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젤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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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서재에서 발견한 나의 길
2012년 11월 30일, 그 날 문득 스승이 보고 싶었다. 문자를 보냈다.
“지나가는 길에 얼굴이 보고 싶어서 연락 드렸습니다. 잠깐 들러도 괜찮으신지요?”
“그래 오너라”
나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초인종을 눌렀다. 사모님 목소리였다.
“병원에 잠깐 가셨는데, 올라와서 기다리세요”
사모님과 인사를 나누고 서재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커다란 창 너머로 북한산 자락이 보이고, 그 아래로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차들의 모습이 보였다. 스승은 이 곳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눈부신 하루를 맞이 했으리라. 서재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상상하는 모든 것을 현실로 연결시킨 곳. 책 속의 경험을 통해 마음 속의 무의식을 찾아 여행한 곳. 어제와 결별하며 특별한 오늘을 부여 받은 곳. 그로 인해 새롭게 태어나게 도와주는 공간이라고 스승은 말했다. 가끔은 책을 보다가 졸면서 꿈 속을 여행하며 미래의 꿈을 찾아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스승을 기다리면서 서재를 둘러싼 책을 보았다. 그 동안 읽었던 책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군데군데 새 책도 보였지만 오래된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책상 위에는 조금 전까지 읽고 있었던 『사기열전』이 펼쳐져 있었다. 얼마 전 스승이 올렸던 칼럼 ‘이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칼럼에서 내 인생에 멋진 책 중에 하나라며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소개하였다.
나는 수 십 년간 이 책을 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때때로 나는 아무 곳이나 펼쳐 읽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 책을 덮는다. 그렇게 내 삶은 이 책과 함께 했다. 왜 그랬을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장 비천한 자에서 가장 고귀한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이 책을 손으로 더듬어 책 속의 영혼들이 내 손끝에서 되살아나는 기이한 황홀을 느껴본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스승의 책 읽는 모습을 떠올렸다. 이른 새벽, 책을 읽으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았을까? 사람과 세상을 어떻게 당신의 생각으로 연결시키며 글을 썼을까? 기다리며 잠시 동안 나는 시간여행을 떠났다.
그는 시간의 나그네다. 옛 글 행간 사이를 거닐다가 문득 발견한 자신의 모습. 밑줄을 그어본다. 행간 사이를 지나가는 밑줄은 누군가가 걸어온 길. 그 길을 따라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굽어진 길을 걸으며 만난 주인공. 그에게 물음을 던지고 이야기를 듣는다. 화자가 주인공인지 자신인지 알 수 없다. 단지 그는 이야기를 마음 한 켠에 적어둔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는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그는 세상의 길과 사람의 마음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아름다운 시(詩)를 남겼다.
책을 읽으면서 스승이 남긴 밑줄에서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 밑줄은 직선이 아닌 약간은 굽어지고 울퉁불퉁했다. 문득 그리스 신화에 미궁을 빠져 나오게 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삶이라는 미로를 탐험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되는 운명의 실. 스승은 매일 아침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풀어내며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실 위에 글귀들은 환한 불빛이 되어 당신의 길을 아름답게 밝혀주었으리라. 나도 그것을 믿고 책을 읽으면서 나 만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이 실이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모르지만, 나의 길에는 스승의 등불이 환하게 비추고있어 가슴이 뛴다.
내 삶을 바꾼 만남
스승을 기다리며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보았다. 평생 함께 하나의 운명으로 연결되어 살아갈 팔팔이들, 내 영혼의 큰 울림을 주었던 책들이 떠올랐다. 그 책 속에서 수 많은 깨달음이 있었고, 천의 얼굴을 가진 다양한 나의 모습들을 찾아갔다. 새로운 나를 마주할 때면 환희에 차기도 하고, 때로는 울고 웃기도 했다. 스승과 8개월 동안 수업을 하고 여행을 함께 했다. 하지만, 단 둘이서 만남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승은 나의 똥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 누구보다도 말이다. 나 스스로도 이전에는 똥쟁이의 삶을 부끄러워했지만 당신과 함께 하면서 달라졌다. 아마도 스승은 똥쟁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 자신에게 조금씩 눈을 떠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 날의 대화는 똥쟁이가 당신의 제자가 되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스승은 목이 아픈 가운데에서도 환하게 웃으면서 나의 눈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냄새 나는 똥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야기들이 내 안에서 발효되어 좋은 거름이 되었다고, 그리하여 지금은 거름 속에 뿌리 내린 나무가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승은 ‘넌 사람들에게 깊은 향기를 나눌 수 있는 꽃을 피울 거야, 다 잘 될 거야’라고 화답했다.
한 시간 정도의 대화에서 나는 스승의 영혼을 느낄 수 있었다. 아픈 목,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맑은 소리. 그 선한 영향력이 나의 몸 세포 하나 하나를 감동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스승의 눈을 보면서 감사의 기도를 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기회 주심에 감사하고
나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심에 감사하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누구든 평생 잊을 수 없는 만남을 가진다.
만남은 인생을 바꾸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 만남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일 수가 없다.
– 정민의 『삶을 바꾼 만남,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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