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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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이미지
조지프 캠벨 Joseph Campbell 지음 / 홍윤희 옮김 / 살림 출판
1. 저자에 대하여
이 책을 읽기 전에 별도로 저자 조사를 하지 않았다. 이 책에는 저자의 생애를 요약한 연표가 상세하게 나와있다.
이 책을 읽은데 필자가 기억하면 좋을 것 몇 가지만 적어두고자 한다.
(아래의 내용은 다른 책들에서 저자에 대해서 본 것으로 필자 나름대로 구성했고, 내용의 확인을 요하는 것들이다.)
저자는 어려서 인디언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다. 6살에 ‘버팔로 빌’을 공연한 것을 보고 인디언 이야기에 심취했다고 한다. 필자는 당시의 ‘버팔로 빌’ 공연 내용이 미국적인 시각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식민지 확장측면에서 이야기를 다루었을 것이라고. 이 책의 저자 조셉 캠벨은 그런 한쪽의 시각에서 구성해서 전달하려던 메시지보다는 인디언 이야기 자체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인디언 전설은 필자가 관심이 많다. 개별적으로 흥미롭다. 인디언들의 이야기에는 별자리 이야기, 꽃말 전설, 옥수수 전설 등 세계3대 종교라고 하는 것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다.)
저자의 논문 주제는 아더왕의 성배전설에 관련한 것이다. 이는 저자가 책에서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 나오는 내용을 많이 인용하였는데, 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저자는 문화인류학을 공부하였다.
저자의 삶에서 달에 우주선을 보낸 사건을 목격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지구에서 떠나보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니까. 이 책에서도 지구를 거대한 우주에 속한 하나의 작은 세계로 보게 한다. 물론 그렇게 본 지구도 거대하지만. 지구라는 세계를 탈피해서 더 커다란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8. 시각예술을 매개로 이 책은 꿈과 삶과 신화의 바다를 항해한다.
9. 『신화의 이미지』는 독자들을 우주적 꿈에 세계로 안내한다. 우리는 책을 펼치는 순간 비슈누 신과 함께 잠든다. 그리고 내내 세계의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꿈을 꾸고 난 당신은 더 이상 꿈꾸기 전의 당신이 아니며, 당신이 바라보는 지구는 꿈꾸기 전의 지구가 아니다. 깨어나서 우리는 우리가 신화 속에 살고 있음을, 꿈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9. 이 책의 글보다는 그림을 좀더 더디게 ‘읽어’ 주십사하는 것이다. ....『신화의 이미지』는 그가 집필한 어떤 책보다도 체제가 자유롭다. 하지만 또 어떤 책 못지 않게 조화롭다.
캠벨은 그야말로 마음 가는대로 그림을 배열하고, 그림 가는대로 펜을 놀린 것 같았다. 굳이 논증하려 하지 않고,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는 그의 스타일은 이 책에서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이야기는 언어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혹은 언어가 떠난 자리에서 이야기는 더 풍성하게 들려올 수 있음을 ‘신화의 이미지’를 통해서 보여준다.
옮긴이의 말
6. “신화는 당신이 걸려 넘어지는 곳에 당신의 보물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6. 켐벨은 신화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 들어가는 통로라고 본다. 그리고 그 동굴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으로 더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캠벨의 책은 바로 이 보물이 가득한 동굴로의 초대이다.
7. 조지프 캠벨의 다채로운 삶의 경력 만큼이나, 켐벨의 저작들은 사람을 강하게 매혹시키는 힘이 있다. 그것은 현란하게 펼쳐지는 그의 박학다식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이 갖는 힘은 오히려 그토록 다양하게 펼쳐져 보이는 세계 신화의 스펙트럼에서 그가 인류의 정신사적 통일성을 발견해 나간다는 데 있다. 그 통일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모든 종교와 신화는 동등한 위상을 갖는다.
7. 그가 신화를 ‘인류의 위대한 한 가지 이야기’로서 ‘단일신화’라고 할 때, 그것은 다양한 신화들의 차이를 지워나가는 ‘하나’가 아니라 다양한 신화들이 공존함으로써 이루어지는 ‘하나’이며 그 속엔 무수한 우주의 배꼽, 무수한 우주의 중심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대화하게 된다.
7. 현대인은 삶에 의미를 주는 ‘신화’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발견하고, 그래서 현대사회는 혼란 속에 있다. 현대 과학은 문자 그대로의 신화를 ‘무가치한 거짓’으로 거부하게 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신화의 진정한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이고, 신화의 상징적인 의미는 심리학적인 것이다.
8. “신화는 개념체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체계에서 옵니다. ……신화는 마음이 거처하는 곳, 경험이 있는 곳에서 생겨납니다. ……신화는 사실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신화는 사실들 너머 그 사실을 알려주는 무언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8.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A는 not A가 아닌 세계이지만, 그가 안내하는 꿈과 신화의 삶은 A가 진짜로 not A가 되는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는 “네가 바로 그것이다” 신은 도처에 있으며 , 당신 안에 있다.
