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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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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3일 10시 22분 등록

신화의 힘


조셉캠벨, 빌 모이어스 Joshep Campebell with Bill Moyers/ 이윤기 옮김. 고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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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저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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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화는 나의 운명

조셉 캠벨 Joseph Campbell. 1904~1987.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조셉 캠벨이 어느 대담에서 ‘千一夜話천일야화’의 한 대목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이런 대목이다. ‘

어떤 사람이 밭을 갈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쟁기가 무언가에 걸렸다. 그는 무엇이 걸렸는지 보기 위해 

더 깊게 파고들어가다가 고리를 하나 발견했다. 그 고리를 들어올린 순간, 그는 보물이 가득한 동굴을 발견했다’.

 

캠벨은 신화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본다. 

그리고 그 동굴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으로 더 깊게 파고 들어가댜 하는 것이다. 

캠벨의 책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의 초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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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04년 3월 2일 뉴욕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1910년 남동생 찰리와 함께 아버지를 따라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버팔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를 보러 갔다. 그 순간 아메리카 원주민이니 인디언들에 대한 평생에 걸친 관심이 촉발되었다. 그 날 본 인디언의 토템 포올과 가면 그리고 기둥에 매료당했다. 나는 미국 인디언 문화에 대한 책들을 즐겨 읽었고, 뉴욕에 있는 자연사 박물관을 자주 찾아갔다.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겼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했다.

바로 이 공부가 캠벨을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1913~1918년 나의 가족은 뉴욕의 뉴 로셀로 이사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해 굉징한 관심을 가졌던 캠벨은 공립 도서관 어린이 서가에 있는 인디언 신화에 관한 책을 전부 다 읽었다. 11세에 성인 도서 서가에 출입할 것을 허락받고 공부를 계속해 나간다. 14세에 병이 걸려 한동안 집안에 머물며 자연 과학을 공부한다.

1919년 뉴 로셀의 집에 화재가 발생했다. 나의 할머니가 숨지고 내가 수집한 인디언에 관한 책이나 유물들이 불터버렸다.


1919~1921년 코네티텃 뉴 밀포드에 있는 캔터베리 예비 학교에 입학하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은 생물학이었다.


1921년 다트머스 칼리지에 입학하여 생물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다. 2학년 때, 나는 멜레코우스키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로망스 The Romance of Leonardo da Vindi'를 읽고 인문학에 눈을 뜨게 되고, 콜럼비아 대학 영문과로 전입했다.


1924~1926년 육상팀이 주자로 나는 0.5마일 경주에서 콜롬비아 대학과 뉴욕 시의 기록을 세웠다. 또한 대학의 재즈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배를 티고 유럽으로 가는 길에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 동양철학의 세계에 이끌린다.

1925년 콜럼비아 대학에서 문학 학사학위를 받고 샌 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AU 선수권 대회에 뉴욕 체육 동호회 육상팀과 함께 출전했다. 하와이에도 방문하고 워싱턴의 아카데미에서 열린 인디언 로데오에도 참가한다.

1926년 콜럼비아 대학으로 돌아와 육상팀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중세문학을 공부한다. 성배에 관한 석사논문 ‘가슴 아픈 일격 The Dolorous Srtoke'을 쓴다.

 

2편에 계속

Ⅱ.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알리는 글: 거의 모든 대화는 캠벨의 글이다. 캠벨의 말이 아닌 경우, 모이어스라고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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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자 빌 모이어스의 말

14. “모든 고통의 씨앗은 가장 중요한 인간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유한성이랍니다.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 이것을 부인할 도리는 없는 것이지요”.

<이그쥬가르쥬크 Igjugarjunk>란

북부 캐나다 카리부 에스키모의 샤만이었소. 이 사람은 유럽 손님들에게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 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캠벨-

 

msn036.gif 인간의 고통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거나 잃어버릴때 나타난다. 어릴때 가장 소중히 아끼는 물건이 없어졌을때, 상실감을 느낀다. 예를 들어, 작은 이모가 밍크코트와 그에 어울리는 밍크 모자를 사주었다. 나는 그 옷을 좋아했고 특히 모자는 나의 심벌이었다. 바람이 쌩쌩 불고 추운 겨울날 시골에서 나는 검정밍크와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다.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아마 그 옷과 모자를 4~5년정도 줄기차게 입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엄마가 그 옷과 모자를 버렸단다. 왜? 너무 적어서 그만 입어도 될것 같아서... 나는 그때 생애 처음 상실감을 느꼈다. 그 기억이 상실감의 최초였다.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는 물건이 없어져 버린 상실감으로 인해, 아마도 나는 한달정도 가슴앓이를 했던 기억이다.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을 버리는 것은 쉽다. 그러나 소중히 여기는 것을 버리는 것은 가슴이 쓰리는 일이다. 버릴 수 있을 때 새로운 것이 들어온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버린다는 것은 잊고 싶은 과거를 지우는 것이요,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물건 뿐만 아니라. 기억도 마찬가지다. 좋은 기억은 추억이 되지만, 나를 힘들게 한 기억은 상처가 된다. 상처는 기억하면 할수록 깊은 생채기를 낸다. 생채기를 내기보다는 직면하여 그 기억을 모조리 쓰고 용서하고 태워서 날려보낸다.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어둡고 딱딱한 것을 뜯어내고 그 자리에 하얀 색으로 도배한다. 새로운 소중한 체험이 들어올 자리를...

 

16. 법의 권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강제력 이상이 어떤 힘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장의 권능이 의례화 되고 신화화되는 것이다.

 

16. 우리의 컴퓨터, 우리의 연장, 우리의 기계만으로는 넉넉하지 못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직관, 우리의 참 존재에 기대서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 컴퓨터를 사용하려면 전원을 켜고 패스워드를 치고, 화면이 켜지는 데까지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나의 직관은 언제든지 가능하다. 마음의 문을 열고 모든 것을 관찰하고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면서도 꿈속에서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나의 직관은 마음을 여는 데서분터 시작한다. 본다는 것은 관찰하고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16. 영웅이 歷程역정(겪을역, 단위정)을 통해서 얻는 직관은 이성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랍니다. 영웅의 역정은 이성을 부인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할 수 있지요. 부정적인 열정을 극복함으로써, 영웅은 우리에게도 우리 내부의 비합리적인 야만을 극복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답니다.

 

17. 인류는 <자기의 내부에 식인종적이고 색정적인 열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탄한 바 있다. -캠벨-

자기 발견의 삶으로 설명한다. <자기 내부에 자기 운명의 실을 풀어낼 힘이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는 그렇게 합리적일 수 없는 것이지요.>

 

msn036.gif 남에게만 식인종적이고 야만적인 야수성과 잔인성이 있는줄 알았다. 남에게서 보이는 것은 내안에 그러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보이는 거였다. 나만 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고 , 나보다 많이 다른 사람은 특이한 사람인줄 알았다. 나의 무지였다. 내 마음속에는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잔인성과 악에서부터 평범함, 남을 위해 베풀줄 하는 자비의 고귀한 모든 것들이 내 뼈속 깊은 곳 DNA 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어느 순간에 무엇을 끄집어 사용할지, 아니,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나”를 형성한다. 인류가 행한 모든 생각과 행동속에서, 나의 무지로 끄집어 내지 못했던 것들도 있을 것이다. 내 안의 광맥을 찾으려면, 경험을 하고 책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switch on 시키다 보면 알아갈 것이다. 나의 삶은 나를 끊임없이 알아가는 과정이고, 내 안의 광맥을 캐내는 일이다.

 

17. <求道구도의 궁극적인 과녁은 자기(영웅)만을 위한 해탈이나 몰아沒我가 아닌, 동아리를 섬기기 위한 지혜와 권능을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

캠벨에 따르면, 고명한 구도자와 영웅은 다른 점이 많은데 그 다른 점 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은 구도자는 자기만의 삶을 누리기 위해 도를 닦지만 영웅은 사회의 구원을 위하여 행동한다는 점이다.

 

17. 조셉 캠벨은 인생을 모험이라고 확신한다.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오?>

봉직하던 대학의 이사진이 좁으장한 학교의 커리큘럼으로 자기를 잡아 두려 했을 때. 캠벨이 내뱉은 말이다. 그는 박사 과정을 밟고 박사가 되는 것도 마다하고 책의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그는 책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양을 읽으면서 평생을 산 사람이다. 그는 문화인류학, 생물학, 철학, 예술, 역사, 종교의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세계로 난 가장 확실한 길은 인쇄된 책의 갈피에 나 있음을 깨우쳤다.

 

msn036.gif 나보다 먼저 간 위대한 사람을 만나는 길은 그 사람들이 써놓은 책을 읽는 일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 글을 읽고 생각할 수 있음은 나에게 크나큰 축복이다.

새로운 세계를 알수 있는 것도 책을 통해서이다. 나를 키우고 성장시키는 것은 책이다.

 

18. 캠벨은 뉴욕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면서 인디언의 토템 포올과 가면에 매료당한다. 소년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상념에 잠긴다. 누가 만들었을까? 대체 무슨 뜻일까? 그는 겨우 열 살 때 이 방면의 공부를 시작한다. 바로 이 공부가 그를 신화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석학이자 우리 시대의 가장 화끈한 스승으로 만든 것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그는 민담과 인류학에 나오는 해골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

 

20. “운명은 앞서서 뜻있는 자를 인도하지, 뜻있는 자의 멱살을 잡아 끄는 것은 아니라오”

-로마 속담-

 

msn036.gif 운명이 나를 인도하는 것과 잡아끄는 것은 큰 차이지. 잡아끌어들인다 하여 마음에도 없는 것이 보일리도 없지. ‘인도’함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고 갈망해야만이 언뜻 스치는 바람이나 떨어지는 나뭇잎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트이는 것이지. 그래서 ‘인도’하는 것과 ‘잡아끄는’것의 차이가 바로 이것이지.

 

20. 목사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말로써 사람을 믿음에 이르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오. 자기가 보았던 빛을 신도들에게 넌지시 보여 주기만 하면 될 텐데 말이오.

 

20. “이 세상에서 기왕에 알려진 것, 기왕에 사유된 것을 알고,

다음에는 이 지식을 참되고 신선한 사상의 흐름으로 창조하는 행위“

-매튜 아놀드

 

msn036.gif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했다. 인류가 쌓아놓은 많은 지식과 경험들을 어떻게 나의 것으로 버무리는냐는 것이 창조행위이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된다. 지식을 섭렵하고 경험하다 보면 나만의 것을 새로이 만들어낼 수 있을 거다.

 

20. 바로 캠벨이 그렇게 했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노라면-정말 귀를 기울인다면-의식이 새로운 생명으로 되살아나고 상상력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놀라운 경험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가 보기에

<세계 신화가 지니는 공통되는 주제는, 심오한 원리를 통하여 중심에 이르려는 인간 정신의 욕구를 지향> 한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경험)을 찾는 것이지요>

 

msn036.gif 오래전에 20대 방황하던 시절, 스물살 이전은 나의 삶이 아니었다. 그저 부모가 학교가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로봇이고 수동적인 삶이었다. 20대 이후는 나의 생각을 가지고 좌충우돌하면서 넘어지고 생채기도 내보고 가시에 스스로 찔려도 보면서 나를 알아갔다. 그당시, 나는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었다. 최근 몇 년사이 나는 알았다. ‘나에게 삶의 의미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 그까짓것 몰라도 돼. 설령 내가 삶의 의미가 없다고 한들 무슨 대수야.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면 되는 거지. 가슴뛰는 순간을 느끼면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다.

 

21. 캠벨에게 신화는 그 가락의 내력과 이름을 알지 못하면서도 맞추어 춤을 추는, <우주의 노래>, <천구天球의 가락>이다.

 

21. 옛 모듬살이는 일찍이 ,삶이 본질은 삶이라고 하는 것이 죽이는 것과 먹는 데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신화가 다루어야 하는 위대한 신비가 바로 이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냥이라는 행위는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供犧祭(이바지할 공, 희생할 희, 제사제)가 되고, 사냥하여 다시 한 번 제물이 되어 달라고 비는 마음으로, 죽은 동물의 영혼과 화합을 기도하는 일련의 몸짓을 보인다. 이 경우 공희제에 등장하는 동물은 저승에서 온 사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캠벨이 요약하는 바에 빠르면, 이로써 <사냥꾼과 사냥감이 된 동물 사이에는 참으로 불가사의하고도 놀라운 일종의 협약이 이루어진다. 바로 이 협약을 통하여 이 양자는 죽음과 매장과 재생이 신비스럽고 영원한 주기속에서 하나의 동아리가 된다. > 이들의 예술-이들이 그린 암벽화-가 구비문학은 오늘날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는 충동에 모습을 부여하게 된다.

 

 msn036.gif성경에서나 신화에서 동물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모습속에 어떤 상징이 들어있을까를 늘 궁금해했다. 이제는 알았다. 캠벨의 책을 읽으면서, 왜 모든 인류가 동물을 잡아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가를. 동물을 잡아 죽여 희생시킴으로써, 동물을 잡아 먹은 인류가 생존하고 살아있음을. 내가 살아갈 수 있도록 다른 것을 잡아 먹어야 하는 살아있는자의 숙명을 속죄하는 의식. 죽어가는 생명에 대한 미안함과 속죄가 신을 통해 그 화합을 이루게 하려는 의식이다. 죽어가는 생명과 살아있는 자의 협약이 바로 공희제였다.

 

22. 곡물의 씨앗이 영원한 주기를 표상하는 고귀한 상징이 된다. 곡물은 죽어 땅에 묻힌다. 그러면 그 씨앗이 그 곡물을 재생시킨다. 캠벨은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이 모두 이 곡물의 씨앗이라는 상징적인 존재로써 영원한 진리 -죽음에서 새 삶이 생긴다는 진리, 캠벨 자신의 말에 따르면 <희생에서 지복의 삶이 빚어진다는 진리>를 드러내는 데 매료당한다.

 

msn036.gif 곡물이 죽어 비료와 거름이 되어 땅을 기름지게 한다. 그 기름진 땅위에 새로운 죽어 썩어진 곡물에서 새로운 씨앗이 돋아난다. 이게 바로 생명의 순환, 죽어야 새로운 생명을 얻는 자연의 이치다.

 

22. 이러면서 그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코란: 너희는 선인이 겪은 것과 같은 시련을 겪지도 아니하고 천복의 낙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23. 수많은 문화의 가지에서 서로 비슷한 이야기들- 창세, 처녀수태, 神子成肉, 죽음과 부활, 재림, 그리고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생겨나는 까닭을 알고자 한다.

그는 “진리는 하나이되, 현자는 여러 이름으로 이를 언표한다”는 힌두 경전에 나오는 통찰을 좋아한다. 이 가면이 곧, 우리의 언어와 기술로는 정의가 불가능한 궁극적 실체를 뜻한다. 신화는 가시적인 세계의 배후를 설명하는 메타포이다.

 

24. 캠벨의 책에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은 방심하는 죄악, 깨어있지 않는 죄악인 태만을 방기하는 죄악이다.

msn036.gif 알면서도 방심하고 행하지 않는 죄, 깨어있지 않는 정신의 나태함과 태만. 내 인생의 방치다. 무지속에 살아있음은, 몸만 살아있는 동물적 본능이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해야할 일은 안하고 깨어있지 않는 것은 살아있는 시체다. 인간다운 삶은 사유하고 배우고 열려있고 깨어있으면서 행하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동물적 삶과 인간다운 삶의 어우러짐이다.

 

26. 우리에게 열어 준 많은 가르침의 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살았던 삶 자체의 진정성이다. 그는 신화란 우리 심층의 영적 잠재력에 이르는 실마리이며, 신화야말로 우리를 기쁨과 환상, 심지어는 황홀의 세계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고 믿는 한편, 우리를 그 세계로 불러들이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우리를 불러들이는 그는 그 세계를 다녀온 사람 같았다. 캠벨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었을까?

그렇다. 지혜이다. 그는 대단히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박식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전인미답의, 광대한 우리 과거의 파노라마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에 걸맞는 표현의 방법이 있다. 그런데 그는 수천 가지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특별히 좋아하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27. 일본에서 열린 세계 종교 학회에서 캠벨은 뉴욕의 사회철학자와 일본 신도의 신주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는다.

사회철학자가 신주에게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신도의 종교 의례를 숱하게 보아 왔고, 귀국의 성지도 여러 곳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 신도의 종교적 이념을 모르겠어요. 신도의 신학을 이해할 수 없어요.”

일본인 신주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고갤르 가로 저으면서 응수한다. “글쎄요. 우리에게 종교적 이념 같은게 있는 것 같지 않군요. 신학도 없고요. 우리는 춤을 출 뿐이지요..”

그렇다. 캠벨도 춤을 추었다. 우주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었을 뿐이다.

 

msn036.gif 나도 나와 내 인생을 위해서 춤을 추고 싶다. 우주의 리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살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면 그냥 추어라. 지금 춤추고 있는 순간만이 존재할 뿐.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1. 신화와 현대 세계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이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이니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msn036.gif 내가 살이있음의 떨림을 느낄 때,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내 마음도 덩달아 나뭇잎처럼 흔들림을 느낄 때, 살아있음의 가슴이 뛰고 있는 것을 느낄 때, 진정 이 순간을 느끼고 몰입할 때, 나는 살아있음이다.

 

31. 모이어스: 신화가 도대체 우리 삶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캠벨: 우리 몫의 삶을 살면 되는 겁니다. 살만 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

32. 인류의 삶을 떠받쳐 왔고왔, 문명을 지어왔고, 수천 년 동안 종교를 틀지어 온 이러한 고대의 정보는 심원한 내면적인 문제, 내면에 관한 신비, 내면적인 통과 의례의 문턱넘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신화라고 하는 주제에 마음을 두게 되면, 바로 이 신화라는 것에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손에서 놓아 버리고 싶지 않은 전통의 느낌, 깊고, 풍부하고, 삶을 싱싱하게 하는 정보가 솟아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34. 토니오는 보헤미안 무리 중 하나에게 이런 편지를 씁니다.

