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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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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20일 00시 54분 등록

이틀 전 이 숲에 첫 서리가 내렸습니다. 벚나무는 붉게, 느티나무는 노랗게 물들었고 붉나무는 노란빛이었다가 이미 제 이름처럼 붉어졌습니다. 바야흐로 여우숲이 만추를 지나는 중입니다. 이제 곧 겨울이 올 모양입니다. 오늘은 밭에서 배추 몇 포기를 짚으로 묶어주었습니다. 늦게 심었지만 대견하게 커주고 있어서 올해는 김장을 기대하게 됩니다. 김치냉장고가 없는 나는 유년의 경험을 살려 구덩이를 파고 독을 묻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자자산방의 앞뜰과 뒤뜰에는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국의 향기로 가득합니다. 누구라도 불러 저 향기 나누고 싶을 만큼 그 향기 곱고 깊습니다. 요 며칠 샛노란 산국 곁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의 향기를 누렸습니다. 행복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과 달리 숲의 소리를 듣지 못하던 시절에 나는 이 즈음이 참 힘들었습니다. 추분을 지난 해가 동지를 향해 점점 그 길이를 줄여나가는 시간... 마치 쓸쓸함을 타고난 종자이기라도 한 듯 나는 한 없이 외로워지곤 했습니다. 하지만 숲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생기고부터 나는 한결 겨울로 다가서는 시간을 담담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래적 고독과 화해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질서였습니다.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꽃인 산국의 메시지는 아주 강력한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겨울의 문턱을 기다려서야 꼭 제 꽃을 활짝 피우는 산국... 다른 모든 식물들이 서리를 맞고 쓸쓸하게 사그러들 때, 그때서야 비로소 그 시간대에 가장 아름다운 향기를 풍겨내며 노오랗게 피어나는 산국! 알이나 번데기의 형태로 겨울을 나지 못하고 성충인 상태로 겨울을 나야 하는 곤충들에게 산국은 어쩌면 마지막 식량일 것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피는 꽃에서 그들은 꽃가루를 구하고 꿀을 구합니다. 겨울을 견딜 마지막 양식으로 삼는 꽃이니 그들에게 산국이 얼마나 반가울까요?

산국 곁에서 야생의 국화 향기를 아주 흠뻑 맡다 보니 자연스레 산국을 취하러 찾아오는 곤충들도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꿀벌이 독식하는 꽃인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꽃등에 류만도 세 종이 넘었고 토종벌과 서양벌, 그리고 네발나비류들도 산국으로 깃들었습니다. 심지어 숲 주변에 적응한 파리류들도 산국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 꽃 한 송이 핀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사람들은 이 시절 단풍에 마음을 빼앗겨 저 작고 수줍고 늦은 꽃을 아는 이도, 기억하는 이도 별로 없지만, 숲 언저리를 오가는 그 무수한 곤충들에게 산국은 얼마나 소중한 꽃인가? 얼마나 많은 곤충들이 저 꽃을 통해 험한 시간을 견딜 수 있는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동안 산국으로 찾아 드는 생명들 곁에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삶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의 벚꽃처럼 이르고 또한 화사하지 못하더라도, 혹은 여름날의 나리처럼 크고 선명하지 않더라도, 늦가을 저렇게 소박하게 피는 산국처럼 그저 저마다의 때에 맞게, 저마다의 크기와 빛깔에 맞게 저다운 꽃 피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으로 나 아닌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나눌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모두 꽃을 피우자. 저다운 꽃 피우자. 그대의 가을, 저 산국처럼 깊고 그윽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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