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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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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3일 13시 14분 등록
한명석님께서 보내신 내용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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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1학년 때, 아들의 목표는 열 다섯 가지였습니다. 그 중의 첫 번째는 ‘여자친구 사귀기’였지요. 2학년이 되어 그 목표는 여덟 가지로 압축되었지만, 여전히 첫 번째는 ‘여자친구 사귀기’였습니다. 그리고 녀석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진동아리의 멤버 한 명이 흑장미가 되어주었거든요.

아들과 여자친구는 신세대답게 알콩달콩 잘 지냈습니다. 매일 점심을 같이 먹고, 얼짱 각도로 찍은 사진을 판넬로 만들어 선물하기도 하면서. 그 애들의 놀이 중에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여자친구가 가수 이승환 마니아인 것을 배려한 놀이인데요, 아들이 여자친구에게서 이승환 CD를 한 장씩 빌려서 듣고, 그것에 대한 소감이나 관련 글을 써서 ‘이승환레터’를 만들어 되돌려 준다는 겁니다. 그것도 손으로 써서. 그 얘기를 듣고 감탄한 내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이 좋은거다. 니가 언제 또 그 짓을 하겠니.

아들이 군대에 간 지 67일이 되었습니다. 혼자 남은 여자친구가 종종 메일을 보내옵니다. 우울하다고, 중간고사 끝나고 읽을 책 좀 추천해달라고, 기분이 훠얼 나아졌다고, 재잘재잘대는 내용입니다. 그러더니 엊그제 이 적의 노래 ‘다행이다’를 보내왔습니다. 아름다운 노랫말입니다.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젊은 날의 나는 왜 그렇게 무미건조했을까, 생각하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연애-결혼-중산층의 삶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거부하느라, 말랑말랑한 연애감정 자체를 거부했었지요. 어머니의 삶으로 대변되는 여자의 삶에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날 일이 없었지요.

그러고도 오랫동안, 낭만적 사랑을 살짝 얕보는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이 예기치않은 매혹적인 상태에 메스를 갖다대는 식이었지요. 사랑은 뇌에 특수한 물질이 분비되는 화학반응이라서, 길어야 3년에 불과하대, 그걸 평생에 걸쳐 늘여놓은 것이 결혼제도이지. 사랑에 목매는 사람들을 의존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독립의식이 사랑과 배치된다고 생각했던걸까요.

“나 없는 곳에서 아프지 말아요.”
주인없는 아들의 미니홈피에 여자친구가 남긴 말을 보며, 나는 내 자세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은 그 순간 만으로 충분한 것이구나. 상처입을 것이 두려워 미리 방어벽을 칠 필요가 없는거였구나. 어린 연인들의 사랑에 관심을 갖기보다, 군 복무 중에 아들이 처하게 될지도 모를 상황에 급급했던 내가 민망했습니다.

나와는 달리 아들이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있지 않다는게, 지친 하루 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때문이라는것”을 일찍 깨닫게 되어 다행입니다.

오래도록 내게는 ‘他者’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경미한 자폐증에 가까운 상태로 내 안에 갇혀 살았는데, 변화경영연구소와의 만남은 나를 깨고 나오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가 원해온 삶의 방식이 여기에 있습니다. 애인보다 끔찍한 스승과 知己에 대한 꿈이 황홀합니다. 인격의 중심이 만나는 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나의 삶 전체가 하나의 교류가 될터인데. 죽음이 앗아가기 전에 이 몸을 사람에게 주어라. 내가 소통입니다. 늦게나마 내가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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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해 23세 여성입니다. 이 메일이 저를 뜨끔하게 하였습니다.

저 또한 글쓴이께서 젊은 날 가졌던 생각처럼 아무리 낭만적인 사랑이라해도 유통기한이 있다고 생각하며 이를 얕보는 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 진취적이고, 확고한 꿈과 비전이 있고, 깨어 있는 어르신들로부터 다른 젊은이들에 비해 생각이 깊다는 말을 듣고 있는 저이지만 위의 메일을 받고 갑자기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장차 결혼할 생각도 없고 독립적인 길만을 고집하는 저입니다. 저를 사랑한다는 사람이 몇몇 있었지만 마음을 닫아버리고선 자물쇠를 채워놓은 것 마냥 다가오기 힘들게 만들어버리곤 하는 저입니다.

연애-결혼-중산층의 삶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거부했다던 글쓴이의 말처럼, 어머니의 삶으로 대변되는 여자의 삶에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었다는 글쓴이의 말처럼, 저는 그 말을 재연이라도 하는 듯 그러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중년의 나이로 저보다 더 깊은 성찰이 가능할 것도 같은 현재의 글쓴이는, 내 젊은 날이 무미건조했다고 결론 내리시며 후회하는 어조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그 순간, 함께 풍요롭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시며 진작에 이것을 알았다면 젊은 날 남들과 같이 중산층의 어머니가 되기 위한 평범한 코스를 밟으며 사랑다운 사랑도 한번 해보는 게 더 좋았을텐데... 하는 어투로 말예요.

저는 현재 글쓴이의 자식 또래의 나이지만, 제가 글쓴이의 나이가 되면 똑같이 후회를 하게 될까 두렵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습니다.