< ....... 위대한 악마적 미학의 길을 모험하고, ‘인류’를 경멸하는 냉엄하고도 긍지에 차 있는 그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선망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이 세상에 유식한 인간을 시인으로 만들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과 살아 있는 것과 일상적인 삶을 사랑하는 나의 고향일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따사로움 , 모든 종류의 정겨움, 모든 종류의 유머는 내 고향이 알고 있는 이런 사랑에서 유래합니다. <천사의 혀와 인간의 혀>, 그러나 사랑이 부족하여 <꽹과리나 시끄러운 바라소리>나 내는 사람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심지어 이들의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사양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토니오는 <작가는 진실에 진실해야 한다>고 씁니다. 그런데 토니오가 진실에 진실하면서 애정을 기울이는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왜냐, 인간을 진실하게 그려 내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인간이 지닌 불완전을 그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인간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합니다. 이 세상을 떠날 즈음의 석가를 알지요? 석가의 모습은 우리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불완전한 인간은 작가가 진실한 언어의 창을 던지면 상처를 입고 맙니다. 그러나 그 창은 사랑의 창입니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 만의 이른바 <에로틱 아이러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잔혹하고 분석적인 언어로 죽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35. 캠벨: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사랑스럽지요.

모이어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캠벨: 고통이라는 하는 것은 불완전한 존재만이 체험하는 것이 아닌가요.

모이어스: 인간적인 고통, 인간적인 분투, 인간적인 삶 ......

신화라고 하는 것은 오랜 세월에 걸친 우리의 진리 모색, 의미 모색, 의미 있음의 모색을 그 뼈대로 하는 이야기랍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이해하고, 죽음과 맞설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태어나서 살고 살다가 죽는 이 기나긴 삶의 길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평생 영원의 의미를 이해하고 영원을 접하고, 신비를 이해하고, 우리가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도움이 필요합니다.


캠벨: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인 존재와 현실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신화는 인간의 삶의 영적 잠재력을 찾는 데 필요한 실마리인 것이지요.

36. 모이어스: 신화의 정의를 <의미의 모색>에서 <의미의 경험>으로 바꾸셨는데요?

캠벨: <삶의 경험>이라고 합시다. 너무 외적 가치를 지닌 목적에만 집착해서 움직이는 바람에, 우리는 그만 가장 중요한 게 내적 가치, 즉 살아 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삶의 황홀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되었지요.

신화는 사람들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신화를 읽으면 사람들은 상징의 메시지를 해독하기 시작하지요.

연애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절망과 함께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영적인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우리는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라는 것입니다.

모이어스: 결혼이 <자기>와 <자기>의 재회, 우리의 뿌리가 되는 남성 혹은 여성과의 만남이라면, 우리 현대 사회에서 결혼이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이루어지고 깨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8.캠벨: 그건 결혼이 아니라니까요. 결혼을 통한 관계를 인생의 가장 중요한 관계로 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결혼을 아직 못한 겁니다. 결혼은 원래 하나였던 것이 지어 내는 둘의 관계, 둘이 하나의 육肉을 이루는 관계입니다. 결혼의 관계가 오래 계속되고, 어느 한쪽에서 시시각각으로 변덕을 부리는 대신 거기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게 되면 그걸-실재의 둘은 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임을-깨닫게 됩니다.

39.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이랍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고 하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고 하는 제물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되는 것이랍니다.

 

msn036.gif ‘결혼은 시련’이다. 참 의미를 깨닫게 한다. 나와 상대방의 관계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는일이다. 달콤한 순간과 환상은 어느덧 엷어지고 바로 삶의 현실이 돌아온다. 결혼을 할 때, 장밋빛을 아예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결혼하고 나서 좋은 점은 나의 몸과 마음을 나눌 친구가 있다는 것. 내가 무엇을 해도 이해해주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사랑이란 진정한 이해란,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닌, 상대바이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원하는 시점에,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주는 것이었다.

나의 낯선 남자는 늘 그렇게 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그는 말했었다. ‘참으로 가슴이 많이 아팠다. 당신을 붙잡아 두자니, 내가 살고 당신이 죽을 것 같고, 당신을 보내자니 당신이 살고, 내가 죽을 것 같고. 그래도 당신을 더 사랑하니 당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니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서 많은 사랑과 이해를 받은 후, 시간이 흐른 후에 그의 깊은 사랑을 느꼈다. 그는 시련을 잘 견뎌냈고 살아남았다. 그가 시련을 견디고 있을 때, 나는 어땠는가? 나 또한 내 나름대로 시련이 있었다. 삶의 현실에서 뾰족한 돌이 이리 굴르고 저리 굴르면서 동글동글한 조약돌이 되어 갔다. 그러면서 그의 깊은 사랑을 느끼면서 존경했다. 가장 가까운 남편을 존경한다.

내 인생에서 잘 한 일중에 하나가 낯선 남자와 결혼한 것이다. 나는 남편을 낯선 남자라 부른다. 익숙하면서도 늘 낯설게 다가오는 남자이기에.


40. 모이어스: 결혼이라는 것은 사회적 계약이 아니라 영적인 수련이라고 하시는 거군요?

캠벨: 중요한 것은 영적 수련입니다. 사회는 이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게 해야 하는 것이고요. 사람은 사회를 섬겨야 하게 되어 있지 않아요. 사회가 사람을 섬겨야 하느 것t이지요. 사람이 사회를 섬기게 되면 그 사람은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를 만납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이 세계를 위협하는 자들은 바로 괴물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사람들이 아닙니까?

 

msn036.gif ‘사회가 사람을 섬긴다?’ ‘사람이 사회를 섬긴다’ 어느 것이 지금 현실일까? 내 생각에는 둘다 존재한다. 사회가 사람을 섬기면서 사람이 사회를 섬기기도 하고, 조직에서는 조직이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조직을 섬긴다. 조직이 사람을 섬기다가 어느 순간 조직이 사람을 섬기기 시작하는 순간, 그 조직은 각자의 삶을 존중해주는 조직으로 살아남는다. 사회는 너무 거창한 말이고, 자신이 속한 가정이나 조직이 이해가 더 쉽다. 사회는 광범위하다.

 

41.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42. 모이어스: 롤로 메이는 오늘날 미국 사회에 범죄가 이토록 많은 것은 젊은 남녀에게 위대한 신화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즉, 위대한 신화가 젊은 남녀고 하여금 세계와의 관계를 알게 하거나, 가시적인 사회 이면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었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캠벨: 그래요. 범죄가 많은 또 하나의 까닭은 이 미국에는 에토스(윤리적 겨레 정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어떤 문화권이든지 우리가 문화권이라고 부르는 모듬살이에는 삶의 규범이 될 만한 룰, 그 문화권 사람들 사이에 묵시적으로 이해되는 불문율 같은 게 있는 법이지요 그런 문화권에는 에토스라고 할 수 있는 것,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우리는 그런 식으로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어떤 묵시적 양해 사항이 있어요. 이것이 바로 정리되지 않는 신화라고 할 수 있겠지요.

 

msn036.gif 나는 씨족사회가 자리잡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에토스 즉 내식대로 풀어쓰자면, 오吳家네 전통과 풍습일게다. 예를 들면, 음력 설날이 되면, 어머니는 3시부터 일어나 부산을 떤다. 청소하고 마루에 자리를 펴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아버지, 어머니는 세배를 드렸다. 부모에게 공경을 표하는 예법이었다. 조금 후에 당숙이나 당숙모님들이 도착하면 방안에 들어 할아버지 할머님께 세배를 드렸다. 그렇게 모든 아들이나 며느리 되는 사람들은 집집마다 돌면서 세배를 드리고 나누었다. 이러한 것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런 것들을 보면서 자라온 자녀들은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인사하는 것을 자연히 몸에 체득하게 된다.

 

43.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삶이 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삶의 지혜와는 상관없는 것들이지요. 우리는 테크놀로지를 배웁니다.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많은 교수들 역시 자기가 가르치는 학문이 삶의 가치와 어떤 관계가 있느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뜽한다는 겁니다. 오늘날의 우리 학문-문화인류학, 언어학, 종교학 들을 말합니다- 에는 전문화 경향이 보입니다.

 

44. 전문하가는 전문가가 관심하는 문제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속성이 있어요. 잡학가는 여기에서는 이 전문가로부터 한 수 배우고 저기에서는 저 전문가로부터 한 수 배우기 때문에 일단 문제를 위에서 내려다볼 줄을 알지요. 그러나 내가 말한 두 전문가는 어떤 현싱이 왜 이 분야에서도 나타나고 저 분야에서도 나타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잡학가는 전문화한 문화보다는 훨씬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문제의 영역으로 뛰어들기도 하는 것이지요.

 

msn036.gif 그렇다. 잡학가. 나도 잡학가이고 싶다. 여기서 한수, 저기서 한 수 배우면서 통합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나는 예술경영인이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에 갇혀있다. 자신의 철학과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기에 어쩌면 자신의 프레임만 들여다 볼 수 있다. 나는 수많은 그림그리는 작기들의 그림을 보면서 분석하기를 좋아한다. 그림과 칼라의 심리관계, 그림속에 있는 칼라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를 분석한다. 마음에 드는 명화나 그림을 재탄생시켜서 판매도 하는 회사도 경영하고 있다. 그림을 볼 수 있는 안목도 향상된다. 다양한 그림들을 보면서 느껴본다.

며칠전에 하워드 가드너의 다중지능 검사를 해보았다. 관심이 있다면

http://www.multiiqtest.com/ 들어가서 해보면 질문지에 클릭하면 바로 자신의 지능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1순위로 ‘자기성찰지능’이 나왔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특정한 활동에 대한 좋고, 싦음이 분명하여 그것을 잘 표현한다.

② 감정 전달에 뛰어나다.

③ 스스로의 강점과 약점을 명확히 인식한다.

④ 자신의 능력을 확신한다.

⑤ 적절한 목표를 설정한다.

⑥ 야심을 가지고 일한다.

잘하는 일로는 시, 일기, 예술 작업, 자기반성, 목표, 자서전, 가족사, 종교 활동들이 있다.

직업군으로는(내가 좋아하는 순서대로) 기업가, 예술인, 심리학자, 작가, 심리 치료사, 정신분석하자, 발명가, 자기 인식 훈련 프로그램 지도자. 심령술자, 신학자, 역술인등이다.

 

2순위로는 ‘인간친화지능’이다. 특징으로는

①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 이입이 뛰어나다.

② 또래들 사이에서 인기다 높다

③ 또래나 나이가 더 많은 사람니나 똑같이 잘 사귄다.

④ 리더십을 보여준다

⑤ 다른 사람과 협동하여 일하는 데 능숙하다

⑥ 다른 사람의 느낌에 민감하다

⑦ 중개인이나 카운슬러 역할을 자주 한다.

잘하는 일로는 연극, 대화, 합의 결정, 집단 작업, 운동, 클럽, 단체행동, 단체 디조 등

직업군으로는 사회 운동가. 배우, 정신과 의삭, 이벤트 사업가, 개인 사업가(상업, 중소기업), 개그맨, 컨설턴드, 교육 사업가 등..

나는 위의 지능을 보면서 신기했다. 내 삶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신비했다. 나의 딸이 TG 스쿨(감이당 산하)에서 사주를 배워왔다면서, 나를 임상실험하고 있다. 계속 몇 달째 나를 상대로 하고 있다. 할 때마다 말해주는 게 재미있고 다르게 풀이해준다. 그날은 나의 사주를 풀어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현실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도록 도와주는데,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실현시킨다”고 했다. 신기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마음먹은게 있으면 그냥 한다. 결심할 필요도 없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일단은 뭐든지 해본다. 해보면서 맞는지 안맞는지 나 스스로가 알아간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 ‘될까, 안될까’ 에 대한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할 뿐이고, 나머지는 우주가 신이 알아서 할 것이다. 나는 최근에야 그 기도의 의미를 알았다.

 

‘주여, 나의 뜻대로가 아닌 주의 뜻대로 하소서’의 뜻을 말이다. 나는 자연의 한 부분이고 우주의 티끌만한 먼지이지만, 우주의 수많은 별꽃들중에서 튀어나온 별이기도 하다.

주의 뜻이라는게 신의 뜻, 우주의 뜻,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라고 말이다. 나는 다만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고 있고, 갈 뿐이라고. 그러면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뒤돌어보는 일이 없어졌다. 후회하는 일이 별로 없어졌다는 것이다.

 

‘예술 경영인’이라는게 무엇인가. 그림을 보고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일이다. 그림 그리는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그림을 다양한 소재에 프린팅해서 자신의 소품을 판매할 수 있게 도와 준다. 일반인들에게는 추억에 남을 만한 , 보고 있으면 자긍심과 자부심, 향기있는 순간들의 사진을 프린팅해 준다. 또한 사람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분석하고 지금의 현재 심리나 마음상태를 읽어주고 말해준다.

내가 쓰고자 하는 책의 주제도 명화나 신화 그림을 풀어쓰면서,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우리 삶에 결부시키고 녹아내릴 수 있는가이다. 나는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지만, 15년전에 모래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고 (석화) 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강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2010년에 ‘그림만드는 미술관’을 창업했다. 내가 어쩌다 운명의 손에 이끌려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지금도 모르지만, 내 운명이고 천복임을 요즈음에는 약간씩은 느끼고 있다.

 

47. 모이어스: 선생님께서는 사라 로렌스 대학에서 38년간이나 신화를 가르쳐 왔습니다. 고만고만한 증류 가정을 배경으로 대학에 온 젊은 처녀들에게, 정촌 종교와 다른 이 신화를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어떻게 신화에 관심을 갖게 했습니까?

 

47. 테마가 시공을 초월해 있습니다. 문화는 이런 이야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요.

테마의 대응 구조라는 것을 모르고 읽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되겠지만, 다른 게 아니에요.

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우리 삶을 기름지게 하는, 한 번 빠져 볼 만한 것이지요. 신화는 우리 삶의 단계, 말하자면 아이에서 책임 있는 어른이 되고, 미혼 상태에서 기혼 상태가 되는 단계의 입문 의례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런 의례가 곧 신화적인 의례인 것이지요. 우리는 바로 이런 신화적인 의례를 통해 우리가 맡게 되는 새로운 역할, 옛 것을 벗어 던지고 새 것, 책임 있는 새 역할을 맡게 되는 과정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msn036.gif 나도 조셉 캠벨 세계로 들어가면서 새로운 신화에 눈을 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구본형 선생님이 쓰신 글 들중 상당수가 조셉 캠벨이 말한 것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48. 우리가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상은 판사 자체가 아니라 신화적인 인격인 것이지요.

왕이나 여왕에 대하여 반응할 때 우리는 그들의 인격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이들이 지닌 신화적인 역할에 따라서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이 판사가 되거나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될 경우, 그 사람은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신성한 직함을 대표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 직함이 의미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은 자기의 개인적인 욕망과 심지어는 자기 삶의 다른 가능성까지 희생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msn036.gif ‘지위가 위치가 그 사람을 만든다‘ 는 말의 참뜻을 알았다. 지위라는 것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인격이 아니라 공적인 업무, 즉 신화적인 역할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지위가 주어지면 그 지위에 맞게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그릇과 지위를 조화시킴이요. 지위가 주어졌을 때, 그 지위를 남용함은 자신을 파괴하거나 타락으로 가서 자신을 파멸시킨다. 나에게 어떤 신화적인 지위가 주어질 지 모르기에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내가 할 일을 즐긴다. 그러다 보면 지위과 나의 그릇에 걸맞는 조화로운 삶을 살게 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48. 입대해서 군복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방기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를 섬기기 위해 사회적으로 조직된 삶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49. 모이어스: 붙박이 별의 영원성은 저에게 삶의 지평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저에게 저 우주 어느 곳에는 늘 저의 일에 관심하시고 언제든지 맞아들일 차비를 마치신 채 저를 내려다보시는, 자애롭고, 다정하고, 공정한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일러 준 것도 붙박이 별입니다. 그런데 소울 벨로우는 오늘날 과학이 믿음을 대청소해 버렸다고 합니다.

 

캠벨: 바로 지금 이 시각에 신화는 우리가 사른 삶과 구조에 어울리는 수준으로도 삶의 본을 제공해 줍니다. 하지만 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시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삶이 모습이 얼마나 빨리 바뀌는지 50년 전에는 온당했던 것이 지금은 온당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어요. 과거의 미덕이 오늘날에는 악덕이 되었고요. 과거에 우리가 악덕이라고 하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필요악이 되어 있는 경우도 수없이 볼 수 있어요. 도덕적인 질서는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우리가 사른 실제적인 삶의 도덕적 필요성과 발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그렇지 못해요. 구시대의 종교는 다른 연령층, 다른 족속, 다른 가치 체계, 다른 우주에 속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자꾸만 뒷걸음질을 치다 보니 이제는 역사와도 발이 맞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린 세대는 앞 세대로부터 배운 종교에 대한 믿음을 잃고 정작 들여다 보야야 할 내면은 무시한 채 엉뚱한 내면만 기웃거리고 있어요.

 

엉뚱한 내면이란 신비체험 즉 정신질환의 일종인 심리적 해리의 차이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심리학회 같은거. 해리를 통하여 신비를 체험하는 것은 진짜 체험이 아니에요. 해리의 증세를 보이는 사람이 기계적인 방법을 통하여 신비 체험에 빠져 드는 것은 신비가 헤엄치고 있는 물에 빠져 죽는 것이나 다름 없어요. 신비 체험에는 준비가 필요한 법입니다.

 

msn036.gif 대형교통사고를 당하고 몇년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가 생긴 위의 환자는 치료를 받으면서 사고 당시 일어난 중요한 체험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환자는 당시 두 차량이 충돌한뒤 얼마동안 의식을 잃었고 의식을 다시 찾았을때는 자신의 몸과 의식이 분리되어 있었다. 마치 모든 상황을 몸 밖에서 체험하는 듯했다. 환자는 공중에 붕 뜬 느낌으로 주위에 선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이런현상은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도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정신적으로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반응이다. 실제 견딜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신에게서 이탈하는 현상을 해리(dissociation)라고 부른다."

