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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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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9일 05시 25분 등록

노적봉, 해발 716미터. 북한산의 주능선으로 둘러쳐진 심장부에 우뚝 솟아 있는 독립봉이고 산 전체를 360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조선 후기 피난국가였던 북한산성 내의 유일한 암봉으로서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노적가리를 쌓아 놓은 것 같다 하여 그리 부른다. 노적가리가 눈에 익지 않은 나는 여인의 가슴을 연상한다. 남녀 모두의 로망이라는 B컵보다 조금 펑퍼짐하면서 포근한 엄마의 젖가슴이다. 언젠가 우리 아가 힘들지…”하며 품어주시던 어머니의 가슴 말이다.

노적봉은 동봉과 서봉으로 된 쌍봉이다. 동봉은 걸어서 오를 수 있고 서봉은 암벽등반으로만 오를 수 있다.

 

올해는 51일이 수요일이다. 한 주의 가운데 날인데 나는 쉰다. 근로자의 날. 공무원도 일을 하고 학생들도 학교에 간다. 어떤 기준으로 쉬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찌됐건 은행이 일을 하지 않으니 우리 같은 직장도 따라서 일을 하지 않는다. 달력에 빨간 글씨가 아니면서 쉴 수 있는 유일한 날이다. 모두가 쉬는 날이 아니니 홀로 놀 수 있는 날이기도 하다. 나는 늘 이날이 되면 어떤 놀이를 하며 지낼까 궁리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결국은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간다.

북한산은 도심 가까운 곳에 있어 주말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노적봉행은 나를 북한산으로 부른 사람이 있어서다. 바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글이었다. 산을 생각하면 그곳에서의 놀이를 생각하게 된다. 홀로 산에서 할 수 있는 놀이가 많지 않지만, 오늘은 어떤 길로 갈까? 그 길에는 지금쯤 무슨 꽃이 피어있을까? 그 길은 한적할까? 이런 생각 끝에 하루 코스가 길게 잡히면 산행 말미에 일탕이 하고 싶어진다. 노적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을 만들어낸 것도 그의 풍욕장면이다. 바람으로 씻으나 물로 씻으나 몸을 씻는 것은 매 한가지다.

 

깊은 산에서의 알탕. 푸른 가을하늘 맑은 물에 붉은 단풍이 드리우는 계절이 오면 오래오래 걸어서 몸에서는 쉰내가 나고, 발은 피곤에 쩔어서 시원한 물을 원할 때나, 땀에 젖어 근질거리는 머리카락이 알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부른다. 몇 해 전 지리산 종주길에 천왕봉에서 대원사로 하산하는 길 어디쯤에 알탕을 하기에 좋은 곳이 있다고 했었는데해보지 못했다. 그 산은 어머니 같은 느낌을 주는 산이었다. 다시 지리산을 찾아 오래도록 걷고 그리고 알탕을 해봐야지…. 산에 관한 나의 로망 중 하나이다. 산행을 하다 맑은 물을 만나면 아줌마들은 빨래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종종 있다. 나는 아마 여성과 남성의 중간쯤 인가 보다. 빨래를 하고 싶은 생각과 알탕 생각이 동시에 일어난다. 책에는 나와 비슷한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서울의 한 복판에 우뚝 솟은 산에서 대낮에 풍욕을 즐기는 사내. 이 사내의 친절한 설명은 나를 선동하기에 충분했다.

 

그날이 오늘이다. 하루 종일 봄 꽃이 지천인 산에서 놀다 오리라. 마음만 동하면 산은 언제나 그곳에 있으니 가기만 하면 된다. 인터넷으로 산길을 찾기 시작했다. 등산로가 워낙 많은 산이라 저마다 블러그나 카페에 자신이 다녀온 북한산사진과 글이 넘쳐난다. 너무 많은 정보는 원하는 것을 얻기에 더 힘이 든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렀다. 내일 산에 가지고 갈 막걸리 안주를 사기 위해서였다. 일단 부드러운 찌개용 두부를 한 모 샀다. 그리고 내 주먹만한 참외가 10, 비닐봉지에 담겨져 있는데 만원이라고 했다. ‘비싸네…’ 하면서도 일단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오렌지는 있으니 과일은 두 가지면 족하다. 사과를 가지고 가면 좋은데 맛있는 사과가 똑 떨어졌다. 마트에서 사는 사과는 맛이 없다. 특별 주문한 사과라야 하는데하필이면 며칠 전에 동이나 버렸다.

