을 마저 돈 채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음 번에는 그리스에 가나 봐. 차에 한 자리가 남아서 나도 같이 가게 해준다는데…"

 

"… …!“

 

"아무래도 나, 따라가야 되겠어."

 

나는 언니의 말에 몸의 모든 무게가 바닥으로 턱 - 꺼지는 기분이었다.

 

"언니,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가자. 다들 언니 때문에 흩어져서 고생하며 찾았단 말이야."

 

"어차피 다들 여행하려고 돌아다니는 것 아냐? 이제 나 안전한 거 알았으니 각자 원하는 대로 여행하면 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우리가 단체로 여행 왔으니까 단체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닐까?"

 

", 거길 다시 어떻게 들어가냐, 이 마당에? 난 진짜 잘못 없고 우연히 길 잃어버린 건데 이미 일행들은 나 원망하고 있는 거 다 알거든? 난 미안해서라도 못돌아가.“

 

나래는 눈쌀을 찌푸렸다.

 

"그리고, 솔직히 다들 나처럼 여행하고 싶은데 겁이 나서 못하는 거 아냐? 다들 무슨 헤라 여신의 정기를 받은건지 질투들만 많아서는자기들이 못한다고 꼭 남도 못하라는 법 있어? 이해를 못해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뒤에서 욕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각자 자신만의 방식이란 게 있는 거니까."

 

"언니, 안돌아가는 거야, 못돌아가는 거야?"

 

나는 나래가 헤라의 질투를 이야기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점점 소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큰 눈망울이 더욱 커지고 새까만 눈동자가 흰자를 뒤덮는다. 귀가 길어지고 콧잔등이 넓어진다. 그리고 점점그녀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러니까 난 못간다고 전해미안하지만."

 

헤라인가? 아니다그 반대다. 그녀는 이오다. 헤라의 질투를 받아서 소로 변해버린. 그리곤 그렇게 이오니아해를 건너 가겠다고 기어이 우기고 있다. 스스로 쳐놓은 질투의 결계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언니연락해."

 

"그래, 그런데 너 돈 있니? 나 아까 레스토랑에서 돈을 다 써버려서 현금이 없다."

 

"… …"

 

"한국에서 갚을 테니까 현금 있는 것 좀 빌려주라. 나 정말 돈이 한 푼도 없어. 카드도 안되구. 넌 카드는 있을 거 아냐? 저기 조금만 가면 바로 ATM 있어."

 

나는 주섬주섬복대를 열었다. 65유로화이것이 내가 가진 현금 전부였다. N는 고맙다고 말하며 유로화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를 흘끔흘끔 지켜보던 음악가 일행 사이로 하늘 하늘 사라져 버렸다.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나는 나래언니가 일러준 대로 ATM이 있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신전의 벽돌들을 틈으로 기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작고 알아들을 수 없는 글씨들이 불안했다. 카드를 주입하자 기계가 멈춰버렸다. 나는 멍하니 - 기계 앞에 1. 기계를 통통 두드리고 다시 1. 그리고 주먹으로 점점 더 세게 3분 정도 기계를 쳐댔다. 카드가 또로록 굴러나왔다. 나는 감지덕지하며 토해낸 네모조각을 받아들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하아무엇인가가 확 -- 속에서 푹 솟아올라 소리가 되었지만 결국 물거품처럼 가라앉았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내 탓이다.

 

차라리 그 때 계단에서 굴러 죽어버렸다면?

 