 

" 해리는 정신적 신경생물학적 보호 매커니즘이다. 해리의 목적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감소하거나 제거하는데 있다. 해리의 정신적, 생물학적 생성방식에 대해서 제기된 지식들은 최근에 들어서야 밝혀지기 시작한 것 들이다."

 

" 해리현상은 트라우마의 경험에 관계없이 일상에서도 약하게 나타날수 있다. 정신적관점에서 볼때 해리는 현재의 상태에서 이탈하기, 정체성과 거리두기, 일종의 자기 부재다. 건강한 사람에게도 관찰할수 있는 가벼운 형태의 해리는 바로 깨어있는 상태에서 꾸는 백일몽이다. 이럴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무슨일을 했지만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정도가 심한 해리의 경우는 낯설거나 '마비된듯한' 느낌이 드는 경우를 들수 있다. 이럴경우 상황이나 육체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 이른바 '탈현실화' 혹은 '탈인격화의 느낌이다.

건강한 사람도 때로 이런 느낌을 경험한다. 특히 지나치게 피곤하거나 너무 큰 부담을 느낄때 그런 경우가 찾아온다. "

 

" 해리는 일반적으로 불안과 결부된 신호에 의해서 유발된다. 이 신호는 제삼자에 의해서는 종종 지각될수 없다. "

 

"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순간 엔도르핀이 뇌에서 마비시키는 것은 '객관적'통증 신호가 아니라 감정의 관여부분이다. 감정의 관여가 마비되고 의식이 현실에서 이탈하는 현상은 해리성 장애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도 발견할수 있다. 환자는 자신의 몸과 분리된 느낌이 든다. 트라우마 상황에서는 이것이 '마지막 구원'인 셈이다. 여기서 해리는 견딜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 남도록 '도와주는' 셈이다."

요하임 바우어의 '몸의기억' 중의 해리에 관한 부분이다.

 

51. 멕시코 북서부 인디언 그룹이라면 페요(선인장의 일종, 옥은 여기에서 나오는 환각제)가 자생하는 지역의 인근 몇 마을 지역을 일컫는다. 이들은 페요테를 사슴과 동일시한다. 이 인디언들은 자기네들이야말로 페요테를 찾아 이것ㅇ르 다시 인디언 종족에게로 몰로 오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 행세를 한다.

이 임무야말로 신비 여행과 같다. 이 임무에는 전형적인 신비 여행의 모든 요소가 고루 들어 있다.

 

첫째, 세속적인 삶과 유리되는 단계다. 이 여행을 떠나야 하는 사람은 여행을 떠나기 겆네 자기 실제 생활에서 저지른 과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고백해야 한다. 고백하지 않으면 신비 여행은 영험이 없어지기 때문에. 과실을 빠짐없이 고백한 다음에야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아주 특별한 언어, 말하자면 토착어를 쓴다. 이들은 “간다”고 해야 할 자리에 “온다”는 말을 쓴다. 왜? 이들은 이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승에 있기에.

 

이윽고 이 모험 여형의 문턱에 이른다. 이 여행의 途程도정에는 일정한 구간마다 정신적 변용의 단계를 나타내는 특별한 신당이 있어요. 이 신당을 모두 지난고 난후 폐요테를 모은후, 폐요테를 죽이는데 사슴을 죽이는 것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정말 사슴에게 하듯이 조그만 화살을 날리고는, 쓰러진 폐요테를 모으는 의례를 연기한다.

이 모든 과정은 내면여행- 외계를 떠나 영적인 존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일- 과 관련된 체험의 복사판이다. 이들은 이 의례의 각 단계를 정확하게 영적인 변모와 동일시한다.

 

52. 모이어스: 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칩니까?

캠벨: 페오테에게는 생물학적, 기계적, 화학적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영적으로 변모시키는 효과도 있다는 것을 상징하지요.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영적으로 변모하면 자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비 여행이 최악의 여행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자기가 어디를 향하는지 알고 있으면 전혀 다른 신비 여행이 된다.

 

모이어스: 물에 빠진다는게…… 정신적인 위기인 까닭이... 어떤 물이라고 하셨더라……

캠벨: 헤엄을 쳐야 하는데도 헤엄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가는 물이지요 영적인 삶의 경우 이것은 진실입니다. 의식意識의 변모라고 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체험인 것이지요.

 

52. 머리가 지닌 특수한 기능으로서의 의식이라는 겁니다. 데카르트식 사고방식의 일부이다. 테카르트 파 사람들은 머리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의식에 영향을 미쳐 어떤 방향, 혹은 어떤 목적에 맞게 작용하게 하는 기관인 것이지 의식을 일으키는 기관인 것은 아니지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온몸에 두루 존재한다. 이 의식은 그 의식의 주체에게 살아있는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한다.

나는 의식과 에너지는 어떤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다. 삶의 에너지를 찾아볼 수 있는 데엔 반드시 의식이 있다. 식물의 시계에도 의식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어린 시절 숲속에서 많이 지냈지만, 숲속에서 살다보면 각기 서로 다른 이런 읫기이 상호 관계 속에서 뒤엉켜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숲속에는 식물의 의식도 있고 동물의 의식도 있는데, 우리의 의식은 이런 의식들과 상호 작용을 하게 된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우리 담즙은 우리 의식에 도움이 될 만한 게 그 음식에 들어 있느지 없는지 안다. 이 모든 작용이 곧 의식이다. 이런 의식을 단순한 기계적 술어로 번역하력 해서는 안 된다.

 

53.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캠벨: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수준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54.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을 수준을 오르락내리락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msn036.gif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온 몸에 존재한다’. 온 몸에 존재한다는 것. 마음이 어디에 있는냐“는 물음에 심장에, 우리 머리에 있다라기 보다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온 세포에 존재한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태어나서 3세 이전까지는 머리가 아닌 몸이 기억한다. 몸이 기억한다는 말은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온 신경과 세포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의식은 마음에 심장에 머리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온 몸에 세포가 기억하고 있다.

 

54. 신화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인간의 어마어마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현몽하고 있는 원형적인 꿈입니다. 나는 이 원형적인 꿈 세계의 문턱에 이를 때마다 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압니다. 신화는 나에게 절망의 위기 혹은 기쁨의 순간, 실패 혹은 성공의 순간에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신화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 삶의 본이 될 경우, 그는 신화화하는 차원으로 들어가지요.

 

msn036.gif 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삶의 본이 되기 전에, 나의 삶이 나 자신을 떳떳하게 하고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지고, 그 다음은 나 자신을 감동시켜야 한다. 나 자신을 감동시키면 천지가 움직임을 느낄 것이다. 천지가 움직임은 우주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동참하고 도와준다. 그러한 에너지가 다른 사람들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58. 어쩌면 이 행성에서의 삶은 이로써 끝날지 몰라도 우주의 끝은 아니에요. 우주의 모든 항성에서 폭발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아시지요? 그런 문맥에서 폭발이지요.

(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오펜하이먼,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하는 것을 보고는,

“나는 이 세계의 파괴자인 사신死神이 되었구나”를 두고 한 말.)

 

우주라고 하는 것은 우리 태양계의 태양 같은 무수한 항성이 폭발하는 원자로 같은 것이랍니다. 이 균형이라는 것이 얼마나 섬세한 것인가를 알고, 지구에서 물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고, 생명을 안아준 우리 환경 주변에서 일어나는 많고 많은 일들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우리가 아는 이러한 생물이 이 우주의 어떤 행성에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겠어요. 하고 많은 별들이 거느리는 위성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나는 상상할 수 없어요.

 

60. <스타워즈>에는 신화적인 원근법이라고 할 만게 있다. <스타워즈>는 기계가 지배하는 상태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묻는다. “기계가 인간성을 마모시킬 것이냐, 아니면 기계가 인간을 섬길 것이냐?” 인간성이라고 하는 것은 기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이다.

 

msn036.gif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차가운 머리인 냉정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가슴이 말하는 것. 인간다움은 불완전하면서도 따뜻한 가습이 있음이다.

 

62. 각 종교는 정해진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접근이 가능한 일종의 소프트웨어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

64. 메타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도무지 그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수도 있다.

62. 메타포, 우주를 내 아버지라고 하거나 우주를 내 어머니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

 

msn036.gif 각 종교가 지향하는 목표는 같지만, 가는 길이 다른다. 다다른 방법이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남도 여수에서 서울을 가고자 할 경우, 비행기, 기차, 트럭, 자가용, 배, 또는 걸어서 서울로 가는 방법론의 차이가. 이 방법론의 차이가 종교이다. 도착하는 목적지는 서울 즉 진리에 다다르는 것이다.

 

65. 모이어스: 언젠가 어는 밀림의 토인들 이야기를 하셨지요? 그 토인들이 선교사에게 <당신네 신은 문을 꽁꽁 쳐닫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 늙어서 병이라도 든 것처럼, 그러나 우리신은 밀림에도 있고 벌판에도 있고 산꼭대기에도 있다. 비가 올 때도 있다> 이렇게 말했다지요?

 

65. 피그미족의 새에 관한 전설

한 소년이 숲속에서 아름다운 새 소리를 듣고는 그 새를 사로잡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소년은 새에게 먹이를 주자고 아버지를 조르지요. 아버지는 새 따위에게 먹이를 줄 수 없다면서 새를 죽여요. 이 전설은 그 사내는 새를 죽이고, 새를 죽임으로써 새의 노래를 죽이고, 노래를 죽임으로써 저 자신을 죽인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로써 그 사내는 죽는 것이지요. 완전히 영원히 죽는 것이지요.

 

msn036.gif 숲속에 노니는 새의 노래소리가 좋아서 새를 데려왔다. 새를 죽이는 것은 새의 노래를 죽였다. 노래가 나오지 않은 것을 안 소년은 상심해서 죽었다. 자식이 죽는 것을 본 아비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이 죽었다는 자책감으로 죽는다. 다른 생명을 죽이는 것은 곧 바로 나의 죽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과보’다.

 

66. 모이어스: 오늘날 우리가 이야기하는 신화는 과거 경험이 지닌 어떤 기원을 설명하고 있나요?

캠벨: 신화의 뼈대가 되는 모티프는 같아요. 옛날부터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ㅇ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어떤 사회의 동아리가 되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난다. 그런 시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混淆혼효(뒤섞인다는 뜻)를 거치면서 보다 복잡 다단한 신화학이 된다.

 

67. 내가 아는 모든 형제애는 구속적인 사회에 갇혀 있다.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는, 공격성이 밖으로 투사된다.

가령, 십계명은“살인하지 마라”고 한지만 다음 장에 가면, “가난안으로 가서 거기에 있는 것음 모두 죽여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이 바로 범주가 구속된 사회의 도그마이다.

참여와 사람의 신화는 오로지 무리의 안을 맴돕니다. 밖을 향햐면 태도는 표변한다. <이방인>이라는 말이 드러내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방인과 한솥 밥을 먹을 수 없는 것이지요.

 

67. 신은 인간의 삶과 우주에 기능하는 -개인의 육신과 자연에 기능하는-동기를 부여하는 함. 혹은 가치 체계의 화신입니다. 신화는 인류 안에 있는 영적 잠재력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우리 삶의 기운을 북돋우는 힘은 이 세계의 생명의 기운을 북돋우기도 하지요. 그러나 개중에는 어떤 특수한 사회만 섬기는 신화와 신들도 있습니다.

 

69. 모이어스: 베이루트로부터는 자동차를 이용한 폭탄 공격 소식이 연달아 들어옵니다.

 

69.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자들은 종교의 관념을 저희가 사는 사회에만 적용시킬 줄 알았지 이 시대의 삶, 이 시대의 인류에게 적용시킬 줄은 모르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 현대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 종교의 실패를 증거하는 무서운 본보기입니다.

 

 

80. 개인은 자기 삶과 관계된 자기 나름의 신화적 측면을 찾아야 합니다.

신화는 네 가지 기능을 지닙니다.


첫째는 신비주의와 관련된 기능입니다.

우주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것인지를 아는 순간,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존재인가를 아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이 엄청난 신비 앞에서 경이를 경험합니다. 신화는 신비의 차원, 만물의 신비를 깨닫는 세계의 문을 엽니다. 그런 세계를 잃은 사람에게 신화는 있을 수 없지요. 만물에서 신비를 읽을 때, 우주는 한 폭의 거룩한 그림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몸은 비록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도 끊임없이 초월의 신비로부터 메시지를 받으면서 살 수 있게 됩니다.


두 번째는 우주론적 차원을 연다는 것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운행되는가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우주가 무엇인데? 하고 반문하면 모른다.

성냥을 켜면 불이입니다. 불이 무엇이지요? 산소가 연소되는 현상이로 하겠지만, 불에 대해서는 아무 설명도 안 됩니다.

 

세 번째는 사회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한 사회의 질서를 일으키고 그 질서를 유효하게 합니다. 신화가 곳에 따라 많이 다른 것은 바로 이 기능 때문입니다. 신화의 기능 중에서 우리 세계를 가장 폭넓게 지배하고 있는 기능이 바로 이 사회적 기능입니다. 시대착오적이지요.

 

네 번째는 교육적 기능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 낼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교육적 기능입니다. 신화는 사람들에게 이걸 가르쳐 줄 수 있어요.

 

82. 오늘날 우리가 할 일은 온 길을 되돌아가 자연의 지혜와 조화되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짐승과 물과 바다가 사실은 우리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이 나타나서 세상을 다스리자 만물은 만유신론이라는 이름 아래 추방을 당합니다. 만유신론의 진정한 의미는 <신학적>입니다. 이것은 정의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이 신비스러운 초신학,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종말, 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떠받치는 힘입니다.

 

 

msn036.gif 신화를 알아감은 나 자신의 근본을 알아감이다. 인디언들의 지혜, 짐승과 물과 바다가 즉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들이며, 우리는 따로가 아닌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서 인디언들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이 대지 위에서 우리는 우리는 행복했다.

대지는 우리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잘 보살펴라.

나무와 동물과 새들, 자연의 모든 친척들을 존중하라.

위대한 신비를 향해 가슴과 영혼을 열라.

모든 생명은 신성한 것, 모든 존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라.

대지로부터 오직 필요한 것만을 취하고, 그 이상은 그냥 놓아 두라.

모든 새로운 날마다 위대한 신비에게 감사하라.

진실을 말하라. 하지만 사람들 속에선 오직 선한 것만을 보라.

자연의 리듬을 따르라. 태양과 함께 일어나고 태양과 함께 잠들라.

삶의 여행을 즐기라. 하지만 발자취를 남기지 말라.


아침에 눈을 뜨거나 저녁에 잠들기 전에

뭇 생명들과 자신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해 감사하라.

위대한 신비가 자신에게 준 많은 좋은 것들과,

날마다 조금씩 더 성장할 기회를 갖데 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라.

다른 사람의 모카신을 신고 두 달 동안 걸어 보지 않고서는 그를 판단하지 말라.

어떤 상황에서든지 진실함을 잃지 말라.

삶에서 자신을 행복으로 이끄는 것과,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참다운 지혜다.


마음이 안내하는 소리에 귀기울이고, 그 소리를 따르라.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오는 해답에 마음을 열어 두라.

해답은 기도를 통해, 꿈을 통해, 또는 홀로 고요히 있는 시간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인디언들의 가르침-

 

84. 시애틀 추장은 구석시 시대 도덕률의 마지막 대변자 중 한 사람이었징됴. 1852년을 전후해서 미합중국 정부가 나날이 늘어나는 미국 국민을 이주시키기 위해 그 부족의 땅을 팔것을 요구했을 때 시애틀 추장은 명문의 해답을 보냈지요. 이 서한은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도덕의 문제, 진짜 도덕의 문제를 그렇게 선명할 수 없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번 인용해 보기로 하지요.

 

“워싱턴에 있는 대통령은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우리 땅을 사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하늘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땅을 어떻게 사고 팝니까? 우리에게 당을 사겠다는 생간은 이상하기 짝이 없어 보입니다. 맑은 대기와 찬란한 물빛이 우리 것이 아닌 터에 그걸 어떻게 사겠다는 것인지요?

 

이 지구라는 땅덩어리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빛나는 솔잎 하나하나,

모래가 깔린 해변 깊은 숲속의 안개 한 자락 한 자락,

풀밭, 잉잉거리는 풀벌레 한 마리까지도 우리 백성에게는 신성한 것이올시다.

이 모든 것이 우리 백성의 추억과 경험 속에서는 거룩한 것이올시다.

우리는 나무 껍질 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 혈관을 흐르는 피로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부요. 이땅은 우리의 일부올시다.

향긋한 꽃은 우리의 누이올시다. 곰, 사슴, 독수리...

이 모든 것은 우리의 형제올시다. 험한 산봉우리, 수액, 망아지의 체온, 사람....

이 모두가 형제올시다.

 

반짝거리며 시내와 강을 흐르는 물은 그저 물이 아니라 우리 조상의 피올시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그대들은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것인가를 알아주어야 합니다.

호수의 맑은 물에 비치는 일렁거리는 형상은 우리 백성의 삶에 묻어 있는 추억을 반영합니다. 흐르는 물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소리는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의 음성입니다.

강 역시 우리의 형제입니다. 강은 우리의 마른 목을 적셔 줍니다. 강은 우리의 카누를 날라 주며 우리 자식들을 먹여 줍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형제를 다정하게 대하듯이 강 또한 다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공기가 우리에게는 소중하다는 것에, 대기의 정기가 그것을 나누어 스는 사람들에게 고루 소중하다는 것에 유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할아버지에게 첫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던 바람은 우리 할아버지의 마지막 한숨을 거두어 갑니다. 이 바람은 우리 자식들에도 생명의 정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만일에 우리가 이 땅을 팔거든, 다른 땅과는 달리 신성한 땅으로 여겨 주십시오. 풀밭의 향기로 달콤해진 바람을 쏘이고 싶은 사람이나 찾아가는 신성한 땅으로 여겨 주십시오.

그대들의 자식들에게 우리가 우리 자식에게 가르치는 것을 가르쳐 주시겠어요? 우리는 자식들에게 땅이 우리의 어머니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땅에 일이 생기면 땅의 아들에게도 일이 생깁니다.

