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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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를 배우기 시작한 내 둘째 딸, 수린아
네가 글자를 알아 버렸구나. 저 달을 달이라 쓰고 저 꽃을 꽃이라 읽는 법에 물들어 가는 구나.
수린아,
달을 달이라고 써 놓고 저 하늘의 달을 기억할 수 있겠니? 꽃이라는 글자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겠니?
달이라는 글자는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는단다. 글자는 글자일 뿐이지. 낮 동안 지치고 힘든 모든 이들이 쉴 수 있도록 말없이 조용히 밤하늘을 다독이는 저 진짜 달을 이 달이라는 글자에서 떠올릴 수 있겠니? 토끼도 잠을 자야 하고 여우도 잠을 자야 하고 수린이도 잠을 자야 하는 밤에 조용히 도닥도닥 다독여 주는 저 달을 떠올릴 수 있겠니? 저 달은 하늘에서 '얘들아, 모두 조용히 해! 지금은 자야 하는 시간이야!"하고 알려 줘야 하는데, 잠을 깨우면 안되니까 빛으로만 다독여 주는 거지. 아주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게 빛을 내는 거란다. 그래야 토끼도 여우도 수린이도 잠을 잘 수 있거든.
그런데 저 달만 밤에 잠을 자지 못해서 어떻게 하나? 달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 다독여 주다 보니 너무 피곤해단다. 그래서 달은 자꾸만 작아지는 거지. 잠을 못 자는 대신에 작아지고 작아졌단다. 그러다가 아주 작아져서 밤하늘에 보이지 않게 된단다. 밤하늘에 달이 사라지니 토끼도 여우도 수린이도 잠을 잘 수 가 없었지. 달이 없으니 무섭고 불안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던 거지. 그래서 달은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어. 그래서 달은 다시 조금씩 조그씩 커지는 거지. 그래서 달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거야.
수린아, 이제 이 달이라는 글자를 보고 달을 떠올릴 수 있겠니?
꽃이라는 글자를 잘 보렴. 꽃이 보이니?
엊그제 수린이는 아빠 배낭에 쏙 들어가 아빠 등에 업혀서 산에 갔었지? 거기서 산도 보고 물도 마시고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보고 꽃도 보았지? 그래! 그래! 온통 초록빛깔 나뭇잎으로 뒤덮힌 산에 빨갛고 또 분홍빛으로 하늘하늘 피어난 그 꽃들이 기억나니? 그 꽃을 이 꽃이라는 글자를 보며 떠올릴 수 있겠니? 수린이는 꽃냄새도 맡아 본 적이 있었지. 그래! 그래! 코를 꽃에 가까이 대고 숨을 코로 천천히 들이쉬면 꽃향기가 코로 들어와 수민이 가슴에 가득 담기지. 정말 황홀한 향기가 나지.
꽃들은 대부분 봄에 핀단다.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고 겨울이 되면 하나씩 둘씩 떨어져 씨앗이 되고 열매로 변하는 거지. 그 때는 꽃을 볼 수 없단다. 그래서 꽃을 보고 싶을 때 산이나 들에 가지 않고도 꽃을 떠올리려고 이렇게 꽃이라는 글자로 써 놓는 거지.
수린이가 이렇게 달이라는 글자와 꽃이라는 글자를 알았구나! 수린이가 글자를 배우고 읽을 수 있고 쓸 수도 있으면, 나중에는 책을 볼 수 있단다. 수린이가 책을 보게 되면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가 되어 먼 나라 섬으로 여행을 갈 수도 있고, 비행기와 로케트를 타고 하늘을 날 수도 있고 또 달에도 가 볼 수도 있지. 그래! 그래! 수린이가 제일 좋아하는 코끼리를 만나서 코끼리랑 친구하고 놀 수도 있지!
수린이가 글자를 읽고 책을 읽는 동안 토끼도 조용히 기다리고 여우도 코끼리도 모두 모두 조용히 기다린단다. 그래야 수린이가 글자를 통해 만나러 올 수 있거든. 조용히 하지 않으면 글자를 읽지 못해서 토끼도 여우도 달도 꽃도 만날 수 없지. 수린이가 조용히 글자를 읽으면 토끼도 여우도 달도 별도 모두 모두 수린이를 만날 수 있단다. 그래서 글자 속에서 토끼랑 여우랑 달이랑 꽃을 만나면 크게 웃으면서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면서 반갑다고 노래를 부르는 거지. 맞아! 맞아! 저번에 산에 갔을 때 수린이가 노래를 부른 것처럼 말이지. 너무 좋아서 그런 거지.
아! 행복해요. 글자로 친구들을 만나서 수린이는 너무 행복해요. 그런 수린이를 보고 있으니 아빠도 너무 행복해요!
2013-05-20
坡州 雲井에서
유형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