나는 신전의 벽돌을 더듬으며 그림자 속에 숨어 길을 내려왔다. 의지할 것은 하늘의 별과 멀리 헤라클레스 신전의 불빛 뿐이었다. 빛줄기가 끝나는 곳에 다다르자 양아들의 신전 앞에는 부러진 날개의 청동상이 가로 누워 있었다. 바로 눕지 못한 자세에서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미련이 읽혔다. 여기서 자고 갈까? 나는 지친 마음을 쫓아내려 한숨을 길게 쉬었다. 일단 택시를 타자호텔에 도착하면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그 때였다. 두 개의 라이트가 눈을 떴다. 검은 링컨차였다. 언제부터 있던 것일까? 차는 나를 보고 놀라 선 표범처럼 경직되었다. 이곳에서 노숙을 하려던 의도가 읽힌 것은 아니겠지? 나는 이 시간, 이 곳에 존재하기엔 부조리한 자들 사이의 암묵적 동의를 읽었다. 서로 모르는 척 하도록 하자! 무엇보다도 내게 이 차는 위협적이다. 내가 차 옆을 통과하려 하자 엔진의 으르렁대는 소리가 나직히 들렸다. 윗문의 윈도우가 열렸다. 뒷볼에 달린 굵은 진주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어디까지 가니?”

 

이상하게 예정된 수순처럼 그 녀는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리버사이드 호텔이요.”

 

나를 미행한 것인가?

 

타렴. 데려다줄게.”

 

“… …”

 

이 시간에 택시는 없어그 녀의 말에 나는 뒷문으로 올라탔다. 차는 바닥이 없는 것처럼 미끌리며 나아갔다.

 

반갑네.”

 

낮에 해변에서는 감사했어요.”

 

그래. 여행은 즐겁니?”

 

절 미행한 건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지나치게 자주 뵈어서요.”

 

여행 코스가 다 그렇지.”

 

아 네…”

 

여인은 빙긋 웃었다. 나는 시트에 등을 묻고 운전석을 쳐다보았다. 이 운전사는 정말로 리버사이드 호텔을 하는 걸까?

 

아까 그 처녀는 나래지?”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레스토랑에서 대화하는 것을 들었나?

 

그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스스로 선택한 거니까.”

 

나는 셔츠의 카라를 만지작거렸다. 이 사람은 우리를 도대체 언제부터 관찰하고 있었던 걸까?

 

사람마다 특색이 있어. 나래는 개척자라고 할 수 있지. 마치 신화의 이오처럼 스스로 들판으로 나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정말 걱정하는데요. 그런데 언니는 늘 핑계만 대니까요.”

 

명분이란 게임의 룰에 지나지 않아. 네가 나이가 더 들면 이해하는 눈이 생길 거야.”

 

이오는 결국 소가 되잖아요. 헤라의 미움을 사서요. 우리는 언니가 소가 될까봐 걱정하는 거죠.”

 

마지막엔 별자리가 되지. 황소 자리. 고난 끝에 신이 되는 거야.”

 

혹시 시칠리아의 황소 아세요?”

 

나의 질문에 여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식었다. “아니…”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시칠리아의 황소는 처형 도구다. 신전의 계곡을 지을 당시, 아크라가스의 참주 팔라리스는 구리로 소 모형을 만들었는데 특별히 마이크 역할을 할 수 있는 입모양을 만들어 놨다. 그 안에 자신의 적을 집어 넣고 불고문을 했다. 희생자가 고통을 못 이겨 발버둥을 치고 비명을 지르면 구리 황소는 요란한 소리를 냈다. 고문을 당하는 사람은 입모양 쪽 말고는 소리를 내지를 수 있는 구멍이 없으므로 거기다 대고 소리를 질렀는데 그 소리는 꼭 암소 소리같이 들렸다고 한다. 그는 그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희생자가 죽어가는 동안 포악한 참주는황소가 암소의 소리를 내는구나.’ 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그래. 처형도구라니 끔찍하구나. 그 이야기를 왜 나한테 하는 거지?”

 

그냥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이오가 소가 되는 이야기나, 시칠리아의 황소나 비슷한 이야기니까요.”

 

어떤 점에서?”

 

그 둘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사람이 아니라 소가 되기 때문이죠. 하나는 소로 살아야 하는 고통, 다른 하나는 소로 죽어야 하는 고통.”

 

너는 소가 되는 것이 두렵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니 낯선 어둠만이 이어졌다. 왠지 리버사이드 호텔은 반대편일 것만 같았다.

 

사실, 내가 이 차에 타기 전에 전 죽고 싶었어요.”

 

“… …”

 

그런데왠지 당신이 절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이 차에 탔던 거니?”