우리는 땅이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이, 우리가 핏줄에 얽혀 있듯이, 그렇게 얽혀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생명의 피륙을 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그 피륙의 한 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사람이 그 피륙에 하는 것은 곧 저에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그대들의 신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 땅은 신에게 소중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상하게 하는 것은 창조자를 능멸하는 짓이라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대들의 운명이 우리들에게는 수수께끼입니다. 들소가 모두 살육되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이지요? 야생마라는 야생마가 모두 길들여지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은밀한 숲의 구석이 수많은 사람 냄내세 절여지고, 언덕의 경치가 “말하는 줄”로 뒤엉킨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지요? 수풀은 어디에 있나요? 사라지고 말았나요? 그러면 독수리는 어디에 살지요? 사라졌나요? 저 발빠른 말과 사냥감에게 이제 그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어떠한지요? 누리는 삶의 끝은 살아 남는 삶의 시작입니다.

 

마지막 붉은 인간이 황야에서 사라지고 그 추억이 초원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 신세가 될 때도 이 해변과 이 숲이 여기 이렇게 있을까요? 거기에 우리 백성의 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게 될까요?

 

우리는 이 땅을 갓난아기가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사랑하듯이 사랑합니다.

그러니 만일에 이 땅을 팔거든 우리가 사랑했듯이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보살폈듯이 보살펴주시오.

그대들의 것이 될 때 이 땅이 간직하고 있던 추억을 그대들 마음속에 간직해 주시오.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이 땅을 간직하면서, 하느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듯이 이 땅을 사랑해 주시오.

우리가 이 땅의 일부이듯이 그대들도 이 땅의 일부올시다. 이 지구는 우리에게 소중합니다. 이것은 그대들에게도 소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압니다. 홍인종이 되었든 백인종이 되었든 인간은 헤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우리는 결국 형제인 것입니다.

 

 

2. 내면으로의 여행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의 음성이 들려 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 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칠흑 암흑에서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92. “어둠의 순간에 눈이 보기 시작한다” -레트커의 시구

 

93.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들 자신이 바로 이 세상 잡사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 우리의 경험은 송두리째 우리의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어요.

msn036.gif 인류의 모든 경험과 기억이 내 세포속에 모두 들어있다. 내 몸 속에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105. 여성은 삶을 상징하거든요. 남성은 여성을 통해야만 삶의 장으로 나올 수 있어요. 따라서 대극하는 것과 고통이 있는 이 세상으로 우리를 나오게 한 것은 여성인 셈이지요.

 

107.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궁극적인 떠남, 최고의 떠남은 하느님을 위한 하느님으로부터의 떠남, 모든 초 관념적 경험을 위한, 하느님이라는 관념으로부터의 떠남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108. <영원이란 신간의 산물에 대한 애정 속에 존재한다> -시인 블레이크

속세의 근원은 영원입니다. 영원은 스스로 이 세상으로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생각의 범주 너머에 있습니다. 동양의 대종교에서 이런한 관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110. 에덴 동산은 시간에 무지하고, 대극에 무지한, 말하자면 더할 나위 없이 순진무구한 상태의 메타포랍니다. 바로 이 원초적인 중심에서 인간의 의식은 서로 다름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111.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태아가 최초로 하는 체험이랍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직전에 자궁의 율동이 시작되는데 이때 어마어마한 공포를 느낀답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경험하게 되는 것이 공포인 셈입니다.

<나>만을 외로움을 느끼면 <자기>는 다른 것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게 되고, 그런 욕망을 느끼게 되면 이 자기>는 둘로 나뉩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세상이 비롯됨이요 한 쌍의 대극이 비롯됨입니다.

 

 

msn036.gif ‘두려움’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피곤해서 어떻게 하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잤는지 모르지만, 깨어나보니 날은 이미 어두컴컴해져있다. 깜깜하지는 않지만 해가 어둑해질무렵,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 잠들고 있었다. 아마도 그 기억이 내가 느낀 최초의 두려움, 몸에 소름이 돋는 외로움이었다. 날은 어두워졌는데, 집안에 아무 기척도 없고 고요하기보다는 적막감이 도는 외로움.

요즘에도 가끔 아주 가끔 자고 나면 그러한 두려움과 외로움이 밀여 올때가 있었다.

 

모이어스: 신화는 인류가 놀랍게도 공통의 신화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해서 모든 이야기에 여자라는 이름의 금단의 과실 모티프가 등장한다는 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112. 구약성서를 보아도 하느님은 하나의 금계를 세웁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하느님은 아담이라는 친구가 필경은 그 금단의 과실을 먹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금제를 깨드림으로써 아담은 자기 삶에 입문하게 됩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금제에 불복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지요.

msn036.gif 금제를 깨뜨림으로서 나의 삶이 시작되는 것. 그러면 반항함으로써 나를 찾으려는 몸부림이 사춘기의 시작이었다. 모든 것이 싦었다. 부모도 싫고 형제가 간섭하는 것도 싫고, 알 수 없는 반항이 중학교 시절 반항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대로 주어진 삶에 불복하는 순간이 나를 찾아가려는 몸부림이었네.

 

모이어스: 유사성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112.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는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인간이 세계 어디에 살든 기본적으로는 같다는 설명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육체가 하는 내적인 경험입니다. 같은 기관, 같은 본능, 같은 충동, 같은 갈등, 같은 공포를 가졌으니만치 인간은 같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 공통되는 바탕에서 융 박사의 이른바 원형이 산출된다는 것입니다. 원형은 인간이 공유하는 신화의 관념이라는 것이지요.


112. 원형은 <바탕되는 관념>이라도 불러도 좋은 근본적인 관념입니다. 융 박사는 이런 관념을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했지요. <원형>이라는 술어는 <근본적인 관념>이라는 술어보다 나은 것 같군요.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한 까닭은 이 원형이라는 것이 하의식에서 위로 솟아오르기 때문일 겁니다.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과 프로이트의 콤플렉스가 다른 점은, 무의식의 원형이 우리 몸의 각 기관과 그 기관이 지닌 힘의 드러남이라는데 있습니다. 원형은 생물학적인 바탕에 섭니다만,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과정에서 억압된 트라우마(정신적 상처) 경험의 덩어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개인적인 무의식으로 생리적입니다만 융이 말하는 무의식의 원형은 생물학적이다. 생리적 원리는 생물학적 원리에 견주면 2차적이다.

 

 

msn036.gif 근본적인 것이 무의식의 원형이고, 그 무의식의 원형은 모든 인류에 내재해 있는 것.

그것을 바탕으로 프로이드의 무의식은 개인의 삶의 경험에서 억압된 트라우마네.

 

113. 우리가 신화를 다루면서 노리는 것은 세계 체험의 한 방법이 아닐까 싶군요. 초월의 이미지를 열어 줄 세계인 동시에 그 안에 살 우리의 모습을 빚는 세계의 체험이라면 어떨까요?

 내가 생각한 신화는 모든게 신비 그 자체였다. 이제는 알겠다. 신화가 메타포이고, 시詩이고, 은유고 상징이었다는 것을.

 

114. 신화를 다루는 것은 신의 실재를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지침을 얻기 위함이다.

 

115. 기도할 때 두 손바닥을 붙이는 이유는, 손바닥을 서로 붙이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신이 상대방의 안에 있는 신을 알아본다는 뜻입니다.

 

116. 신화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가령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 같은 큰 신화는 신전의 신화, 대규모의 신성한 의례의 신화이지요. 인류는 의례를 통하여 자기네들끼리, 혹은 우주와이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는데, 큰 신화는 바로 이 의례를 설명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은유로 알고 해석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117. 세상은 신의 나타남이라고 보지 않고 방사, 혹은 응결의 현상으로 설명하는 관점도 있어요. 즉, 소리가 대기를 응결시키고 이 대기의 응결체가 불, 물, 그리고 흙이 되는데 세상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이런한 관점에 따르면 우주는 이 원초적인 소리, 이 떨림에 싸여 있어요. 이 소리가 바로 만물을 파편으로 이루어 시간의 장으로 보내는 것이지요.

 

118. 나는 신화를 예술의 여신 뮤즈의 고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로 신화가 예술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시의 영감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는 거죠. 삶이 시 같고, 우리들은 바로 이 시의 세계에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은 신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119. 내가 ‘시’라고 하는 것은 언어로 된 것이 아니고 행위와 모험으로 이루어진 시를 말합니다. 이러한 시는 행위를 초월한 어떤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이런 시를 접하면 우리들 자신이 우주적인 존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겁니다.

 

모이어스: 우리가 신화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지언정 꿰뚫어 볼 수는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는 궁극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린 것입니다. 자주 인용되는 산스크리트 어로 된 시가 있는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자는 실은 알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안다는 것은 실은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것이 아는 것이다. -<도덕경>

 

120. 우리는 자신을 부정적인 것과 동일시할 것이 아니고 긍정적인 것과 동일시해야 할 것 같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제 2의 자궁 같은 것이다. 종교는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극도로 복잡한 것을 우리 안에서 익게 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익으면 스스로 동기도 유발시킬 수 있고, 스스로 행동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죄악이라는 관념은 평생 우리를 처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122. 은유라고 하는 것은 코노테이션connotation(암시적 의미)으로 읽어야지

디노테이션denotation(명시적 의미)으로 읽어서는 안됩니다.

현실의 개념을 넘어서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라는 범주도 초월합니다. 신화가 바로 우리를 늘 이 지점에다 데려다 놓고는 합니다. 신화는 우리에게 그 신비-그 신비가 바로 우리들 자체입니다만-에 이르는 사다리를 마련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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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세익스피어 “예술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

자연은 곧 우리의 본성이고, 신화에 등장하는 이 멋진 시적 이미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외부적인 이미지에 갇혀 있고 이 이미지를 읽으면서도 이것을 우리들 자신과 관련시키지 못하면 이미지를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내면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외면의 세계와 접하는 우리의 요구와 희망과 에너지와 구조와 가능성이 반영된 세계입니다. 외계는 우리가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자리가 바로 이 외면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내면의 세계, 외면의 세계와 함께 발을 맞추어야 합니다.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 -노발리스

 

123. 약 40년 전에 이집트에서 발굴된 도마의 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내 입을 통하여 마시는 자는 나와 같이 괼 거시오, 나 역시 그와 같이 될 것이라‘ 이렇게 되면 영락없는 불교이다. 우리는 모두 부처의 의식, 혹은 그리스도의 의식의 현현이다. 단지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다.

‘부처“라는 말은 ”깬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여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 깨어 우리 안에 그리스도, 혹은 부처의 의식에 다가서야 합니다.

 

 

msn036.gif “늘 깨어있어라”는 참의미를 알았다. 깨어있다는 것은 나의 의식의 흐름을 계속해서 주시하는것. 깨어있음은 내면의 자아가 나를 밖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라는 것을... 내면의 나를 관찰자로서 언제 어디서나 늘 관찰하고 있음이 깨어있음이다. 나의 의식이 내 몸을 빠져나와 우주로 날아올랐다. 그 순간 확장된 나는 바로 우주였다. 우주의 모든 것을 껴안은것. 아니 우주 자체가 나 자신이었다. 그래서 그순간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어렴풋이 느꼈던 기억이 있었다.

 

 

125.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정말 우리 안에 있는 존재,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숨결을 주고 깊이를 주는 존재의 몇 분의 일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깊이밖에는 살지 못한다. 이 깊이밖에 살지 못한다는 절실한 느낌을 경험할 때 홀연히 모든 종교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125. 프로이트와 융은 둘 다 신화는 무의식에서 솟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작가는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뮤즈(예술의 신) 혹은 성서적인 용어를 쓰자면 ‘하느님’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샤만이나 先見者선견자가 하는 말은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말인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125. 민담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듣고 즐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화는 영적인 교시를 위한 것이지요. 인도에는 두 종류의 신화, 즉 민간의 관념과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아주 멋진 말이 있어요. 민간이 지니는 관념적 측면은 <데시desi> 라고 하는 데, 이 말은 ‘지방’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 사회와 관계가 있지요. 이건 젊은이들을 위한 이야깁니다. 젊은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사회 생활로 나서고, 들판으로 나가 사냥하는 법을 배웁니다.


“응, 군인이 되어야 하는구나,, 그러면 사회를 위해서 군인이 되어 싸워야지” 젊은이를 이렇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나 근본적인 관념을 나타내는 신화도 있습니다. 산스크리트 어로는 “마르가marga"라고 하는데, 이것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길“은 곧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신화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나오는데, 이 길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력으로 되돌립니다. 사회는 개인에게 신화가 무엇인지 가르치는데, 이 ‘마르가”는 개인을 신화에서 떼어내고 명상을 통해서 바른 길을 좇게 합니다.

 

128. 중세에는 신화적 독창성과 민화적 독창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의 무대가 3개 있었지요. 성당, 성, 가정집입니다.

상징의 마당은 백성들 무리의 경험을 그 바탕으로 합니다. 특정한 사회, 특정한 시공을 함께하는 무리는 같은 상징의 마당을 공유하지요. 신화는 이렇게 문화와 시간과 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일에 상징과 은유가 예술을 통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삶은 신화에서 떨어져 나가 버립니다.

 

은유는 신의 가면입니다. 이 신의 가면을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하지요.

 

129. 메시지, 메시지에 이르는 단서를 간취하기 위해서는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모이어스: 체험한 사람은 최선을 다하여 이것을 이미지에 투사시켜야 합니다.

 

 

msn036.gif 삶은 체험이고 명상이다. 진리는 삶속에,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땅을 딛고 있는 이 두 신발속에 있지 저 산위에 교회에 절안에 성당에 사원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어서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책을 통해서 책속으로 빠져들어서 책으로 세상과 담을 쌓아서는 안된다. 책을 통해서 나의 의식을 깨우자. 책속에 있는 한자의 글들이 내가 삶을 살아갈 때 경험과 섞여서 나만의 방식으로 깨달아가는 것이 삶이다.

 

130. 나는 인도에서 바위에다 붉은 고리를 걸어 놓은 걸 보았습니다. 이렇게 붉은 고리를 걸면, 그 바위는 신비의 화신으로 변모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물을 생각하되 실제적으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이렇게 신비의 측면에서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예요. 가령, 이것은 시계입니다. 하지만 이 시계는 존재하는 사물이기도 합니다. 이 시계를 이렇게 벗어 놓고, 여기에다 고리를 걸면 바로 다른 차원의 사물이 되는 거지요. 聖別성별이라고 하는 게 바로 이겁니다. 고리를 거는 순간 시계는 성별되는 거지요.

 

msn036.gif 나의 삶에 의식을 도입하고 거행하는 순간, 나만의 신성한 순간이 시작된다. 형식이 갖춤으로써 내면이 깨어날 준비를 한다. 내면에게 깨어날 준비를 하라고 형식인 의식이 거행된다.

 

131. 모이어스: 초월적인 존재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초월적”이라는 말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과 관련된 기술적 , 철학적 술어입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적인 존재”라고 하는 말은, 자연계 너머, 혹은 자연계 밖에 있는 존재로서의 하느님을 뜻합니다. 이것은 초월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말로는 지나치게 유물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바깥 어딘가에 있는 일종의 영적인 존재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인동형동성적神人同形同性的 신을 와사상척추동물 瓦肆相斥推動物쯤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은 헤겔입니다.


“초월자”라는 말의 본뜻은 모든 개념을 초월해 있습니다. 칸트는 우리의 모든 경험은 시공에 한정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은 어떤 공간 안에서, 어떤 시간대에 생기는 것이지요. 우리의 감각은 시공의 장에 갇히고, 우리의 마음은 생각의 범주라고 하는 틀에 갇힙니다. 그러나 우리가 접촉하려는 하는 궁극적인 존재-이건 사물이 아닙니다.-는 갇혀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려고 함으로써 이것을 가둘 뿐입니다.

 

132. 초월자는 모든 사유의 카테고리를 초월합니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카데고리입니다. “하느님”라는 말은 모든 사유를 초월해 있는 존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이 말 역시 사유를 통해서 생긴 것입니다.

신이 한 분인가? 신이 여러 분이던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생각의 카테고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려는 존재, 생각하려는 존재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msn036.gif 초월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거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님이 네 마음속에 있지 절에 있지 아니하다. 숨쉬는 공기에도 있고, 내가 보는 화초나 꽃에서도 지나가는 길위에서도 모든 것이 다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카데고리를 벗어나는 것이 초월하는 것이다.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 갇혀있지 않는 것

 

132. 궁극적인 실재는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범주를 초월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느냐 ,없느냐는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부처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둘 다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하다”

궁극적인 신비로서의 하느님은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133. “우파니샤드”에 인드라 신에 관한 이야기.

 

138. 본질적 성질상 인생은 죽이고 먹음을 통해서야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입니다.

 살아있는 생명체 즉 인간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고 먹음으로써 생존한다. 야채라고 하는 것도 살아있는 생명 전체의 몸을 먹는 일이다. 과일도 마찬가지로 과일이라는 몸 전체를 우리는 먹는다. 죽이고 먹음을 통해서 살아지는 무서운 신비의 덩어리가 살아있음이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생명체의 희생위에 치러졌다. 언젠가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이 혹여 쓰레기나 남기고 가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또 한가지 깨달음은, 내가 태어나 수많은 생명체를 먹어치웠으면, 그만한 보답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이다. 수많은 에너지를 먹고 살아감에 그 에너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그 에너지를 공급해준 그 생명체의 것이기도 하다. 그 생명의 희생에 보답하는 것은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 삶을 방관하지 않는 것. 늘 깨어있어서 나를 알아가는 것. 등등...

 

138. “말썽? 인생이라는 게 어차피 말썽 아닌가?” -조르바-

 맞다. 어차피 인생이라는게 사건이 생김으로써 참여하게 된고 얽히게 되고.... 다만, 늘 경계하는 것이 있다. ‘관심’과 ‘간섭’의 경계를 잘 구분해야 한다는 것. 내가 남의 인생에 관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간섭할 권리는 없다는 것.

