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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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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7일 16시 17분 등록

내가 죽음을 알게 된 것은 국민학생이었을 때부터다.

 

우리집은 동네에서 제일 잘사는 집,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았다. 아버진 고향을 떠나 신태인 표천동이란 곳으로 이사를 오셨다. 아마도 내가 5살이나 6살때의 일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얼마후에 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집과 이웃한 집은 같은 집 안쪽에 세를 들어사는 길동이네와 그리고 뒷집에 경미네, 그리고 앞집에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거기에도 동갑내기가 살았다. 우리 동네에 내 나이 또래 아이들이 많았다.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며 놀았다. 한데 모여서 도둑잡기 놀이를 했다. 해거름판에 아주 신나는 놀이였다. 문 앞 공터에 쌓아놓은 모래더미에다가 불을 피워서 놀기도 했다. 불장난도 무지 재미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죽음에 대해서 인식한 것은 딱 그 무렵이다. 내가 1학년이거나 2학년 혹은 3학년쯤일 때이다. 경미네 오빠와 앞집에 동갑내기가 있는 그 집, 그집 오빠가 철길에 누어 자살을 했다. 동시에 앞집과 뒷집이 초상이 났다. 경미와 그 언니가 삼베옷을 입었던 것이 기억에 난다. 뒷집 오빠는 동생들과 나와 내 동생과 산에 나무를 하러 가기도 했었다. 경미네는 무척이나 가난했다. 그 집 아저씨를 우리 어머닌 선풍기 장수라고 기억하신다. 멀리까기 선풍기를 팔러 다니시기도 했나 보다. 경미네는 그 오빠가 첫째이고, 그 아래로 언니가 하나 있고, 경미가 있고, 경미 여동생이 있었던 것 같고, 또 어린 남동생이 있었다. 경미네가 우리 뒷집에 살기 전에 옆집 어딘가에 살았을 적에 그집에 가서 밥을 먹은 적이 있다. 어른들은 논밭에 일을 나가시고 놀다가 함께 밥을 먹었는데, 밥이 모두 꽁보리밥이었다. 그것을 고추장과 김치와 비벼 먹었다. 우리집에서는 꽁보리밥은 먹지 않아서 그게 신기하고 이상한 경험이었다. 앞집 오빠는 잘 기억에 나질 않는다. 그집에 동갑내기 남자애가 동생들과 함께 우리집 마당에 와서 놀았고, 어린 동생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집은 엄마가 없었다. 가난 때문에 도망갔다고 기억할 뿐이다.

 

내 어렸을 적 기억은 뒷집 오빠와 앞집 오빠가 집이 너무 가난해서 희망이 없어서 둘이 같이 자살했다라는 정도이다. 나는 그때 어렴풋이 가난과 희망이 없다라는 것이 뭔지 느꼈다. 경미는 많이 울었지만 며칠이 지나서 몇 달이 지나서 아무렇지 않게 잘 지냈다. 나는 그게 아주 이상했다. 그렇게 살 수도 있나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4학년 때에 집이 전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전학을 할 무렵에는 옆집 오빠는 서울 어디에 메리야스 공장에 다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월급을 타서 내복을 사왔다는 말을 들었다. 옆집 아주머니(막동이 엄마)는 점심밥을 해 주셨다. 쇠고기국을 끓여 주셨는데, 나는 제대로 먹지 못했다. 아주머니께서 일부러 생각해서 끓여주신 것이지만 쇠고기는 내 입에 맛지 않아서 국은 다 식어버리고 쇠고기 기름은 입 안에서 모래알처럼 굴렀다. 나는 오래 지나서 그날의 기억을 아버지께 말씀 드린 적이 있다. 아버지께서도 쇠고기국이 입에 맞지 않고 모래가 구르더라고 하셨다.


아버진 가난하셨다. 그런데, 난 우리 아버지께서 가난하시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끼니를 걱정해본 적이 없다. 아버진 부지런하셨고, 그리고 옆집이나 앞집이나 뒷집 아저씨들보다 젊었다. 그래서 였는지도 모른다. 가난이란 것을 아주 어렴풋이만 짐작을 한 것은.