 

당신은 누구죠?”

 

여자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동공에 내 그림자가 비쳤다.

 

나는 피아니스트야.”

 

그리구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왜요? 말해줘요.”

 

사실 나는 악마란다.”

 

여자는 다정하게 말했다. 창밖의 나무 그림자 한 다발이 그녀를 가리우고 지나갔다. 여자는 여전히 아름다운 채였다.

 

너와 거래를 하기 위해 미래에서 왔단다.”

 

미래에서 왔다구요?”

 

그래. 나는 너의 미래야.”

 

“…당신이 내 미래라구요?” 나는 흥분하여 외쳤다.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나요?”

 

아니.”

 

여자가 말했다.

 

나는 너의 미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무슨 말이죠?”

 

나는 다른 우주에서 왔어. 우주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평행 우주로 구성되어 있거든.”

 

“… …”

 

넌 수학 선생이니까 잘 이해할거야.”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넌 중학생 때 나갔던 전국 콩쿨에서 입상하지 못했었지?”

 

“….”

 

그곳이 바로 우주가 갈린 시점이지. 왜냐하면 나는, 그 콩쿨에서 우승했거든.”

 

“… …”

 

그 후 모든 콩쿨에서 우승했어.”

 

나는 열병 환자처럼 끌었다 식었다를 반복했다.

 

당신의 삶은 멋졌겠군요.”

 

그래, 멋졌지. 내가 온 평행우주에서 나는 세계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란다. 말하자면, 나는 12개의 과업을 모두 이룬 헤라클레스나 마찬가지야.”

 

멋지네요그럼나는이 우주에 남은 나는 어떻게 되나요?”

 

수학 선생이 되었잖니.”

 

그게 다인가요?”

 

거기에도 많은 우주가 있지. 앞으로 네 선택에 따라 무한대의 우주가 생겨날거야. 하지만 피아니스트가 되지는 못하지. 넌 이미 너무 많이 왔어.”

 

“… …”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굳이 과거까지 나를 찾아와서 내 미래를 다시 죽이는 거지?

 

당신이 내게 하려는 제안은 뭐죠?”

 

나와 인생을 바꿔보지 않을래?”

 

그녀가 본심을 드러냈다.

 

너의 우주와 나의 우주를 바꾸는 거야. 너는 항상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니? 너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 최고 기량의 피아니스트야. 이 우주에서도 너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면 나는요?”

 

너는 나의 평행 우주로 가서 이미 내가 일궈놓은 명성을 업고 살 수 있어.”

 

“… ….”

 

나에겐 멋진 차가 있고 프로방스에 저택도 있지. 그리고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사람들은 너를 알아볼거야.”

 

그렇지만 늙은 채겠죠.”

 

나는 너보다 겨우 30살이 많을 뿐이야. 앞으로도 넌 40년은 더 살 수 있지 않겠니?”

 

늘 이런 식으로 우주를 흥정해 왔나요?”

 

모든 우주를 완벽하게 만들어왔지. 우리 세계에선 이게 유행이야.”

 

“… …”

 

명심해. 너는 나야. 나는 너고. 너는 최고가 될 수 있어.”

 

그리고 당신은젊음을 다시 얻고요.”

 

“… …”

 

이번엔 여인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난 방금 죽고 싶어했었지. 어차피 버리려던 것이라면 남을 준들 무슨 상관이랴? 게다가 이 사람은 미래의 나라고 하질 않는가? 내가 달리 더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

 

어머니는, 기뻐하시던가요?”

 

최고의 생을 누리다 가셨지.”

 

여인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대답했다. 목소리에서 확신이 묻어났다.

 

이미 돌아가셨군요.”

 

, 애전에 돌아가셨단다.”

 

미래의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비행기 사고로스칼라 극장의 내 데뷔 무대를 보러 오시다가 그만.”

 

“……!”

 

, 내가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하지만 아쉬워할 건 없단다. 어머니는 고통 없이 가셨어. 내가 이 세계에서 남은 몫까지 다해서 보살필게.”

 

“…. 좋아요.”