 

오늘 함께 가기로 한 동행은 도반이다. 나이차이는 좀 나지만 편안하게 산길동행이 가능한 친구다. 그 친구에겐 등산화만 챙겨 신고 오라고 했으니 나머지는 내가 준비해야 한다. 사실 혼자 가나 둘이 가나 준비하는 것은 비슷하다. 1리터짜리 보온병을 꺼내 팔팔 끓인 물을 채웠다. 이건 커피를 마시고 컵라면을 먹기 위한 물이다. 500리터 보온병에는 차를 준비했다. 산에서는 차가운 물보다 따뜻한 차가 갈증해소에 더 좋다. 태희가 선전하는 프렌치카페 커피믹스 4봉지, 두부와 김장김치. 구운 계란 4. 참외와 오렌지를 깍아서 락앤락도시락에 준비했다. 북한산길을 표시한 지도를 출력한 용지도 잊지 않았다. '컵라면과 김밥 막걸리는 산밑에 가면 있겠지' 하고 준비하지 않았다.

 

일차 목적지는 4호선 수유역 1번 출구다. 전철역에 내려 출구를 찾아서 걷다 보니 벽에 북한산전도가 보인다. 둘레길이 만들어지고  찾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전철역에는 북한산 둘레길 그림지도가 친절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며칠 동안 인터넷을 뒤지며 어느 길로 갈까를 고민한 것이 괜한 일을 했구나 싶었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전체를 한 컷 찍고 우리가 갈려고 하는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노적봉까지의 길을 한 장 더 찍었다. 스마트폰이 스마트 하긴 하다. 이렇게 사진을 찍어서 크기를 조절해가며 보면 종이에 출력한 종이보다 훨씬 더 쉽고 편하게 길을 찾을 수 있다.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주머니에 있던 프린트된 지도를 배낭에 쑤셔 넣었다.

 

수유역1번 출구로 나오면 마을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마을버스 번호도 1번이다. 그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아카데미하우스이다. 아카데미 하우스입구 오른편에 작은 통나무로 된 탐방지원센터가 보인다. 등산로 입구이다. 통나무 집 앞에서면 두 갈래 길이 있다. 그 왼편 길로 접어 들어 조금 올라가면 대동문으로 가는 이정표가 있을 것이다. 초입에 산 벚꽃이 한창이다. 높은 나무에 하얀 꽃이 초록 잎을 달지 않고 꽃만 지천이다. 지금이 한창이란 뜻이지.

 

친구에게 나는 말한다. “저 나무가 산 벚꽃이야. 우리스승이 좋아했다는 그 꽃 말이야호젓한 산길에 여인네 둘이서 수다를 떨면서 호사를 누리다가 아차 싶었다 "어떻게 하냐이제 사 생각이 나니. 우리 막걸리 안 사가지고 왔다. 컵라면도 없고" 마을버스를 내린 곳을 생각해본다. 그곳에도 상점은 없었다. 더 내려가야 할 모양이다. 배낭 속에 먹을 것을 생각해본다. 과일과 구운 계란, 커피믹스, , 더운물 이것이 다다. 괜챦을까? 정상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 막걸리 마시는 걸 보면 침을 흘리고 있을 텐데. 많이 아쉬울 거야. 하면서도 우리는 선뜻 오던 길을 내려갈 결정을 하지 못했다. 친구는 괜챦다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와 동행한 이 친구는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타입은 아니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잠시 후 나는 내려가자고 했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는 오늘 점심이 부족했다. 막걸리가 없는 정상은 아쉬워서 안되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간다. 어디쯤가면 마트가 나올까를  생각하며. 얼마 내려오지 않아 어르신 한 분이 배낭을 메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혹시 올라가면 막걸리를 살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없다고 하신다. 분위기상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것이 역시나였다. 탐방지원센터까지 내려가지 않고 집이 하나 보인다. 비닐천막이 쳐져 있고 한 면에 글자들이 써있다. 포장마차 같았다. 산행 길 초입에 흔히 보이는 곳. 비닐로 된 천막을 치고 간단한 마실꺼리와 안주를 팔 것 같은 가건물이다. “혹시 저 집이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닌가요?”함께 내려오던 어르신에게 여쭈었다. “주말에는 장사를 하는데 요즘은 주말에도 장사를 하지 않는 모양이야고 하신다. 산에 오는 사람들이 저 아래 수퍼에서 사가지고 오니 장사가 잘 안 되는 모양이라고부연설명도 아끼지 않으신다. 그러니 오늘은 필시 문을 열지 않았을 거라는 말씀이다. 말을 하는 동안 어느덧 건물 옆에 다다랐다. 혹시나 하여 건물 안을 바라 보았다. 모르지 않는가. 오늘 문을 열어 놓았을지도.

