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용^^
- 조회 수 2427
- 댓글 수 1
- 추천 수 0
고도를 거스르는 자
선홍 빛 잇몸을 가진 젊은 날, 그런 날에 늙은 문장을 가졌다면 갑갑하고 허무하여 견딜까. 나는 조급하다. 나의 문장이 더 늙어가고 조악해지기 전에 내 젊은 날을 서둘러 이야기해야 하므로. 그리하여 섣불리 내 젊음의 말 하나를 떠올려야 했다. 나지막이 발음해 보는, ‘히말라야’. 그것은 나에게 충격이었으니 가장 먼저 내 안에서 솟아났고 입 속에 머금어 조용히 반복하니 이내 폭풍이 되어 다가온다. 이제는 아득하고 희미하지만 당시, 더는 명징할 수 없었던 충격의 현장. 순백의 만년설이 대지를 덮은 모습을 본 나는 매 순간 놀라있었다. 그 놀람의 연유를 알아야겠기에 아무 말 하지 않는 눈부신 설경에서 메시지를 읽어내려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결국 읽어 낼 수는 없었다. 사유의 일천함이 원망스러웠으나 말은 침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나는 무리하여 의미를 끌어내지 않을 것이어서 그 침묵에 동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조차 잠잠해지는 히말라야의 절대 고요 속에 그 침묵의 의미를 간파한들 한갓 인간이 알아차리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 것을. 절대자가 아닌 이상 여기 이 자리에서는 날고 뛰는 인간이나 느리고 기는 인간이나 매 한가지의 인간이니, 서열과 경쟁이 사라지는 이 땅에서 나는 안도했다.
존재의 가치를 일 순간 평준화 시켜 버리는 그 절대를 메마른 호흡을 위해 입 끝을 벌리며 지켜보았다. 침묵은 고요한 중에 귀청을 때렸다. 법문을 중얼거리는 수 없는 말들이 바람에 날리지만 말을 걸어오는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역설의 현장에서 침묵의 시그널이 뱉어내는 충격을 나의 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마음은 오르기를 원하고 몸은 내려가기를 원했다. 더 이상 상쾌할 수 없는 공기에 청량해야 할 내 머리는 누군가 도끼로 내려 찍는 듯 아프다. 침묵의 충격은 나에게 고소증세가 되어 이제껏 살아온 시끄러운 삶을 질타했다. 산소포화도 85, 분당 맥박수 103회, 10초당 19회. 맥박이 요동을 친다. 아무런 메시지를 찾지 못했던 사유의 힘은 결국 과학적 수치에 의존하고서야 신의 영역에 들어섰음을 알아차린다. 루클라에서 출발하여 카라반을 시작하고 만 이틀 뒤, 고소증세는 찾아왔다. 고소증은 거의 모든 것으로부터 의욕을 빼앗아갔다. 밥을 먹는 것도 물을 마시는 것도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았고 벌 수십 마리가 내 머리에 들어앉아 돌아다니는 듯했다. 급하게 혈관확장제를 털어 넣는다. 약발이 빨리 듣기를 기도하고 고통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기도했다. 나를 죽이지 마라 기도하고 이겨낼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다. 기도했다. 또 기도했다. 무기력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다. 무기력한 내 모습을 보는 일이 괴로웠지만 과거, 무기력했던 모습들만 유난히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기억은 환청을 동반하고 내 가장 괴로웠던 기억을 3D로 재현한다. 간절한 기도도 무시로 떠오르는 불안한 기억을 어쩌지는 못했다.