저자 서문
12. 그림은 우리의 시선을 붙잡아 서두르지 않고 잠시 쉬어가게 하며, 그림이 펼쳐 보이는 즐거움 속에 머물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구성하면서 그림 자체가 지는 특성에 다라 배열하여 독자들이 언제라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 페이지부터 읽어나갈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그림에 담긴 신화적 테마들은 각 장에서 해석하였는데, 그 해석은 독립적인 논의라기 보다는 예술작품들을 위한 장치로서 고안된 것들이다.
12. 꿈을 통해 신화를 향한 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 신화는 꿈의 본성에서 비롯된다. 꿈은 깨어있는 의식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내면세계로부터 떠오르는 것이며, 이는 신화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12-13. 1부에서는 꿈을 통해서 신화를 향한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2부에서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이라는 원대한 3대 ‘세계 종교’를 완성시킨 유럽과 근동, 인도, 극동, 중남미의 신화이다. ..... 신화의 건축물들을 확인해볼 것이다.
3부에서는 적용과 해석을 통해 동양과 서양사이의 차이점을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언급할 것이다.
4부에서는 요가를 통환 신화의 상징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동양적 접근방식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5부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정점을 이루는 부분으로 희생된 신에 대한 세계 각지의 민속과 문자기록들에 대한 비교 조사이다.
6부에서는 꿈으로서의 신화, 삶으로서의 신화와 더불어 ‘깨어남’이라는 역설적 신비에 대해서 고찰해 볼 것이다.
* 저자 서문에 나온, 책의 구성에 대하여 요약
Ⅰ. 꿈으로서의 세계 The World As Dream
20. ‘우린 그런 것들이지
꿈으로 만들어진 것들, 하여 우리의 작은 생은
한숨 잠과 함께 한 바퀴 도는 것이지’
- 셰익스피어, 「헛소동」
‘우리를 꿈꾸는 꿈이 있답니다.’
- 칼라하리의 한 부시맨
‘중국의 현자 장자는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꾸고 일어나 상념에 잠겼다.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을 꾼 사람인지, 혹은 사람이 된 꿈을 꾸고 있는 나비인지.’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지구별에 왔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우리는 잠자기 위해서, 꿈꾸기 위해서 여기에 온 것이지.’
-아즈텍 시인, 작자미상
‘La Vida es Sueno :"인생은 꿈"’
- 칼데론의 희곡 제목
* 이 책은 1부를 시작하면 첫 번째 페이지에 그림설명과 그림이 나온다. 그것은 아담이 자고 있고, 신이 아담의 옆구리에서 이브를 만들어내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이다. 그림1.<이브의 탄생>
1-1장. 잠의 지배자
24. 인도에서는 천구과 지옥,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우주가 어느 한 존재가 꾸는 위대한 꿈이며, 그 꿈속의 모든 등장인물들도 마찬가지로 꿈을 꾸고 있다고 노래되어왔고, 그것이 인도의 문명 전체를 틀 지웠다.
* 이시영의 만화 <지구에서 영업중>, <한눈에 반하다>에 나오는 신의 이미지는 인도의 신 비슈누인 것 같다. 작가는 꿈꾸는 자를 모델로 캐릭터를 만들었다.
레오나르도 드카프리오가 주인공인 영화 'Inception'에서도 꿈꾸는 사람이 나오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서 주인공을 구하는 것이 주요 구조다.
인도의 비슈누에 관한 이야기를 더 알고 싶다.
그림4. <우주의 꿈을 꾸고 있는 비슈누>
26. ‘꿈은 영혼의 가장 깊고 비밀스러운 곳에 숨어 있는 작은 문이며, 이 문은 우주의 밤을 향해 열려 있다. 그 밤은 ‘자아 의식 ego-consciousness'이 생겨나기 오래 전부터 정신psyche으로 존재했고, 또한 우리의 ’자아-의식‘이 얼마나 멀리 확정되건 간에 정신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모든 ’자아-의식‘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리하고 구별하며, 개별적인 것들만 알고, 자아에 관계될 수 있는 것들만 본다. 그것이 별들 가운데 가장 멀리 있는 성운까지 미친다 해도, 자아-의식의 본질은 ’한계‘에 있다. 모든 의식은 분리한다.
꿈은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 깊은 곳으로부터 생겨나며, 너무나도 유치하고 기괴하며 비도덕적이다. 꽃처럼 피어나는 그 솔직함과 진실함 앞에, 우리는 기만에 찬 우리의 삶에 대해 얼굴을 붉히게 된다.’
* C.G. 융, 인도의 예술작품에 대한 설명
27. 그림5.<코끼리 왕을 구하는 비슈누>
‘태양의 새를 타고 날아오르며 세계라는 환상을 꿈꾸는 자, 비슈누는 (누구나 환각에 의해 자신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자신의 상상 속의 일화 속으로 쉽게 들어간다. 그리고 이 작품은 끝난다.’