 

그 후에 두 번째 죽음은 한참 후에 겪었다. 대학생이 되었을 때이니까 19살인가 20살 쯤일 거다. 집에 있는데,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시더니 말을 하지 못하시고 울음을 터뜨리셨다. 나는 그때의 어머니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터져나오는 눈물은 숨도 아니고, 뭔 말인지도 모를 것이었다. 엄마가 한참을 숨을 제대로 못쉬시다가 ‘불쌍한 우리 상진이,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갔네, 불쌍한 우리 상진이.’라며 우셨다. 외삼촌은 논밭일을 하시다가 아파서 병원에 가셔서 주사를 맞다가 주사 쇼크로 돌아가셨다. 외삼촌은 많이 배우질 못하셨고, 착하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늦께까지 결혼을 못하셨는데, 나중에 결혼을 하셨지만, 같이 살던 부인은 도망을 갔다. 큰 외삼촌의 둘째 아들이 양자가 되어 상주가 되었다. 우리 외가의 삼촌과 이모, 어머니의 학력은 모두가 국졸이다. 그러니 외삼촌이 특히나 못 배웠다 할 것도 없다. 고향에서 부모님 모시고 형님과 같이 농사지으며 지내는 것이 고생스러운 것인지, 어떤 것인지는 나는 잘 모른다. 남의 눈에는 평생 땅만 파고 살아서 가난하고 못나보일지도 모를일이지만, 어머니께서 울면서 하신 말씀 때문에 외삼촌이 불쌍한 분이구나하고 생각한다.

 

세 번째 죽음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다. 외삼촌이 가을에 돌아가시고, 그해 겨울이 한참일 때, 그러니까 다음해 1월이었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다. 나는 교회의 선배들과 함께 1박 2일로 임원수련회를 겸해서 모악산으로 MT를 갔다. MT에서 돌아오니 어머닌 걱정이 많으셨다. 둘째 동생이 집에 안돌아와서이다. 이전에 살던 동네에 같은 또래들을 수소문해 보았는데, 그 녀석들은 어디를 놀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 무리에 끼었나 싶었는데, 동생은 그 무리에 없었다. 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은 사흘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날은 눈이 많이 왔고, 동생은 같은 학교 친구들의 고등학교배치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해서 방학중인데도 학교에 가던 길이었다. 눈길에 미끄러지는 트럭이 길을 가던 내 동생을 치었다. 동생에게는 신분증이 없어서 연락이 안되었던 것이다. 교통사고 현장에 가족을 찾는다는 전단지를 붙여 놓았다는 것을 동네의 아주머니가 알려주셔서 나중에 알게되었다. 그곳은 우리가 사는 집에서 버스로 한 정거장 떨어진 경찰서였다. 경찰서 담벼락은 허물어져 있었다.

 

나는 동생의 죽음을 격고 나서 무서움증이 심해졌다가 괜찮아졌다가 했다. 당시 우리가 살던 곳은 동서학동의 좁은목의 끝집이었다. 예전에 살던 집은 상장사가 샀고, 거기를 개발한다고 새들어 사는 사람들을 모두 내보내서, 새로 구한 집이 좁은목이었다. 좁은목 약수터 가는 길, 한벽루와 갈라지는 커브길 끝집. 집 뒤쪽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지는 곳이다. 거기엔 밤나무가 있었는데, 나는 밤나무 그늘이 무서웠다. 그당시에 사극에서 본 장면이 떠올라서 무서웠다. 지붕에 귀신이 앉아있는 장면이 드라마에 나왔는데, 나는 그 장면이 끔찍하게 무서웠다. 그런데, 그집이 꼭 그랬다. 여자 하나가 지붕에 앉아있는 듯한 인상. 그집은 가파른 계단을 몇 개 올라가야 하는 축대를 높이 쌓은 집이다. 집 앞에서 집을 쳐다보면 담과 밤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지붕이 보였다. 나는 그 어둠이 무서워서 지붕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발 밑만 쳐다보다가 집으로 들어가곤했다. 그 여자와는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중에 동생이 죽고나서는 그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죽음이 따라 다녔었구나 하고.