 

방을 달아낸 듯한 부엌에 사람이 보였다. 아주머니가 방을 닦고 계시는지 쪼그리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고 계신 모습이다. "열렸다!" 반가운 마음에 우리는 그 집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아주머니 막걸리 있어요?" ". 있어요"하신다. ...살았다. "그런데 좀 비싸요" "할 수 없죠" 더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를 한다. "몇 병 줄까요?" "친구는 나를 쳐다본다" "한 병?  두 병?"고민을 하다가 "한 병 주세요" 했는데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다시 "두 병 주세요"하니 아주머니는 "산에서 마시면 술이 잘 안 취해요"하시면서 검정비닐에 서울막걸리를 두 병 담는다. "혹시 컵라면도 있어요?" ". 있어요." 그것도 두 개 달라고 했다. 합이 만원이란다. 친구는 이건 제가 낼께요.” 하면서 지갑을 연다. 그런데 그 만원이 자신의 전 재산이라고....이런. "또 벌면 돼죠"

 

아주머니가 막걸리와 컵라면 젖가락을 챙기는 사이에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건물 앞에 노란장판으로 마무리 된 평상이 보인다. 나물들이 가지런히 누워있다. 봄나물을 데쳐서 말리고 있는 중인가보다. 가까이 가서 보니 봄에 나무를 밀고 나온 새순들이다. "여기 이 나물 이름이 뭐예요?" "다래순 이예요"하신다. . 이것이 다래순이구나. 만원을 지불하고 나오려는데 "다래순 나물 무친 것 좀 싸줄까요?"하고 물으신다. "!"하고 얼른 대답했다. 일회용비닐봉지에 한 주먹가량 다래순 나물을 싸주시면서..."많이 싸줬다가 버리면 아까우니 조금만 싸 드릴께요"하신다. ". 감사합니다" 친구의 빈 배낭에 막걸리와 컵라면 다래순 나물을 넣었다. 막걸리두통에 우리는 부자가 된 기분이다. 다시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가지 않아 대동문으로 향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아래쪽은 아카데미 탐방지원센터0.5km, 10시 방향은 칼바위 능선 1.2km, 2시 방향은 대동문 1.4km라고 적혀있다. 대동문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벌써 피었던 진달래와 철쭉이 길을 사이에 두고 양 옆에 나란히 서있다. 꽃과 잎이 반반 정도 함께 있는 중이다. 나는 친구에게 어느 것이 진달래인지? 철쭉인지? 구별하는 법을 설명한다. "지금은 둘 다 꽃과 잎이 반반이라 구별이 안 가지만 이건 진달래고 저건 철쭉이야. 어떻게 구별하느냐 하면 진달래는 이른봄에 꽃이 먼저 피어나고 꽃이 진 자리에 잎이 돋아나지. 철쭉은 꽃과 잎이 함께 피어난다. 그러니까 얘는 진달래인데 잎이 나기 시작해서 지금은 꽃과 잎이 함께 있고, 쟤는 철쭉인데 지금 함께 피고 있는 중이야. 진달래는 먹어도 되는 꽃이고 철쭉은 독성이 있어서 먹으면 안 돼. 그래서 화전을 부칠 때는 진달래를 사용하지." 나는 친구에게 제법 잘난 척을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동문과 연이은 성곽이 보인다. 대동문을 뒤로하고 기념사진을 한 장씩 찍는 것도 잊지 않는다. 문 안으로 들어서니 삼삼오오 사람들이 앉아서 점심을 먹고 있는 중이다. 11시가 채 안된 시각인데 벌써 막걸리에 김밥에 과일등 저마다 준비해온 음식을 펼쳐놓고 한창 먹는 중이다. "과일 먹고 갈래?" 했더니 좋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다 가운데 우뚝 서있는 은행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은행나무는 밑둥은 조금 거리를 두고 바위로 둘러쳐져 있다.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배낭을 풀었다. "커피도 한잔할까?" 좋다고 한다. 프렌치카페 두 개를 꺼내고 막걸리잔 용도로 싸주신 종이컵도 두 개를 꺼냈다. 도시락도 풀었다. 오렌지와 참외가 옹기종기 있다. ,,둘의 다방커피 맛이 좋다. “커피는 역시 믹스커피가 맛있어카페에서 마시는 커피는 원두커피를 마시지만 산에 올 때는 늘 믹스커피를 준비한다. 적당히 달달하고 적당히 부드러운 커피한잔이 온 옴을 따뜻하게 채워주고 에너지를 준다.

