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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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지금 검은등뻐꾸기, 소쩍새 같은 철새들이 합류했습니다. 날마다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소리들로 숲이 채워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가만히 숲에 앉아 눈을 감으면 저들 분방하게 노래하는 소리에 가슴이 일렁이는 때입니다. 지난 겨울부터 쓰고 있는 책이 있는데, 나는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풍성하고 아름다운 소리로 가득한 이 계절에 나는 안팎으로 닥쳐오는 여러 일들의 뒤엉킴 속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생명 어디에도 없어서 모든 생명은 누군가에게 닿아 있고, 또 천지만물의 끈 속에 연결되어 있음을 알면서도 훌쩍 스스로를 가두어 바깥으로 닿아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지는 순간이 자꾸 일어섭니다. 좀체 나를 가만히 바라볼 수가 없으니 뒤엉킨 매듭들을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만사 제 이치를 따르며 운행할 테니 이 상황에서 그 순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해 보고자 애쓰는 중입니다.
마음이 소란하여 예전처럼 집중하는 것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멈추고 바라보니 한 가지는 내 밖의 문제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밖의 문제 대부분은 내가 손쓸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것이 내게로 연결되어 있고 그 때문에 개입하고 행동하고 처신할 수밖에 없는데, 내 마음대로 다룰 수가 없으니 버거운 상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가만히 엎드려 바라보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내 안의 문제입니다. 나는 무언가를 물들이며 살고 싶어 하는 놈인데, 그 물들이고 싶은 것을 정말 물들일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닥쳐온 탓입니다. 물들이는 일에서 늘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 물들이고 싶은 무언가를 물들일 수 없을 것 같다는 회의가 들면 그것은 가던 길이 뚝 끊어진 느낌에 다르지 않으니까요.
풍성해진 새소리를 따라 모처럼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위태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속삭입니다. ‘나도 이 숲을 온통 소나무 빛으로 물들이고 싶었던 날들이 있었다네. 열심히 자라고 열심히 결실을 만들어 숲으로 흩어 보냈지. 저 옆에 보이는 내 자식들, 형제들을 보시게. 모두 그때의 노력이지. 그런데 더 멀리서 유심히 숲 전체를 들여다보게. 내 빛깔로 물든 영역이 얼마나 되는지?’ 바라보니 소나무의 영역은 숲 전체에서 극히 일부입니다.
소나무의 속삭임에 위로를 얻었습니다. 내 빛깔은 여기에 있는데 저 먼 바깥으로부터 먼저 물들여 올 수가 없는 것이구나. 물들이고 싶다면 반드시 나로부터 퍼져나가야 하는 것이구나. 내 빛깔이 자연스레 차고 넘쳐 흘러야 하는 것이구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숲은 또 모두를 물들이고 싶어 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 가르쳐 나를 위로했습니다. 쇠락해 가는 소나무가 들려줍니다. ‘숲이 아름다운 이유는 한 빛깔로 채워지지 않기 때문임을 이제야 알았다네, 저기 내 발 아래 자라고 있는 붉나무, 생강나무, 저 먼 곳의 층층나무, 소태나무, 개서어나무, 심지어 곁에서 지금 내 하늘을 위협해 오는 저 신갈나무까지... 숲은 저마다의 빛깔로 오직 저와 제 주변, 그리고 인연 닿는 곳 조금을 물들이고 있는 각자의 삶 때문에 눈부신 것이라네. 지금 새소리 풍성하고 깊어지는 까닭도 바로 거기 다양성의 향연 속에 있지 않던가?’
나는 이제 다시 나를 더 깊이 물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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