 

남동생이 죽었을 때 나는 한번도 울지 않았다. 나는 놀랐고, 놀라는 중에 친적 어른들께 당부사항을 들었다. 어머니께서 충격이 크시니 내가 첫째이니 어머니를 잘 돌봐야 한다는 것. 할머니께서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내가 안죽어서 손자 잡아먹었네.’ 하면서 울어서 그 소리에 엄마가 정신이 없으시니 내가 할머니랑, 엄마랑 잘 다독여서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당시의 내게는 슬픔이란 없었고, 의무만이 있었다. 동생의 장례는 조용히 쉬쉬 빨리 치러졌다. 큰 이모님이 동생의 옷가지를 챙겨서 태워줘야 한다고 해서 같이 전주천 평평바위에 가서 태웠다. 그것이 동생의 장례에서 내가 참여한 유일한 의식이다. 그 후에 나는 무기력해졌다. 집은 우울했다. 어두움이 무서웠다. 갑자기 아무 잘못없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기력해졌다. 나 뿐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동생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으로 뭔가를 겪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갑상선이 부었고 얼굴이 갑자기 부었고 약을 드셔야 했다. 할머니는 갑자기 늙으셨다. 막내여동생은 무서움증이 심해졌다. 막내 동생의 두려움은 자신을 괴롭히던 오빠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서로가 비교되는 존재로 무척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남동생은 사춘기가 되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그것을 여동생을 괴롭히는 일로 풀었다. 여동생은 당하면서도 오빠가 미워서 오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실제로 오빠가 죽어버리니 그 충격이 말이 아니었다. 그건 여동생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아인 그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엄마와 나와 여동생은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잤다. 그래도 무서웠다. 눈만 감으면 이상한 것이 나타나서 무엇인가를 싹뚝 썰어서 피가 줄줄 흘렀다.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엄마는 너무 아파서, 내가 무서움을 느낀다는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 할 수도 없었고, 할머니에게도 그랬고, 여동생에게도 더욱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아무말없이 지냈다. 학교에 친구들도 내 동생이 죽은 줄 몰랐다. 그때는 겨울 방학중이었고, 아무일이 없는 듯이 학기가 다시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를 죽음으로 잃고 크게 소리내어 울어보지도 못하고 일상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 당시에 동생이 왜 죽었는지 생각했는데, 그건 내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노는 것 때문에 가족들은 별로 안중에 없었다. 특히 둘째 남동생은 그랬다.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아니고, 아침에 밥먹고 헤어지면 저녁에 잠깐 텔레비전을 볼 때나 보는, 서로의 관심사가 다른 남남이었다. 당시에 나는 그게 잘못이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관심 속에서 사라지면 실제 삶에서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그렇게 결론을 내버렸다.

 

