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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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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19일 01시 34분 등록

니체가 대결해야 했던 것은 니힐리즘이 아니라 증오가 아닌가?

 

사람은 죽는다.

모든 것은 똑같다.

 

사실 기독교도 죽은 후에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주의의 극복을 위한 전략 중 하나다(가령, 키에르케고르). 니체는 기독교를 부정하기 때문에 기독교적 입장의 니힐리즘이다. 니체의 입장에선 죽으면 정말 끝이므로 육체의 지상이 진리라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이성이 낳은 니힐리즘이다. 그렇게 여겨졌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이성의 결과물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 진정한 니힐리스트가 되는가? 세상을 증오할 때. 세상이 살만하면, 사람들은 허무를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은 왜 살까?”를 언제 생각하는가? 이성적 치열함이 그대를 옥죄어 올 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삶의 이유 따위야 어찌 되든 상관없다. 우리는 세상이 힘들 때 죽고 싶다. 세상에서 의의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은, 완곡한 표현일 뿐이다. 오늘 상사에게 서류철로 머리를 찍혔는데 그저 굽신 굽신 거리며 과장실을 나와서 시선 끝에 14층 건물의 창밖이 들어올 때, 우리는 충동적으로 죽고 싶다. “더러워서 살기 싫다.”

 

[살아야 한다] [살 필요 없다]의 대결이 아니다.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자식, 부모, 가족 등의 핑계 역시 논리적 근거가 아니다. 그것은 그저, 감정적 취향이다.

 

, [살고 싶다] [살기 싫다]의 대결이다. 어디에서도 왜 살아야 하느냐?”의 답은 찾을 수 없다. 답이 없다. 죽어도 되고 죽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 이성과 진리(뭐라고 부르든) 등의 명분은 결과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뒤따라 올 수 있다. A는 살았다. 왜냐하면… B는 죽었다. 왜냐하면핑계 없는 무덤과 생이 어디 있는가?

 

니체는 머리로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며, 오히려 구역질이 진리를 더 잘 안다고 했다. 육체가 진리다. 이 말은 육체적 요구에 충실하자는 의미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무엇인가에 구역질을 한다면그것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감정이 의지를 만든다. 감정이 곧 의지다.

 

사실 니체의 이론만 두고 본다면, 니체의 여동생이 히틀러를 두고 초인은 바로 당신을 두고 한 말이라고 주장한 것이 그리 틀린 바도 없다. 히틀러의 생각에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에 속하지만 모든 것은 권력에의 의지를 표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필요악은 실천되어야 한다. 더 높은 완전한 경지를 위해서. 니체의 어떤 이론이 히틀러를 반박한단 말인가? “동정은 걷어치워라.” “초극의 세계로 가자.” “초인들의 세상.” 심지어 히틀러는 전시 상황이었고 훌륭하게 치뤄낸 전쟁자체는 그 자체가 명분이 되므로. 사실 히틀러는 초인이 되려다 실패한 훌륭한 사자가 아니던가? 아닌가? 아니라면 왜 아닌가?

 

니체가 말한 증오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다시 과장실로 들어가 과장을 칼로 찔러 죽인다거나, 사무실의 불특정 다수에게 기관총을 연사한다거나, 아니면 모든 폭력성을 자신에게 끌어모아 14층에서 뛰어내리는 것 따위에서 우리가 초극을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증오의 발산일 뿐이다.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어리광이다.

 

히틀러의 맹점은 니체의 사상을 자신의 증오에 대한 포장재로 썼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해 앙심을 품고 제대로 된 복수의 한 방을 노리며, 그 때 얻을 쾌감으로 니힐리즘을 극복하려드는 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아도 되고 살지 않아도 된다. 살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한 자들은 뜻밖의 해를 얻고, 더욱 방황한다. 그러나 이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삶의 주인이 된다. 선과 악의 도덕도 아니요, 니체도 아니다. 축을 빼버리면 삶은 연체동물처럼 무너져버린다. 다시 축을 세우는 것 스스로의 몫이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을 살고 싶게만드는 생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그 감정이 참으로 강렬하여 무엇무엇을 해야만 한다.”고 스스로 강령을 만들고 이에 복종하고자 할 때에도, 오로지 당신만이 입법자요 심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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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멸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에 대하여.

