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iwai
- 조회 수 2094
- 댓글 수 19
- 추천 수 0
아들은 어릴 때부터 내가 갖지 못한 재주가 있었다. 보기에도 복잡한 조립 장난감을 손쉽게 맞추었다(또래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수백 개 조각의 직소(Jigsaw) 퍼즐도 똘망똘망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맞추곤 했다. 내가 조립식 가구나 제품을 사와 설명서를 보고도 낑낑거리면 녀석이 어느 틈에 와서는 옆에서 일일이 훈수를 두었다. 나중에는 답답한지 나를 제치고 녀석이 다했다. 그 분주한 손놀림과 몸짓, 그리고 그것에 몰입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이 너무 보기 좋았다.
그런 재주(?) 때문인지 아들은 고 3때, 일찌감치 항공기나 대형선박을 조종하는 특성학과로 진로를 결정했다. 자신은 아빠처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지시와 통제로 틀에 박힌 회사생활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자유롭게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아들은 첫해에 고배를 마셨다. 항공 운항과 1차 합격의 기쁨도 잠시, 시력이 나빠 떨어졌고 항해학과에는 점수가 미치지 못해 낙방했다. 한 해를 재수하여 올해는 마침내 아들이 원하는 학교의 항해학과에 들어갔다. 그런 아들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신의 적성과 재능에 맞는 일을 일찍이 찾아 주저 없이 나아가는 아들의 자신에 찬 모습이 기특했고, 반면에 특별한 기술 없이 40대 후반에 회사에서 퇴출된 내 자신이 한심스럽기만 했다. 전공이나 미래의 진로에 대한 고민 없이 대학에 들어갔고 때가 되어 취직해 20년 넘게 매일 비슷한 일을 반복한 대가라고 생각하니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다.
이 땅의 40대 후반/50대 중년의 남성들은 성실과 근면을 미덕으로 쉼 없이 달려왔다. 회사에서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하루의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그것이 회사에 대한 충성이든 상사 눈치를 보든 어쨌든 조직 생리상 정시에 퇴근할 간 큰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생업으로 한다는 것은 생계를 책임진 가장에게는 사치스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동시에 남이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전문성을 갖춘 일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몸과 시간을 회사를 위해 희생했건만 어느새 피할 수 없는 퇴직 또는 퇴출의 칼날이 자기를 겨누고 있음에 씁쓸해 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의 생리상, 비용 대비, 그에 상응하는 수익을 창출하지 못하면 일정한 유예기간을 거쳐 ‘폐기처분’ 되는 것이 직장인의 비애지만 말이다. 사용자와 근로자간 쌍방 노동계약 하에 근로자는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조건이 맞지 않으면 어느 한쪽이 계약을 종료시킬 수 있다(물론 공정한 계약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자신이 맞지 않으면 그만두면 되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퇴사 또는 퇴출을 당했건 마냥 신세 한탄하고 회사를 원망하며 무기력하게 남은 인생을 살아 갈 수 없는 일이다. 자신도 회사에서 매월 임금을 받았고 일정 부분 회사로부터 혜택을 받았음을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조기 퇴직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 없이 성실과 근면으로 우직하게 달려왔던 자신의 미련함과 안일함에 대한 대가라고 하면 너무 심한 자기비하일까? 성실과 근면의 자세로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성실과 근면’이라는 이 고리타분하고 진부한 단어는 왠지 융통성 없고 무능한 사람이 복종과 자기 색깔 없이 그저 무리를 따라가기만 하는 노예적인 근성이 느껴져 더 이상 사용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나도 일정 부분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중의 하나다.
퇴직에 따른 자기비하, 무기력, 분노,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해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자기 파괴적인 감정에 굴복해 남은 삶을 낭비할 순 없다. 지난 세월, 회사와 함께한 기간 동안 수고한 자신을 위로해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것에도 자기한테 힘껏 박수를 보내자. 그리고 늦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보자. 나 또한 그 길을 갈 것이다. 그 길은 험하고 고통이 따를 것임을 안다. 삶의 냉혹한 현실에도 맞닥뜨리게도 될 것이다. 언제 까지가 될지 모르지만 규칙적인 수입은 없고 지출은 크게 줄지 않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최소 비용이 자신을 압박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될 때도 있을 것이다. 넘어서야 한다. 이것은 모험이다. 그 모험에서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도중에 그 모험을 감당할 수 없어 주저앉을 수도 있다. 승리한다고 해도 ‘전리품’이 남은 인생의 화수분이 될 가능성도 많지 않다. 그러나 한번 그 끝을 보고 싶다. ‘나’를 넘어서기 위해. 절실함과 용기로 그 모험을 뚫고 나가련다. 그 모험의 여정에 누군가는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간절히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을 매몰차게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만물이 내게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용기와 그리고 희망을 줄 것이다. 끝으로 나를 먼저 사랑해야겠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3472 |
[5월 2주차] 지금 이 순간 ![]() | 라비나비 | 2013.05.13 | 2022 |
3471 | 9-2 마침내 별이 되다 (DS) [15] | 버닝덱 | 2013.05.13 | 2081 |
3470 |
5월 2주차 칼럼 -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려는 이유 ![]() | 유형선 | 2013.05.13 | 2156 |
3469 | #2. 필살기는 진지함이다. [8] | 쭌영 | 2013.05.13 | 2051 |
3468 | 떠날수 밖에 없는 이유 - (9기 최재용) [16] | jeiwai | 2013.05.11 | 2492 |
3467 | 산 life #3_노적봉 [6] | 서연 | 2013.05.09 | 2904 |
3466 | 2-4 너는 나의 미로 | 콩두 | 2013.05.08 | 2310 |
3465 | 가까운 죽음 [12] | 한정화 | 2013.05.07 | 2419 |
3464 | 산 life #2_마이너스의 손, 마이더스의 손 [1] | 서연 | 2013.05.07 | 2614 |
3463 | 저와 함께 춤추시겠어요 [6] | 한젤리타 | 2013.05.06 | 2195 |
3462 | (No.1-1) 명리,아이러니 수용 - 9기 서은경 [13] | tampopo | 2013.05.06 | 2033 |
3461 |
[5월 1주차] 사부님과의 추억 ![]() | 라비나비 | 2013.05.06 | 2358 |
3460 |
연 날리기 (5월 1주차 칼럼, 9기 유형선) ![]() | 유형선 | 2013.05.06 | 2272 |
3459 | 나는 하루살이 [14] | 오미경 | 2013.05.06 | 2184 |
3458 | Climbing - 6. 오름에도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1] | 書元 | 2013.05.05 | 1989 |
3457 | #1. 변화의 방향 [7] | 쭌영 | 2013.05.05 | 2086 |
3456 | 9-1 마흔 세살, 나의 하루를 그리다(DS) [7] | 버닝덱 | 2013.05.04 | 2168 |
» |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9기 최재용) [19] | jeiwai | 2013.05.04 | 2094 |
3454 |
시칠리아 미칠리아 - 소설 전체 ![]() | 레몬 | 2013.05.01 | 2213 |
3453 | 시칠리아 미칠리아 - 몬스터 (수정) [2] | 레몬 | 2013.05.01 | 22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