당시 우리집은 시내로 가야하는 변두리 끝집이어서 동생이 사고가 난 길을 꼭 지나다녀야 했다. 그래서 우리집은 거기서 사는 것보다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이사를 했다. 어머니의 건강이 말이 아니어서 어머니의 친척들이 많이 사는 이리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는 더욱 무기력해졌다. 어머니의 친척들은 많지만, 나와 막내동생은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함께 삶의 터전과 친구들을 모두 잃었다. 막내동생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되었는데,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나는 전주에서 이리로 이사하면서 오랜시간을 같이 보내는 사람들과 조금씩 멀어졌다. 이리에서 전주로 기차를 타고와서 저녁에 집에 갈때까지 남는 시간을 빈둥빈둥 보냈다. 삶이 허망하기에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무엇을 집중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냥 햇볕을 쬐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장편소설을 읽었다. 토지를 읽었다. 많은 사람이 나와서 좋았다. 집은 우울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견딜만 했다. 토지의 평사리에서 이사온 사람들의 집에 우환없는 집이 몇이나 되나, 사람들은 다 그만그만하게 살아간다.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음 죽음은 취직을 하고서다. 집에 우환과 함께 나는 직장생활을 순탄하게 하지 못했다. 3일에 한번씩 밤을 새며 일을 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무척 힘이 들었다. 나는 근무가 아닌 날에도 집에서 쉴 수가 없었다. 집은 이상하게 시끄러웠다. 나는 작은 소리에도 잠을 설치는 예민한 사람이다. 야근을 하고 돌아온 후에 낮에도 제대로 쉬지를 못했다. 당시에 막내동생은 가출을 했다. 전학을 한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이리에서 전주까지 직행버스를 타고 친구를 만나러 다녔다. 가끔은 외박을 하다가 급기야는 가출을 했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엄청나게 말랐고, 직장 상사에게 시달렸다. 그리고는 다음해에 광주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자취를 시작했다. 나는 쉬는 날 익산 집에 가는 것이 싫었다. 광주에서 익산집에만 다녀오면 화가 났다. 동생은 여전히 몇 달째 가출중이었다. 어머니께서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고 뭔가를 싫다고 표현하는 것에 짜증이 났다. 군산에 근무할 때는 가끔 전주에 가서 만나곤했던 선배를 광주로 옮기고는 잘 만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소식을 들었다.

‘태진이가 교통사고로 죽었단다.’

그 소식을 들은 것은 고향 순창에 외할머니 만나러 놀러오신 어머니와 이모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 밤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장례식장이 어디인지, 발인이 언제인지는 묻지 않았다. 그냥 그 소식을 들은 것으로 끝을 냈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아무런 정신이 없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갑자기 말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그동안 몹시도 짜증나게 했던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미워하는게 미안해서 전화를 했다. 그렇다고 덜 미워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미움이 덜해진다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어찌어찌하다보면 덜 미워지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제발 죽지만 말고 살아있어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이 다였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닐테지만 그 당부만은 하고 싶었다. 


태진오빠의 죽음은 동생의 죽음을 생각나게 했다. 그건 내 관심에서 사라지면 존재가 사라진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이 다시 들어맞아 맞춰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게 언덕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미련스럽고, 느린 사람이라서 어찌해야할지 모르지만, 그런 내게도 비빌 언덕 같은 사람이었다. 멀리에라도 정이 많은 사람이 하나 있어 언제라도 거기로 가면 볼 수 있다는 그 위안 하나가 사라져버렸다. 또다시 무서움증이 들었다. 밤에 불을 끌 수가 없었다. 물론 잠도 오지 않았다. 배는 고팠지만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배는 늘 고팠고, 먹고 나서 돌아서면 배가 고팠고, 먹어도 배가 고팠다. 그러니 배가 고프다고 해서 먹을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은 것은 문제였다. 그냥 멍하니 앉아있는 것이 곤혹스러웠다. 어떤 무서운 생각이 들지 몰라서 이번에도 소설 속에 빠져 들었다. 이번에는 영웅문에 빠졌다. 그 소설 속 주인공과 태진오빠는 꼭 닮았다. 미련스런 것까지.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는지 잘 모르고 잘 살았다. 실제로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 사이에 기억이 없을 뿐이다.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이었지만, 죽었으니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취직 공부한다고 서로가 좋아하는 감정이 생겼다 해도 타이밍이 맞지 않아서 제대로 데이트를 한 번도 못해봤으니 추억이란 것을 앂으며 살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일이 생기니 다른 일에 묻혀서 잘 살았다.

