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센토
- 조회 수 1958
- 댓글 수 5
- 추천 수 0
꽃분홍 진달래와 흐드러지게 핀 벗꽃이 한창이던 봄날
사부님은 한 줌 뼈로 남으셨습니다.
사부님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아침,
마음 속 풍경 하나를 떠올려봅니다.
6년 전, 3기 연구원은 사부님과 몽골 여행을 떠났습니다.
말을 처음 타본 저희들은 몽골 가이드의 고삐에 이끌려 다녔습니다.
그 때 자유롭게 말을 타는 사부님의 뒷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며칠이 지나고 제법 말 등과 안장에 익숙해진 저와 종윤이형은 사부님과 함께 말을 달렸습니다.
멋진 오후였습니다. 세상엔 뜨거운 햇살과 푸른 초원과 말과 우리들 뿐이었습니다.
츄우, 츄우, 그렇게 바람을 가르며 숙소로 돌아와서 맥주를 한 캔 쭉 들이켰습니다.
냉장고가 없어 미지근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맛있었습니다.
아마 그 때 저는 얼핏 자유의 맛이란 걸 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의 몽골 풍경입니다.
강이 흐르는 숲에 자리를 잡고 몇 명은 말을 타러 가고, 남은 이들은 물놀이를 하며 강을 즐겼습니다.
저는 숲에 남았으나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니 말이 타고 싶어졌습니다.
혼자 말을 끌고 숲을 벗어나 초원을 달렸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말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보니 제 뒤에 떠나온 숲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방이 텅 빈 지평선입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일단 말머리를 돌립니다.
한참을 달려도 사방이 똑같은 풍경이라 그냥 말이 가는 대로 놓아둡니다.
그러자 말이 제 길을 찾아갑니다. 다행히 익숙해보이는 숲 길이 눈 앞에 드러납니다.
황망히 사부님을 떠나보내고,
저는 아직도 이 두 개의 풍경 사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쉽게 다다가지 못하는 제게 사부님을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사부님께서 인간 관계는 '한덩이 밥과 한 그릇 국'의 문제라고 말씀하셨지만
여전히 제겐 그 사소한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기만 합니다.
아마도 사부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기에 여태 게으름을 피웠나봅니다.
막막한 자유의 무서움을 알기에 당신이 나아가길 기다리며 길 위를 서성였나봅니다.
이제 제 길을 열겠습니다.
시 같은 삶으로 가는 길은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꾸준히 가겠습니다.
따뜻한 밥 한덩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당신처럼,
누군가에게 저 막막한 자유의 풍경 속으로 달려나갈 수 있는 용기를 전해줄 수 있다면
삶은 더할나위 없는 기쁨이겠죠.
이 봄, 자신의 삶으로 우리를 가르치시던 사부님께서
이제 자신의 죽음으로 좋은 삶을 가르쳐주십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사부님 생전에 한번도 이 말을 못 전했네요.
사부님, 사랑합니다.
2014년 4월 17일
김도윤 드림
추신.
사부님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과 '사부님의 마지막 수업' 영상을 나눕니다.
2013년 4월 16일 크리에이티브 살롱 9에서 진행되었던 추도식에서 사용한 영상입니다.
> 구본형의 마지막 수업
- 사진: 구본형 변화 연구소 연구원과 꿈벗 (신재동이 모으고, 강미영이 선택)
- 노래 : 최우성
- 사운드 편집 : 김인건
- 촬영/편집 : 김도윤
- 제작 : 크리에이티브 살롱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