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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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만나서 난 완전히 망했어요." 부부싸움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 한번 잘 못 만나면 망하기는 매 한가지다. 은행에서 만난 고객이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자동화기기에서 입금을 하고 은행 객장 TV앞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앉으면서 내뱉은 첫마디였다. 칠십대 후반의 남자이다. 전 직장에서 나와의 인연이 있던 고객이다. 회사를 옮기면서 처음에는 도곡동에 자리를 잡았다. 삼 개월 남짓 근무하다가 지점상황이 여의치 않아 압구정동으로 이동을 하였고 이 동네는 5-6년을 근무했던 곳이라 아는 사람이 많다. 사무실 맞은편 아파트에 사는 고객이라 가끔 길에서 마주치곤 한다. 걸음이 빠른 분이었는데 오늘도 은행 문을 막 들어 설려고 하는데 앞서 들어서는 이가 있었다. 눈에 익은 모습이다. 나는 어르신의 팔을 꼭 잡았다. 누군가 하고 돌아보며 “왠 일이냐?”며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자동화기기에서 볼일을 보았고 어르신은 은행 안으로 들어가셨다. 아마 PB센터에서 일을 보겠지 했다. 일을 마치고 객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쯤에 어르신이 계신가 찾고 있는데 그분도 내가 그냥 가 버리지나 않았나 하고 생각을 하셨던지 고개를 돌려 출입문을 보고 계셨다. 눈짓으로 장소를 정하고 나는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일을 마치고 내 옆자리에 앉으며 한 말이다. 나를 만나서 완전히 망했다고 하시는 어르신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조금 숙이며 동의를 표했다. 나를 보는 순간 이런 마음이 들었다고 생각이 된다. 원인을 따라 가다 보면 그 끝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업무 처리를 위해
우리에겐 아픈 상처가 있다. 마무리가 되어 새살이 돋고 딱정이가 떨어진 상처가 아니다. 아직도 상처는 고름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중이다. 증권회사의 지점장. 그 자리를 맡고 있을 때 일원으로 뽑은 직원이 있다.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던 직원이다. 입사를 위한 프로필을 보면서 의아해 할 만한 이력. 행시출신의 지방직 공무원. 돈을 벌기 위해서 주식공부를 시작한 사람. 돈을 벌면 제3세계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맺어진 인연. 내가 자리를 마련해서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직원이다. 직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요구한 것은 단 한가지였다. 신규고객창출을 잘 하라는 주문이 아니었다. 현존하는 고객의 자산을 잘 관리할 직원이 필요하다. 고객자산을 가지고 장난질하면 절대 안 된다. 안정적인 관리가 제일 중요하다. 나머지 영업은 내가 다 해 줄 거다.
자신은 저평가된 회사를 찾아서 매수하고 적정한 가격이 오면 매도하는 방법의 매매를 하는 것이 자신의 투자방법이라고 했다. 일명 가치주 투자이다. 피터린치, 워렌버핏,
함께 일을 시작한 직원은 나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켜주었다. 물론 고객 계좌의 수익율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고 있었다. 고객이 고객을 부르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계약직으로 시작하여 정규직원이 되고 많은 급여가 직원의 몫으로 돌아갔다. 증권회사는 자신의 영업실적에 따른 인센티브제도가 잘 구비된 곳이다. 언제부턴가 직원의 넥타이가 명품으로 바뀌고 벨트와 지갑이 바뀌고 있었다.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고객이 많아졌다는 증거이다. 몇 번의 높은 수익은 투자자들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신뢰를 낳는다. 투자자산이 눈덩이처럼 늘어나기 시작한다. 어디에서 돈을 구해오는지 계좌의 자산이 자꾸만 늘어나고 있었다. 그 즈음에 알게 된 회사이다. 기업탐방을 다녀온 직원의 얼굴에는 약간의 홍기가 느껴졌다. 좋은 투자처를 알게 된 기쁨이다. 이리저리 자료를 찾아보던 직원이 연말임에도 불구하고 회사방문을 하겠노라고 했다. 12월31일 모두가 쉬고 싶어하는 연휴기간이다. 해나 넘기고 방문을 하지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니란다. 남동공단에 위치한 공장에 한번 가보면 회사 상황을 잘 알 수 있으니 다녀와보겠노라고 했다. 연말과 연시를 이용하여 기업탐방을 하겠노라는 직원을 보며 한 켠으로는 그렇게까지 할 일이 뭐에 있느냐고 했지만 흐뭇한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뽑아놨지 하는 자부심도 함께했다.
