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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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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1일 08시 55분 등록

연휴3일의 마지막 날. 아이는 내게 원주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다. ‘길이 많이 밀릴텐데...’생각한다. 다른 날은 저희들끼리 잘도 가더니만 이번에는 굳이 자동차로 데려다 달라고 하는 아이이다. 3. 일 년 전쯤부터 시작한 미술공부. 미술공부라고 하기보다는 미대진학을 위한 미술학원 다니기이다. 그림실력은 졸라맨 수준인데 미대를 가겠다고 한다. ‘저놈이 학과공부를 하기 싫으니까 또 수를 쓰는구나생각하며 아이의 말을 들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장래희망을 물어보면 늘 변화가 있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교 시절에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꾸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나는 마치 아이가 어른인양 주문을 하곤 한다. 오십의 나이에도 잘 모르고 살아가는 주제에 아이에게는 나보다 더 정돈된 꿈을 원하는 꼴이라니…우리의 둘째 아이. 올해 고3이다. 그 아이의 장래희망은 돈 많이 버는 일을 하는 거다. 남들 연봉을 한달에 벌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는 아이이다. 정작 아이가 원하는 일을 들어보면 돈하고는 거리가 있는 경찰, 형사 이런 이야기를 하다가 언젠가는 멀티샵을 하겠다고도 하고...수시로,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남편은 가끔 말한다. "우리아이들은 왜 공부를 못하지?" "글쎄...나도 이해가 잘 안가"나의 답이다. 누구를 닮아서 그렇겠는가. 우리의 유전자를 타고나서 그럴 것이고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습()을 만들어주지 못한 부모 탓이 아니겠는가.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을 이유가 없다. 이런 대화를 하면서도 내가 믿는 한 구석은 있다. 어른들의 잣대, 사회의 잣대로 분명히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나 미래에 부모가 해 줘야 하는 애프터서비스는 크게 필요치 않을 거란 믿음 이다. 누군가는 맞벌이 부부가 가지는 장점이라고 한다. 아이들을 살뜰히 챙겨주지 않으니 스스로 챙기던지 아니면 학교에서 선생으로부터 꾸지람을 듣는다. 그 몫을 스스로 감내해야 하니 어떻게든지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한다. 혼이 나던지 아니면 본인이 챙기던지.

 

이런 아이가 고2 초반에 미대를 가기로 했다고 나에게 통보를 한다. ", 또 공부하기 싫어서 이러는 것 아냐!" "아니야. 나는 줄곧 디자인 공부를 하고 싶어했다고. 그런데 엄마가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아서 갑작스런 말로 들리는 거야! 중학교 때도 엄마한테 말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신중하게 들어주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기초가 있어야 하는 주요과목들에 부담을 느끼던 아이이다. 특히 수학공부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 이런 실랑이를 하던 차에 담임선생과 면담을 하러 갔다. 아이의 담임은 다행히 미술선생이다. 홍대 대학원을 나온 여선생. 나이는 내 나이와 엇비슷한 연배이다. 나는 아이에 대한 의심의 마음을 갖은 채로 상담에 임했다. 담임선생은 말한다. "일단 여름 방학 때 미술학원에 다니게 해 보세요. 보통 미술학원이 방학에는 집중교육을 시키니 아마 본인이 하기 싫은 것을 임시방편으로 이야기한 거면 못 다닐 겁니다. 하루에 7-8시간을 흥미 없는 그리기 작업에 견뎌낼 아이는 없습니다. 그렇게 지켜보고 난 다음에 진로는 결정해도 늦지 않습니다. 대신 학원을 어머니가 직접 투어하세요. 아이의 시간도 절약할 겸 어머니도 공부하시고. 그 후에 괜챦은 곳으로 아이를 데리고 가보시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미술전공을 하고 미술을 가르키는 선생이지만 진학에 관하여는 잘 모르겠다라고 아예 솔직히 말을 한다. 학교에서 정보를 알려주기 힘들 정도의 대학진학시스템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꼴이람...'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라고 하는 담임선생을 붙들고 더 말해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아이와 함께 학원투어를 시작했다. 내 보기에 괜챦은 곳을 골라서 아이를 데려가라고 담임선생은 말했지만 아이는 이미 자신이 가고 싶은 학원을 물색해 놓은 상태였다. 아이보다 내가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니 아이와 함께 학원투어를 시작했다. 일단 아이가 가고 싶다는 학원엘 가보고 다른 곳들을 둘러보고...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상담을 한 결과는 놀라웠다. 미대를 가고자 하는 학생에게 정작 미술실력은 아무래도 괜챦다. 학과성적만 어느 정도 뒷받침되면 된다. 다른 모든 것은 학원에서 만들어준다. 그러니 아이가 열심히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2때 제일 많이 시작한다. 미술공부는 대학가서 다시 하는 거다. 내용의 골자는 이랬다. 내가 알기로 미대 중에 제일 이라고 하던 H대는 아예 실기테스트가 없어졌다라고 했다. 참 이상도 하지. 내가 아는 상식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대목이다. 한 두 군데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니 진실인가보다. 이렇게 시작한 미술공부를 아이는 거뜬히 그 해 여름을 견뎌냈다. 학원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하기 싫은 공부를 하고 오는 아이의 얼굴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유난히 학원다니기를 싫어하고 학원의 비 합리성을 논하는 아이였는데 아무런 말 없이 잘 다니는 것을 보니 아이의 말대로 미술공부가 그냥 해본 말을 아닌듯하다. 이제 공부를 시작한지 일년이 되어간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고 휴대폰바탕화면에 깔고 다니라며 카톡으로 보내준다. 내 눈에는 제법이다. 졸라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럴듯한 그림들을 주곤 한다. "네 그림실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니?" 나의 질문에 아이의 대답은 그리 신통치는 않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열심히 해보자" ""

