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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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년 전에도 올 해처럼 정말 비가 많이 왔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작은 오두막을 짓는 일이 올 해 숲 학교를 짓는 일처럼 지난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눅눅하고 또한 뜨거운 땀방울이 가득 담긴 나의 새 오두막에서 첫 잠을 자던 날을 나는 잊지 못합니다. 그 해 시월 말일이 그 날인데 볕이 참 좋은 날이었습니다.
만추의 숲 풍경에 취해서 한 달을 보냈고, 눈 쌓여가는 자연의 모습에 홀린 채로 첫 책을 쓰며 그 해 겨울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들어 첫 봄이 왔을 때 나는 괴산 5일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처음으로 밭을 갈고 이것저것 푸성귀를 심었고, 제법 되는 양의 옥수수도
심고 고구마도 심었습니다. 어설프지만 그래도 농부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습니다. 스스로는 참 감개무량했습니다. 사실 글을 쓰고 책을 쓰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내게는 그다지 큰 비중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로 살겠다는 간절함은 귀농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아주 크고 깊게 자리했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농부로 사는 즐거움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농부로 사는 즐거움은 ‘직접’의
즐거움이요 ‘거절’의 즐거움이자 ‘조아림’의 즐거움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선 내가 ‘직접’ 일군
것을 스스로의 밥상에 올리고, 또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즐거움을 그대는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어쩌면 내가 직접 쓴 책을 세상에 내놓고 누군가 나의 세계를 읽어줄 그 어떤 독자를 기다리는 즐거움과
비슷할 것입니다. 다른 이가 만든 것을 중개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직접 일구고 이룬 것을 세상과 나누는
즐거움이야 말로 모든 직업 영역에서 달성하고픈 즐거움의 으뜸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창작과 예술, 그리고 농사가 가장 훌륭한 직업 영역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거절’의 즐거움은 세상에 맞설 수 있는 나 자신의 힘을 갖는 통쾌함입니다. 내가
생산한 농산물을 나는 아무에게나 팔지 않을 것이다. 돈만 주면 무조건 누구에게나 파는 구조의 자본적
질서에 맞설 수 있다는 즐거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돈보다 귀한 가치를 인정하는 훌륭한
소비자들과만 거래하겠다는 야심(?)을 채울 수 있는 것 역시 내게는 농부로 사는 즐거움의 하나로 생각한
것입니다. 소로우가 월든 자신의 오두막에 살 때 세금을 거부하다가 유치장에 들어간 그 심정 속에 통쾌함이
있었을 것임을 안다면 이 즐거움도 아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아림’의 즐거움은 깊어져야 누릴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사람이 만든 권력이나
자본에 조아리기보다 하늘과 땅과 바람과 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하루하루에는 겸허한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인간 아닌 다른 생명들을 나와 대등하게 대하며 얻게 되는 충만감 역시 또 다른 겸허함의 즐거움입니다.
올해 나는 농부로 사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숲학교를 짓는다고 땅과 생명으로부터 유리된 시간이 많아서 일 것입니다. 어제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거절을 당하는 경험을 했는데, 세상으로부터 오랜만에 거절을 받고 보니 농부로 사는
그 즐거움이 더 그리워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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