29. 그림4에서 신의 그의 피조물들의 꿈을 꾸고 있었다면, 그림6에서는 신의 피조물들이 신의 꿈을 꾸고 있다.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보자. 욥이 야훼의 창조물인가, 아니면 야훼가 욥의 창조물인가?
* 오늘(2013.06.06) 목요 인문학 강좌 : 기독교의 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아래부분에 씌인 라틴어를 해석해 주셨다. 정확한 문구는 받아적지 못했다.
Deus comprehenus non est Deus.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신은 신이 아니다? 신이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되는 존재가 아니다.?)
31. 우주적 미래들은 절대로 그 자체로 순수한 상태에서 경험될 수 없고, 자신의 지역적 조건에 따른 종족적 적용양식으로부터 추상해낼 수밖에 없다. 사실 우주적 의미들의 매력은 그 무한히 다양한 변형 작용들에 있다.
* 그러니까 내가 지역적, 종족적 적용양식에 따라 꿈을 꾸게 된다는 말이지, 그 꿈 속에서는 우주적 의미들이 담겨있는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내 적용양식을 알아야겠다.
32. 그림7. <위대한 신, 시바 마헤슈바라 Shiva Mahesvara>
C.G.융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무의식을 의인화할 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집합적 인간존재로, 다시 말해 양성의 성격을 다 갖추고, 젊음과 노년, 탄생과 죽음을 넘나들며, 백만 년이나 이백만 년 동안의 인간의 경험을 고루 갖추고 있는, 불멸의 존재로 생각할 것읻. 그런 존재가 있다면 그는 변화하는 현세의 모든 것들보다 더 고귀한 위치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에게 현재란 더 덜도 아닌 예수보다 십만 년 전의 어느 해(年)를 의미할 것이다. 그 존재는 오랜 옛날부터 꿈을 꾸는 자이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경험으로 인해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훌륭한 예언자일 것이다. 그는 무한히 긴 세월 동안 개인의 삶, 가족의 삶, 부족의 삶, 국가의 삶을 계속 반복하여 살아왔으며, 성장하고, 피어나고, 부식하는 삶의 리듬 감각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 융이 말하는 ‘무의식을 의인화시킨 존재, 집합적 인간존재란 바로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그 존재다.
1-2장. 죽음과 부활의 신
35. 그림10.<젊은 태양의 신 테페르툼Nefertem으로 다시 태어난 투탕카멘 Tut-Ankn-Amon>
“나는 어제이자, 오늘이며, 내일이다. 그리고 나는 두 번 태어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나는 신들을 창조하고 지하세계와 심연과 천상의 주민들에게 무덤의 식사를 주는, 신성하며 숨겨진 영혼이다. 나는 동쪽의 지배자이며 빛이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두 얼굴의 소유자이다. 나는 양육된 자들의 신이며, 어둠으로부터 생겨나 죽은 자가 살고 있는 집의 형태로 존재하는 신이다. 경배하라! 지구의 중심에 서 있는 성소의 군주를. 그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그이다.”(『이집트 사자의 서』,「낮이 다가오다」
* ‘그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그이다’ 신의 속성을 이렇게 표현하는 구나.
1-3장. 경이로운 아이
66. 이와 유사한 것으로 동양에서는 유명한 구세주이자 세계의 꿈을 꾸는 비슈누의 화신, 크리슈나의 탄생에 관한 전설이 가장 잘 알려진 일화이다.
* 저자가 유사하다고 하는 사건들
- 예수의 탄생과 어린 예수를 죽이려는 일련의 사건들
- 모세가 유대인을 박해하는 이집트 왕자로 자라난 사건
- 크로노스(아버지)가 성장한 제우스(아들)에게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아들들을 삼켜버린 것
--> 저자는 동서양에서 비슷한 신화들을 찾아서 보여주고 있다.
1-4장 강력한 여신
75. 우주 기원의 본질이자 여성성과 개인성의 본질인 마야는 다음의 세 가지 힘을 지녔다고 한다.
1. 감추는 힘: 사물의 실재적, 내적, 본질적인 성경을 감추거나 은폐하는 힘이다.
“그는 모든 생물체에 들어있지만, 그 아트만은 겉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2. 투영하는 힘: 환영으로서의 인상과 깊은 생각을, 그와 결합되는 욕망이나 혐오와 함께 방출하는 힘이다.
무지(감추는 힘)가 실재를 은폐한다면, 상상력(투영하는 힘)은 현상을 전개한다.
“이 투영하는 힘은 모든 (겉으로 들어나는)모습들을 창조한다. 그것이 신의 모습이건, 우주의 모습이건.”
3. 드러내는 힘: 이것은 예술과 경전, 의례와 명상을 알게 하는 역할을 한다.
* 저자는 이 부분 다음에 그림49.<다리가 있는 풍경>, 토마스 겐스보로우 의 그림을 넣었다.
‘다리’가 상징하는 것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연결하는 것이라면, 신의 속성 중에 ‘드러내는 힘’을 말하는 것일까?