 

지난달부터 주말이면 실기준비를 위한 테스트라며 대학에서 시험을 본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갈때는 저희 친구들끼리 모여서 가곤 했다. 이번에는 원주에 있는 연세대라고 한다. 3엄마라고 해봐야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학원비 주는 일, 저녁 늦게 오면 간식 챙겨 주는 일 정도가 다인 불량엄마라 오랜만에 하는 부탁을 아니 들어 줄 수가 없다. "형원아! 삼일 연휴라 길이 많이 밀릴텐데 고속버스 타고 가면 안되나? 엄마가 같이 가 줄께" "그럴꺼면 뭣 하러 엄마가 같이 가나?" 아이의 말이 맞기도 하다. 버스는 저희들끼리 가도 된다는 말이다. 친구2명과 함께 가기로 했다고 했다. 아마 친구들한테 이미 "우리 엄마한테 말해서 데려다 달라고 할 께" 이렇게 말을 해 놓았을 거다. 며칠 전부터 아이의 눈치를 보며 구슬러 보았지만 요지부동이다.

 

일요일 아침 고3수험생 세 명을 태우고 출발했다. 원주까지는 120km. 두 시간 정도 걸리겠다 싶었는데 출발시각기준 두 시간 만에 도착했다. 타자마자 아이들은 이어폰을 꼽더니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든다. 얼마지 않아 세 놈 모두 잠이 들었다. 고속버스를 태워서 보내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휴게소에 잠시 들르겠느냐고 물어봐도 그냥 가자고 한다. 깨우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연대 원주캠퍼스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아이들이 한 손에는 커다란 프라스틱박스(물감,붓 등 그림도구용) 다른 손에는 노란 물통을 하나씩 들고 삼삼오오 건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길가에는 **미술학원 이름이 있는 미니버스들과 자가용들이 즐비하다. 아이들을 건물 앞에 내려놓으며 다섯 시간 후에 내린 자리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일요일 오전 교정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맞기에도 그렇고 우산을 쓰기에도 그런 정도의 비다. 차를 세우고 호숫가를 한 바퀴 돌아본다. 홀로 족 남자 몇 명이 보인다. 저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들임에 틀림없다. 또 다른 무리들은 부부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 그렇게 세 명의 가족이다. 이들은 언니나 오빠 누나나 형과 함께 동행한 가족들이다. 그러고 보니 여자 혼자인 나 같은 사람은 안 보인다. 그렇지…보통 이런 일은 남자들이 하는 일인데 싶다. 우리집 남자는 좀 특별함을 인정한다. “너는 특이한 사람하고 사는구나”라고 스승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도 특이하긴 마찬가지이니 쌤쌤이다.