 

그러다가 문득 대전에 근무하다가 일이 터졌다. 친구를 만나고 늦게 해어져 돌아오던 날 밤. 친구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나는 예쁜데, 가까이 가면 가시로 찔린단다. 그래서 예쁘지만 아픈 꽃, 정화란다. 뭐 이런 시발스런 이야기가 있나 싶은데, 맞는 말이다. 어느 정도 가까이 오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많이 가까이 오는 것은 싫다. 내가 가시로 찌르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놈이 마음에 안드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딴 소리 듣고 싶지도 않고, 누군가를 가슴 아프게 하고 싶지도 않아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냥 고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많이 늦었고, 다음날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기숙사로 돌아왔다. 다음날 일을 하다가 한가해져서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꺼냈다가 알았다. 내가 전화하고 싶어했던 태진오빠는 3년전에 죽었다는 것을.

이런 시발. 그것을 어찌 잊고 지냈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어디 묻혔는지도 모르고, 그를 아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한 적도 없으니 나는 그냥 그가 여전히 전주에 있는 줄 알았던 거다. 나는 익산에 살아서 그와 못 만났던 것처럼, 내가 군산에 근무해서 그를 자주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내가 광주로 발령을 받아서 못만났던 것처럼, 이번에도 대전에 근무하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 않아서 그냥 그가 그곳에 있을 줄 알았던 거다. 무의식에서 여전히 그가 전주에 있었던 거다. 무덤에나 한번 가볼껄. 그랬다면 나는 그가 죽었다고 한번 실컷 울었을 테고, 그리고 그가 죽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을 거다.

 

동생이 죽었을 때, 어둠이 무서워서 어찌할지 모르는 나를 학과 선배가 위로해준 적이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모르고 맞는다고. 어쩌면 죽음은 그리 무서운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때 어두움이 갑자기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던 그때, 죽음이 아무런 예고없이 닥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무기력해졌을 때에, 나는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배웠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 선배의 말은 틀리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알고 맞는다해도 무섭고, 무기력할거고, 그리고 슬플거다. 내가 아는 최고의 복수가 있다.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더 이상 상대에게 어떤 위로도, 뭔가를 할 어떤 기회도 주지 않는 것이다. 깊은, 그 무엇으로도 메꿔지지 않은 상실감을 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쌀집오빠는 아주 제대로 갔다. 나쁜 놈 같으니라고.


그냥 혼자서 생각하는 중에 내린 결론은 죽음은 왼편 뒤 한발자국 뒤에 있다는 거다. 그녀석이 손을 뻗으면 나의 목을 언제라도 잡을 수 있다. 나는 가끔 그걸 의식하며 산다. 머리카락까지 모두 하나하나 살아있는 듯이 오싹할 때, 그때는 그것이 옆에 가까이 서 있구나 한다.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날, 무엇을 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자꾸 넘어지는 날에는 그런 기분이 든다. 그러면서 잡히지 않을 정도로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자고 하면서 그것을 모른채 한다. 의식하면서도 모르는 체.

 

그리고 나는 최근에 또 하나의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병문안을 갔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에게 목덜미를 잡히시는 것인가하고. 그리고는 덤덤했다. 그때는 병석에 누워계신 것이고,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으니까하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나는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계속 장례식장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억할 만한 곳에 붙어 있었다. 울면서 웃으면서, 밥먹고, 잠 자고, 또 울면서 웃으면서 그랬게 보냈다. 그리고 이번엔 소설 속으로 도망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망가고 싶기도 하다. 그가 남긴 책 속에서 들어가는 것도 두렵다. 아마도 나는 그가 남긴 책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도망을 하더라도 그곳에서 그를 찾아낼 터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예전에 아무 관련없는 사람들 속에서 닮은 사람을 찾아내었듯이. 차라리 그의 목소리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깊은 상실감. 그건 뭔지 모르겠다. 더이상 즐거운 일을 같이 하지 못한다는 것, 더이상 기다림이나 짜증 같은 마음이 요란스런 것도 더불어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여기서 모두가 스톱이 될 거라는 것. 일하다 보면 또 상실감인지 뭔지가 목구멍에 걸리겠지. 그리고 어느 날에 어떤 놈이 내 목덜미를 잡는지 어떤지를 모르다가 잡히고야 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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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7 17:18:01 *.43.131.14

준비가 되면 들어갈 수 있을 테지요. 강요는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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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7 23:02:23 *.58.97.136

상실의 트라우마...  정화선배에겐 스승님이 정말 특별하셨던 것 같아요.