 

다시 오른편으로 이어진 성곽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연신 조잘거리며 걷는다. 사실 나는 산에 홀로 다니기를 즐긴다. 누군가와 함께오면 보폭도 맞춰야 하고 가고 쉬는 것도 맞춰야 한다. 가끔 대화도 해야 한다. 이렇다 보니 홀로 산행이 편하다. 사람들은 묻는다. 산에 혼자 가면 심심하지 않느냐고... 천만에. 심심하지 않다. 다른 질문도 한다. 산에 가면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아무 생각도 안 한다. 무슨 생각을 싸 들고 산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가는 것이다. 산이 있으니 가고 산이 좋으니 간다. 무엇을 얻으러 가는 것이 아니다. 산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즐거워서 가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산에 가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무와 풀 꽃들과 바람 그리고 하늘 모든 것이 자연상태 그대로이다.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은 사람 하나가 보태지는 것 뿐이다.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산길을 걷다 보면 숨이 차오르고 가슴이 뛴다. 이때 뛰는 가슴은 단지 숨이 차기 때문이다.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끼며 산에 왔음을 알게 된다. 다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뛰던 가슴은 진정이 된다. 땀이 흐른다. 몸 안에 간직하고 있던 세상으로 나와야 했던 찌꺼기 말이다. 하염없이 산길을 걷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그렇지. 그랬구나. 그러면 되겠네. 그런 의미였구나. 내려가면 전화를 해야지..."아무런 준비 없이 떠오르는 생각. 어떤 날은 그 한가지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다. 상관없다. 하루 종일 함께 놀아도 실증 나지 않는 친구다.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친구다. 왜 왔느냐고 묻지 않고 왜 가느냐고도 묻지 않는다.

 

오늘은 다르다. 노적봉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으로 나를 선동한 그 사내. 나의 스승이다. 스승에게는 나 같은 제자들이 많다. 특히 나와 함께 공부를 한 팔팔이들. 그런데 오늘은 모두가 쉬는 휴일이 아니라서 동행자가 한 명이 된 것 뿐이다. 스승의 책을 읽어본 사람에게 노적봉에 가자고 하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자연스럽게 우리대화의 주인공은 성곽도 진달래도 백운대도 아니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게 하는 우리의 스승이며 그분이 좋아한다던 산 벚꽃이며 풍욕을 즐겼다던 노적봉이다.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사랑이야기 들이다.

 

드디어 노적봉이다. 해발 716미터라고 쓰여있는 팻말에는 아래 방향으로 대동문 2.1km, 북한산대피소 0.8km라고 적혀있다. 아뿔싸. 출입제한구역 팻말도 함께 보인다. 펜스가 노적봉 진입로를 막고 있다. 출입이 가능한 경우를 친절하게 설명하여 놓았다. 2인 이상, 헬멧과 자일이 구비되고...뒷말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대강의 뜻을 보자면 두 명 이상이 암벽등반을 위한 장비를 갖추고 그것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사람만 들어가도 좋다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아무도 펜스를 넘어서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몇몇 사람들도 우리같이 망설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출입을 하지 말라는 말에 모두들 포기하고 백운대로 방향을 튼다. 우리도 백운대로 가자는 결론을 보았다. 다시 더 높은 정상을 향하여 서너 발자욱을 떼어놓는데 뒤에서 노적봉이 내 발걸음을 놓아주질 않는다. 다시 제자리에 섰다. 하염없이 바윗덩어리를 바라본다. 풍만한 여인의 가슴 같은 바위.

 