 

다섯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노트북을 챙겼다. 조용한 카페에서 내 할 일을 하리라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둘러보니 만만한 곳이 보이질 않는다. 가까운 거리에 토지문화관이 있다. 사고(思考)하는 것은 능동성의 근원이며 창조의 원천입니다. 그리고 능동성이야말로 생명의 본질인 것입니다. 하여 능동적인 생명을 생명으로 있게 하기 위하여 작은 불씨, 작은 씨앗 하나가 되고자 하는 것이 <토지문화재단>설립의 뜻입니다. 재단 설립자 박경리선생의 말이다. 이 곳은 선생의 옛집과 뜰, 집필실을 원형대로 보존되어있다. 그분의 유품들이 전시되어있고 창작을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는 곳이다. 전시관 입구에 “노동글쓰기는 삼발이 같은 것이었다. 글을 쓰다 막히면 밖에 나가 풀을 뽑고 그러다 보면 생각이 떠오르고 막혔던 것이 뚫리는 것이었다.”라는 글이 보인다. -생명의 아픔 61-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탱하는 다리가 있다. 선생에게 노동과 글쓰기가 그것이었다면 나는 무엇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생각을 하며 전시관을 둘러보다가 문학공원을 나섰다. 다음 목적지는 치악산. 네비게이션을 찍어보니 32km이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나에게 소일해야 하는 시간이 다섯 시간이나 되니 일단 출발한다.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치악산은 한가하다. 특히 비 오는 일요일이라 그런지 주차장이 휑하다. 차를 세우고 산채정식을 한다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홀에는 불이 꺼져 있는 상태이고 학생으로 보이는 처자가 컴퓨터를 하고 있다. “식사되나요?” “몇 분이세요?” “네, 혼잔데요” 식사는 된다고 한다. 홀을 지키던 처자는 “엄마!”하고 주방 쪽을 향하여 소리친다. “곤드레더덕밥 하나요!” 주방안쪽에서 처자가 부르던 엄마라는 분이 나오면서 “곤드레밥은 돌솥에 하는 거라 시간이 좀 걸립니다. 괜챦으세요?”고 묻는다. 어차피 나는 시간이 널널하다. “괜챦습니다”

 

나는 컴퓨터 앞으로 돌아간 처자에게 묻는다. "혹시 잔 술도 파나요?" 산에서는 막걸리나 동동주를 잔으로 팔기도 하니까. 메뉴에는 잔술에 대한 안내는 없다. "잔으로 파는 술은 없는데요. 드시다가 싸가지고 갈 수 있게 포장은 해드립니다" ‘이 학생 장사를 아네…싶다. "옥수수동동주 하나 주세요" 한 두잔 마시고 싸가지고 갈 요량이었다. 반투명 흰 통에 담긴 옥수수동동주 한 병과 타원형으로 길쭉한 흰 접시에 배추겉절이 그리고 고동색 막걸리잔 하나를 가져다 준다. 술을 따라보니 노랗다. 빈속에 막걸리 한잔이 목을 타고 내려간다. 짜릿하다. 거푸 두 잔을 마셨다. 한 두시간 후면 아이가 기다리는 학교로 돌아 가야하고 운전도 해야 한다. 한잔을 더 따르고 마개를 닫아놓았다. 시간이 좀 걸린다던 곤드레밥이 나왔다. 양념장에 비벼서 먹는 곤드레밥은 강원도에 오면 어느 곳이나 대부분 있는 메뉴이다. 돌솥에 단호박과 더덕 새송이버섯 은행등과 함께 곤드레나물을 얹어서 지은 밥이다. "일 분 정도 뜸을 들여서 드세요" 돌솥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한다. 따라놓은 술 한잔을 마저 마시고 솥을 여니 고소한 기름냄새와 곤드레와 어울린 각종의 야채들이 다소곳이 숨을 죽이고 있다.