부럽기도 하고 또  선배님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많이 아프네요..

깊은 상실감... 시간이 치유해주리라 믿습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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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09:50:35 *.39.145.44

고마워요. 스승님이 모두에게 특별하셨죠.

시간은 무언가를 치유하지 않아요. 그냥 닳아 없어지게 할 뿐. 노력이, 사람이 치유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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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08:52:34 *.216.38.13

정화씨. 지난번에 잠깐 이야기 한 뒤로 정화씨와 나눈 이야기들이 떠나가질 않네요.

분명히 정화씨에게는 상처가 되기도 하겠지만, 한 편의 글을 통해 치유가 되고,

또 이 이야기들이 누군가에는 꼬옥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힘을 내어 글을 쓰신 그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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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09:48:20 *.39.145.44

선배님이 얘기해 주셔서 글로 쓰게 되었어요. 모닝페이지 쓸때 조각조작 쓰긴 했지만, 그래도 계속 써서 그게 뭔지 치유는 해야겠지요.

상담하시는 분들이 큰 일을 겪은 사람들에게 그 일을 자꾸 이야기하게 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이야기하면서 그게 풀리나봐요, 나중에 이상행동이 없어진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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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44:18 *.216.38.13

개인적인 바램이 있다면, 이 경험이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첫번째 죽음의 경험, 두번째 죽음의 경험 등을 차곡차곡 정리하고,

 

좀 더 가능하면 정신과 전문의 (요한이 형과 하면 금상첨화!) 와 함께

치유하는 과정등을 담은 책으로 출간해도 좋을 것 같아요..

 

마지막에는..

 

정화씨의 장례식을 담은 글로 클로징하면 멋진 책이 완성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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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0:54:30 *.216.38.13

참, 정화씨께 추천해 주고 싶은 책이 있는데...

 

제가 책의 <헤밍웨이 편>을 쓰면서 참고 했던 책인데, 정화씨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질 비알로스키의 <너의 그림자를 읽다> 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사시기를 권해드리지만,  정화씨에겐 빌려드리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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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8 18:04:19 *.61.23.211
질 비알로스키 너의 그림자를 읽다를 기억해 둘께요.
그러다가 사거나 빌려읽거나 하겠죠.
지금 관심이 딴 데 있으니 흘러가다가 이 책을 만나지 싶습니다.제가 죽음과 치유를 쓴다면 단편이거나 3번째 책쯤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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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2 22:42:00 *.50.96.158

뒤 늦게 읽어 댓글을 이제 답니다.  아픈 가족사가 있었군요. 가까운 죽음을 저는 아주 늦게 겪었습니다.

언제 부터인가 죽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붙어 다닌다는 것을 알았어요. 죽음과 익숙해져야 어느 정도 인생을 안다고 누가 그러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습닌다. 인간은 회복 탄력성이 있다고 하는데 상실감에서 빨리 회복되길 바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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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17:29:56 *.11.178.163
회복 탄력성 그거 무척 좋은데요.
탄력성도 폭이 있듯이, 상실감도
폭이 있겠죠. 지금은 극과 극을 달리지만, 곧 괜찮아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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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10:45:47 *.50.65.2

정화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의 과거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죽음 이한꺼번에 폭풍처럼 몰려와서 모든 것을 쓸어가버렸던 지난날.

그 이후 저의 20대는 거의 방황과 상실감과 알 수 없는 분노가 있었지요.

지나고 보니, 그러한 경험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정화님의 죽음에 대한 글을 보면서

언제 초대받을지도 모를 죽음이 있기에 

살아있는 이 순간이 더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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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3 17:32:12 *.11.178.163
죽음은 제 주변에 있는 것들과 하는 일의 가치를 바꿔 놓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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