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 조회 수 3498
- 댓글 수 3
- 추천 수 0
겨울로부터 세 계절이 흘렀습니다. 그간 나는 홀로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그림 한 장을 그렸습니다. 숲이
처음 내 영혼을 물들이던 때의 그것처럼 이 그림은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생생해졌습니다. 이 그림이 현실로 완성되면 이 숲과 주변 마을,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군과 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아름다운 모습까지도 분명해졌습니다.
처음 섬광처럼 스친 그림은 세 계절을 지나면서 숙성되었고
주변의 다른 배경과 어우러져 이룰 더욱 아름다운 모습까지로 확장되었습니다. 숙성 과정에서 나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이 그림에 대한 코멘트를 구했습니다. 그림을 조심스럽고 소중히 간직하면서 동시에
현실성을 검증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 극소수의 사람들은 모두 아직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아주
특별한 야외 박물관을 이 숲에 들여놓겠다는 나의 그림이 참 좋은 그림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그림이
꼭 현실이 되는 날을 응원하겠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세 계절 동안 그림을 구체화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사진을
찍으러 다녔고 수시로 메모를 했습니다. 그림은 더욱 견실해졌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게는 달랑 한 장의 그림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멋진 그림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서는 자원이
있어야 하는데, 내게는 필요한 자원이 없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이미 숲에서 배운 지혜가 있었습니다. 풀과 나무들
역시 자원이 부족한 상태로 시작하여 숲을 이루어간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나무와 풀이 저마다 자신의
하늘을 열고 더 많은 생명을 부양할 수 있는 숲을 이루기까지 그 부족한 자원을 어떻게 조직하고 조달하는지를 아는 것은 자립적이고 또한 더불어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내게 없는 자원을 가졌거나 그것을 지원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가진 사람 몇 명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민간인을 만나서 의사를 묻자 반응이 좋았습니다. 민간의 힘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큰 자원을 필요로 하는 그림이기에 관공서의 의사결정자들도 만나갔습니다. 우리 군의 군수님은 이 아름다운 그림을 함께 그려보며 좋아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한계가 있어 당장은 직접 나설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도의 의사결정자를 만났습니다. 멋진 그림이라는 점에 동의했지만 군 최고 결정자의 의중이 중요하다며 난감해 했습니다. 또 다른 부서의 고위직 도청 관계자에게도 면담을 요청해서 상의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위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민간이 제시하는 참신한 아이디어가 얼마나 귀한 지를 생각하기 보다 자신이
지닌 우월적 지위를 강조했습니다. 문화적 식견도 창의력도 없는데다 무례한 그에게 그림을 보여준 것이
후회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관공서가 합리성에 기반하여 의사결정을 할 수만 있다면 그림은
수월하게 현실화될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그래서 기대도 컸습니다. 하지만 비합리적 이유에 의해 결과적으로
뼈아픈 거절을 받게 되자 실망도 컸고 절망감마저 들었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나는 몇 날을 정신적 불면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차라리 창의력과 열정이 높고 평소 나의 그림을 갖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해온 다른 지방자치단체에게
이 그림을 넘겨줄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절망의 며칠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나는 주저앉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미 숲에 오두막을 짓고
살겠다고 결심하던 순간부터 세상은 나를 주저앉게 할 수 없으리라 다짐했던 그 초심을 다시 꺼내어보며 차라리 다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때로는 삶에도 아직은 때가 아닌 날들이 깃들어 있음을 아니까요. 품은
그림을 버리지 않는 한, 그리고 ‘때’를 기다리며 견딜 줄 아는 한, 세상은 결코 나를 주저앉게 할 수
없을 테니까요!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1237 | 당신은 사랑을 몇 번 해보았나요? [1] | 문요한 | 2011.09.21 | 3889 |
1236 |
삶이란 죽음 위에 피는 꽃 ![]() | 승완 | 2011.09.20 | 5360 |
1235 | 문명은 모든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문명이어야 한다 | 부지깽이 | 2011.09.16 | 4382 |
1234 |
흔들리는 자신 가만히 바라보기 ![]() | 김용규 | 2011.09.15 | 3537 |
1233 | 감정의 굳은 살 | 문요한 | 2011.09.14 | 3831 |
1232 |
개인사를 관통하는 성장과 퇴화의 패턴 ![]() | 승완 | 2011.09.13 | 4625 |
1231 | 그녀는 수수께끼입니다 | 부지깽이 | 2011.09.09 | 5054 |
» | 세상은 나를 주저앉게 할 수 없다 [3] | 김용규 | 2011.09.08 | 3498 |
1229 | 갓난아이가 학교를 구하다 [2] | 문요한 | 2011.09.07 | 3848 |
1228 |
인간에 내재해 있는 위대한 힘 ![]() | 승완 | 2011.09.06 | 4659 |
1227 | 그날, 루까의 성벽 위에서 | 부지깽이 | 2011.09.02 | 5211 |
1226 | 농부로 사는 즐거움 몇 가지 [2] | 김용규 | 2011.09.01 | 3586 |
1225 | 당신의 뇌가 가장 뛰어날 때 [1] | 문요한 | 2011.08.31 | 4840 |
1224 |
아시시의 바람이 준 가르침 ![]() | 승완 | 2011.08.30 | 5518 |
1223 |
비둘기의 꿈 ![]() | 신종윤 | 2011.08.30 | 5540 |
1222 | 특별함의 원천 [2] | 부지깽이 | 2011.08.26 | 4578 |
1221 | 끝까지 가자, 끝을 만나게 되리라! [3] | 김용규 | 2011.08.24 | 3535 |
1220 | 세상의 모든 사랑은 불완전하다 | 문요한 | 2011.08.24 | 4452 |
1219 |
르네상스인, 탐구하고 재생하고 자립하는 인간 ![]() | 승완 | 2011.08.23 | 5180 |
1218 | 오늘이 내일을 만든다 | 신종윤 | 2011.08.23 | 43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