 

홀로 밥 먹는 것. 홀로 여행하는 것. 홀로 걷는 것. 공연보기.영화보기. 전시관 둘러보기 등등. 나는 혼자 하는 것에 익숙하다. 아니 익숙하다기보다 거리낌없이 할 수 있다. 함께하면 좋은 것들이지만 혼자 하는 것도 괜챦은 품목들이다. 그 중에 혼자 못해본 것이 술 마시기였는데 오늘은 홀로 술 마시기를 경험한다. 산에서 마시는 막걸리는 술이라기 보다는 밥에 딸리는 반찬과 같은 의미이다. 다른 술에 비해 배도 부르고 에너지 보충에도 좋은 막걸리가 언제부턴가 산행에 있어서 빠지지 않는 메뉴가 되었다. 산 정상에 올라서 마시는 술이 제 맛이기는 해도 오늘 같은 날도 술이 땡기는 날이다.

 

갖가지 반찬과 함께 밥을 먹고 있는데 식당 문이 빼꼼히 열린다. "식사 되나요?"묻는다. 무의식에  돌아본다. 나와 비슷해 보이는 연배의 여자다. 식사시간이 지난 식당이라 묻는 것이리라. ""하고 좀 전의 그 처자가 답을 한다. 두 사람이 들어선다. 160센티가 채 되어 보이지 않는 키에 사십대 중반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여자 두 사람이다. 두 사람 모두 등산복차림에 배낭을 매었다. 내가 앉은 자리는 의자가 있는 식탁인데 그들은 좌탁에 자리를 잡는다. 산채정식을 시킨다. 그리고는 메뉴판을 둘러본다. 아마도 뭔가 마실거리를 찾는 모양이다. 메뉴를 둘러보며 동동주의 이름을 하나씩 읽고 있는 중이다. 밥을 먹다 말고 나는 말을 꺼냈다. "저어...괜챦으시면 제가 마시던 동동주가 반 통 이상 남아있는데 옥수수동동주입니다. 이것을 드시는 것은 어떠세요? 실은 잔술을 팔지 않아서 한 통을 주문했는데 남아서요." 메뉴를 둘러보던 여자가 친구인듯한 동행에게 눈짓을 한다. 동의를 구하는 중인모양이다. 두 사람이 의견을 같이졌는지 좋다는 표시를 한다. 나와 그녀들 중간쯤에 서 있던 학생은 내가 주는 동동주통을 그녀들 식탁으로 옮겨준다. "동동주 값의 50%는 저희가 계산 할께요"한다. "아닙니다. 그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저 혼자 마시지 못하니 싸가지고 갈려고 했던 것이니 괜챦습니다." 자신들도 한 통을 다 마시기에는 많다는 생각을 하던 차라고 했다.

 

나는 식사를 거의 다 해가고 있고 그녀들은 소곤소곤거리며 밥을 먹고 있다. 멀지 않은 거리인데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용한 사람들인 듯하다. 아줌마 둘이 모이면 대개는 목소리가 커지게 마련이고 아무도 없는 식당에서 들릴 법도 한데 그렇지가 않다. 곤드레밥 만원, 옥수수막걸리 오천원. 합이 만오천원이다. 아침에 남편에게 받아가지고 온 오만원권을 청바지 주머니에서 꺼내서 계산을 했다. 동동주가 맛있다며 통을 들어 보여주는 걸로 인사를 대신한다. "맛있게 드세요"인사를 하고 식당을 나섰다.