 

나는 깍지 낀 두 손을 바라보았다. 방금 지중해에 담근 것 마냥 축축하고 끈적거렸다. 지중해. 오늘 아침 만났던 해변의 아이들. 물보라. 그리고 루까내가 루까의 손을 놓을 때 이미 나는 그 아이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리도 아쉬운걸까? 확실히 이 차는 리버사이드 호텔로 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단을 향해 수렴했다. 물기로 번들대던 눈동자의 불이 꺼지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안녕을 고하기 위해 창밖을 바라보았다.

 

, 저기요! 잠시만 세워주세요!”

 

여인은 마지못해 운전자에게 사인을 보냈다. 차가 멈췄다.

 

왜 그러니?”

 

저 자판기요! 저기서 소다캔 하나만 뽑아 마실 수 있을까요?”

 

나는 갈증으로 얼이 나간 사람처럼 창문을 콕콕 두드렸다. “저걸 꼭 먹어보고 싶어요!”

 

저런 음료는 나의 세계에선 얼마든지 있단다. 게다가 훨씬 더 맛있지.”

 

“…네 그렇겠죠. 하지만 이 순간, 이 곳에서 마실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다 똑같은 거야.”

 

다 똑같지 않아요!”

 

나는 미래의 나에게 소리쳤다. 제발요…! 그리고 저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조금만 빌릴 수 있을까요?

 

여인은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내가 내민 손바닥 위로 동전 몇 개를 떨구어주었다. 나는 반색하곤 차문을 열고 나섰다. 밴딩머신 안에서 동전이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투둥 소다캔이 여기 저기 머리를 박으며 출구로 떨어졌고 나는 허리를 굽혀 캔을 집어 들었다. 아침에 루까가 건네던 감촉 그대로 차가웠다. 딸깍 꼭지를 따는 소리가 히말라야의 메아리처럼 웅장했다. 여지없이 흰 포말들이 차올랐다. 나는 간지러운 파도가 손등에 범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라임밭의 향내가 풍겼다. 이 작은 세계를 들어 입에 가져가자, 눈에 카시오페이아 별자리가 M자를 그리며 박혔다.

 

카시오페이아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안드로메다인데, 안드로메다는엄마에 의해 해안에 사슬로 묶였다. 카시오페이아가 딸을 자랑한 탓에 포세이돈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분노한 포세이돈은 카시오페이아의 나라를 괴롭혔다. 결국 카시오페이아의 사랑이 안드로메다를 괴물 고래의 것으로 만들었다. 카시오페이아 자리 옆에 페르세우스 자리가 있지, 그리고 바로 옆에 고래 자리도안드로메다는? 안드로메다도 가까이에 보여. 카시오페이아 주변에. 그런데 사실, 안드로메다는 별자리가 아니야. 안드로메다는 사실 은하야. 우리 은하가 포함된 국부 은하군에서 최대급 은하지. 카시오페이아와 가까워 보이지만 카시오페이아는 19.4광년, 안드로메다는 254광년 떨어져 있지. 둘은 그저 이 지구에서나 엄마와 딸로 보이는 거야.

 

안드로메다는 또 다른 우주.

 

별다를 것 없는 레모네이드 맛이었다. 곧 이 익숙함에서 멀어지게 되겠지. 나는 예고된 그리움에 전율하였다.

그 소년을 다신 못보겠지. 만약 내가 그 소년을 따라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면 또 다른 우주가 열렸겠지.

 

갑자기 내 앞에 무한한 우주가 열리고 나는 설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냐! 이 얼마나 멋진 우주던가! 나는, 내가 가진 것은 능력이 아니라 시간이야. 나는 내 삶에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어. 나는 결코 내 삶을 성공에게 위임하지 않겠어. 나는 철저히 실패하고 부활하리라! 나는 신이 될거야!

 

내가 힘차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링컨차는 없었다.

 

“… …”

 

정적이 환호처럼 내 세계를 축복하였다. 그 곳에는 내가 숨쉬는 새로운 공기가 있었다.

 

멀리 리버사이드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달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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