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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잘했어요.”
강습 첫날 강사가 나에게 건넨 말이다. 잘했다? 우와, 이게 얼마 만에 들어보는 멘트야. 잘했다니? 웃긴다. 운동신경이라면 젬병인 나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종목이 있었다니.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첫 경험의 기억들이 있다. 첫 만남, 첫사랑, 첫 출근, 첫 외박, 짜릿한 첫 키스의 경험 등. 눈을 감고 잠시 유년시절로 돌아가 가장 기억나는 장면을 끄집어 내어보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 심리하자 카를 융은 자신의 첫 기억을 두세 살적으로 시작한다 -. 각인효과(Imprinting)라는 것이 있다. 비교행동 학자로써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콘라드 로렌츠(Konrad Lorenz)가 주장한 것인데, 예를 들면 알에서 부화된 새끼 오리는 태어나자마자 마주치는 대상을 자신의 어미로 인식을 하게 되어 따라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닭이든 망아지든 초기단계에 인식된 대상이 계속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인데 이는 사람에게도 확장이 된다. 그렇기에 이것은 때론 당사자의 삶에 고착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싫든 좋든 한사람의 원형(原形)에 자리 잡는 것이다. 트라우마로써 혹은 긍정적 강화요인으로써.
초등학교 2학년 시절.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숙제를 내셨다. 다음과 같은 엄포와 함께.
“내일까지 숙제 안 해오면 알지.”
이럴 때 저마다의 성향에 의한 선택은 몇 가지로 분산이 된다.
① 설마 때리기야 하겠어. 숙제는 무슨 숙제. 에이, 놀러나 가자.
② 어떡하지. 할까 말까. 어떡하지 (고민하다 날이 샌다).
③ 숙제. 어떡하든 완수해야할 당면과제.
타고난 범생이인 나는 선생님이 내주시는 숙제라면 무조건 목숨 걸고 임무완수를 해야 되는 역사적 사명인줄 알았다. 국민교육헌장 첫 구절만 떠올려 보더라도 이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학생의 소명은 선생님의 지시를 엄중히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나. 나는 그것에 충실하기 위해 누나를 졸랐다.
“누나야,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는데 내일까지 안 해가지고 오면 죽인다 안 카나. 우짜노. 누나가 그림만 그려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께.”
그랬다. 숙제 내용은 흰 도화지에 그림 하나를 그려서 크레파스나 물감의 채색 대신, 색종이를 잘게 모자이크처럼 색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본 밑바탕 그림이 필요한 것인데 중요한 것은 그림은 젬병이라 어쩔 수 없이 다른 이에게 협조를 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나의 협박으로 그려 받은 그림에 작업을 시작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색색의 색종이를 대고 볼펜이나 연필 심지로 찢어서 붙여야 되는데 시간이 지나자 허리, 목, 어깨, 팔다리가 중년도 아닌데 저린 신경통이 찾아오고 눈은 충혈이 된다. 얼추 괘종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럴 때 사람들에게는 다시금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
① 에이,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서 하지.
② 한만큼 이익이다. 설마 무슨 일이 나겠어.
③ 졸린 눈을 비벼가며 기를 쓰고 해나간다.
그것만이 살길인 냥 어린 소년은 저린 팔을 달래가며 그날 밤을 하얗게 새었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작품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예상치 않았던 사단이 일어났다. 등교하여서보니 교실 뒤쪽 게시판에 거짓말 조금 보태어서 대문짝만하게 나의 작품이 떡하니 전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참 잘했어요! 라는 파란색 도장이 정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채 아래 하단에 선명히 쾅하고 찍혀져 있었다. Oh My God. 저절로 생판 모르는 영어가 틔어 나왔다. 덕분에 온몸에 전율이 찾아왔고 심장은 벌렁벌렁 몸은 전기감전을 받은 듯 부르르 떨린다. 그 충격, 그 느낌. 정말이지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부면 공부 체육이면 체육 무엇 하나 잘하는 것 없었던 나였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때 그분은 나에게 헬렌 켈러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끌어준 설리번 선생님의 역할로 자리 잡을 수 있었고, 참 잘했어요 파란색 도장은 지금도 나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의 상징으로 각인이 되어있다.
사마천 <사기열전> 맹상군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맹상군은 집의 재산을 기울여서 정성껏 대우하자 천하의 인물이 모여들어 빈객이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는 신분이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한결 같이 자신과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 이런 그를 진나라 소왕은 계략을 짜내 죽이려고 했다. 이에 맹상군은 사람을 시켜 소왕이 아끼는 첩에게 가서 풀어 주기를 청하도록 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여우 겨드랑이의 흰 털로 만든 가죽옷을 갖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나라에 와서 소왕에게 이미 바쳤고 또 다른 옷은 없었다. 그는 고민에 싸여 빈객들에게 대책을 물었지만 시원하게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그중 개 흉내를 내어 좀도둑질을 하던 자가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여우 가죽옷을 구해 올 수 있습니다.”
그는 개 흉내를 내어 진나라 궁궐의 창고 속으로 들어가 전날 소왕에게 바쳤던 여우 가죽옷을 훔쳐 돌아왔다.
맹상군은 말을 타고 달아나 함곡관까지 왔지만 국경의 법으로는 첫닭이 울어야 객들을 내보내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또 어쩔 줄을 몰라 했었는데 빈객 가운데 맨 끝자락에 앉은 자가 닭울음소리를 흉내 내자 근처의 닭들이 다 울어 통행증을 보이고 빠져나왔다.
처음 맹상군이 좀도둑과 닭울음소리를 잘 내는 사람을 빈객으로 삼았을 때, 다른 빈객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그런데 맹상군이 진나라에게서 곤경에 처했을 때 이 두 사람이 그를 구하였다.‘
암벽을 타고 오를 때 기본적인 신체조건상 아무래도 배가 불룩하게 나온 중년의 아저씨 외양 보다는 몸이 가벼운 사람이 유리한 면이 있다. 세상이란 참 웃긴다. 말랐다는 것이 어떤 상황에선 이렇게 강점으로 작용할 수가 있다니. 칭찬 덕분인지 나는 가볍게 발을 올린다. 이럴 때는 발레리나가 따로 없다. 아! 이런 장면을 마늘님이 봤어야 하는데.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어찌 보면 세상은 한편의 희극이다. 개 흉내를 내며 좀도둑질을 이어가던 이에게 닭울음소리를 내며 한량으로 살아가던 이에게 자신의 장점을 발휘할 그런 기회가 찾아올 줄 누가 알았을까. 손가락질과 멸시를 당하던 그들에게 그런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일 장이 열릴 줄 꿈에나 생각했을까. 그래서 사람의 앞일은 모른다고 이야기 하는가.
사람에게는 생긴 모습이 있다. 이것을 유식한 사람들은 기질이라고 명명을 한다. 그 기질은 각인효과처럼 평생을 따라 다닌다. 태양, 태음, 소양, 소음인으로 구분되는 사상체질처럼 이 기질은 웬만하면 바뀌질 않는다. 이것은 진리이다. 그렇기에 개인 그릇의 크기와 재질은 타고남의 영향이 많은 작용을 한다. 그러다 어떤 환경적 요소 등에 의해 변화 될 수 있는 어느 시점이 찾아오는데 이에는 무언가의 인연이 필요하다. 이는 친구 혹은 스승이 될 수도 있고 무형의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개 흉내와 닭울음소리를 내며 연명하던 그들에게, 콤플렉스로써 자신감 없어하던 어린 소년에게 맹상군과 선생님이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금 누군가의 인연이 오늘 문을 두드린다.
“참 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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