 

치악산은 처음인 산이다. 악산으로 유명한 산이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나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곳이다. 아이가 원주로 가야 한다는 말을 했을 때 생각이 들었다. 기다리는 동안에 치악산에 가봐야겠다. 산행을 할 시간은 되지 않지만 맛있는 산채집에서 밥도 먹고 책을 보다가 글도 써야겠다. 나의 계획 중에 책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은 하지 못했지만 맛있는 밥에 홀로 마셔보는 술은 성공이다. 치악산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나는 한번도 와보지 않은 산이지만 대학시절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무작정 배낭을 메고 전국에 있는 산을 누볐다고 했다. 가을학기 기말고사를 끝낸 어느 날 치악산을 찾았는데 무리를 해서 그랬는지 인대가 끊어지는 사고가 났고 그 몸을 해서 이곳을 올랐었다는 이야기. 그때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탓에 지금도 산행을 하다 보면 오른쪽무릎이 좋지 않다고 했다. 함께 공유한 일이 아니지만 치악산은 내게 한 남자를 생각하게 하는 산이기도 하다.

 

몇 주 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세계팝업아트 전"이 열렸다. “종이로 펼치는 입체 조형의 세계”라는 슬로건을 단 전시이다. 세계적인 팝업 아티스트들의 방한으로 독특하고 개성있는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전시였다. 나는 팝업아트라는 것을 처음 들었다. 친구에게 걸려온 전화에 그냥 동행을 했었는데 전시관을 둘러보니 아이들의 그림책에서 간간히 봤던 것이었다. 책을 펼치면 그 사이에 입체로 펼쳐지는 산, 사람, 고성(古城)...다양한 모양의 종이들이 입체로 살아난다. 누워있던 책장에서 일어서는 종이로 펼쳐지는 세계. 팝업아트의 세계는 예술작업뿐 아니라 광고, 잡지 일러스트, 패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과 산업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분야라고 했다.

 

전시관 초입에 내 눈에 띄는 작품이 보인다. 어린 왕자이다. 어린 왕자가 살고 있는 B612소행성. 그곳에는 화산이 세 개있다. 화산의 분화구를 청소하고 있는 모습의 왕자가 보인다. 청소중인 어린 왕자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는데 동행했던 친구가 다가와 묻는다. "어린 왕자 좋아해요?" 그를 바라본다.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어린 왕자....내가 좋아하는 책이다. 누가 당신 인생의 책은 어떤 것인가요? 하고 물으면 첫 번째로 생각나는 것이 어린 왕자이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지만 내게 어린 왕자는 인생을 바꿨다기보다는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어린 왕자가 그려진 일기장을 쓰고 메모를 위한 소형노트에 어린 왕자를 그려서 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책 선물을 하게 되는데 처음으로 건네는 책이 이 책이기도 했다. 몇 권의 어린 왕자를 선물했던가...누구나 읽었음직한 책이지만 사주고 싶은 마음이 동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 책을 선물하곤 했으니까.

 

"어린 왕자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남아있나요?" 아트 전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물어온다. "장미, 여우, 길들인다는 의미...이런 것들이 생각납니다." 나는 디테일에는 매우 약한 사람이다. 여행을 하면 그곳에서 보았던 장면들은 생생한데 이름도 잘 생각이 나질 않고 소소한 것들은 모두 희미한 배경 속으로 묻히고 내 마음에 남았던 특정 장면들만 떠오른다. 이것이 직관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누군가가 말해주었다. 요즘은 디테일을 보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잘 되지 않는 것은 여전하다. 어린 왕자의 많은 내용 중에 유독 밀밭과 여우 그리고 장미가 생각나는 것은 여우가 말하는 길들인다는 의미에 꽂힌 탓이리라.

 

여우는 말한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내 생활은 햇빛이 드는 것처럼 환해질 거야. 난 다른 모든 발소리와는 다른 한 가지 발소리를 분간할 수 있게 될 거야. 다른 발소리를 들으면 난 얼른 굴 속으로 들어가겠지. 그렇지만 네 발소리를 들으면 마치 음악 소리를 들은 듯이 굴 밖으로 뛰쳐나올 거야. 그리고 저길 봐!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먹지 않아. 밀은 나한테 아무 소용이 없어. 밀밭을 보아도 머리에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거든. 그건 서글픈 일이지! 하지만 너는 금빛 머리카락을 가졌어. 그러니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멋질 거야! 금빛으로 무르익은 밀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럼 난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소리도 사랑하게 될 거야..."

"부탁이야...나를 길들여줘!"

