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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그리 서두르세요. 호흡이 중요합니다.”
강사의 시범이 있은 후 수강생들의 실습시간. 저마다 암벽을 타는 스타일이 다양한데 나의 경우에는 뭐가 그리 급한지 서둘러 올라간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단련이 되어있지도 않은 근육에 과부하가 걸리거나 힘이 빠져 매트에 떨어지곤 한다. 우람한 몸매를 만들기 위해 한번쯤 바벨을 들어본 분들은 공감이 갈 것이다. 올리고 내릴 때 들숨 날숨의 호흡이 일정치 않을시 몸에 무리가 갈수 있다는 것을. 클라이밍도 그러하다. 무작정 올라가는 것이 아닌 템포의 경기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뒤에서 뭐가 쫓아오는 냥 성급히 굴다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그럴 때 강사의 일침.
“천천히 하세요.”
그랬다. 나는 왜그리 서둘러 가는가.
서울이라는 대도시와 지방의 차이점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사람들의 행동패턴을 들 수 있다. 시골의 어르신 분들은 웬만한 일에는 뛰질 않는다. 횡단보도에서 파란 신호등이 깜빡거려도 당신의 갈 길을 갈뿐 급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서울 택시 기사 분들 경우에는 아마도 이런 경우에는 속이 끓을 것이다. 업무차 완행버스를 타고 지방 출장길의 어느 날. 탑승할 승객이 보이지 않음에도 구간마다 차를 정차시킨다. 정시 출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사님, 시간이 다되었는데 출발 안하시나요?”
거래처장과의 약속시간에 애가 타는 내가 나름 예의를 갖추어 말씀을 올리노라면 돌아오는 답변은 염장을 지른다.
“조금만 기다려유. 할머니가 타실 때가 되었는데 오늘은 늦으시구먼유. 올 때가 되었는디.”
연방 시계를 바라보며 어느덧 바쁜 현대인의 속성에 젖어있는 나는 그 말에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오른다.
‘무슨 소리야. 정시가 되었으면 출발을 해야지. 이렇게 시간관념이 없어서야…….’
처음 서울로 상경해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출근길 전철 안에 승객들이 그렇게 많다는 점과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해서 이어지는 빠른 발걸음 이었다. 형형색색 각기 다른 신발의 모양 속에 역내에 울려 퍼지는 저마다의 구둣발자국 소리가 묘한 여운을 남기게 하였다.
‘뭐야, 뭐가 저리 급한 거지.’
그러면서 나는 지방 그분들이 그러했듯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그러던 나 자신. 몇 개월이 지나자 그들의 대열에 자연스럽게 합류를 한다. 늦장을 부리면 지하철에 타질 못할뿐더러 그렇지 않으면 생존경쟁의 시장에서 이탈된다는 학습된 강박관념에 의해서이다.
유럽이라는 나라를 처음 방문하였을 때 인상 깊게 느꼈던 풍경중 하나가 일상생활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이른 시간과 오후 가릴 것 없이 카페는 사람들의 물결로 이어졌다.
‘뭐야, 저 사람들은 할 일이 없나.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저렇게 죽치고 앉아 있는 거지.’
낮 시간 상가를 방문할 경우에는 낭패를 보기 일쑤였다. 날씨가 덥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몇 시간 동안 문을 닫아걸고 오침을 즐긴다.
‘열심히 일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러니 지금 유럽의 경제위기가 온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를 보라고.’
빨리 빨리로 대변되는 특유의 기질성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대한민국의 공동체란 자부심이 자연히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카페에서의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에스프레소와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내려쬐는 햇볕에 몸을 맡긴 채 일상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진지한 인생철학과 비즈니스에 따른 손익의 탐구를 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그네들의 모습이 때에 따라서는 다른 시각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만, 한편으론 부럽게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지. 지금은 대한민국 핫이슈중의 한분이지만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21세기가 원하는 경쟁력은 휴식에서 창조되고 놀이에서 발견된다며 <휴테크 성공학>의 저서를 2003년 부르짖을시 사람들은 콧방귀를 뀌었다.