누가 보아도 좋은 회사였다. 시대의 조류에도 맞는 업종이었고 무엇보다 회사의 기술력이 좋다는 증거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내 노라 하는 은행, 공직자들이 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좋은 회사. 고객들의 돈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시작한 투자금은 자꾸만 규모를 늘어만 갔다. 일 이년 정도 투자를 하면 몇 배의 수익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를 안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돈들. 다른 투자상품을 권유할 때는 잘 하지 않던 고객도 엔젤투자에는 쉽게 돈을 투자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대심리를 읽게 된다. 미지의 세계,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세계이지만 잘 만 되면 대박이 터질 수 있다는 회사에 자신의 돈을 걸기 시작한다. 그것도 인생역전을 꿈꾸며 로또를 사는 사람들처럼. 주식이라고 하는 물건은 로또 보다는 제법 그럴싸해 보여서 그런가? 규모가 만만치 않다. 없다던 돈은 어디서 그렇게 나오는지...
일년 남짓 모아진 투자금은 수백의 고객에 수백억의 규모가 되어버렸다. 투자가 진행되던 중간에 나는 이직을 하게 되었다. 나로 인하여 시작한 인연이었으나 돈을 잘 벌어주는 직원이 그곳에 있었으니 나를 따라 거래처를 옮기는 고객은 거의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투자의 주역은 내가 아니고 내가 자리를 만들어 준 그 직원이고 투자자들은 그와 함께 있어야 자신의 구좌에 투자금액이 불어날 것이니까.
이직 후 일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투자되었던 회사의 주식이 상장을 했다.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회사의 주가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주식투자는 늘 자신의 기대와 부합하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시장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의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회사의 가치와 시장의 많은 참여자가 평가하는 가치는 서로 다를 수 있다. 자신만 예쁘다고 하는 것은 연애를 할 때는 상관없지만 투자를 할 때는 남들도 예쁘다 해주어야 가격이 올라가는 법이다. 아무리 좋은 기업도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가격이 오르기 않는 것이 주식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다.
상장한지 6개월이 지나고 감사보고서가 나오는 3월에 동사는 <의견거절>이라는 상장폐지에 해당하는 의견이 나왔다. 대박을 꿈꾸며 주식을 보유하고 있던 투자자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결과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끔 주가조작에 얽힌 이야기들이 신문지상에 나온다. 음모론도 함께 존재한다. 이런 스토리의 영화도 나오곤 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다. 이제 상장폐지된 회사는 청산절차에 들어가있다. 대박의 꿈은 신기루가 되었다.
나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이 돈을 잃었다. 소수는 적절하게 현금화하는 행운도 잡았지만 대부분은 신기루처럼 돈이 사라져버렸다. 감당할 만한 수준의 금액도 있고 삶의 방향을 바꾸어버린 경우도 허다하다. 투자는 투자자의 책임이다라고 말을 하기에는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 오늘의 원망도 그때의 인연이 낳은 결과이다. 의도가 순수했다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나는 무죄다. 감정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당연히 유죄다. 그것도 형량이 아주 무거운 죄다.
많은 사람이 그 직원을 원망하고 나를 원망한다. 과정은 사라지고 결과만이 남았다. 많은 돈을 벌었던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망한 기억만 남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었던 돈에 덧붙여서 투자금액을 늘려놓았으니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욕심을 조절한 사람들이 많지 않다. 몇 번의 성공은 지속적으로 성공하리란 기대를 낳고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규모의 투자를 하고 한꺼번에 완전히 망해버린 꼴이 되었다.
어르신이 말씀 하시는 완전히 망했다는 의미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는 내가 보는 시선이고 본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로 시작한 인연이 자신의 많은 돈을 잃었으니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하다. 함께 은행 문을 나오며 나는 사무실로 어르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다음에도 우리는 또 만날 것이다. 주유소 앞에서 건널목에서 그리고 은행에서 어쩌면 나의 사무실에서 볼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시장은 어때요?" "일은 잘되나?" "당신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어떤 대화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 이 모든 대화의 중심에 내가 서있고 고객이 있다. 돈은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껌딱지와 같은 존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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