그림50.<달빛 아래 현을 켜며>, 마위앤
‘.... 지금 그림에 솜씨가 뛰어난 사람을 만나 성대하게 그려낸다면 방을 나서지 않고도 앉은 채로 시내와 골짜기를 다 접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무엇을 보여주기 위함인가?
그림51.<민강에 스민 봄>. 스타오 --> 이것도 산수화다. 위에 쓰인 시를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이것들은 감추는 힘을 보여주는 것인가?
83. 자연과 영혼의 절대적 이분법(A는 not A가 아니다: 인간은 신이 아니다)이라는 일반적 생각을 초월하는 신화적 이미지로서 성육신 교리는 이미 지적되어왔듯이(교회법에 의해 경시되긴 했지만) 예수라는 한 사람의 속에서 신과 인간이라는 대립쌍의 절대적 구분이 없어진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또한 예수의 경우처럼 이러한 대립물들의 일치가 궁극적인 진실이며 자아의 기반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도 강조된다.
84. 초기 그노시파의 「도마복음」....
‘왕국은 네 안에 있고, 네 밖에도 있다. 네가 네 자신을 알게 된다면 너는 네가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리라. 하지만 네가 네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는 가난 속에 있을 것이고, 네 자신이 가난이 되리라.(80:19-81:5)
사도들이 그분께 물었다. 언제 죽음의 휴식이 찾아오고 언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까? 그분이 사도들에게 대답했다. 너희들이 바라는 것은 이미 와 있으나, 너희들은 그런 줄을 모른다.(90:7-12)
나무를 쪼개 보아라. 나는 거기에 있다. 돌을 들어올려 보아라. 너는 그곳에서 나를 찾으리라.(95:26-28)
86.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내가 태어날 때 모든 것이 태어났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원인이자 만물의 원인이었다.……만약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신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86. 그리고 다시 실레지우스이 말을 빌자면,
“내가 그를 에워쌀 때, 신은 나의 중심이 된다.
내가 그에게도 녹아들어갈 때, 신은 나의 둘레가 된다.”
* 얼마 전 목요인문학강좌 살롱9 불교 수업에서 신과 우리의 존재와 ‘바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Ⅱ. 우주 질서에 대한 생각 The Idea Of A Cosmic Order
2-1. 문자 전통과 무문자 전통
94.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문화의 신화의 의례들에서 서로 비슷한 구조나 종종 동일한 모티프들이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여러 방식들 중 한 가지가 바로 심리학적 방법이다. 제임스 G. 프레이저 James G. Frazer의 『황금가지 The Golden Bough』에 나오는 유명한 말을 인용해 보자면,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서로 다른 나라, 서로 다른 하늘 아래 사는 인간 정신의 유사한 구조에 비슷하게 작동하는 유사한 원인들의 결과이다.”
98-99. 여기서 주로 문자적 전통을 다룰 것인데, 그 이유는 첫째, 우리는 문자적 전통을 발전시키고 활용한 사람들의 손으로 해석된 신빙성 있는 문자기록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무문자 전통에서 순전히 원시적인 것과 원시성이 퇴색된 것을 구별하려면 우선 문자 전통의 주요 형상들과 태마들, 모티프들에 익숙해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이유는 결국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모든 철학, 신학, 신비주의와 과학이 사실은 다양하게 굴절되고 발전해온 하나의 위대한 문자화된 세계유산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그 역사, 해석, 적용방식, 주안점 그리고 지역적 목적들은 달랐지만 어쨌거나 이들은 기원에 있어서 하나이며, 그 물려받은 상징들에 있어서도 하나이다.
2-2장 세계산
100. 그림65에서는 태양의 신이 두 가지 국면으로 나타난다. 첫째는 심연에서 떠오르는 모습이고 다음은 우주산 꼭대기를 오르는 모습이다. 수메르의 옛 천문학자들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은 평평한 것도 둥근 구형도 아니었다. 그들은 우주가 무한한 바다로부터 계단처럼 층층이 솟아올라 있는 거대한 산이라고 생각했다.
113. (그림74,75) 우주 전체는 존재 Being와 되기 Becoming의 상위 양식과 하위 양식 사이에서 인식되는 조화의 방식으로, 하나의 단일한 생명이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런 사고로부터 두 가지 방향의 영적 운동이 투영된다. 위에 있는 것은 아래로 내려오고 아래 있는 것은 위로 올라간다.
....... 게다가 상계와 하계의 전체성은 위아래를 관통하는 ‘천상의 에너지’로서 영적인 신의 현존을 가득 채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눈에는 보이지만 도달할 수 없는 천상의 존재들은 천상적 힘의 물질적 핵심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간 역시 영적인 존재로서 지상의 베일에 가려지 있는 ‘신의 이미지’이며. 신이 ‘생명을 쥐고’ 있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금한’ 이상 어떻게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모든 인간 존재와 인간되기는 높은 하늘에 인도된다. ...... 따라서 지상의 질서는 천상의 질서에 상응한다. ........