‘무슨 소리야, 열심히 일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휴식을 취하라니. 우리가 IMF를 겪은 지가 언제인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먼.’
회사의 월례 특강에 외부강사를 그분으로 모시고자 할 때 윗분께서 하시는 말씀 왈.
“당신은 정신이 있는 거야. 지금같이 어려울 때에 논다는 개념이 말이나 되는 소리야. 직원들 정신이 바짝 들게 정신교육 잘하는 그런 강사 있잖아.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조직에 목숨 걸어야 한다는.”
김성호의 <일본전산 이야기>에는 장기 불황 속에서 10배의 성장을 이룬 '일본전산'의 성공적인 경영 사례를 소개한다. 책의 내용중 신입직원 선발시 밥을 빨리 먹는 사람을 채용하는 사례담이 있다. 밥을 빨리 먹는다? 저자는 그것을 열정과 일에 대한 적극성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세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화두가 펼쳐지자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도서가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지키고 있고, 종교를 떠나 템플 스테이 체험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렇게 열심히 바쁘게 살던 이들이 무슨 일일까.
2013년 5월 3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좋은 교육을 찾아 헤매던 30~40대 젊은 부부 8쌍이 아이들을 데리고 시골 초등학교 옆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직접 일구며 살아간다. ... “미쳤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곳을 택한 그들에게 누구나 궁금하게 생각하는 내용을 기자가 물었다. “애들이 좋은 대학 못 가도 괜찮으냐”고. 이에 그들은 이렇게 답한다.
“대학 안 가고 농부 해도 괜찮아요. 행복하면 되죠.”
“우리 애들이 귀하게 대접받고 필요해질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오름에도 숨고르기가 필요하다. 이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격다짐으로 올라가기보다는 자신의 페이스대로의 전진이 필요하다. 클라이밍을 할 때 종종 부상을 입는 경우가 있는데, 입문한지 얼마 안 된 이들은 대개 무리하게 힘으로 전진하며 저것쯤이야 하고 홀드를 움켜쥔다. 그러다 어깨에 통증을 느끼며 급기야 팔이 빠지기도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한다.
“숨고르기를 하세요. 손과 발을 뻗을 때 호흡이 중요합니다. 무작정 힘으로만 가다가는 지치고 오래 못가요.”
강사의 한마디는 삶을 깊이 탐구해온 노년 철학자의 어록과 같다. 그렇다. 단기전이 아닌 인생의 장기전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능력들이 필요하다. 스킬, 스펙, 경험 등. 그중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수록 인생의 롱런을 위한 장기적인 페이스 조절 능력이 더욱 요구됨을 실감한다. 무리하게 오버페이스를 하다가는 초반에 앞서가다가도 제풀에 지쳐 버리는 경우가 많다.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수영장이든 헬스클럽이든 연초에는 신청자들이 넘쳐나며 저마다 심하다할 정도로 목표물에 열중한다. 무언가 시작해야 한다는 의무감의 일념에서 기를 쓰며 매달린다. 하지만 2월이 되면 인원이 줄어들고 다시 3월이 되면 신청자들이 몰린다.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시작되는 계절에 다시 한 번 심기일전의 정신으로 새로이 수강증을 끊는 것이다. 그러다 4월을 넘어 5월로 접어들면 그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한민국 경제가 8분기 연속 0%대 저성장 국면 고착화로 줄어들었다는 헤드라인이 매스컴을 장식하는 작금. 쉼표가 없이 성장일변도의 폭주 기관차로 달려온 우리이기에 이를 우려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그러기에 새롭게 출범한 정부에서는 일반 기업체에서처럼 전년도 대비 몇% 성장 그래프의 정책을 주장한다. 반면 전경련에서는 너무 빠른 경제민주화에 제동을 거는 속도조절을 건의하지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정체 혹은 뒤로 내쳐짐이 후퇴 내지는 퇴보라는 인식을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강요 받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는지. 이제는 숨고르기가 필요한 시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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