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한정화
  • 조회 수 2357
  • 댓글 수 6
  • 추천 수 0
2013년 4월 30일 21시 01분 등록
지난번에 여수 갔을 때의 일이었어. 갑작스럽게 일을 하게 된 건 말이야.

함민복 시인이 강연하러 여수 트립티에 오신다는 말에 나는 순간 혹했지. 그런 내 낌새를 보고는 여수에 언니는 나를 부르더라구. 강연도 듣고, 다음날 있는 금오도 비렁길 행사에 같이 하자고 말이야. 서울에서 여수까지 가기엔 유혹의 요소가 좀 적기도 했지. 그런데 그냥 가기로 했어. 

함민복 시인의 강연은 잘 들었지. 그리고 같이 간 일행이 해야할 일도 같이 거들었지. 그날은 트립티의 커피만드는 교육이 있었어. 나도 참여할 핑계들 대가며 함께했지. 교육을 마칠 무렵 다음날 행사 준비를 어떻게 했는가 묻을 때에 플랑카드가 없다는 건 알았어. 그런데, 이미 8시가 넘었고, 밤에 플랑카드를 제작해 달라고 주문할 수는 없었지. 우리는 다음날 8시 배를 타야했거든. 그래서 방법을 모색한 것이 천에 직접 그려넣자였어. 재료가 잘 준비된 것이 아니어서 나는 좀 머리가 아팠어. 천에 눈에 잘 뜨게 예쁘게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달라고 하는데, 딱 보니 할 사람이 나 밖에 없더라구. 그림 그린다는 사람이 못한다 할 수도 없고 난감했지.

저녁식사는 잘 먹었지. 난 좀 일찍 끝났으면 했었어. 트립티 커피가 ‘금오도 비렁길 축제’에 함께한다는 플랑카드를 만들어야했으니까. 저녁식사에 술마시는 자리가 편치 않았어. 여관에 들어오니 11시가 넘었지. 아 골치 아파. 난 그날 핑계거리가 많았어. 일찍부터 일어나서 몇 시간을 차를 타고 왔고, 3시간 정도되는 강연을 하나 들었고, 또 커피 만드는 교육까지 들었고, 그리고 이미 내가 자야할 시간이 넘어서 정말 피곤했거든. 플랑카드는 정확한 문구를 지정해 준 것도 아니고, 무엇을 그려달라고 정확하게 지정된 것도 아니어서 좀 난감했지. 여관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구상하기 시작했지. 그전에 광목천의 크기도 제대로 보질 못했거든. 어느 정도 크기로 만들어야 하는지, 얼마나 잘 보이게 만들어야 하는지는 그때부터 시작하는 것이었어. 그리고는 광목천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렸어. 물감은 애초부터 준비해 오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물감을 준비해왔다 해도 아크릴이 아닌 수채물감은 광목천에 제대로 받지도 않았을 거야. 내가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는 동안 같이 간 일행 중 한명이 바느질을 해주었어. 광목천이 조각난 것이어서 3개를 이어 붙여야 했거든. 

화사한 색으로 글씨를 큼지막하게 썼고, 커피잔을 그려 넣었어. 트립티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맛있는 커피 트립티’라고 큼지막하게 썼지. 트립티는 외국에서 가져온 말이거든. 그리고 요새는 그런 말이 너무 흔하잖아. 그게 카페인지 뭔지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난 거기까지 했을 때 마쳐야 하나 생각했어. 그런데 말이야. 바로 이 지점까지가 내게 요구한 부분이었던 것 같아. 

그런데 난 거기서 멈출 수 없었어. 글씨도 잘 보이고, 그게 커피인지도 알고, 그게 맛있다는 것도 알렸는데, 그게 내가 그린 것이란 것도 알려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시간을 들여서 큼지막하게 싸인을 했지. 진짜로 크게 싸인을 했냐구? 아니. 싸인을 크게 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난 다른 방법을 썼어. 그때 내게 떠올랐던 것은 말이야, 이 그림은 딱 누구꺼라고 생각나는 그걸 넣자는 것이었어. 싸인을 보고 그게 누구 그림인지 안다면 좋겠지. 그런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싸인이 없어도 그림의 부분만을 보고도 그게 누구꺼란 것을 알면 좋겠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평소에 내가 즐겨 그리는 것을 그려 넣었어. 기운이 팍팍 넘치는 선을 말이야. 그러고 나니 기분이 훨씬 좋더라. 다 마치고 나니 예상했던 시간보다 1시간이나 더 지났더라구.