 

138. 죽음에만 고통이 없어요. 사람들은 나에게, “이 세상 일을 낙관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래요. 인생은 이대로도 굉장해요. 당신은 재미가 없나 보군요. 인생을 개선한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이보다 나아지지는 않을 겁니다. 이대로일 거니까 받아들이든지 떠나든지 하세요. 이걸 바로잡는다거나 개선할 수는 없을 테니까.”

 

msn036.gif 죽음만이 고통을 못느낀다. 그렇지 죽으면 감각이 없어지니. 죽음은 몸이라는 집을 버리고 의식이 어디론가 가버리니. 그 집에 머물지 않은 의식은 말 그래도 주인없는 빈집일테니. 그러면 살아있다는 것은 의식이 있고, 몸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신경이 살아있다.

신경이 살아있다는 것은 또한 신경이나 고통을 느끼는 피부나 마음, 심장 내 몸의 모든 것이 의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거네. 어~~~ 기막힌 발견이군. 캠벨이 말한 의식은 뇌나 심장에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를. 이렇게 풀어가는 군. 고통을 느끼는 모든 것은 살아있음이요. 살아서 느끼는 나의 피부, 신경, 심장, 위, 내장, 이 모든 것들이 의식이니 나의 몸 전체가 의식이라는 것이다.

 

138. 우리는 사악한 일에도 참여하고 있어요. 참여하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 한다고 하는 일이 어느 누구에게는 반드시 사악한 일이 되고 있어요. 이 세상 피조물이 피할 수 없는 아이러니지요.

msn036.gif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란 누군가의 희생위에 치러진 잔치이다. 내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남의 희생위에서 치러지는 웃음이다. 남의 힘듬과 눈물위에 지어진 성이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이다.

 

139. “역사는 내가 헤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악몽” -제임스 조이스-

이 악몽에서 헤어나는 길은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모습인 이 자체가 만물을 창조한 무서운 힘의 현현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사산事象의 끝은 늘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나 고통 또한 세상이 존재하는 까닭의 일부입니다.

 

140. 영웅의 행동 반경은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선악이 있는 시간의 장, 대극이 있는 곳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기 마련입니다.. 인류는 초월의 장을 나서면 대극의 장으로 들기 마련입니다. 인류는 선악뿐만 아니라 남성과 여성, 정당함과 부당함, 이것과 저것, 빛과 어둠까지 알게 하는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었습니다. 

이 시간의 장에 있는 모든 것은 이원적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그러하고, 삶과 죽음, 존재와 부재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상상력 속에 존재하는 궁극적인 한 쌍의 대극은 남성과 여성입니다. 이 경우 남성은 공격적이고, 여성은 수용적이며, 남성은 戰士전사이고 여성은 몽상가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영역과 전쟁이 영역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에로스(사랑)과 나나토스(죽음)이라고 하지요.

 

140.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

-헤라클리토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이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오,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msn036.gif 자연이라는게 선하고 악한게 있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 있지.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 풀이 약초나 독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풀을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초나 독초가 된다. 선과 악이 속세의 착각이지 선함도 악함도 없는 것이 세상사인가.

 

141. ”나무“란 생명이 나무, 우리들 자신의 삶의 나무”- 리그 베다-

 

나무 위에 두 마리의 새가 앉아 있다. 아주 약삭빠른 녀석들이다. 그런데 한 마리는 그 나무의 과실을 먹는데 다른 한 마리는 먹지 않고 관찰만 한다“

자, 나무의 과실을 먹는 이 새는 그 과실을 죽이고 있지요. 그러나 관찰만 하는 새는 필경은 굶어 죽고 말 것입니다. 결국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143. 모이어스“ 뉘우쳐 깨달을 경우 이 순간의 세상이 곧 영원이라는 확신에 이르는 것 같군요?


캠벨: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뒤에 오는 것이 아니에요. 영원이 그리 긴 시간도 아닙니다. 아니,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입니다. 천국이라는 개념의 문제는 거기에서 至福지복을 누리면서도 영원이라는 것을 생각에도 두지 않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영원과는 아무 상관 없이 하느님의 지복지관에서 끝없는 복락을 누린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선악의 분별이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만물의 영원을 경험하면 어떻습니까? 인생에는 그런 기능이 있어요.

 

 

msn036.gif ‘영원’이 존재하기는 하군요.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이 자리가 영원이라는 거네요. 나는 요즘 시간의 개념을 생각해봅니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가 존재하기라도 하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이 지나면, 1초가 지나면 바로 과거가 되는 것이 아닌가.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되니 . 과거 현재 미래를 살아가는 것이 지금 이 순간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바로 영원인데, 위에서 말한 “깨어있다면”은 그 깨어있는 순간이 바로 영원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깨었다는 것은 나를 관찰한다는 의미이며 내면의 관찰자가 밖으로 나와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관찰자를 배꼽에서 빼내어 내 얼굴 앞에 내 머리위에서 내 앞에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거니까. 깨어있는 순간이 바로 영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3. 태초의 이야기꾼들

 

149. 죽음은 최종적인 해방입니다. 그런데 신화는 두 가지를 두루 섬깁니다. 즉, 젊은이를 이 세상의 삶과 만나게 할 때도 신화가 끼어들고, 이 삶에서 해방될 때도 신화가 개입합니다. 말하자면, 종족적 관념은 인류의 근본적인 관념의 껍질을 벗기는데, 이 근본적인 관념이 바로 우리를 내적인 삶으로 안내해 준답니다.

 

신화는 나에게도 어는 길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일러 줍니다.

 

150. 나는 빛을 내는 전구電球인가, 전구가 수레가 되어 실어 나르는 빛인가....

 

육체는 의식의 수레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식과 동일시할 경우, 그 의식의 수레인 육신이 낡은 자동차처럼 부서져 가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처음에는 범퍼가 내려앉고 , 다음에는 타이어.... 하는 식으로 하나씩 하나씩 내려앉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예측이 가능해요. 이렇게 하나씩 무너져 가다 보면 이윽고 의식이 의식과 다시 만나는 대목이 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면 더 이상은 살이 있는 상황이 아닌 것이지요.

 

151. 우리가 아는 한, 짐승에게는 죽음에 대한 관념이 없습니다.

msn036.gif 동물의 왕국을 보면, 금방 낳은 새끼가젤이 어미 앞에서 사자가 달아들어 먹는 광경을 보았다. 어미는 그 자리에서 애통해하지만, 또 다시 살아간다. 슬픔도 잠시, 가젤 어미는 살기 위해 도망가고 살아간다. 그렇다고 동물에게 죽음의 관념이 없다는 깊은 의미는 무엇일까. 죽음 이후를 생각하지 않는것. 살아있는 그 자체로서 살아간다는 뜻인가.

 

151. 매장 의례는 가시적인 삶 너머에 있는 다른 삶의 존재에 관한 관면, 가시적인 차원 너머에 있는 다른 존재의 차원-우리가 사는 가시적인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이라는 관념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어디엔가 가시적인 우리 삶의 버팀목 노릇을 하는 불가시적인 삶이 있을 것이다. ... 이것을 신화의 기본적인 테마를 이룬느 관념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모이어스: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것을 버티어 주는군요.

 

캡벨: 사람은 죽임을 통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이러한 행위와 관계가 있는 죄의식이 있지요. 매장에도, 친구는 죽었지만 다른 데서 계속해서 살 것이라는 의식이 반영됩니다. 이런 문맥에서 보면, 내가 죽인 짐승도 죽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사 살아 있는 것으로 됩니다.

 

153. 모이어스: 그 부족의 주식이 되는 동물, 식량원이 되는 동물이 회생 의례를 치른다.

캠벨: 삶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인간은 사냥꾼이다. 사냥꾼은 맹수와 마찬가지다. 신화를 보면, 사냥하는 맹수와 사냥감이 되는 짐승이 어울려 의미심장한 역할을 연출해 낸다. 이 양자는 삶의 두 측면을 암시한다. 즉, 공격적이고 죽이고 정복하고 창조하는 삶의 측면과 대상 혹은 객체가 되는 삶의 측면을 암시하는 것이다.

 

154. 먹기 전에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먹는 행위 자체를 의례 행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 의례 행위는 목숨을 버린 동물에게 자진해서 먹을 것을 준 것에 감사하는 의례, 그 동물이 아니었으면 굶을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는 의례입니다. 그러니까 사냥은 의례인 것이지요.

의례는 나의 개인적인 충동 때문에 너를 죽인 것이 아니다. 이것도 다 자연의 법칙에 화합하는 행위다. 이런 뜻을 나타내고 있지요.

 

msn036.gif 밥 먹기 전에 하는 기도를 찾아서 써본다.

 

물 한방울 속에도 천지의 은혜가 깃들여 있고,

밥 한톨 속에도 만인의 노고가 스며 있으며,

한 올의 실타래 속에도 베짜는 이의 땀이 서려 있다.

이 물을 마시고, 이 음식을 먹고, 이옷을 입고

부지런히 수행정진하여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의 은혜에 보답하겠읍니다.


五觀偈오관게

計功多少量彼來處 계공다소양피래처

忖己德行全缺應供 촌기덕행전결응공

放心離過貪等爲宗 방심이과탐등위종

正思良藥爲療形枯 정사양약위료형고

爲成道業應受此食 위성도업응수차식


공덕 많은 이 음식 어디에서 왔는가

내 덕행 돌아보니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 속의 온갖 욕심 모두 버리고

이 몸을 지탱하는 좋은 약 삼아

깨달음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위글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밥 먹을때 하는 게송으로

소심경의 오관계를 현대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 음식이 이 곳에 이르기 까지 수고한 모든 이들의 공덕을 하나하나 헤아려 봅니다.

이 공양을 응당히 받을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나의 덕행을 살펴봅니다.

이 음식을 먹는 뜻은 나의 허물과 탐진치를 멀리하고

마음을 바르게하는 것을 으뜸으로 합니다.

다만 이 몸이 말라 병들지 않도록 약으로 먹습니다.

그리고 이 음식을 받는 것은 응당 도업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msn036.gif 이 밥을 먹기 전에

 

땅과 물, 공기와 불이 합쳐져

이 음식을 만들었네.

우리가 그것을 먹을 수 있도록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수고를 하고

생명을 바쳤으니,

여기 이 음식이 우리에게 보탬이 되듯이

우리 역시 큰 생명에 보탬이 되리라.

 

- 자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세운 캘리포니아 오하이 학교에서 식사시간에 가는 기도문-

 

 

 

158. 짐승에게는 사람에게는 없는 힘이 있지요. 가령 샤만은 자주 짐승의 영을 수호령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샤만이 특정 짐승의 혼령을 자기 보호자, 혹은 스승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msn036.gif 인디언들이 밥을 먹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적어본다.

 

국 냄비에 대한 명상

 

나는 인디언이다.

지금 불 위에서 끊고 있는 이 국냄비처럼

평범한 것들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

냄비 속에서 끊고 있는 물은 비구름에서 내려온 것

그것은 하늘을 상징한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온 것

사람과 동물과 나무, 우리 모두를 따듯하게 해주는 태양으로부터.

냄비 속의 고기는 네 발 달린 가진 동물을 상징한다.

우리의 형제인 동물들

그들은 우리가 살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했다.

냄비에서 나오는 뜨거운 김은 살아 있는 숨결

그것은 원래 물이었다.

이제 그것은 하늘로 올라가 다시 구름이 된다.

이 모든 게 성스럽지 않은가.

맛있는 국이 끊고 있는 냄비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 단순한 것들 속에서도

위대한 정령이 얼마나 나를 돌봐 주고 있는가를.

-존 래임 디어-

 

162. 우리가 들소 춤을 가르쳐 줄 테니까 우리 일족을 죽이거든 그 들소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다오. 그러면 우리가 다시 살아나게 될 테니.

바로 이겁니다. 바로 그 의례를 통해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들어간 곳을 통해 나올 수도 있게 됩니다.

 

msn036.gif 아프리카나 인디언들은 매일 매순간을 함께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저녁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부락의 모든 주민들이 나와 노래한다. 춤을 춘다. 살아있음을 즐기면 자신을 먹여준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춤을 추는 의식을 행한다. 삶 자체가 의식이다.

 

163.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라고 불었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무, 돌 같은 거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잇지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어요. 이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삼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랍니다.

 

msn036.gif 그대라고 부름은 존중이다. 산이나 물이나 강, 바다. 나무나 숲속에서 사는 모든 동물들을 ‘그대’라고 부른다는 것은 존중한다는 의미다. 존중하는 생명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163. 짐승은 많은 의미에서 인간을 앞섭니다.

“만물이 비롯된 때에는, 지혜와 지식은 짐승들에게만 있었다.

<절대적인 존재>인 티라와가 인간에게는 직접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라와 신은 어떤 짐승을 인간에게 보내고, 그 짐승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현현한다.

인간은 그런 짐승, 하늘의 해, 달 , 별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

-포니 인디언-

 

msn036.gif 자연을 잘 관찰하다 보면, 배울수 있는 것이 많다. 아는 만큼 우주의 세상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사시사철 변하는 자연을 보면서 인간의 생로병사와 재생을 알 수 있다. 절대고독에 흔들리는 겨울나무를 보면서 봄에 맞이할 새싹을 알 수 있다. 바람을 맞으면서 세상살이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는 것을 느낀다. 자연을 사물을 사람을 바라보고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내 마음의 투영이다.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어떤 이는 이 달밝은 밤에 달을 바라볼 수 있는 우주를 볼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또 한편 어떤 사람은 ‘오늘밤 달마저도 나를 슬프게 하는구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달에 투영한다.

똑같은 달이 떠오는데 각자 느끼는 바가 다른 것은 각자 마음의 투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고 할 수 있다. 세상은 그대로이고 완벽하다. 어떻게 느끼고 살아갈지는 자신의 의지와 마음, 세상을 보는 프레임에 달려있다.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생각의 습관이 바로 운명이고 삶이다.

 

164. 아름다움의 문제, 이것이 그들이 의도한 아름다움일까? 아니면 아름다운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일까? 새들의 노래가 아름다운 것은, 새들에게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일까? .... 암벽화를 볼 때마다 예술에 관해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하지요. 어느 단계까지가 우리가 ‘미학’이라고 부르는 예술가의 의도이고, 어느 단계까지가 아름다움을 간직한 심성의 자연스러운 발로인지, 어느 단계까지가 그들이 습득한 바를 드러내는 것인지 궁금해지는 겁니다.

거미가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들 때 그 아름다움은 거미의 심상에서 오는 것이겠지요. 거미줄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거미가 지닌 본능의 아름다움입니다. 우리 삶이 지닌 아름다움 중 어는 정도가 살아 있음의 아름다움에 관한 것일까..... 어느 정도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일까...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지요.

 

166. 사원은 우리 영혼의 풍경입니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의 영적인 삶의 어머니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167. 암벽화의 메시지는 그 동굴에서 체험된 영원한 권능의 시간과 관계가 있습니다.

 

168. 남자들은 이 아이를 남자들만의 성소로 데려갑니다. 아이는 여기에서 시련을 당하지요. 가령 할례를 당한다든가. 몸의 한 부분에 상처를 입는다든가,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한다는가 하는 겁니다. 어머니의 젖으로 자라난 아이가 여기에서는 사람의 피를 마시는 겁니다. 이로써 아이는 어른이 됩니다.

 

시련은 곧 아이의 몸이 회생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희생이 치러지면 입문자의 몸은 어른의 몸이 됩니다. 이런 의례를 치른 이상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169. 이야기는 삶을 바로 잡고 삶의 모습을 바꾼다는 의식 아래 씌어집니다.

의례의 마당은 신화가 드러나는 마당입니다. 의례에 참가한다는 것은 곧 신화에 참가한다는 것이지요.

 

170. 알려진 바로는 초경을 치른 여자에게도 입문 의례가 있었다고 해요. 조그만 오두막 안에서 며칠 동안의 명상을 통해 여자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기간이 있었다는 겁니다. 오두막에서 앉아있는 겁니다. 그러면 한 몫의 여자가 되는 거지요. 여자라는게 뭡니까? 생명을 나르는 수레 아닙니까? 생명이 여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자는 이 생명을 낳고 먹여서 기릅니다. 여자의 힘은 대지의 여신이 지닌 힘과 동일시됩니다. 그러니까 여작 해야 하는 일은 이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소년에게는 이런 일이 저절로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외부의 힘이 소년을 성인으로 입문시키고, 개인보다 위대한 무엇인가를 섬기게 하는 것이지요.

 

172. 맙소사. 카톨릭 교회에서도 의례가 축소되었어요. 교회는 의례적인 언어까지도 상당히 일상적 언어로 번역해 냅니다. 미사를 뜻하는 라틴어는 원래 우리들을 일상성의 마당에서 “몰아낸다” 는 뜻을 지닙니다. 그래서 사제가 우리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곳, 거기가 제단입니다. 그렇게 등를 돌리고 있는 사제와 더불어 비로소 우리는 외계를 향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사제들이 성소를 돌려 놓아 버렸어요. 세상과 오순도순 지내보자는 거겠지요.

이들의 의례의 기능이 우리를 늘 있었던 자리로 감싸 들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밖으로 내던지는데 있다는 것을 잊은 거지요.


174. 신화를 살아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살아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 방면의 예술가들이다. 예술가들의 기능은 마땅히 환경과 세계를 신화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80. 수우족 소년 블랙 엘크의 체험담


“귀신을 몰아 낸답시고 그대 안에 있는 가장 귀한 존재를 몰아 내지 않도록 주의하라”

-니체-


나는 이 세계의 중심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갔다. 내가 본 환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성스러운 세계의 모습이다.

세계의 중심에 있는 산은 바로 “악시스 문디 axis mundi(세계의 축)”를 말한다.

악시스 문디”는 중심점, 모든 사물의 회전 중심인 극점을 말한다. 세계의 중심점은 움직임과 정적이 함께하는 점이다. 움직임은 시간이지만 정적은 영원이다. 우리 삶에서 이런 것을 깨닫는다는 것은 곧 영원을 체험하는 것이다. 일시적 체험에서 그 일시적 체험이 지닌 영원한 측면을 체험하는 것. 이거야말로 신화 체험인 것이다.

이 소년은 모든 선이 만나는 곳에는 빛나는 한 점이 있다고 했다.

