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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4일 11시 23분 등록

얼치기 작가

 

아직은 새벽이 차다. 실로 오랜만에 일찍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갑작스런 편두통과 어지러움에 저녁 답에 잠시 누워 있는다는 것이 12시간이 흐른 뒤에야 일어났다. 깨어나니 운 좋게도 새벽이다. 지난 밤의 긴 잠이 차가운 새벽에도 몸을 일으키게 했는데, 상쾌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메마른 백색의 겨울을 지나 가지 끝에 망울들이 조봇하게 들어섰다. 간만에 주어진 나의 새벽에 봄을 느끼는 행운까지 더한다. 한 여름 실록과 한 겨울 무채색의 경계에 선 연두의 봉오리들이 올망졸망 맺힌 모습이 유난히 여리고 눈물 겨워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춥지만 길었던 겨울 잠이 힘이 되어 매서운 추위에 아랑곳없이 그 연약하지만 봉긋한 맺힘이 우뚝하다. 그 모습이 볼수록 의젓하여 감탄을 자아낸다. 기어이 봄은 오려나 보다.

 

어느 한 시기의 폭발적인 독서로 인해 내 행동과 사유의 근본이 바뀌어지리라 기대했던 적이 있었다. 기라성 같은 작가들의 고전들을 읽고 나면 만사에 그윽한 눈빛과 달통한 표정으로 뒷짐지며 세상을 살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은 적이 있었다. 참으로 유아적이어서 귀엽기까지 했던 그 생각에서 깨어났을 때는 몸 둘 바를 몰랐다얼굴이 붉어질 일이다. 삶에 스며드는 체험과 깊은 고민 없이, 단지 독서로 인해 변화될 사상의 지각변동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두어 시간의 짧은 잠이 순간의 상쾌를 불러올 수 있겠지만 잠시 뒤면 여지없이 정신은 몽롱하고 중심을 잡기 힘든 위태함이 여전히 남지 않던가. 나에게는 더 깊은 침전이 필요했다. 숙면이 필요했으나 설핏 자다 깬 선잠으로 깨어있는양 하려니 얄팍한 지식의 무리함을 동반했고 제 한계를 넘어선 동력으로 오버의 피곤함을 불렀다. 힘 없는 다리로는 산을 오르지 못한다. 그것은 꾸준함으로도 어쩌지 못한다. 깨어났으나 여전히 잠에 취한 채로는 오는 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지난 주 칼럼을 써내고 시름이 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얘기를 해댔고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글을 마구 가져와 억지로 엮어냈다. 제 부족함을 메우려 쓴 글이 천박함을 그대로 드러내었고 실속 없는 전투적 글쓰기로 조급함을 먼저 보여낸 하수의 글이었다. 사람들이 읽고 조금이라도 어렵다면 제 사유이든 남의 글이든 자신이 미처 소화시키지 못하고 토해낸 상한 음식과 같다. 제대로 소화시켰다면 사상의 에너지로 쓰였을 그 주옥의 깔끔한 음식들이 준비가 덜된 나에게 들어와 기름기를 덮이고 튀김 옷을 입혀 사변이 되고 거들먹이 되어 다시 내뱉어진 쓰레기가 되었다. 내 살펴보니 이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

 

지난 1사람아, 두려워 마라는 칼럼에서는 지적 허영이 묻어있고 정제되지 않고 배출된 폐수의 악취가 난다.

 

사회는 산을 침해하지 못하고 산은 인간 사회의 사태들에 동요하지 않는다인간은 산을 이해할 수 없으나 산은 인간을 미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인간의 원시가 살아있는 곳이며 인류의 신화적 동경을 품고 있는 곳이 산이다. Axis mundi! 제 사는 야트막한 뒷산의 신화적 가치는 세계의 중심이 그곳에서 비롯됨을 역설한다. 유한을 인식함으로 무한을 가늠하듯 존재 너머의 무엇은 인간이 인간의 시간을 극복해야 함을 산을 통해 힌트 내린다. 산과 인간, 건너지 못할 그 큰 강물의 크기를 가늠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과제로 넘어온다.

 

산이 가진 열쇠는 탈인간, 탈시간 이다. 신의 존재를 역설한 김용규 선생이 말한 변화와 시간과의 관계를 산과 인간의 관계로 조금 비틀어 표현하자면산은 탈인간화된 자연의 모습이며 인간은 탈자연화된 모습의 산이지 않겠는가. (남의 말을 빌려 가져다 쓰는 일은 이렇게 위험하다. 스스로도 이해하기 힘든 거친 비유가 되어 버린다.) 인간의 시선으로 산을 이해할 수 없다면 구만리 장공에서 붕새를 타고 노니는 장자적 시선을 빌려보자. 우주의 가장 왼편에 무한의 퍼텐셜을 놓아보고 가장 오른쪽에 유한의 인간을 놓아본다면 그 사이 어딘가에 산이 자리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 가장 오른편의 인간이 제 존재의 연원을 알기 위해 시간을 무한 소급하는 과정에 최초의 진공이었던 퍼텐셜의 상태로 가는 그 언저리에 산이 걸리적 거릴 수 있다는 이야기겠다.’

 

마주함에 대하여라는 칼럼에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가? 사유의 억지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높다,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그 높음. 인간을 죽여놓는 그 높이에 대해 이제 말할 차례다. 흰 산, 높은 흰 산에 대해 내 안으로 들어가 그것과 만난 다음, 나는 다시 흰 산에 대해 쓸 테다. 물리적으로 높다는 것은 내 자의식이자 우리의 자의식이 그리 만든 것. 높다, 낮다라는 말은 이미 그 자체에 언어적 제약을 품고 있다. 누가 높음에 대해 낮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가. 누구도 규정할 수 없는 그 높음에 대해 나는 스스로 답을 해야만 한다. 산을 오르는 수직의 운동이라는 단편적 사실에 더하여 일상을 거스르는 인식을 재발견해야만 하는 과제가 주어진 거다. 그것은 내 자신을 내가 생각하는 사유의 방식과 언어 너머의 세계를 가늠해야 하는 무겁고도 혹은 무서운 숙제이지 않겠는가.’

 

이런 글로 작가 아이덴티티는 요원하다. 읽는다고 다 읽은 게 아니다. 쓴다고 다 쓰는 게 아니다. 제 자신도 만족하지 못하는 글을 그저 필요에 의해 생산하고 스스로를 바꾸지 못하면서 해라체를 남발하는 글을 써대는 작가는 사회악이다. 얼치기 작가양 하며 사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재앙이다. 지표를 뚫어내는 연두의 어린 새싹을 바로 보아라. 그것은 아직 푸르지 못하지만 푸름이 되기 위한 강력한 힘으로 솟아오른다. 어설픈 푸름을 흉내내지 말고 제 힘으로 흙을 떠밀고 솟아오를 일이다. 봄을 보았다니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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