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에게 비밀을 털어놓겠다. 마음 한편으로 리처드 파커가 있어 다행스러웠다. 리처드 파커가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가 죽으면 절망을 껴안은 채 나 혼자 남겨질 테니까.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아닌가. 내가 아직도 살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리처드 파커 덕분이었다. (중략) 그는 나를 계속 살아있게 해주었다. 그건 그가 밉지만 동시에 고마웠다. 지금도 고맙다. 이것은 분명한 진리이다. 리처드 파커가 없다면 난 오늘날 이렇게 살아 여러분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했을 것이다.”

- 얀 마텔 소설, <파이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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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배가 난파해서 가족은 수장되고 망망대해에서 구명보트를 타고 표류하는 열여섯 살 소년 파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더 절망적인 것은 그 작은 구명보트 방수포 안쪽에 ‘리처드 파커’라는 200kg이 넘는 벵갈 호랑이가 함께 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상이 되세요? 두려움에 떨던 소년은 결국 살기 위해 호랑이랑 친해지고 길들이는 것을 선택합니다.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호랑이를 위해 물과 고기를 주고 한편으로는 서로의 영역을 구분하고 가르치면서 둘은 서로를 의지한 채 기나긴 표류를 이어갑니다.  

매우 상징적인 영화라서 영화가 끝난 뒤에 많은 생각과 의문들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리처드 파커라는 사람 이름의 호랑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생각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예기치 못한 인생의 시련일 수도 있고, 불안이나 두려움을 의미할 수도 있고, 우리 안의 본능일 수도 있고, 융이 말한 그림자라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나로 결론내릴 수는 없었지만  ‘우리 안에 존재하지만 감당할 수 없어서 허락하지 못한 부분’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즉, 우리 안에 빛과 어둠이 있다면 그 어둠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이 호랑이(어둠)는 언제 우리를 잡아먹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야기하기에 우리는 흔히 세 가지 방식으로 이를 대합니다. 첫 번째는 호랑이를 보스처럼 대하고 호랑이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호랑이를 적처럼 대하고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호랑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 가둬두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가지 방식 모두 그렇다고 호랑이가 사라지거나 작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파이는 우리에게 네 번째 방식을 보여줍니다. 우리 안의 호랑이와 서서히 친구 먹는 것입니다. 호랑이의 위험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자세히 관찰하면서 차근차근 호랑이를 길들여 나갑니다. 결국 호랑이로 인해 두려움에 떨지도 않고, 쫓아내려고 하지도 않고, 가두지도 않은 채 구명보트 안에 공존하며 서로를 의지한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깨닫게 됩니다. 망망대해를 헤치고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파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호랑이 때문이었다는 것을.

당신 안의 호랑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그 호랑이를 어떻게 대해 왔나요? 이제 그 호랑이를 자주 바라보세요. 어쩌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거나 이뤄 온 많은 것들이 당신이 인정하지 않았던 이 호랑이 때문이었는지 모르니까요. 그리고 앞으로 인생의 바다를 헤쳐가기 위해 필요한 동반자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