-알프레드 예레미아스 Alfred Jeremias
115. 뱀의 유동성은 물을 의미하고 계속해서 날름거리는 갈라진 붉은 혀는 불꽃, 즉 생명을 수태하는 바다에 내재된 생명의 불꽃을 의미한다.
2-3장 중앙아메리카의 세계산
144. 피터 퍼스트Peter Furst교수가 말했듯이, “샤먼과 재규어는 단순히 힘이 동등한 것이 아니라, 샤먼이 동시에 재규어고 재규어가 샤먼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올메카 입상들 중에 환관처럼 생긴 신기한 몸의 형태와 범처럼 생긴 모습들은 실제 인간을 모델로 했다기보다 신화적 관념, 즉 “사제, 혹은 샤먼에게 내재 되어 있는 초자연적 재규어의 능력, 재규어와 영적인 유대와 동일한 정체성, 그리고 총체적인 영적 변형 능력으로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간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그의 역량”을 타나내는 것일 수 있다.
151. 아귀처럼 굶주린 사자가 먹을 것이 없어진 것이다. 사자는 시바신에게 돌아가 먹을 희생물을 달라고 애원하였다. 시바는 가장 위대한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통찰력을 발휘하여, 그 괴물에게 네 스스로 자신을 먹어치우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빛나는 성찬이 시작된 것이다.
괴물은 자신의 발과 손부터 시작해서, 다리와 팔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 결국에는 얼굴만 남게 되었다. 자기 소모라는 생명의 신비를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던 시바 신은 이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자, 자신의 분노로 빚어낸 이 피조물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너는 지금부터 ‘영광의 얼굴’인 키르티무카Kirtimukha로 불려질 것이며, 영원히 나의 문 앞에 살게 될 것이다. 너를 경배하는 데 태만한 자는 누구든 절대로 나의 은총을 받지 못하리라.”
*‘영광의 얼굴’에 관한 전설
160-161. 희생의 첫 번째 교훈은 ‘묵종’이며, 이것은 단순한 묵종이 아니라 존재의 숭고한 신비와 전제조건 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生)을 소진하는 생의 과정이다. 이것이 바로 ‘영광의 얼굴’ 이미지에서 타나난 것이고, 분명 중국의 ‘도철’ 문양에서 나타난 것이다.
161.“만물은 우리에게 빌려진 것으로 생각하게나.
오 벗들이여, 우리는 여기 지구를 스쳐 지나갈 뿐이라네.
내일 또 그 다음 날(당신이 바라시듯이, 오! 생명을 주신 이여!), 내 벗들이여. 우리는 갈 것이네. 그 분의 집으로.”
* 작자 미상의 아즈텍의 시
161. 인도의 「따이띠리야 우파니샤드」에서는 조금 더 열정적인 사고를 선사한다.
“오, 놀라워라! 오, 놀라워라! 오, 놀라워라!
나는 음식이다! 나는 음식이다! 나는 음식이다!
나는 음식을 먹는 자이다! 나는 음식을 먹는 자이다!
나는 음식을 먹는 자이다!
나는 신들보다 먼저 태어났으며,
불멸성의 배꼽에 있는 세계 질서의 장자이다!
누구든 나에게 보시하면 그는 그대로 받으리라!
나는 음식이요, 음식을 먹는 자를 다시 먹는 자이다!
나는 온 세상을 초월하는 존재이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태양과 같은 빛을 얻으리라.
이것이 비밀의 가르침 ‘우파니샤드’이다!”
2-4장. 달력의 순환
178. 각각의 브라흐마가 한 생애가 끝날 무렵, 브라흐마와 모든 것들은 우주의 꿈을 꾸는 자의 몸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간다. 그 꿈꾸는 자는 다시 브라흐마의 한 생애만큼의 시간동안 꿈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리고 그의 몸속에서 다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연꽃의 꿈이 다시 펼쳐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다. 게다가 무한한 공간에서 무수히 많은 연꽃 우주들이 무한이 넓은 연꽃 연못에서처럼 어디서나 움트고 꽃피우고 시든다. 시간의 무한성 속에서 과거에 시작도 없었듯이 피고 지는 브라흐마의 세계에 끝은 없다.
세계의 꿈을 꾸는 자가 꿈꾸지 않는 깊은 잠의 초시간적 상태가 되어 연꽃의 꿈이 다시 용해되어 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모든 것의 파괴가 완성된다.
195. 그림138. <뱀 치마를 입은 여신 코아틀리쿠에Coatlicue>
“우주의 다이나믹한 힘이 육화된 것으로서, 반대물들과의 투쟁 속에서 생명을 부여하고 죽음을 먹고 자란다. 이 투쟁은 너무나 강력하고 필수적이며, 그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는 전쟁이다.”
199. 이를 위해 희생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신성한 전쟁제도가 세워졌고, 그들은 매일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의 꽃을 바치듯이 희생자들의 가슴을 갈라 살아있는 심장을 꺼내 높이 받쳐 올렸다.
199. 삶이란 죽음의 얼굴 위에 덮어쓴 가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죽음도 또 다른 가면일 뿐인가? 아즈텍 시인이 물었듯,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너머에 진실이 있다고, 혹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단지 꿈꿀 뿐, 우리는 꿈속에서 태어날 뿐.