 

캠벨: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되풀이된, 신에 관한 정의가 있다. 신은 중심은 도처에 있으나 주변은 없는, 이해가 가능한-감각이 아닌, 마음으로만 이해가 가능한-구체球體라는 정의가 그것이다. 그런데 그 중심은 바로 모이어스씨가 앉아 있는 그 의자이다. 내가 앉아 있는 의자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 둘 다 이 신비의 드러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의 해답이 될 수 있는 놀라운 신화적 자각일 수 있다.

모이어스: 그게 곧 메타포, 현실의 이미지라는 것이군요.

캠벨: 그럼요. 우리가 이 자리에서 가지고 있는 것은 무리 모두 개인주의라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중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를 마주보고 있을 뿐이다. 이게 바로 신화적인 홀로서기이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있는 산은 도처에 있는 것이다.

 

msn036.gif 신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다. 느끼면 있는 것이고, 느끼지 않으면 없는 것이기도 하다. 내 가슴에 사랑하는 이가 살아있으면 그는 살아있음이요. 옆에 있어도 그 사람이 내 가슴에 살아있지 않음은 살아도 죽어있음이 아니던가. 이렇게 이해해야 되나?

4. 희생과 천복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생명수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msn036.gif 천복을 찾는 일은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경험하는 것이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으려면, 내 속에 묻혀있는 광맥을 찾으려면 끊임없이 시도하고 경험해보는 수밖에.

서서히 나의 천복도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186. 이 모든 것은 생명의 힘과 권능과 마술적인 가능성을 표상하는 존재로 우리 주위에 있다. 이 생명의 힘과 권능과 가능성은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삶의 일부분의 도면서 우리에게로 열려 있다. 우리는 이런 존재가 늘 우리 안에 메아리친다는 느낌을 자주 경험한다. 우리들 자신이 곧 자연이니까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187. 오늘날에도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로 필요불가결한 것.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잇는 장소이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이다. 처음에는 이곳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성소로 삼게 되는 순간부터 여기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일어납니다.

 

msn036.gif 여백의 미美.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관계와 관계에서도 적당한 거리를 서로를 존중하게 하고 사랑하게 한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외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칼릴 지브란-

 

194.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준다.

옛 사람들의 삶의 목표는 항상 영적인 원리를 의식하고 사는 삶이었지요.

 

196. 궁극적인 모든 영적인 암시는 침묵에 담겨져 있다. 이 침묵은 소리 너머에 있다. 육肉이 된 말씀이 최초의 소리이다. 그 소리 너머에 있는 것이 초월적이니 미지의 존재, 불가지적인 존재이다. 이것은 위대한 침묵, 혹은 공空, 혹은 초월적인 절대다로만 표현될 수 있다.

 

197.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향연이다. 그것은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오는 것이다.

에덴 동산에서 인류의 타락을 다룬 우리 이야기는 자연을 부패한 것으로 보고있다. 바로 이러한 신화가 우리를 대신해서 이 세계를 부패시키고 있는 거다. 자연 자체를 부패의 상징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비롯되는 모든 것은 죄악이고, 따라서 타기되어 마땅한 것으로 전락한다. 신화가 자연을 타락한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자연 자체를 신의 현현으로, 정신을 자연의 본성인 신의 드러남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나 삶의 양식은 확연하게 달라진다.

 

197. 모이어스: 오늘날 자연의 본성인 신성은 누가 해석합니까? 누가 우리의 샤만입니까? 우리를 대신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해 주는 이가 누구입니까?

 

캠벨: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가들이야말로 오늘날에도 신화와 교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예술가는 신화와 인간성을 이해하는 예술가들이지,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사회학자 같은 예술가는 아닙니다.

 

모이어스: 시인도 예술가도 아니고, 초월적인 접신 경험도 해보지 못한 보통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7.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 삶에서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된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msn036.gif 나도 이 방법을 시도해보겠다. 나 조셉 캠벨에 꽃혔어. 예술을 해독히고자 나를 해독하고자 캠벨이 나에게 새로운 의식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8. 샤만과 사제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제가 한 사회에서 맡는 일은 기능적이다. 어떤 사회가 어떤 신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섬길 겨우 사제는 의례르 f집행하는 기능인으로 서품을 받는다. 그 사제가 섬기는 신은 그 사제가 태어나기 전에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샤만의 권능은 그가 거느린 친교영신, 즉 샤만 자신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신들로 상징된다. 샤만의 권위는 그 자신의 심리적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사회가 부여한 성직의 권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블랙 엘크의 예에서 보듯이 내적인 경험을 외적인 경험으로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것.

 

217. 쇼펜하우어는 명편 에세이를 통해

<사심 없이 남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고뇌와 고통에 인류가 참가하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우리는 자신을 제일 자연의 이법으로 여기는네 자기 보존을 포기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는가?

 

218.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개달음이 돌파구임을 보여 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둘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라는 개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가지 측면이라는 개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실재는 모든 생명을 동일시하고 통합하는데서 비롯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가 끊임없이 의식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형이상학적 진실일 것입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거야말로 우리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219. 영웅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물리적이니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바로 우리를 이러한 진실에 던져 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이러한 개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고 곧자 랗게 됩니다. 하와이 경ㅎ찰관은 자기가 목숨을 걸고 구하려던 청년이 누구인지도 몰랐어요. 쇼펜하우어는 자세히 보면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장담합니다. 사람들이 서로서로 자기를 잊은 상태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21. <신곡> 끄트머리에서 단테는 하느님의 사랑은 지옥의 바닥에 이르도록 온 주우에 사무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거의 같은 이미지입니다. 보살은 자비의 원리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치유의 원리에 다름 아닙니다.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자비가 있기 때문에 삶이 계속되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보살은 개달음을 얻음으로써 불사를 획득한 존재이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해서 이 세상의 슬픔에 참가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자진해서 이 세상에 참가한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과 엄청나게 다릅니다.

 

 

222. 시간이 존재하면 고통이 있게 마련입니다. 과거 없이 미래를 맞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현재를 사랑해 봐야 편재는 곧 과거가 됩니다. 상실, 죽음, 탄생....상실, 죽음, 탄생,,, 삶은 이렇게 돕니다. 십자가의 명상은 곧 삶의 신비의 상징에 대한 명상입니다.

 

222. 자살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연히 어던 시간대에 처하게 된 삶에 대한 심리적인 자세 자체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더 나은 시간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다른 삶을 위해 이 삶을 버리는 행위가 곧 자살인 겁니다. 하지만, 융 박사의 말마따나, 상징적인 상황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죽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죽어야 하는 죽음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죽음을 통해서 더 큰 삶의 길로 나서야 하는 것입니다.

 

223. 사람들은 살아 있음의 경험을 절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을 좋아한다고 고백하곤 합니다. 매일 직장을 오가면서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우리는 문득, 살아 있음의 체험 안으로 한발 들어서게 됩니다. 삶은 고뇌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 그리고 무서운 것이다. ..... 그러나 나는 살아 있다.... 이런 느낌을 경험하게 합니다. 월남전 당시의 이 젊은이는 전우를 위해 용감하게 죽음을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224.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신 분이자, 그 살로 우리를 먹이신 분입니다. 결국 우리 어머니의 몸이 곧 우리의 양식인 것이지요.

 

225. 삶의 미로를 뚫고 자나가면 삶의 영적인 가치를 접하게 된다, 이것이 lqk로 신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입니다.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기릉ㄹ 잃었다> -단테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세 마리의 괴물을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인 베르길리우스Virgil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이라는 것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230. 나는 늘 학생들에게 너희들 육신과 영혼이 가자는 대로 가거라.

 

231. 천복이 있는 영생의 샘을 찾는 이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늘 이와 비슷한 것, 천복에 들어온 것과 같은 조그만 직관을 경험하고 있어요. 그걸 잡는 겁니다. 그걸 잡으면 무엇이 어떻게 될지 아는 사람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 바닥으로 그걸 인식하는 도리밖에는 없어요.

 

232. 천복거리를 찾는 일은 스스로 갈고 닦아야 하는 기술 같은 것이지요.

 

233.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게.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 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요.

 

234. 천복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산스크리트 어에서 배운 겁니다. 산스크리트 어에는, 이 세상의 가장자리, 즉 초월의 바다로 건너뛸 수 있는 곳을 지칭하는 말이 세 가지 있어요. 즉 <사트Sat=존재> , <치트Cit=의식>, <아난다Ananda=천복, 황홀>을 뜻합니다. 이 말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요.

<내 의식이 제대로 된 의식인지, 아니면 엉터리 의식인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존재가 제대로 된 전재인지, 아니면 엉터리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어떤 일에 천복을 느끼는지 그것은 안다. 그래, 이 천복을 물고 늘어지자. 이 천복이 내 존재와 의식을 데리고 다닐 것이다. >

 

234. 나는 살이 있을 동안에도 이런 종류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면 그게 곧 천복이라고 생각해요.

모이어스: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는 것이군요.

천국은 바로 이곳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이자. 하느님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에요.

 

235.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른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 줍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 있게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235. 영원한 생명수는 우리가 있는 곳에 있습니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5. 영웅의 모험

 

우리는 이제 혼자 모험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다.

시대의 영웅들이 우리를 앞서 이 여행을 다녀왔기 대무이다.

그래서 미궁은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제 영웅이 길에다 깔 놓은 실을 붙들고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무서운 괴물이 있어야 하는 곳에서는 신을 만나게 되고,

남을 죽여야 하는 곳에서는 저 자신을 죽이게 되며,

외계로 나가야 하는 곳에서는 우리 존재의 중심으로

되돌아오게 되고,

외로워야 할 곳에서는 온 세상과 함께하게 될 것임을 .....

 

조셉 캠벨

 

239. <영웅>이라는 말은 자기 삶을 자기보다 큰 것에 바친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요.

삶의 행적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육체적인 행적입니다. 육체적인 행적을 보면 영웅은 싸움에서나, 남을 구하는 데서 용기 있는 행동을 보여 주지요. 또 하나의 행적은 정신적 행적입니다. 이런 행적에 따르면 영웅은 여느 인간의 영적인 삶의 범부를 훨씬 넘어서서 존재하는 희한한 체험을 하고는 우리 삶에 유용한 메시지를 가지고 귀환합니다.

 

239. 우는 보통, 누군가의 보호와 감독 아래 줄잡아 14년에서 20년 동안이나 의존적인 상태에서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냅니다. 이 동안 우리에게는 책임은 없습니다만, 대신 우리는 벌이면 벌, 상이면 상을 받아야 하는 복종적인 예속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박차고 자기 책임과 자기 확신 위에서 영위되는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인 영웅 여행의 기본적인 모티프입니다. 즉 이 여행을 바쳐야 한 인간은 어떤 상황을 떠나 삶의 바탕되는 것을 찾아내고, 보다 풍부하고 성숙한 인간 조건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241.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를 자기가 속한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보호받아 마땅한 영웅적인 행위로 본다> -오토 랑크-

 

242.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진정으로 탐구한다면, 진정으로 자기를 보존할 방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의식의 영웅적 변모의 과정에 든 거나 다름없습니다.

결국 모든 신화가 다루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모입니다. 전에는 저렇게 생각해 왔지만 지금부터는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 의식의 변모는 이로써 시작되는 것이지요.

모이어스: 의식은 어떻게 변모합니까?

스스로 부여하는 시련이나, 계시를 통해서 변모하겠지요. 시련과 계시, 이것이 바로 변모의 열쇠인 겁니다.

 

243. 모이어스: 지도자는, 어차피 해야 할 일을 찾아내어 선두에서 그 일을 해치우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나폴레옹은 지도자였지요. 그러나 영웅은 아니지요. 그가 성취한 것은 인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프랑스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으니까요.

 

지역 영웅이라고 할 수도 있고, 지역 신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지역 신은 지역 신이되, 이 신에게 정복당한 백성들에게는 원수가 될 테지요. 영웅이냐, 괴물이냐는 우리 의식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지요.

 

246. 아버지를 찾는 일은 곧 자신의 이력, 자기의 이름, 자기의 근본을 찾는 일입니다.

 

248. 우리 삶이 우리 기질의 잠을 깨웁니다. 우리들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찾아볼 필요가 있어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상의 무엇을 촉발시킬 만한 상황으로 자신을 던져 넣을 필요가 있는 것은 이 때문이지요. 현실로 드러나는 우리 이하의 무엇으로 떨어져서는 안 됩ㄴ다. 그래서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249. 모이어스: 영웅 신화는 우리에게 원형극장, 혹은 콜로세움, 혹은 영화관에 앉아 격투기나 영화를 구경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행위를 구경이라도 좀 하라고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의 영웅적인 행적을 구경하면서 불구가 되어 버린 우리 자신을 위로하는 일은 정치적인 의미에서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경기에 참가하지 않고 경기를 구경하는 것은 대리체험을 통하여 참가하는 행위입니다.

 

250. 모이어스: 행동하게 하는 대신 구경만 하게 하는, 말하자면 은근히 수동성을 부추기지 않나 싶은 것이지요. 말하자면 은근히 수동성을 부추기지 않나 싶은 것이지요. 신화의 이면에 있는 세계는 영적 가치가 모두 고달되어 버린 우리 세계인 것 같고요.

사람들은 발기 불능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저에게는 불감증, 권태, 보편적인 짌서로부터의 소외감, ...이거야말로 현대인에게 내린 저주 같아 보입니다. 우리 심층의 갈망을 일깨워줄 영웅이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무기력한 삶과 강요된 삶으로 빚어지는 사회학적인 침체 상황은 T. S. 엘리어트의 <황무지>가 그리고 있다.

 

252. <위험한 길은 이러하니, 면도날과 같다> -힌두경전

위험한 길은 자기 욕망과 열정과 감정을 따르되 마음을 다스림으로서 이러한 위험이 우리를 다리 밑으로 밀어 버리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253. 원자가 입자인지 파동인지, 아니면 이 둘을 겸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259. 우리 삶- 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261. 삶이라는 것이 여성을 편애하기 때문이지요.

초경을 경험하면 소년는 벌써 어른이 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것은 알고, 아기를 배고, 어머니가 되는 일뿐입니다. 그러나 소년은 먼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야 하고 삶의 에너지 전부를 자기에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262. 젊은이들에게 세계는 더 만나야 하는 것, 더 살아야 하는 것, 더 사랑해야 하는 것, 더 배워야 하는 것, 더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268. 신화는 시예요. 시적 언어는 대단히 유동적인 것이예요. 그런데 종교는 시를 산문으로 바꾸지요.

 

269. 아기의 삶은 생명의 충동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무의식에서 무엇이 솟아오르냐에 달려 있어요.

 

279. 모이어스: 우리가 아기로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분명히 우리의 의식 아래에 이미 어떤 기억이 저장되어 있다는 것이군요.

 

본능, 이게 바로 생물학적 기반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금 더 지나면, 외부로부터 강제를 당할 때마다 무엇인지 거북살스럽고, 이질적이고, 두렵고, 죄의식이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가 가장 까다로운 우리의 심리적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인 거죠.

 

271. 신화가 암시하는 첫째 방법은 신화 자체나 영적인 지도자나 스승을 따르라고 가르칩니다. 좋은 코치는 선수가 달리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선수의 천성적인 동작 양식만 조금 수정해 줍니다. 좋은 스승은 제자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면서 그 제자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알아냅니다. 좋은 스승은 충고를 할 뿐 명령을 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들도 제자를 이런 식으로 가르칩니다. 그렇다고 새서 가만히 있는 게 좋은 스승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따금씩 말을 해줌으로써 실마리가 될 만한 것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그런 말을 들려 줄 스승이 없으면 스스로 창안한 방법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즉, 자기에게 어울리는 바퀴를 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 하난 좋은 방법은 자기가 다루고 있는 문제와 같은 것을 다루고 있다 싶은 책을 이용해서 배우는 겁니다. 책 역시 실마리를 던져 줄 수 있습니다. 나는 주로 제임스 조이스나 토마스만 같은 사람들의 책을 통해서 배웠어요.

 

272. 대중은 이상주의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서, ,자기 중심>이 아닌, ,자기 방기>를 바탕으로 삼은 이야기를 하나 보고 싶어하고 있었던 겁니다.

 

273. <스타워즈>의 등장인물들이 쓰고 있는 가면은 현대인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진지 괴물스러운 힘을 상징합니다.

 

273. 결국, 다드 베디더는 자기 인간성을 완전히 발달시키지 못했던 겁니다. 그는 로봇입니다. 그는 자기의 뜻에 따라 사는게 아니라 자기를 강요하는 조직의 뜻에 따라 사는 관료였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우리 삶에 대한 위협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이 조직은 우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우리가 속한 사회를 부정하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조직이 과연 우리 인류의 목적을 이루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조직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이 조직을 더 이상 섬기지 앟을 도리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생각의 체계에 맞게 이 조직을 바꾸고자 하는 것은 허수고입니다 이 조직의 배후에서 작용하는 역사적인 힘은 그런 정도의 행동이 무의미하리만치 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덯게 해야 하지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인간으로서 위가 속한 시대의 역사를 사는 법을 익히는 일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l중요한 일입니다만 우리에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지요.

 

모이어스: 컴퓨터를 끄고, 기계를 끄고 네 느낌에 따라 네 마음대로 하라-벤 케노비의 음성

 

274. 너는 가슴으로 사는 사람, 인간성을 섬기는 사람이겠느냐, 아니면 <음험한 세력>이 요구하는 대로 하며 사는 사람이겠느냐. 물론 가슴으로 사는 사람이어야 하지요. 생명이 있는 곳은 가슴이니까요. 벤 케노비가 <포스가 너와 함께 할지어다>라고 말할 때 그가 말하는 ,포스>는 프로그램된 정치적인 힘이 아니라 우리 생명의 힘, 생명의 에너지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모이어스: 벤 케노비는 <포스>란 살아 있는 만물이 지어 내는 에너지의 장을 말한다. <포스.는 우리를 감싸고 있고, 포스는 우리를 관류한다. 이 우주를 묶고 있는 것이 바로 이 <포스>이다 라고 말합니다.