 

나는 나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나의 가장 취약한 점이 사실은 내가 그러하지 않기를 가장 갈망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결여된 성실성과 노예정신. 나는 나의 게으름에 지쳐간다. 그러면 게으르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 나야말로 세상을 향해 어리광을 부리고 있지 않느냔 말이야. 나의 무책임함이 낳는 수많은 분석과 정보들을 경멸한다. 나는 나에 대한 남들의 기대와 사랑을 인내로 끊임없이 치환하면서 사랑을 시험한다. 그리고 그들의 텐션이 이겨내지 못할 때 그들을 비난하고 상황을 회피하고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떠나는 것은 오로지 그 동안 미덥지 않게나마 쌓아온 []라는 탑이다. , 나 자신에게서 출발하지 않고 저열한 층계의 설명을 들이밀곤 했다. 나의 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의지를 불가피한 물질로 변경한다. , 오늘은 호르몬 난조로혹은 그냥 먼저 내 스스로를 처단하는 체 하여 남들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는다.

 

그러나 따위는 없다.

 

나는 이제 반성하는 것에 지쳐간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세상을 증오하는가? 나는 나를 증오하고 내가 왜 나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변화할 수 있으리라 믿지만 변화를 꿈꾸기에 현실이 너무 빠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복잡한 정보들 역시, 하나만 해결되면 모두 사그라질 것들이다. 그 하나란, 내가 삶의 중심축을 잡는 것인데,

 

늘 싸우던 것과 싸우지 않게 될 때, 나는 축을 얻게 된다.

IP *.137.98.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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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13:54:04 *.43.131.14

뭔가 난해한 가운데

'몸이 진리다'

'힘들 때 죽고싶다'

'늘 싸우던 것과 싸우지 않게 될 때 나는 축을 얻게 된다'는

말들이 따로 따로 들어와 안에서 부유해요. @@

 

니체의 어떤 것들이 레몬을 힘들게 했던 걸까 궁금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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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9 18:20:13 *.137.98.177
늘 즐겨 댓글을 달아주는 콩두 언니*^^* 난해한 이유는 글쓴이도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대한 학자는 가장 어려운 것을 가장 쉽게 설명하잖아요. 저도 뭔가 아이디어가 있긴 한데 잘 정립은 안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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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0 04:58:11 *.39.134.221

니체가 문제를 해결했는지는 모르겠고

나는 해결하지 못한 것이 '왜 사는가?'  맞다.

살아야 한다도 아니고 살 필요가 없다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

살수록 더욱 혼미해지는 삶이라는 이상한 무엇이 나를 잡아끈다.

生은 牛와 一이 합해진 글자라고 한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는 의미라고.

외나무다리를 보고오니 이런 글자를 해설해 놓은 글이 눈에 들어온다.

네발달린 짐승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은 것이 인생이라나? 내가 걸어보니 두발달린 짐승인 나도

정신 바짝차려야 하고 속도를 낼 수도 없고 조심 조심 한발 한발 서로 엇갈리며 걸어가야 하는 다리가 외나무 다리더라고

그 아래가 천길 낭떠러지가 될지 얕은 개울물이 될지는 아무도모르지.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우리도 모두 그렇다. 외롭지.

식물도 외로움을 타나요? 네 물음에 '이 녀석이 또 뭔가 부딪쳤구나. 그래서 이러는 구나'

함께 그 외로움을 키워보는 놀이를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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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 11:02:00 *.137.98.177

내가 들은 생의 정의 중 최고인 것 같습니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바로 아래에는 심연이 존재하는데 죽음을 바라보며 묵묵히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냥 앞만 보고 사는 것 같아요. 영원히 살 것 처럼 살기 쉬운데 사실 생명여탈권의 버튼이 자기 손 안에 있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극도의 불안이 엄습합니다. 그래서 대개는 그저 운명에게 운명을 위임하길 원하죠. 수동적인 삶입니다.

 

삶이 특별한 의미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순간, 모든 것이 리셋되는데, 그 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게 되는가? 삶은 의무도 도덕도 의미도 아닌, 그저 "권할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외나무 다리 위에서라도 춤추며 건널 수 있지 않을까요?^^ 서연 언니는 그럴 것 같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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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1 18:32:11 *.51.145.193

레몬아, 이거 재미있다. 니체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것저것 주워 들은 바로,

니체는 초인이라는 개념을 '구원으로부터의 구원'을 이룬 인간으로 설정하지 않았을까.

'구원'이라는 개소리로 세상을 현혹하는 '종교'와 모든 '권위'에 초극할 수 있는 인간이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요 인류가 지향해야 할 '인간상'이라 여기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 초인은 니힐리즘이 아닌 대항과 투쟁으로 '획득'해야 할 목표이므로 신과의

싸움이 불가피할 것이고 신과 깊이 싸우다 보니 신의 실체(뭔지 모르겠지만)를 알게

된 다음 '신은 죽었다'느니 살았다느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ㅋㅋㅋ

 

난 이런 게 재미있긴 한데 당최 정리도 되지 않고 논리도 없고...그래.^^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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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4 11:48:53 *.137.98.177

종교와 모든 권위에 초극하는 인간이 초인이라는 말, 매우 정확합니다! 읽지도 않고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네요.ㅋㅋㅋㅋ 오빠의 글을 보고 생각이 난건데, 내가 니체가 읽기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가, 나는 이미 종교에 관한 확실한 무신론자인데 - 니체는 책에서 이미 결론난 사항에 대해 너무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어서였어요. 마치 혼자 미친 사람처럼 전장의 시체를 뒤적이는 사람 같았습니다. 기독교를 떠나서도 초인은 의미가 각별한데, 오빠가 말한대로 모든 권위에 대한 초극이죠. 그래서 (주로 기독교가 개입한) 선과 악의 정의를 버리고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의 입법자이자 심판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봅니다.