모든 것이 꿈이라네……’
2-5. 순환하는 시공간의 세계
207. 아즈텍과 마야, 그리고 일반적인 중아아메리카인의 관점에서 볼 때,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의미에서 ‘사랑’은 어떤 우주적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 반대로 헤라크레이토스에게서처럼 대립쌍들을 함께 묶는 것은 오히려 다툼이다. 다툼만이 세계를 지탱하고 지속시킨다. 그리고 다툼의 신비는 전쟁과 신성한 공놀이 경기라는 지고한 형태로 상징화되었다.
223. 재림하는 그리스도는 우주적 매트릭스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런 점에서 해석하자면, 복음서에서의 처녀인 인간 어머니에게서 예수가 태어난 것은 일종의 전조(前兆)이며, 인간의 역사에 내딛은 자비로운 ‘한 걸음’이었다. 시공간의 몸에서 태어나는 재림에 있어서의 똑같은 신비는 대우주적 규모로 현시한다.
224.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전설을 위해서 성당이 지어지고 또한 그 전설 속에서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처럼, 거기에는 시간과 공간, 영원의 조각들에 앞서 우리 자신과 모든 사물들에 들어 있는 어떤 씨앗이나 부분에 대한 지식이 암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태양과 달과 샛별 속에서 꺼지지 않는 빛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떠오르고 지는 것처럼 결코 죽지 않고 계속해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것이 불과 바람에서 태어나고, 물과 대지에서 태어났듯이 그것은 모든 생명 속에 살아있으며, 모든 것보다 앞서 태어나고,모든 것보다 오래 산다.
2-6장. 변형의 중심
226-227. “그는 돌 하나를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그는 꿈을 꾸었는데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는 것이었다. 주께서 그 층계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
‘주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은 ....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벹엘이라고 하였다. ......” (창세기 28:10-14, 18-19)
229. 융의 말을 빌자면, “(무의식의 장에서) 사람은 더 이상 별개의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으로 융합된다. -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인 인류의 무의식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229. 지상에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곳에 걸쳐 그런 형상들이 출현하는 것을 꼭 인종적 전파나 문화적 전파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심리적인 것, 즉 무의식의 깊이이다. 융의 말을 빌자면, “(무의식의 장에서) 사람은 더 이상 별개의 고립된 개인이 아니다. 그의 정신은 넓어지고, 인류의 정신으로 융합된다. -- 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통적인 인류의 무의식으로 융합되는 것이다.”
235. 신 오딘이 룬 문자의 지혜를 얻기 위해 아흐레 동안 거기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딘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바람이 몰아치는 나무 위에 매달려 있었다.
아흐레 밤을 꼬박 매달려 있었다.
나에게 상처를 남긴 창과 함께, 나는
오딘에게 바쳐졌다. 내 자신을 위해 내 자신을 바쳤다.
그 뿌리 아래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나무 위에 매달려.”
236. 거꾸로 뒤집혀 뿌리가 위에 있는 영원한 나무에 대한 관념들도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까타 우판샤드」에서는 다름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뿌리는 위쪽으로,
가지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무화과 나무를 보라!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브라만처럼 보이도다.
그 뿌리가 바로 순수한 빛
브라만의 모습이다.
그것이 ‘불멸’의 이름으로 불리는 브라만이다.
그 브라만에 모든 세상이 의지해있으며
그를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도다.
그가 바로 그것(브라만)이다.’
238. 중심축이 되는 지점이나 기둥의 이미지의 본질은 움직임에서 정지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분리에서 통합을 향해 가는 길이나 장소를 상징하는 것이다. 반대로, 즉 정지에서 움직임으로, 영원에서 시간으로, 통합에서 다수성으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성겯ㅇ에 나타난 에덴동산에서 그 이미지는 두 그루의 나무로 나타난다. “생명의 나무도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었고, 선악과 나무도 거기에 있었다.”
239. 한편 불교에서는 그런 관문을 통과하여 그 나무(보리수, ‘완전한 앎에로 깨어남’의 나무)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보리수는 바로 붓다가 「창세기」에서와 같은 두 가지 상태, 즉 욕망과 두려움에서 해탈하는 길을 인류에게 열어줄 때 그 아래 앉아 있었던 나무이다. 욕망과 두려움은 티치아노의 작품에서 인간의 타락과 관련된 것으로 표현되었다. 게다가 붓다의 전설에서도 유혹자가 그 나무 주위에 나타났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지 않은가? 게다가 양면을 가진 유혹자는 축복받은 자 앞에 처음에는 ‘열망’의 주 ‘욕망을 자극하는 자’, ‘카마’로 나타났고, 나중에는 ‘죽음’, 즉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 ‘마라’로 나타났다.