루카스가 표준신화 이미지를 사용했던 거지요. -영웅이ㅣ 모험의 소명을 받고 여행을 떠나 시렴을 겪고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를 얻은 뒤 사회의 홍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276. 소화 작용이 일어나는 것, 즉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뱃속은 어두운 곳이예요.

 

고래는 우리의 무의식에 갇혀 있는 생명의 힘을 상징합니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물은 무의식이고, 수생동물은 생명 혹은 무의식의 에너지입니다. 고fork 나타났다는 상황은 이 무의식이 의식적인 인격을 압도하고 힘을 얻은 상태지요. 즉, 이때부터는 무의식이 의식을 극복하고 의식을 통제하려고 합니다.

 

278. 우리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고를 하기는 하되 가게 운여하는 것처럼 사고해요. 하지마 의식은 우리 인간 존재의 부수적인 기관에 불과해요. 그러므로 이 의식에게 우리의 존재를 통제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의식은 한풀 기가 꺾인 상태에서 우리 인강성을 섬겨야 하는 존재이지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해도 좋은 존재는 아닌 것이지요. 의식이 통제하게 될 때, <스타 워즈>의 다드 베이더 같은 인간이 생깁니다. 이런 인간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것만 편들지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는 메피스토펠레스로 상징되는 인물이지요.


모이어스: 누군가가 저에게 ,그래, 조지 루카스의 상상력도 좋고, 조셉 켐벨의 신화학도 좋아. 하지만 그게 내 인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장담하거니와, 상관이 있어요. 이걸 깨닫지 못하면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다드 베이드 같은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구체적인 프로그램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 자기 가슴의 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는 정신분열증적 해리의 위험이 있어요. 자기 중심에서 이탈해 있는 사람이거든요. 자신은 삶을 위한 프로그램에 맞게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우리들의 육체가 관심하는 것은 그런 프로그램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에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 세상에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지를 남의 말에 따라 결정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279. 우리가 살고 있는 차원에서, 육체가 우리의 깊디깊은 삶의 정체를 깨달아 내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본 적 있습니까?

 

<네 안에 있으니까 가서 찾아라>

 

나날의 경제적 관심과 육신의 안락에 갇히지 않는, 진짜 삶의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이런 능력이 있어요.

 

280. 신화에는 개인이 지닌 완전성과 무한한 힘의 가능성을 깨닫게 하고, 그 세계를 날빛 아래로 드러내는 힘이 있어요. 괴물을 죽인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둠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신화는 우리를 사로잡되, 우리 심층에 있는 것을 거머쥡니다.

 

281. 우리들 자신을 구하면 세상도 구원됩니다. 생명력이 있는 인간의 영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영혼이 없는 세계는 황무지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바꾸고, 법을 바꾸고 하다 보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천만에요! 어떤 세상이든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나대로 유효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데 생명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 생명이 우리 안의 어디에서 나왔는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연후에 우리들 자신의 튼튼한 삶을 사는 겁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자면, 용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에 속박된 <자기>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용 우리에 갇혀 있어요. 분석심리학은 용을 쳐부수고 무너뜨림으로써 우리를 보다 넓은 관계의 마당으로 이끌어 냅니다,. 궁극적인 용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를 엄중히 감시하고 있는 우리의 자아, 이게 바로 용입니다.

모이어스: 우리의 자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욕망하는 것, 우리가 믿으려 k는 것, 우리가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가 사랑하려는 것, 우리를 옥죄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게 발 h자아랍니다. 이건 아주 조그만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떨 때는 우리를 아주 곰짝못하게 합니다. 이웃의 말에 따라 행동하다 보면 조만간 곰작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옵니다. 이 경우 이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 비치는 용일 수 있어요.

 

서구 문화권에서는 용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용은 달라요. 중국의 용은 늪의 생명력인데, 대가 되면 괴성을 지르면서 하늘로 날아오릅니다. 인간에게 최상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인데, 용은 바로 이 물을 주재하는 아주 대단히 상서로운 존재이지요.

 

282. 융박사가 치료한 외로운 환자.

자기 스스로 자기 삶을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개닫는 순간 이 여자는 자기 용을 죽인 것이지요.

 

283.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뿐인데도 우리는 우리를 구해 줄 재물, 우리를 구해 줄 권력, 우리를 구해 줄 사상을 찾아 엉뚱한 곳을 헤매지요.

선생님 소리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은 사람들이 이 아드리아네의 실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일입니다.

 

284. 스승 되는 사람은 등대와 같지요.

젊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가능성을 암시하는 본을 만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의 삶입니다. 살아 있는 신화는 우리에게 우리 시대에 알맞은 본을 제시합니다.

모이어스: 많은 사람들은 그 많은 본 중에서 하나를 고르다가 결국 자기가 누군인지도 모르는 채 살다 갑니다.

 

285. 서구인들은 <나. 안에 잠재해 있는 삶의 과녁이자 이상을 살지 절대로 남의 안에 인T는 가능성을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교수 방법은 우리는 학생들에게 그들 나름대로 구상하게 하고, 그렇게 구상한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인도해 주지요. 그러니까 학생은 자기 나름의 자기 길을 찾아야 하지요. 그러니까 그 길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을 향한 잠재력, 다른 사람은 체험해 보지 못한 것, 다른 사람에 의해서는 체험될 수 없는 것일 수밖에 없지요.

 

<그대는 그대의 운명에 깨어 있는가> -햄릿

 

286.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면 인생은 전처럼 다시 즐거워집니다. 우리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삶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측면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죽음의 순간에 끝나는 법입니다. 공포를 정복하면 용기 있는 삶의 길이 열리지요. 모든 영웅이 경험하는 모험 중의 중요한 통과의례는 바로 공포의 극복입니다. 공포가 극복되어야 비로소 영웅 업적의 성취가 있는 거지요.

 

287. 커스터 장군의 부하들이 쏘는 총탄의 소나기 속을 뚫고 들어가는 용감한 인디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기에 좋은 날이다!> 이겁니다. 이게 그들의 구호였지요. 눅기에 마침 좋은 날이라고 생각하는 인디언에게 삶에의 집착이 있을 리 없지요. 이게 바로 신화가 전하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만,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습은, <나>라는 존재의 궁극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가 이미 성취한 자기성自己性을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msn036.gif 오늘은 죽기 좋은 날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모든 생명체가 나와 조화를 이루고

모든 소리가 내 안에서 합창을 하고

모든 아름다움이 내 눈 속에 녹아들고

모든 잡념이 내게서 멀어졌으니

오늘은 죽기 좋은 날

나를 둘러싼 저 평화로운 땅

마침내 순환을 마친 저 들판

웃음이 가득한 나의 집

그리고 내 곁에 둘러얹은 자식들

그렇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떠나겠는가.

 

어느 타오스족 인디언( 낸스 우드가 받아적음)

 

 

287. 고대 영국의 기사 거웨인과 녹기사

 

291. 들꽃처럼 그저 충동에 따라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292. 낙타 -> 사자-> 용을 죽이는 일<나의 미래>

아이의 자기 성취를 방해하는 것이면 모두 다 아이가 버려야 할 <그대의 미래>이지요.

청년기는 자기 발견의 시대, 사자로 변모하는 시기입니다. 이 청년기에는 법률이 적용되기는 하되, 강압적인 <그대의 미래>에 복종시키는 방향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지를 갖게 하는 방향으로 적용됩니다.

 

294. 행복을 찾으려면,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잘 관찰하고 이것을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들더서 행복한 상태, 흥분해서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행복한 상태, 그윽한 행복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렇게 행복을 관찰하는 데는 약간의 자기 분석 기술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남이 뭐라고 하건 거기에 머물면 되는 겁니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천복을 좇으면 되는> 겁니다.

 

295. 아메리카 인디언 민화에는 <구혼의 거절>의 모티프가 자주 나옵니다.

처녀는 구혼자들을 차례로 거절함으로써 자신을 그만큼 드높입니다. 그러나 드높이면 드높일수록 위험도 그만큼 커집니다. 문제는 콧대 높은 것도 좋지만 그 콧대보다 더 높은 시험의 위험을 감당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인디언 민화의 모티프 중에는<어머니와 두 아들>

구혼을 거절하는 순간에, 어머니가 정해 준 범위를 넘어서는 순간에 모험이 시작된다는 겁니다. 어머니가 정해 준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면, 기존의 질서를 부수지 않으면, 기존의 법을 어기지 않으면 창조적인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구혼을 거절하는 민담의 모티프 중 <이로쿼이즈 인디언의 이야기>

298. 여자 물 속에 있었다는 것은 결혼을 통하여 여자가 합리적, 의식적인 세계에서 무의식의 강박충동의 세계로 들어가 있었다는 뜻이에요.

개성이 의지로 통제가 가능한 영역에서 초 개성적인 충동의 영역으로 함몰된 상태를 말합니다.

 

299. 모이어스: 학생들엑 천복을 좇으라, 삶의 기회를 잡으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라고 가르치신다는데, 혹시 이 신화를 들려주시면서, 모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곧 모험에 대한 보답이다., 이렇게 가르치는지요?

암, 모험 자체가 모험에 대한 보답이고말고요.

 

301. 원수라는 것은 바로 우리 운명을 빚는 도구이다.

 

304. 살면서도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신화는 읽어본 적이 없어요. 신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직면하고, 이겨내고, 다른 것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는 인생,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인생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부처가 된 석가는 고통에서 헤어날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피난처가 바로 니르바나인데, 이 열반은 천국 같은 어떤 <곳>이 아니라, 욕망과 고통을 해탈한 마음의 심리적 상태를 말하지요.

그렇게 해탈하면 우리의 삶이..........

조화롭고, 중심이 온전하고, 확신으로 가득 찬 삶이 된다는 것이지요.

 

304. 부처는 보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보살이란, 영생의 진리를 개달았으면서도 자진해서 이 세상에 내려와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이 세상의 슬픔에 참여하는 자를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을 경험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의 고통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자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성이 지니는 자기 중심적인 수성獸性에서 깨어날 때 생기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말은 <더불어 슬퍼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자비는 고통을 해소시킵니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곧 삶이라는 인식을 통해서, 그렇게 해소시킵니다.

모이어스: 삶은 어차피 고통과 더불어 살게 되어 있는 것인데요요?

<고통과 더불어>라고 할 게 아니라 <특정한 고통과 더불어>라고 해야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을 없앨 수는 없어요. 이 세상에서 누가 고통을 끊어 보았답니까? 언제, 어디에서 그런 삶을 살아 보았답니까?

 

 

305. 이 여자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자기의 고통은 기와에 지은 죄를 징벌하는, 혹은 장차 지을 죄를 경계하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결국 이 여자에게 정신적인 고통까지 안겼지요.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지요.

<고통에서 놓여 나고 싶거든 고통이 곧 삶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말고 용감하게 인정하세요. 우리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고상한 존재가 될 수 있답니다. >

나의 말을 들은 이 여자는 정말 고통이 자기 삶의 스승임을 인정하게 되고 이어서 그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바로 그 순간에 세상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경험했다고 합니다.

고통의 원인은 당신에게 있다. 당신이 그 고통을 비롯되게 했다.

<아모르파티 Amor fati> 운명에의 사랑

운명이 곧 우리 삶이니 사랑하라는 겁니다. 우리 삶이 지니는 이러한 측면에 대해 아니라고 한 마디만 할 수 있으면 만사는 해결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에게 동화시키기가 까다로우면 까다로울수록 이것을 성취한 인간은 그만큼 더 위대해지는 거랍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우리가 삼켜 버리는 악마가 그런 우리에게 권능을 부여합니다. 삶의 고통이 크면 클수록 돌아오는 상賞 또한 그만큼 큽니다.

 

306. 앞에서 말한 여자친구는 늘, <하느님이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준 겁니다.

<천만에 당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왜냐하면 설사 하느님이 그렇게 했다고 하더라고 그 하느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당신 자신이 바로 당신의 창조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게 한 것이 당신의 내부 어디쯤인가를 알아야 한다. 이걸 알아내면 당신은 고통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고통을 당신 삶의 일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가능하다. >

 

인생은 苦海고해 -석가

 

인생이라는 게 우리가 이 세상에 흔적을 남겨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조이스

 

306. 프로이트는 우리 삶이 오점투성이인 것은 다 부모 탓이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우리 삶이 이렇게 열악한 것은 우리 사회의 상류계급 탓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탓해야 할 것은 우리들 자신밖에 없어요.

<까르마業>라고 하는 인도의 개념이 아마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겁니다. 이 개념풀이에 따르면, 우리 삶은 우리가 지은 업의 열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밖에는 탓할 것이 없는 것이지요.

 

307. 이 세상에 우연지사가 아닌 게 있어요? 우연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되어 있느냐 여부와 관련된는 문젭니다. 삶의 궁극적인 배경은 우연입니다.

 

307. 우리가 이르러야 할 궁극적인 목적지는 바로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안에 정점이 있다는 것, 우리는 이 정점을 찾아내어 우리 의지로 장악해야 합니다. 이 중심을 잃으면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생기면 우리의 주의는 분산됩니다.

부처가 말한 니르바나는 바로 이런 종류의 평화의 중심점입니다. 불교는 바로 고통이라고 하는 심리적인 문제에서 시작됩니다. 인생은 슬픈 것이라고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과 슬픔으로부터의 탈출구가 있느데 이게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니르바나는 우리 마음 혹은 의식의 어떤 상태를 마하는 것이지 천당처럼 어떤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니르바나는 인생이라는 소용돌이 바로 그 안에 있는 것이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니르바나 상태는 욕망이나 공포나 사회적인 인연에 쫓기면서 살지 않게 될 때, 자기 않에서 내적인 평화의 중심을 발견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행위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심으로부터 나온 자발적인 행위, 이것이 바로 보살의 길, 말하자면 이 세상의 슬픔에 기꺼이 참여하는 삶인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우리는 더 이상 어떤 것에 붙잡힌 상태에서 벗어납니다. 욕망, 공포, 의무 같은, 우리를 붙잡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바로 우리 자신을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성취한 사람,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통치자입니다.

 

308. 티베트 불교화에는 <됨>의 바퀴를 나타낸, 대단히 오묘한 그림이 있어요.

1. 짐승의 삶이 있는 곳 (축생계)

2. 사람의 삶이 있는곳 (인간계)

3. 천상계 신들의 삶이 있는 곳(천상계)

4. 지옥에서 벌받는 영혼의 삶이 있는곳(지옥계)

5. 호전적인 귀신의 삶이 있는 곳(수라계)

6. 굶주린 귀신들의 삶이 있는 곳(아귀계)

이들의 영혼에는애착과 집착과 기대로 가득한 타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습니다.

이 육도의 각 영역 한가운데엔 부처가 있습니다. 이 부처는 깨달음과 해탈의 가능성을 상징하지요. 이 바퀴의 굴대에는 세 마리의 상징적인 동물, 즉 돼지, 닭, 뱀이 있습니다. 바로 이 세 종류의 짐승, 즉 미욱과 욕망과 악의를 상징하는 짐승이 이 바퀴를 돌리는 힘입니다. 이 바퀴의 테는 의식이 굴대에서 이 바퀴를 굴리는 세 마리 짐승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사람,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중심의 굴대와 소위 <삼독, 貪.탐할탐 瞋,성낼진, 癡어리석을치, 미치광이치>의 주위에는 어둠으로 내려가는 인간의 영혼, 깨달음으로 오르는 인간의 영혼이 있지요.

 

309. 깨달음이란 만물을 통해 한 영원성의 찬연함을 인식하는 일이지요. 이 만물이라는 것은 이승에서는 선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고 악한 것으로 판별될 수도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이면을 꿰뚫어 보아 버리는 것이지요. 여기에 이르면 속세적 욕망이나,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놓여 납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마라> -예수

<지각의 문전이 깨끗하면 만물이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을 보아 낼 수 있다>-블레이크

 

309. 진정한 예술가는 조이스가 만물의 <광휘>라고 불렀던 것을 그 자체가 가진 진리의 드러냄으로 인식하고 해석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309. 사람은 다 삶의 경험에서 기쁨을 느끼는 나름의 방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가 사람은 마땅히 그걸 인식하고 그걸 계발하고, 그것과 사귀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들로부터 보통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거북해지곤 하는데, 그 까닭은 내가 보통 사람, 보통 여자, 보통 아이 같은 걸 도무지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310.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은 종교와 예술을 통해 이르는 방법입니다. 삼엄한 철학으로는 이를 것 같지 않아요.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개념이 정교하게 앍힌 숲 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타인에게 자비의 문을 열고 온 가슴으로 사는 삶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요.

잠재력은 기억이라고 하는 튼튼한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이고요.

 

310. 깨달음을 여는 열쇠는 깨달음의 문제를 다룬 책에서 나온다고 해야겠지요. 내 경우 대부분은 책에서 나옵니다. 정말 많은 선생님들을 만나는 은혜를 누리기는 했지만요.

 

310. 신화는 우리 삶의 훌륭한 의지가지 같은 것이었어요. 내 삶으로 쏟아져 들어온 이런 종류의 지혜가 우리 삶에 일으켜 놓은 기적은 정말 대단한 거랍니다.

 

311. 신화는 거짓말이 아니에요. 신화는 시, 신화는 메타포일뿐이에요. 신화가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라는 말은 정말 신화를 잘 나타낸 말입니다. 이게 왜 <버금>이냐하면, 궁극적인 것은 결국 언어로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로 드러난 진리 중에는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신화의 진리는 말씀 너머, 이미지 너머, 불교의 전륜의 테 밖에 있어요. 신화는 우리의 마음을 이 테 밖으로 보냅니다. 이 테 밖에 있는 것은 앎의 대상은 될망정 드러냄의 대상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궁극적 진리에 버금가는 진리인 것이지요.

신화 자체의 신비와 우리 자체의 신비를 알고 체험하면서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이런 앎과 체험은 우리 삶에 광휘를, 새로운 조화를, 새로운 빛을 더합니다. 신화의 문맥에서 생각하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눈물과고 화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겉보기에는 부정적인 것 같은 우리 삶의 순간과 삶의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가치를 읽어 낼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 삶의 모험을 진심으로 반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영웅의 모험, 즉 살아 있음의 모험이지요.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우주의 어머니인 위대한 여신의 신화는 우리에게

이 세상 만물을 자비로 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땅이 곧 여신의 몸이니 만치

이 땅 자체의 신성도 섬겨 주기를 요구합니다.