 

니체가 나타나기 전에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통해 사후 세계에 대한 니힐리즘을 극복하고 있었는데, 니체가 신을 죽여버린 후 "영원회귀사상"으로 필멸하는 인간의 필연적 니힐리즘을 극복하려 했습니다(이렇게 쓰고 있는 이유는, 나도 정리 좀 해보기 위해서 ;;;). 영원회귀사상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영원히 회귀한다"는 것인데, 개개의 것의 필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흐른 강물은 다시 오지 않지만 강물은 영원"한 것에서 필멸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면 내가 과거의 강물과 미래의 강물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과거 역시 초인의 냄비에 우연들을 재료를 넣어서 만든 요리(즉, 요리는 내 의지로 만든 것)로서 결국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도 "내가 그리되기를 바랐던 "나의 의지"라는 것이죠. 이것이 과거의 구원입니다. 미래도 마찬가지로 연결됨.

 

초인이란, (1) 신을 죽이고(즉 기독교적 허무주의 극복을 거부하므로 니힐리즘을 인지함), (2) 영원회귀사상으로 니힐리즘을 초극한 사람인데. 그는 삶의 원리를 깨달은 후, 자유를 쟁취합니다. (즉, 기독교로 대변되는 모든 권위를 이탈).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거죠. 그러면 초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초인은 산 위에 있으면서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범인들에게 영원회귀사상을 깨우쳐주기 위해서는 하산해야 하는데 그러면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보게 됩니다. 초인은 그 사실에 염증을 느끼는 것 같지만, 그 모든 더러움을 수용하면서도 본질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바다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깊은 바다는 산의 정상과 동일합니다. 초인은 깊은 바다와 산 정상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죠.

 

여기까지가 니체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저는 "정말 그것으로 모든 대답이 완료될 수 있는가?"를 되묻는거죠. 영원회귀사상이면, "내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냔 말이죠. 내가 허무주의를 생각할 때,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이 나의 허무주의를 극복하는가?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 칼럼을 쓰기 전에,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낮 12시까지 올리기로 한 글을 올리지 못한 상태였고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으며 몸이 피곤하였습니다. 퇴근한기 위해 외투를 챙겨입고 횡단보도를 지나오는데 그 순간 갑자기 "세상을 증오한다"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곤 별로 살고 싶지 않더군요. 찰나의 감성이긴 했지만...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언제 허무를 생각하는가? 우리는 행복할 때 삶의 이유 따위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질문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셉 캠벨의 말이 계속 생각났어요. "삶은 의미가 없다. 삶의 경험 자체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때" 의무도 있지만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있는데, 살아간다는 건 의미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그저 "하고 싶어서" 하는 부류의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살고 싶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죽는 거죠. 이것은 "살아야 한다는 의무"라는 권위에 대한 탈권위이므로, 이 자체도 초인의 깨우침이 될 수 있습니다. 앙드레 지드가 말했죠. "나를 읽은 후, 나를 떠나라." 우리는 초인의 "영원회귀사상"을 들었지만 영원회귀사상의 권위를 파괴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는 내 삶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즉, 우리가 "삶으로 소풍"을 오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한 일인데 이 소풍을 즐기다 갈건지 아니면 그냥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는 순전히 취향의 문제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재미가 없으므로 가능하면 소풍에 끝까지 남아서 재밌게 놀다가라고 "권할 수"는 있어도 "의무를 부여할 수"는 없습니다.

 

즉 살고 "싶으면" 살고 죽고 "싶으면" 죽는 것이므로, 죽고 싶거나 죽이고 싶게(세상의 파괴) 만드는 "증오"를 극복해야 생을 지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살 의미가 없어, 살 가치가 없어."라고 말하는 누군가를 보았을 때, 그 사람은 치열한 철학적 사유 끝에 해답을 찾지 못한 철학자라기보다, 우울증에 빠진 환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거죠. 살아야 하는 이유란, "살면 재미있을 만한 무언가"에 대한 기대치를 고양시키는 것이지, "의무"나 "지성의 해답" 따위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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