저곳을 가기 위하여 왔는데...그러던 차에 남자 두 명의 대화가 내 귀에 들어온다. “지난번까지 펜스가 없었는데, 오늘 와보니 곳곳이 출입제한구역이 되었다고 투덜 대는 소리였다. "지난번에는 펜스가 없었어요?" "그럼요. 분명 지난번까지 이렇지 않았다니까요" 그 지난번이 언제였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쨌든 그 분의 말은 펜스가 없던 것을 지금은 저렇게 발길을 막고 있다는 말이니 나는 용기를 얻었다. "우리 저 펜스를 넘어가보자. 일단 불법을 저지르는 거야. 걸리면 경찰서까지 갈라나?" 내가 앞장을 서니 그녀도 따라 나선다. 나는 펜스를 올라타서 넘었고 그녀는 펜스 사이로 들어갔다. 이럴 때 성격 나온다. 개구멍을 잘 통과하는 나이지만 펜스는 왠지 타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리가 짧으니 그냥은 택도 없고 난간 하나를 밟고 서서 그 위로 넘는다. 윗 난간에서 뛰어내리는 맛이 일품이다. 장애물을 하나 넘고 나니 길이 순탄하다. 다시 눈앞에 바위가 가로막고 섰는데 그 사이로 햇빛이 보인다. 천연동굴 비슷한 통로이다. 바위 밑은 비를 피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널찍하다. 바위 사이로 난 길을 통과하여 오른다. 통로를 빠져 나와서 넓적바위에 오르니 맞은편에 백운대가 우뚝하다. 북한산의 최고봉들이 즐비하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다. 앞을 가로막고 버티고 선 바위를 본다. 최대한 고개를 젖혀서 보아야 바위 끝과 하늘이 보일 만큼 커다랗고 경사도가 급하다. 바윗 사이로 하얀 밧줄이 내려와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 줄 같다. 암벽들 사이에 중간중간이 매듭인 밧줄이다. 저 줄을 의지해서 올라오라는 신호이다. 눈으로 보기에도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바윗덩어리에 발 디딜 틈을 찾아서 밟고 올라가면 되기는 하겠는데...일단 내가 먼저 시도해보기로 한다. 내가 성공하면 친구는 따라 올라오겠다고 한다. 하얀 밧줄을 잡고 바위에 붙어본다. 최대한 밧줄을 느슨하게 잡고 몸을 바위와 떨어뜨린다. 그래야 발을 옮길 자리를 찾을 수 있다. 바위에 너무 붙으면 몸을 움직일 수 없다. 여러 번은 아니지만 암벽의 경험을 생각하며 발 디딜 자리를 찾는다. 사실 바위틈에 아주 작은 홈만 있어도 발을 놓을 수 있다. 한 발 한 발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오르면 되는데 서너 발자욱을 떼어보니 그 다음 자리에 내 다리가 닿질 않는다. 이건 신체적인 제약이다. 짧은 다리. 밟고 올라갈 자리는 분명히 보이는 데 그 곳까지 내 다리가 닿아줄 생각을 않는다. 밧줄을 잡고 벽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어떻게 기를 써보면 올라갈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뒤의 친구는...자신이 없다. 가지 말라는 길을 왔으니 뒤에 사람들이 올 리 만무하다. 이럴 때는 남자가 필요하다. 오늘 동행하기로 한 남자가 왔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그 사람이 동행했다면 우리는 펜스도 넘지 않았을 거다. 그건 금지행위이니까. 왠지 그럴 것 같다라고 친구와 나는 눈짓으로 동의했다.

 

일단 포기다. 스승이 땀이 절은 옷을 벗고 바람에 몸을 말리던 그 자리에는 오늘은 못 간다. 다음을 기약하며 넓적바위에 퍼질러 앉았다. “우리 여기서 막걸리나 마시자. 여기까지 왔으니 스승도 아마 여기 계실거야." 일단 등산화를 벗고 양말도 벗었다. 발가락 사이로 바람이 시원하다. 산에서 쉴 때는 이렇게 양말까지 모두 벗고 바람을 씌워주면 물집이 잡히지 않는다고 친구에게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녀도 나를 따라 한다. 일단 배낭에서 막걸리 안주를 꺼낸다. 생두부. 김장김치. 다래순무침. 보온병을 꺼내 컵라면에 물을 붓고 막걸리를 딴다. 며칠 전 막걸리 따는 법을 배웠다. 그냥 마개를 열면 넘친다. 막걸리병의 몸통 윗부분을 눌러가며 돌린다. 그렇게 가스를 제거하고 뚜껑을 따면 된다고 시범을 보여주었다. 같은 방법으로 했는데 마개를 여니 막걸리의 가스방울이 마구 밀고 올라온다. 얼른 마개를 닫았다. 다시 조금 열었다가 닫고 열었다가 닫고 드디어 성공이다. 친구는 종이컵에 나는 등산용 스텐컵에 한잔씩 주거니 받거니 마신다. 맛있게 술을 마시는데 새소리가 시끄럽다. 여러 마리도 아닌 것이 마치 무슨 이야기라도 하고 싶은 듯이 곁에서 짹짹거린다. 짹짹거린다가 적절한 단어는 아닌데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동물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분명 예사로운 소리는 아니었다. 둘이 함께하는 자리에 자기도 끼워 달라는 듯이, 아니면 우리의 대화에 할 이야기가 있는 듯이 그렇게 곁에서 조잘거린다. 모습도 보이지 않는 새에게 이야기한다.