 

315. 아저지를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개성과 운명을 찾는다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개성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몸과 대로 마음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런데 그 개성이라는 게 이게 신비로운 겁니다. 개성이라는 것은 곧 우리의 운명이니까요. 그러니까 아버지 탐색으로 상징되는 이 운명의 탐색을 떠나는 거지요.

 

316. 여신 숭배는, 주로 농경 문화, 농경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요. 즉, 대지와 아주 밀접합니다. 대지가 식물을 낳듯이 인류의 여성은 인간을 낳지요. 대지가 그 식물을 기르듯이 인류의 여성도 인간을 기릅니다. 따라서 여성이 지니는 마력은 대지가 지니는 마력과 같은 것이지요. 다라서 상호 관계 아래 있어요. 그래서 만물을 낳고 기르는 에너지의 화신은 당연히 여성의 모습을 지니지요. 여신이 가장 중요한 신화 이미지가 되는 곳은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문화권, 이집트의 나일강 문화권 같은 농경 문화권입니다.

 

316. 여신이 창조신일 때 이 여신의 몸은 곧 우주가 됩니다. 이런 여신은 바로 우주와 동일시됩니다. 우리가 이집트 신전에서 본 여신 누트의 상이 바로 이런 여신입니다. 누트 여신은 삶을 송두리째 감싸 안는 거대한 하늘입니다.

모이어스: 여신이 태양을 삼키는 이미지도 있습니다.

서쪽에서 태양을 삼켰다고 동쪽에서는 다시 낳지요. 이건 태양이 밤에 여신의 몸을 관통했다는 뜻이지요.

 

319. 우리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 몸, 우리 육체의 형상과 이 만물을 짓는 에너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알아내어야 하는 겁니다. 에너지가 없은 몸은 살아 있을 수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몸에서 나오는 삶이고, 무엇이 에너지와 의식에서 나오는 삶인가를 느끼고 있지 않아요?

 

331. 두 번째 태어남이란 중심인 가슴 아래쪽에 있는 세 차크라는 바로 우리가 초극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초극할 수 있을 때 이것은 비로소 우리 가슴을 섬기는 종이 됩니다.

 

339. 존재의 신비는 그대들에게 힘을 부여할 수도 있고 그 힘을 가두어 갈 수도 있다.

이 ‘존재하는 만물 주에서 으뜸가는 존재“를 인도 어로는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이건 남성 명사도, 여성 명사도 아닌, 중성 명사예요. 여자를 인도 어로는 <마야-샤크티-데비>라고 합니다. 이건 <생명을 주신 여신이자 형상을 주신 어머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파니샤드>에서 바로 이 여신은 ,베다>시대 신들에게 자기네들이 획득한 권능과 존재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등장하고 있는 겁니다.

 

342. “육의 욕망은 영에 반하고 영의 욕망은 육에 반한다” ---사도 바울

 

342. 의례의 집전은 곧 신화의 <연출>입니다. 우리는 의례를 통해서만 신화적인 삶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바로 그런 체험에의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343. 여신은 우리 안데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합니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로 나갈 때 가져 가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우주도 우리를 변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깨달음에 이르는 단서가 되기는 합니다.

 

344. 이 우주에는 수억 개 수억 갑절이나 되는 열원자로熱原子爐(향로로)가 흩어진 채 불길을 내뿜고 있어요. 이 열원자로가 바로 별인데, 우리 태양은 그런 별 중 하나랍니다. 그 중의 많은 별은 실제로 산산조각이 나면서 우주 저편으로 흩어지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여기에서 나오는 먼지와 가스에서는 수많은 행성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아득한 우주 저편에서 끊임없이 무슨 소리가 들여 온다지 않습니까? 이 초음파는 이른바 창조의 “빅뱅”이라는 대폭발의 메아리라는군요. 이런 초음파 주에는 자그마치 18억 년 전에 발생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18억 년 동안이나 우주를 가로질러 와 이제야 우리에게 들리게 된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데 살고 있어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는 사람은 이 광막한 우주의 마이크로비트에 지나지 않는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것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와 이 광막한 우주는 하나라는 느낌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변화에 참가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이렇듯이 사랑은 눈과 눈을 통하여 마음을 얻는다.

눈과 눈은 마음의 척후병이라서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를

샅샅이 염탐한다.

이렇듯이 서로 하나가 될 때,

두 눈과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될 때,

두 눈이 본 것을 마음이 좋게 여기므로,

여기에서 온전한 사랑이 태어난다.

오로지 마음이 움직이는 데서만 태어나거나 시작될 뿐

사랑은 다른 데서는 태어나지도 시작되지도 않는다.

 

두 눈이 마음에서,

두 눈과 마음이 기쁨을 누리는 덕에,

두 눈과 마음이 그리하기를 바라는 덕에,

사랑이 태어난다.

진정한 사랑에 빠진 자는

사랑이, 가슴과 눈과 눈에서 태어난

온전한 정성임을 알기 때문에

사랑이 다름아닌 희망임을 알기 때문에

서둘러 연인에게로 달려간다.

그러면 눈은 꽃을 피우고, 가슴은 꽃츨 성숙하게 하는데,

이 성숙한 열매에서 여무는 씨앗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귀로 드 보르네이으

 

349. 에로스적 사랑은 생물학적 충동에서 나와요. 즉, 이성에 대해 몸으로 충동을 느끼는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요소, 개성적인 요소는 개입할 여지가 없지요.

 

아가페적 사랑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식의 영적인 사랑이예요.

 

350. 에로스의 체험은 일종의 사로잡히기예요. 인도의 사랑의 신은 활과 화살통을 든, 덩지가 우람하고 힘이 좋은 청년이랍니다. 이 화살은 <죽음의 고통이 따르는 고뇌>, 開眼개안등으로 불리는데 이것에 맞으면 누구든 육체적, 심리적 폭발을 경험하게 되지요.

 

335. 자기 천복을 따를 때는, 어떤 사람의 어떤 협박에도 두려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 생기든지 <내> 삶과 행동은 나름의 가치를 지녀야 하는 겁니다.

 

357. “이 세상에 내 세상도 하나 있어야겠다. 내 세상만 가질 수 있다면 구원을 받아도 좋고 지공게 떨어져도 좋다. ” -<트리스탄과 이졸데>

 

358. ‘그들은 자기 성취의 주인이자 도구가 되고자 했다. 그런 사랑의 깨달음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가장 고상한 일이다. 그들은 도그마도, 정치도, 사회가 규정하는 어떤 선善의 당대적 개념도 좇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경험으로부터만 지혜를 구하려 했다. -사랑의 파이어니어<개척자>

 

358. 개인주의는 서구 선진 사회는 개인을 살아 있는 실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사회의 기능은 반드시 개인을 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개인을 꽃피게 하는 것이 사회의 기능이지, 사회를 꽃피게 하는 것이 개인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8. 영원의 가면

 

418. 예술이 ‘비추어 내는 것’ 바로 . 신에 대한 예술가의 생각, 신에 대한 사람들의 체험.... 그러나 궁극적인 신비. 무량의 신비는 역시 인간의 체험 너머에 있어요.

모이어스: 그러니까 우리의 체험을 언어로 드러내기는 해야겠지만 우리의 언어는 그 체험에 훨씬 못 미친다는 것이군요.

캠벨: 그래서 시詩가 있는 거지요. 시의 언어는 꿰뚫는 언어입니다. 시에서 정확하게 선택된 언 언어는 언어 자체를 훨신 뛰어넘는 암시 효과와 함의 효과를 지닙니다. 이런 효과를 지니는 시를 통해서야 우리는 저 광휘, 저 에피파니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피파니는 정수를 통해서야 드러납니다.

 

인생에 목적이 있는게 아니다.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


 

Ⅲ. 내가 저자라면


1. 이 책의 전체적 뼈대를 논하라.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으로 이루어졌다. 1985년과 1986년 조지 루카스의 스카이 워커 랜치농장)에서, 그리고 그 뒤에는 뉴욕의 자연사 박물관에서 이루어졌다. 두 사람의 대담물로 PBS 6시간짜리 시리즈 물로 만들어진 것을 토대로 책으로 엮었다.

 

모이어스가 캠벨에게 질문하고, 질문에 답하는 캠벨은 그가 아는 신화에 관한 이야기를 대서사시처럼 들려준다. 캠벨은 신화를 지나치게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 신화의 당대적 역할을 지나체게 이념적, 치료적 기능에 국한시키는 듯하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반대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캠벨은 오로지 가르치는 일, 다른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는 일에만 관심했다.


1. 신화와 현대 세계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곳곳에 신화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성당의 첨탑이나 햇빛에 반사되어 비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그림에서도 교회에서도 사원에서 그려진 그림이나 상징같은 것들이다. 종교는 다만 메타포일뿐이다. 궁극으로 통하는 진리는 같지만, 각 종교가 가지는 정해진 명령 신호가 다르다. 접근 가능한 명령 신호를 입력시켜야 하는 일종의 소프트웨어이다.

신화의 뼈대가 되는 모티프는 같다. 옛날부터 우리의 신화학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는 것은 자기가 어떤 사회의 동아리가 되어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모든 신화학은 어떤 범주에 구속된 사회에서 자라난다. 그런 시화학이 밖으로 나오면서 충돌하고, 충돌을 거쳐 어떤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여기에서 混淆혼효(뒤섞인다는 뜻)를 거치면서 보다 복잡 다단한 신화학이 된다.

즉, 신화는 사회화되었고, 그 사회가 속하는 범주에서 신화는 구속성과 외부에 대한 공격성을 갖는다.

 

2. 내면으로의 여행이다. 신화는 메타포 은유이다. 은유는 신의 가면이다. 신의 가면을 통하여 사람들은 영원을 경험한다. 은유의 메시지의 단서를 얻기 위해서 삶의 체험을 행해야 한다. 체험이 없는 진리는, 누가 진리를 말해도 귀에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이란 우리 삶의 끝에 뒤에 오는 것이 아니다. 영원이란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여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것은, 세속적인 생각을 끊는 바로 지금의 이 자리이다.

 

3. 태초의 이야기꾼들이다. 삶에서 거행되는 의례를 통해 삶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간다. 이 새로운 차원에서 생명은 다른 차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그 들어간 곳을 통해 나올 수도 있게 됩니다.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라고 부FMS다. .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무, 돌 같은 것들까지도. ’그대‘라고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진다. 이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삼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랍니다.

현실의 이미지 ‘메타포’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 안에 밖에 신이 머무른다. 우리가 곧 중심에 있는 산이고, 이 중심에 잇는 산은 도처에 있다.

 

4. 희생과 천복이다. 신화는 우리 삶의 요체인 영적인 삶의 원형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날마다 의례를 접하는 것,. 이것이 우리 삶의 질서를 온전하게 바로 잡아준다.

세상이 뭐라고 하건 자네가 정말 좋아하는 것만 붙잡고 살면 행복하겠다 싶거든 그 길로 나가야 한다. 부모가 시켜서 선택하는 삶은 바퀴 테를 붙잡는 삶입니다. 굴대를 붙잡아야 천복을 누리며 살 수 있다.

천복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천국은 바로 이곳에서 경험해야 하는 것이자. 하느님을 경험하는 곳이 아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이다. 이걸 알고 있으면 어디에 가든지 자기 천복의 벌판에 사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문을 열어 준다.

천복을 좇되 두려워하지 마라,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어도 문은 열릴 것이다.”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그 생명수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다.

 

5. 영웅의 모험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삶에서 나와야 한다. 소녀은 초경을 경험하며서 여성이 된다. 소년은 사회에서 행해지는 성년식을 치루거나 아버지를 찾아 떠나거나 하면서 영웅의 길을 간다. 보살핌을 당하는 삶에서 자신의 삶을 독립해야 하는 시기다. 금제를 깨고 모험을 함으로써 성장해간다. 미궁에서 빠져 나오는 실을 붙들고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영웅이냐, 괴물이냐는 우리 의식의 초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삶의 한 측면으로서 죽음을 받아들여야 무조건적인 긍정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 삶- 남의 삶을 시늉하는 것이 아닌, 우리만의 삶- 역시 탐색의 여행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이다. 사회적인 문화적 배경에 따라 남신 위주 혹은 여신 위주의 신화가 등장한다. 부계사회는 남성위주의 신화다. 서구인들의 여성 경시 풍조는 성서적 사고의 산물이다. 남성위주의 신화가 대두되는 지역은 인도, 유럽인 들이 내려온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성모 마리아나 처녀 수태는 하느님의 일을 대신 하는, 순결과 순수의 상징인 여신이 등장한다. 여신은 우리 안에도 있고 밖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곧 여신의 몸이기도 하다. 우주와 우리가 별개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라는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이것이 신화인 것입니다.

 

7. 사랑과 결혼 이야기이다. 결혼은 시련이며 영적 동일성을 인식하는 일이다. 제대로 된 상대와 결혼해야 ‘육화한 신의 이미지’를 재건할 수 있는데, 이게 바로 결혼이다. 영혼은 그 짝을 찾지 않고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그런데 그 짝은 바로 우리 안에 있다.

 

8. 영원의 가면이다. 인생에 목적이 있는게 아니다. 인생은 확대 재생산하고, 존재를 계속하려는 충동을 지닌 원형질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

 

편집자 베티 를라우어즈의 말

대담자 빌 모이어스의 말

1. 신화와 현대 세계

2. 내면으로의 여행

3. 태초의 이야기꾼들

4. 희생과 천복

5. 영웅의 모험

6. 조화여신造化女神의 은혜

7. 사랑과 결혼 이야기

8. 영원의 가면.

역자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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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는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살아 있음이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따라서 순수하게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은

우리의 내적이니 존재와 현실 안에서 공명합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실제로 살아 있음의 황홀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39. 결혼한 사람은 자기의 정체를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결혼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지요. 결혼은 시련이랍니다. 이 시련은 <관계>라고 하는 신 앞에 바쳐지는 <자아>라고 하는 제물이지요. 바로 이 <관계> 안에서 둘은 하나가 되는 것이랍니다.

 

 

53. 모이어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의식을 변모시킬 수 있습니까?

캠벨: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삶이라는 것은 곧 명상입니다. 신화는 영적인 의식의 수준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54. 기도나 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을 수준을 오르락내리락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어떤 의식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시키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에너지를 감추고 있습니다.

 

123. “영혼의 자리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만나는 자리” -노발리스

 

140. “신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고, 옳고, 의로우나

인간에게는 어떤 것은 옳아 보이고 어떤 것은 옳아 보이지 않는다“

-헤라클리토스-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 이 인간은 시간의 장, 결정의 장에 놓입니다. 삶이 여러 어려움 중 하나는 이 양자의 존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는 중심을 알고 있다. 나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이 속세의 착각일 뿐이오, 하느님 보시기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것임을 안다“. 이러한 인식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163. 인디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그대‘라고 불었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무, 돌 같은 거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잇지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어요. 이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삼인칭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어떤 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될 때 언론이 노출시키는 가장 중대한 문제는 적국의 국민을 순식간에 ”그것“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랍니다.

 

185.

천복을 좇으면,

나는 창세 때부터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내가 살아야 하는 삶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입니다. .....

자기 천복을 좇는 사람은 늘 생명수 마시는 경험을,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지요.

 

197. 캠벨: 방법을 가르쳐 드리지요. 아주 멋진 방법이랍니다. 방에 앉아서 읽는 겁니다. 읽고 또 읽는 겁니다. 제대로 된 사람이 쓴 제대로 된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읽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마음이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삶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 삶에서 항상 다른 깨달음을 유발합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습니다. 이러저러한 게 궁금하다, 이러저러한 책을 읽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베스트셀러를 기웃거려도 안 됩니다. 붙잡은 작가, 그 작가만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그 사람이 쓴 것은 모조리 읽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작가가 읽은 것을 모조리 읽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우리는 일정한 관점을 획득하게 된고 우리가 획득하게 된 관점에 따라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3. 인상적이고 탁월한 착안점

방송에 방영된 분량을 책으로 엮었다. 빌 모어스와 조셉 캠벨의 대담이다. 모이어스의 질문은 우리들이 궁금해하는 부분들을 잘 대변해준다. 방송은 한 번 지나가고 다시 생각할 기회를 갖기 힘들지만, 대담을 책으로 엮음으로서 반복하고 곱씹어볼 수 있다. 대화문을 읽으면서 내 자신이 현장에서 캠벨에게 질문하는 듯하다.

 

4. 나의 단상

전 세계의 신화에 나오는 모티프를 상징적으로 알기 쉽게 풀이함으로써 메타포 상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 성경, 힌두교에 나타난 사상이나 불교 아프리카에 전승되고 있는 조각상을 보았다. 부계중심의 신화, 모계 중심의 신화. 신화는 결국 그 사회에 구속력을 갖고 사회화되어간다. 그러나 미합중국 국장이나 달러 지폐에 그려져 있는 문장의 해석을 봄으로써 캠벨이 미국인인 것은 확실하다. 미국 중심주의와 패권주의의 사상이 깊이 박혀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국은 인디안의 피로 얼룩진 나라이다. 평화로이 잘 살고 있던 나라에 칼과 총으로 인디언의 피를 뿌려가면서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런 나라를 ‘자국의 이익을 무시하고 오로지 상호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을 함께할 것을 결의하면서 태동’한다고 했다.


상징은 그 상징 그 자체이다. 상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해석가의 프레임에 달려있다. 미국인이기에 국장이나 달러 지폐에 있는 것을 신화하는 것도 캠벨의 몫이었으리라. 캠벨이 어린 소년 여섯 살때 인디언의 쇼를 보고 신화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인디언의 역사를 논하지 않고 미국중심에서 설명했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캠벨 자신이 말한 것처럼 삶은 그냥 삶이다. 삶의 의미를 부여하기 보다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삶이라고 했다. 상징을 해석하고 싶은가. 나의 사상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한다. 객관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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