떨어지고 난 다음의 상황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빙벽에서 떨어졌고 떨어졌다는 걸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아프지 않았다. 같이 등반했던 선배님들이 더 놀라셨는지 애써 나를 안정시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끊여 주시는 커피를 마시며 여유 있게 구조대를 기다렸다. 지구 자전 소리를 인간이 듣지 못하는 것처럼 내 고통은 인간이 느낄 고통은 아니었나 싶었다. 울산지역에서 출동한 119 구조대는 두 시간 뒤, 들것과 비상약, 장비들을 짊어지고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뒤, 고통의 역치를 잠시 넘어섰다 다시 돌아온 다음의 고통은 이전의 내 알던 고통이 아니었다. 고통의 수은주가 벌겋게 팽창하고 말을 잇지 못해 목덜미를 길게 뻗어 뒤통수를 땅에 처박았다. 희번득 눈을 뒤집고는 하늘을 보았다가 땅을 보았다가 했다. 미끈한 다리의 봉긋한 장단지 라인 끝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내 뼈가 제 멋대로 튀어나와 있다. 으깨진 왼쪽 발목 뒤로 튀어나온 뼈의 윤곽에 크게 잘못 되었음을 직감했다.
구조대에 실려 인근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다. 바지를 찢어 부목으로 고박했고 진통제를 주사한 뒤 곧바로 큰 병원으로 가는 응급차에 다시 실려졌다. 실려 가는 중에 진통제도 듣질 않았는지 통증은 극한을 향해갔다. 통증보다 더 큰 통증은 조각난 뼈들 사이로 들어가 그것을 상상하고 그 고통을 가늠하는 일이다. 단지 상상일 뿐이지만 고통을 능가하는 고통이 폭풍처럼 몰려온다. 공포다. 아픈 발목에 상상의 고통이 더해졌고 나는 왼쪽 발목을 스스로 자르고 싶었다. 구급차에 동승했던 선배님께 발목을 잘라 달라 했다.
이 끝없는 고도와의 싸움은 내 몸뚱아리 중 어느 하나가 잘리거나 내가 죽어야 결국 끝이 날까. 생각은 두려움을 향해서만 치닫는다. 해발 3400m, 상보체, 다시 머리가 그리고 발목이 아파온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412 | 바텐더의 매직쇼 [2] | ![]() | 2013.03.18 | 2131 |
3411 | 결혼식의 플랜B [1] | 콩두 | 2013.03.11 | 3048 |
3410 | 니체와의 가상 인터뷰 [1] | ![]() | 2013.03.11 | 2719 |
» | 고도를 거스르는 자 [1] | 용용^^ | 2013.03.11 | 2427 |
3408 |
通 하였느냐 ? (신인류의 의사소통) ![]() | 샐리올리브 | 2013.03.11 | 4764 |
3407 | #그냥쓰기8_그녀의 노후 [2] | 서연 | 2013.03.11 | 2303 |
3406 | 나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 할 것인가? [1] | 학이시습 | 2013.03.11 | 2620 |
3405 | 내 꿈의 맛 [1] | 세린 | 2013.03.11 | 2041 |
3404 | 난 무엇이 달라졌는가? [4] | 한젤리타 | 2013.03.11 | 1963 |
3403 | 알려지지 않은 신 _ 15 [1] [2] | 레몬 | 2013.03.11 | 2567 |
3402 | Climbing - 1.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네 끝은 비대하리라 [2] | 書元 | 2013.03.11 | 2225 |
3401 | 첫 걸음, 첫 마음 [2] | 콩두 | 2013.03.04 | 2075 |
3400 | 오로지 | 세린 | 2013.03.04 | 1896 |
3399 | 얼치기 | 용용^^ | 2013.03.04 | 2319 |
3398 |
팀버튼과 나탈리 골드버그 ![]() | 샐리올리브 | 2013.03.04 | 2343 |
3397 | 그냥쓰기#7_상동구이尙同求異 | 서연 | 2013.03.04 | 3992 |
3396 | 왕의 귀환 과 애플의 재 탄생 - 그가 가장 먼저 무슨 일을 했는가? | 학이시습 | 2013.03.04 | 2594 |
3395 | 글쓰기에 대해 견딜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 ![]() | 2013.03.04 | 2128 |
3394 | 알려지지 않은 신 14 | 레몬 | 2013.03.04 | 2814 |
3393 | 떠나고 싶은 날 | 한젤리타 | 2013.03.04 | 23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