241. 그는 절대적 무아의 경지에 이른 ‘일몰과 같은’, 그래서 ‘더 이상 아무것도 그와 비견할 수 없는’ 유일자이다. 그는 ‘부동의 지점’에 서 있는 세계축의 나무 아래에 놓인 성좌에 모셔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은 거대한 수레바퀴의 바퀴통에 바퀴살이 모이듯이 대립물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리고 욕망과 죽음이라는 이름이 신은 움직이는 세계 만물의 통치자로서 그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이곳으로 왔다.
243. 애착에서 슬픔이 솟아나고
애착에서 두려움이 솟아나니
애착에서 벗어나는 자에게는
슬픔이 없으니, 어찌 두려움이 있겠는가?
-불교의 한 구절-
243. 초월성의 이런 모든 가르침들의 극한까지(욕망과 두려움을 넘어선 붓다와 하느님 아버지 속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의 가르침까지) 멈추지 않고 따라올 수 있다면, 분명 모든 대립하는 것들을 떨쳐버리게 되며, 동시에 이원성과 비이원성, 무아와 자아, 천상의 진실과 지상의 진실 또한 떨치게 된다는 점을 알게 될 것이다.
244. 하늘과 땅, 심지어는 비존재와 존재가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거기에 동화될 때,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의 기쁨이 모든 것으로부터 흘러넘칠 것이다.
244. 하늘과 땅, 심지어는 비존재와 존재가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거기에 동화될 때,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생의 기쁨이 모든 것으로부터 흘러넘칠 것이다.(그림185~187)
그림185. <황소를 타고 있는 디오니소스>
그림186. <디오니소스의 일화>
그림187. <우유통을 들고 있는 선한 양치기>
* 저자는 마시는 것들이 들어간 그림들을 배치한 듯 하다. 기쁨... 디오니소스... 우유...
253. 그 시기 이교도의 『헤르메티카』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 중에서 신이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규모도, 공간도, 질도, 형태도, 시간도 신을 둘러싸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254. 신은 자연에 내재하거나 정신을 가진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초월적인 힘이며 절대적 ‘타자’이다.
257. 구세주의 피는 인류 전체의 조상을 정화한 것이며, 그로 인해 인류를 구제하고 세계축을 시간의 여명으로 되돌려놓는 동시에 종국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게 하였다.
253. “모든 것 중에서 신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규모도, 공간도, 질도, 형태도, 시간도 신을 둘러싸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분은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 얼마전에 불교 강좌를 듣고나서 그런가... 꼭 모든 것과 바탕을 지칭하는 것에 눈이 간다.
257. 칼버리Calvary 혹은 골고다(Golgotha), 즉 ‘해골의 언덕’ 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워졌는데,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이 곳은 아담의 뼈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구세주의피는 인류 전체의 조상을 정화한 것이며, 그로 인해 인류를 구제하고 세계축을 시간의 여명으로 되돌려놓는 동시에 종국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게 하였다.
Ⅲ. 연꽃과 장미 The Lotus And The Lose
3-1장 꽃의 권장
260. 단테는 순백의 장미 한 송이로 나타난 천국의 주를 본다.(그림196.)
.... 네 개의 머리를 가진 인도의 창조주 브라흐마가 비슈누의 꿈 속 연화좌에 앉아 있었듯이. 단테의 장미 위에도 삼위일체의 신이 나타난다. 시인은 지상의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서 느끼는 황홀감을 통해 신의 지식으로 인도되었다.
266. 모든 아내는 그 남편의 샤크티이며, 모든 사랑받는 여인은 그 애인의 샤크티이다.
267. 그것(샤크티)은 자기를 실현시키거나 파괴하도록(그것은 당황하게 만들거나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기에) 유혹하는 여성의 힘이다. 괴테는 이러한 생각을 『파우스트』에서 자주 인용되는 마지막 문장에 다름과 같이 요약하였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위로 끌러 올린다.’
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268. 윌리엄 블레이크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이렇게 적었다. “만약 인식의 문이 정화된다면, 만물은 그 자체의 무한한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낼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동굴의 좁은 틈을 통해 모든 사물을 접하는 이상,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3-2. 꽃받침
272. 누군가는 이 상징적인 꽃들과 그 꽃들이 피어나는 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개화, 즉 대우주적 질서를 향한 열림으로 보거나, 자신의 광대한 잠재성을 향한 개인적 의식의 소우주적인 열림으로 생각할 것이다.
280. 오비디우스의 『변신』에서 인용한 그리스의 성자 피타고라스의 말처럼, “영혼은 떠다니면서 이곳으로 왔다가 저곳으로 갔다가 하며 어떤 껍데기든 마음에 드는 것에 깃든다. 짐승의 몸에서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몸에서 짐승의 몸으로 옮겨 다니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붓다와 보살(그리고 힌두교에서는 신)의 신성한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혹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기억나게’ 되는 것이다. 그때, 무지(마야의 감추는 힘)라는 장애물은 천천히 사라져가거나 일시에 초월되는 것이다.
280. 워즈워드가 말했듯, 우리의 생은 “한숨 잠이며 망각일 뿐”이었던 것이다.