다음에 또 올께, 다음에는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올께

 

나는 마음이 동하면 생각과 행동 사이에 거리가 없는 편이다. 긍정의 시선으로 보면 실행력이 좋은 것이고, 다른 시선으로 보면 심사숙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다음의 글을 읽으면서 노적봉에 가야지생각했다.

 

마흔이 되면서 산에 더 자주 가게 되었다. 언젠가 북한산의 노적봉이 마음에 들어 주말마다 그 봉우리를 찾았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지만 아무 보조장비 없이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오르는 길은 대략 세 군데 정도 된다. 정상 바로 밑에서 약 3미터 정도의 거의 수직 벽을 타고 넘거나, 밑으로 살짝 돌아 노적봉의 옆구리를 끼고 오르거나, 서북쪽에서 바위틈을 타고 오르는 길이 있다. 어느 길이든 제법 만만하지 않은 장애물이 있어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봉우리다. 나는 이 점이 좋았다. 잠시 홀로 있을 수 있는 봉우리이기 때문에 이곳에 오르면 우선 옷부터 벗는다. 백운대가 바로 뒤에 높게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노적봉 정상에 사람 키 두 배 정도의 바위가 시야를 가져준다. 동남쪽은 시원하기 그지없이 터져있다. 옷을 모두 벗고 햇빛에 온몸을 말리며 홀로 조망하는 기분은 숨겨두고 두고두고 즐길 만하다. 누군가 다가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척을 내야 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이런 고요한 즐거움은 예사롭지 않은 경험이다. 홀로 산에 있으면 아름다움에 취하게 마련이다.” <나 구본형의 변화이야기137>

 

우리는 때론 자신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의 선동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고 행동을 하게 된다.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귀가 얇다고 한다. 나는 귀가 얇은 사람이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기꺼이 따르고 싶은 사람의 말에 선동이 잘 되는 그런 사람? 이것이 나의 매력 중 하나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벚꽃잎이 내려 앉는 산길. 편안한 동행. 하루를 온전히 행복하게 보낸 근래에 보기 드문 날이었다.

IP *.39.13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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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06:16:43 *.33.18.163

그 날 그 곳에 가셨군요. 저도 산막이옛길을 가족과 함께 걸으면서

스승님과의 추억을 되새겼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을 소중한 사람과 함께 걸어가는게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운지 미처 몰랐습니다. 

나중에 노적봉에 꼭 함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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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08:05:28 *.175.250.219

그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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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11:24:48 *.41.190.165

노적봉엔 세린이만 데려 갔다 뫠~

다음엔 미리 날 잡아 같이 가고 싶은 사람 모아서 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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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12:20:16 *.175.250.219

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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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09:34:57 *.43.131.14

노적봉에 가실 때는 저도! ^^

동하게 하는 행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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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9 19:14:30 *.48.47.253

저도 다음번엔 갈랍니다. 회사 창립기념일 제끼고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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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9 [32] 시련 10.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secret [2] 2008.12.29 283
5208 [37] 시련. 13. 다시 만날 이름 아빠 secret [3] 2009.01.27 283
5207 [28] 시련(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secret [8] 지희 2008.11.17 330
5206 칼럼 #18 스프레이 락카 사건 (정승훈) [4] 정승훈 2017.09.09 1660
5205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모닝 2017.04.16 1663
5204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4.29 1717
5203 9월 오프모임 후기_느리게 걷기 [1] 뚱냥이 2017.09.24 1746
5202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file 송의섭 2017.12.25 1749
5201 결혼도 계약이다 (이정학) file [2] 모닝 2017.12.25 1779
5200 2. 가장 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 2018.03.05 1779
5199 7. 사랑스런 나의 영웅 file [8] 해피맘CEO 2018.04.23 1789
5198 11월 오프수업 후기: 돌아온 뚱냥 외 [1] 보따리아 2017.11.19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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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6 12월 오프수업 후기 정승훈 2018.12.17 1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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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4 칼럼 #27)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 (윤정욱) [1] 윤정욱 2017.12.04 1809
5193 감사하는 마음 [3] 정산...^^ 2014.06.17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