다음날 금오도에 가서 플랑카드를 펼치면서 나는 싸인을 큼지막하게 했다고 하면서, 그 선들이 내가 한 싸인이라고 말했지. 아마 그때 함께 했던 사람들은 모를거야. 난 아직 내 그림들을 여러 곳에 유포하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그날 여수에서 플랑카드를 그리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림을 언제 그려야 하는지, 또 얼마만큼 자세하게 그려야하는지, 무엇을 주로 그려 넣어야 하는 것인지, 또 그림에는 무슨 특징을 남겨야 하는지를 말이야. 우선은 상황이 좋지 않아서 안했으면 했던 거지만 그것은 하길 잘했단 생각이 들어. 그림이 필요할 때 그리지 않으면 안되는 거니까. 또 어떤 것인지 잘 모르고 그리는 난감함은 안 겪었으면 했어. 그런 상황은 언제든 생길거지만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구. 난 처음에 구상을 하는 단계에서 트립티라는 영문 글자와 상표를 여관에서 검색했어. 그런데 그건 쓸데 없는 짓이었지. 결국 그건 안 그려 넣었어. 의뢰한 사람도 예쁘게 그려달라고 했지 로고(혹은 상표)를 넣어달라고 한 건 아니었거든. 구상을 하려고 작은 종이에 그려 본 것은 잘 한 것 같아. 전체 형태를 알고 그렸어야 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리다 보니 점점 작아져 버리더라. 내가 그렇게 큰 것은 익숙하지 않아서 점점 작아진 것도 있고, 손에 쥔 크레파스 굵기를 보다가 줄어든 것도 있는 것 같아. 아참, 플랑카드를 펼쳤을 때, 크레파스가 접은 다른 면에 묻어서 밤에 곱게 조심해서 그린 것이 모두 헛수고가 됐어. 난 그림 그릴 때 손을 여러번 씼어. 그림에 의도하지 않은 지저분한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말이야. 그런데 크레파스가 다른 곳에 배겨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그걸 대비도 하지 못했네. 그리고  사인 대신에 내가 특징으로 삼은 것을 그려 넣은 것은 잘 한 것 같아. 남들은 내게 그려 넣은 그게 뭔지 몰라도 난 그걸로라도 보상받고 싶었거든. 이 심리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랬어. 그 플랑카드란 게 눈에 남고, 또 사진으로도 남을 거 아냐. 난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거든. 커피 앞에 ‘맛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잘 한 것 같아. 사람들은 눈으로 읽는 그걸 바로 연상하는 것 같아. 배에서 막 내리신 분이 플랑카드를 보고 오신 분이 ‘맛있는 커피’ 한 잔 합시다 하셨거든.  

그렇게 갑작스럽게 뭔가를 겪고나니 나중에 이런 것도 대비해야겠구나 했어. 난 사실 내가 상상했던 그 프로세스대로 일이 일어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실제는 전혀 안그런 것 같아. 경험이 없다는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봐. 실전에서 어찌해야할지 잘 알지 못한다는 거 말이야. 여러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리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에도 적당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경험누적으로 생기는 거겠지. 재료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을 때에 대비해서 여러 가지 재료를 실험적으로 써봐야겠어. 그리고 어느 부분은 생략하고 어느 부분을 꼭 넣어야 하는지도 파악하고 말이야. 여수에서처럼 급하게는 안했으면 하지만, 이런 경험도 기회가 있으면 기꺼이 해야겠지. 물론 이런 일은 스트레스 지수가 아주 끝까지 가는 거지. 그리고 평온으로 되돌아올 때의 맛도 좀 보고 말이야. 

IP *.39.145.95

프로필 이미지
2013.04.30 23:25:26 *.109.215.88

정화 누나. 이 글 좋네요!


말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것도 왠지 누나같고, 

아주 구체적인 상황인 있는 것도 재미있고, 암튼 좋네요.


실제 작업한 현수막 이미지가 있음 더 좋을까요, 어떨까요?


프로필 이미지
2013.05.01 09:51:23 *.39.145.95

하하하.현수막 이미지가 하드를 뒤지면 작게라도 한장 나오겠지. 아마도 뻑난 SD카드에 있을지도. 그게 여수를 다녀온 거거든.
그리고 친구한테 얘기하듯이 써보려구. 책 쓸때 그 친구에게 말하듯이 쓰려해.

프로필 이미지
2013.05.03 11:39:28 *.39.145.95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수 금오도에 다녀온 사진은 휴대폰으로 다른 장면만 찍은게 있네. 

함께 간 디카 메모리카드를 날려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서야..... 같이 간 일행이 찍은 단체 사진을 카톡 초대에 나가기를 터치하는 실수도 한몫하고.


아래쪽에 조그맣게 나온 게 전부라네.

s-20130413.jpg




프로필 이미지
2013.05.01 05:53:03 *.39.134.221

주위를 둘러보니 이 일을 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자각을 하는일.

정화님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상황일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함민복시인. 저도 그 강의 듣고 싶었어요. 여수란 곳이 그리 멀지만 않았다면.

아니지...아무리 멀어도 내가 마음이 더 동했으면 갔겠지요.

연구원 입학여행때 팔팔이는 시를 외우는 과제가 있었어요. 일곱편의 시를 외워서 와라.

몇날을 새벽에 출근길에 적어서 다니면서 외웠는데 하필이면 내가 고른 시는 모두 장시...

그때 잠시 고민을 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시를 외울 것인가. 짧은 시를 외울 것인가. 과제를 하는 것에 촛점을 맞추면

짧은 시를 외워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지요. 왜?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가 장시를 외우지 않을거니깐요.

 

사부님이 시킨 첫번째 시가 이분 것이었어요. 사람들잉 둘러 앉아있고 나는 그 가운데 무대에 섰는데 떨리기도 했고

사부님은 "함민복 해봐라"그러셨어요. 내심 나는 좋았지요. 일곱편의 시 중에 제일 긴 시였지만 그 시는 내가 제일 잘 외운 시였으니까요.

"눈물은 왜 짠가"

그 시를 왜 시켰었는지 알고 나서 눈물이 더 짜게 느껴졌다는...ㅋㅋ

프로필 이미지
2013.05.01 09:54:33 *.39.145.95
저도 그 눈물은 왜 짠가를 좋아해요.
제가 만난 시인은 참 착해요. 고운 마음이 고운 시가 된 거겠죠. 강연에서는 시인의 감수성이란 이런 거구나 했습니다.
프로필 이미지
2013.05.05 15:37:58 *.108.81.231

저도 낙서는 좋아하지만 큰 도화지만 보면 떨려요. 디테일한 부분에 치부가 드러나는 것 같어서 쉽게 연필이 안가더라구요. 그런데 플랑카드라니 -_-ㅋ 저라면 그냥 바로 뛰쳐 나왔을 것 같어요~ ㅎㅎㅎ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