기독교적 정신을 존중하는 저는 분명 사람을 사랑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며 친구를 감쌀줄 알고 타인과의 교류를 즐겨 봉사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성간의 사랑에서만큼은 최대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어쩌면 글쓴이의 말처럼 내 삶을 바꿀 수 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비전이 이성간의 사랑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다면 그것이 이상적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답은 원치 않아요.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듯 하면서도 실질적으로 가장 답답한 결론인 듯도 하거든요.

지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에 대해 뒤늦게 후회하는 듯한 내용의 이 메일 한통 때문에 제 삶에 변화를 주는 것이 옳을런지, 아니면 아 이런 생각도 있을 수 있구나 하고 당장에 이 메일을 지우고선 '나는 가던 길을 굳건히 가겠다'하며 마음을 정리해야 하는 것인지, 잠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조언 부탁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제 의견은... 삶의 정의는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IP *.23.11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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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7.05.03 10:03:50 *.155.113.60
안녕하세요, 경미님. 오늘자 메일 제목이 꼭 스팸메일 같다고 딸애가 놀렸는데, 유심히 읽어주어서 고마워요. 정말 여러 모로 저와 비슷한 면이 많은 분 같군요. 무심히 상담란을 클릭했다가 깜짝 놀랐어요. ^^


어머니의 삶으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여자의 삶을 거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수퍼우먼을 강요하는 맞벌이 주부이든, 사회로부터 유리되어 가정으로 세계가 좁혀지는 전업주부이든, 현대여성이 수용하기에는 불합리한 점이 많으니까요.


독립적인 직업관이나, 자기관리 면에서 똑소리 나는 분이라고 느껴지네요. 또 사랑을 제외한 여타 사회생활에서는 적극적으로 잘 해 나가고 계시다구요. 단 사랑을 거부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문제의식이 없지는 않으셨네요. 제 메일이 그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 걸 보면요.


일단 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나름대로 편견에 찬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외로움이 싫어서, 혹은 사회가 규정해놓은 연령개념대로 박자 맞추려고, ‘자기’를 없애고 맹목적으로 종속적으로 사랑에 매달리는 행태가 싫은 거였지요. 사람과 사람의 중심이 만나는, 그 부주의한 황홀의 상태를 거부할 일은 없다고 봐요. ^^


중산층의 삶을 거부한 제 경우에는 농사꾼과의 결혼을 택하는 것으로 일단락이 났었지요. 작가 김형경의 경우에는, 사랑의 완성이 불가능한 아버지 연배의 사람만을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었다네요. 20년의 결혼생활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제 결혼이 측은지심과 관계치의 융합이 가져온 ‘거대한 오류’였구나 하는 생각이구요. 김형경은 자신의 반생이 길고긴 우울증이었다고 합니다. -김형경의 ‘천 개의 공감’ 꼭 읽어보세요.


경미님이 너무 늦게 깨닫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얘기를 했습니다. 사랑과 관계에 대한 생각은 오직 사랑과 관계 안에서만 수정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아무쪼록 독립이라는 이름아래, 경미씨의 젊음을 냉동고 안에 쳐박아두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랑에 대한 많은 오해 속에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가령 ‘첫 눈에 반하는 사랑’은 신경증끼리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아니면 당사자들이 얼마나 외로웠는지의 반증이기도 하구요. 그런 만남은 젊은 시절에 한 번 해봤으면 충분하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선택하는 유형에 대해서도 연구해보면 참 재미있을 것같아요. 재미있는 것은, 나의 기질이 상대방을 부른다고 하네요. 극단적으로 말하면, 의존적인 사람은 강압적인 사람을 만나게 되고, 가학적인 사람은 피학적인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거지요.


제가 경미님보다 훨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여전히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완전한 해답을 드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단지 기질이 비슷한 사람으로서 감히 말한다면, 사랑을 거부한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알렉시스 토크빌이 “미국 민주주의”에서 ‘조상을 잊고 동료를 무시함으로써 개인을 영원히 홀로 남겨두어 결국 자기 마음의 고독 속에 가둬버리게 될 것이며... 독자적인 삶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죽음보다 더 나쁜 삶이며...’ 라고 했다는 부분을 읽으며 망연자실하는 때가 옵니다. 저역시 누구를 무시한 적은 없었지요. 단 무심했습니다 ‘독자적이라는 미명아래 죽음보다 더 나쁜 삶’이라는 귀절이 뒷덜미를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살아온 날 중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던가 돌이켜보면, 놀랍게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고 있던 때였습니다. 상대방의 언어와 몸짓이 내 안으로 고스란히 들어와, 온 우주가 그 사람 하나로 압축 혹은 확장되는 경험,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그 감정을 거부할 일은 없다고 봅니다.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또 경미님이 사랑을 거부하는 데에는 독립적인 기질 이외에도 무언가 심층적인 요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요인을 곰곰이 분석해보시되, 사랑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일단 마음 문부터 열어놓기를 권합니다. 독립성과 사랑은 제로섬 게임이 아닌 것같아요. 가벼운 일치감으로부터, ‘있어주어서 고마운’ 사람을 만나기까지, 두루두루 관계맺기 훈련을 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사랑을 제대로만 해내면 지성, 감성, 정신의 영역에서 ‘대박’ 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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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동
2007.05.03 11:02:06 *.219.66.62
저의 과거도 한명석님의 얘기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성간의 진정한 사랑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그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라고. 그러니 그것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는 아니라고..
저도 다행스럽게 지금은 조금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직 진정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순간 그에 전념하려 애씁니다.
늘상 보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르게 보일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랑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감히 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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