"누구든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는 알지 못하는 거야"

"사람들은 이제 시간이 없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어. 상점에 가서 다 만들어진 물건들을 사는 거야. 하지만 친구를 파는 상점은 없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친구가 없어. 친구를 갖고 싶으면 나를 길들여줘!"

 

어린 왕자에게 여우가 하는 말이다.

 

내가 길들인 사람. 내가 길들은 사람.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길들여 살아왔는지. 길들이면서 살았는지. 이 대목이 왜 내 마음에 들어와 앉았는지 자세히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길들인다는 것의 가치에 대하여, 사람들과의 인연에 대하여 의미를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시간이다. 선택을 한다는 것은 하나를 놓고 다른 하나를 잡는다는 의미이지. 놓아 버린 선택은 기회비용이 된다. 어떤 것을 기회비용으로 삼느냐가 그 사람의 철학이 되겠지. 삶을 살아가는 자신만의 철학. 가끔 오늘 같은 여분의 시간이 주어지면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지나온 시간의 마디마다 내가 선택한 것들. 선택한 사람들.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덕분에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라는 생각. 시절인연에 따라 지금 나는 치악산에서 동동주를 마시는 것이고, 한 통의 동동주를 모르는 두 여인들과 나누어 마시는 것이기도 하리라. 시간이 흘러 다시 치악산을 생각하면 연대 원주캠퍼스를 가자고 했던 나의 아들과 치악산에 아픈 상처를 기억하는 또 한 사람과 동동주를 나누어 마시던 그 여인들이 기억날 것이다.

 

"어린 왕자 좋아해요?" 하면서 비싼(?)책을 사주던 친구도 생각나겠지.

어린 왕자를 선물은 해 봤어도 내게 그 책을 선물해준 친구는 처음이니까.

 

건물은 시험을 마친 아이들을 밖으로 쏟아내고 있다. 세 놈을 태우고 서울로 출발했다. 어라…이놈들 봐라. 십 분도 되지 않아 모두 골아 떨어졌다. 연휴의 고속도로는 밀렸다. 여주휴게소까지는 가야 하는데…졸음이 쏟아진다. 휴게소로 들어서며 아이들을 깨운다. “가서 뭣 좀 먹고 와라. 배 고플 테니” 체크카드를 건네주며 “요즘 엄마 돈이 없으니 너무 많이 쓰지는 마라”도 잊지 않는다. 아이들을 보내놓고 나는 잠이 들었다.

 

원주라는 도시. 어린 왕자.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 나의 아이들. 박경리문학관. 옥수수동동주. 치악산

삼일 연휴의 마지막 날에 내가 길들인 것들이다.

IP *.175.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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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2 16:18:18 *.43.131.14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좋네요. 형님

점점 더 글이 길어지고, 긴 글을 편안히 쓰고 계시구나 싶어요.

어디서 이 글을 쓰셨을까 생각해봐요. 직장 앞 찻집, 새벽의 집에서 새로산 노트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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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2 16:59:25 *.216.38.13

결국, 음주운전의 징후가.... ㅋㅋㅋ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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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3 07:57:26 *.131.89.236

길들인다라는 말에 끌려 보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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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4 13:48:04 *.27.104.238

길수씨~

산 Life라는 제목에 끌려 읽어봤어요.

저랑 비슷한 산 중독에 빠진 것 같군요.ㅋㅋ

몇 년전부터 틈만 나면 산으로 가고 싶은 증상에 시달리고 있어요.ㅋ

저도 혼자 산에 가는 걸 좋아하지만

길수씨하고는 한번 같이 가고 싶네요.

노적봉이던, 자운봉이던, 수락산이던...

막걸리는 길수씨가 준비하고

저는 노래 한자락 준비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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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28 19:47:34 *.62.164.120
평생 함께가는 존재들 - 가족, 산, 막걸리 그리고 책.
제 큰 딸이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데 나중에 고교생이 되어도 그 존재들은 제 곁에 있겠군요. 안심이 됩니다. 아! 자식은 언젠가 품을 떠나겠지요~ ^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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