282. 연꽃은 우주의 심장인 태양과 몸의 태양인 심장을 동시에 상징하며, 둘 다 내재하는 동일한 자아(아트만)에 의해 움직여진다.따라서 태양을 향해 피어 있는 연꽃은 이 거울에 비추어진 진실에 대한 만개한 지식을 상징하며, 봉오리가 진 연꽃들은 그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단계들을 표현한다.
282. 하늘의 연꽃과 땅의 연꽃, 우주와 개별자 사이에 자리잡고 앉아, 그는 스스로가 그 양자의 본질이 같음을 입증한다. 그(붓다)는 기독교의 예수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신비로운 장미’, 즉 성처녀에게서 태어난 진정한 신이자 동시에 진정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사실 서구의 장미는 동양의 연꽃 상징에 상응한다.
3-3장. 저 아래 흐르는 물, 저 위에 흐르는 물
292. 연꽃 여신의 자궁은 공간의 장이며, 그녀의 심장은 시간의 맥박이고, 그녀의 생은 우주적꿈을 반영하는 우리들 각자의 삶이다.그녀의 아름다움은 피안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의 매혹하는 힘이다. 성서로 치자면 그녀는 이브이다. 인류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들, 즉 바위, 나무, 짐승, 새와 물고기, 태양과 달과 별들의 어머니로 확장된 이브라고 할수 있다.
296. 세계 종교로서 모두에게 동등하게 열려있고, 어느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305. 그림223. <안티오크의 성배>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시다. 내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찍어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려고 손질하신다. ..... 언제나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노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앉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복음」15:1-2, 4-5)
307. 그림 224. <포도송이로서 그리스도>
그들이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은 모두 그 잔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러나온 나의 언약의 피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것을 마실 그 날까지, 나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을 것이다.” (「마가복음」14:22-25)
3-4장 황금의 씨앗
311. 세례장면이 연금술적으로 표현된 형태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술은 원초적인 배열들을 수립할 수 없다.” 다사 말해 예술은 ‘위’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해도 태초부터 자연과 독립적으로 작업을 시작할 수 없다. ..... “우리 현자의 돌은 완성된 신체와 미완의 신체 사이, 그 중간에 있는 무엇이다. 그리고 자연 그 자체가 시작된 것은 예술에 의해 완성된다. 자연이 미완인 채로 남아있는 머큐리의 상태에서 작업을 수행한다면, 그대는 그 완성에 이르러 기뻐하게 될 것이다. 완전한 것은 변화되지 않고 파괴된다. 하지만 미완인 것은 진실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한 가지의 파괴는 다른 것을 산출한다.”
312. 연금술사의 목적은 종국의 완성을 성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지속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고, 그 안에서 그들의 ‘돌,’ 즉 현자의 돌은 모형이자 동시에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모든 대립쌍들 - 영원과 시간, 천국과 지옥, 남성과 여성, 젊음과 늙음 - 은 “완성된 신체와 미완성의 신체 사이에 있는” 무언가에 의해 한데 모인다.
313. 융은 왕과 여왕의 대립쌍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약 어떤 사랑의 결합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는 영혼도 없을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 결합은 천상의 비둘기와 땅의 물에 의해서 실현된다. 이것들은 연결고리를 구상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이 영혼이다. 그러므로 영혼이라는 것에 내재한 사고는 반은 육체적이고 반은 정신정인 상태, 연금술사들이 부르는 것처럼 아니마 미디아 나츄라가 된다. 즉, 대립물들을 결합시킬 수 있는 양성구유의 존재이자, 또 다른 개체에 연관되지 않고는 개체로서 완전할 수 없는 존재이다. 연결되지 않는 인간 존재는 전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을 통해서만 전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데, 영혼은 그 다른 반쪽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너’ 속에서 발견된다.’
317-318. 청정한 마음의 네 명의 마하브라흐마 신들이 내려와 아이를 황금 그믈로 받아서 그 어머니 앞에 놓고 축복하였다. “오, 기뻐하소서, 왕비시여! 당신에게서 위대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하늘로부터 두 줄기 맑은 물이 쏟아져 아이와 그 어머니를 씻기고 나자, 아이가 똑바로 일어서서 동쪽을 향해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켰다. 그리고 고귀한 목소리로 모든 붓다들의 승리의 게를 외쳤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 얼마전 불교 강좌에서 이 말의 의미를 새로 배웠다.
유일자와 하나된 자신이기에 무엇과도 나뉘지 않은 전체성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라고.
Ⅳ. 내면의 빛의 변형 Transformations Of The Inner Light
4-1장 심리학과 요가
334. 현대 학문인 심리학을 요가와 동일한 컨텍스트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1) 개인의 운명은 그의 심리적 성향의 작용이라는 생각이다. 즉, 자신에게 들이닥치는 재앙들은 스스로가 초래한다는 것이다.
2) 신화와 종교의 형상들은 저 높은 곳으로부터 계시가 아니라 정신생활의 발현이며, 그 환상의 투영이라는 것이다. 즉, 신들과 정령들은 우리 안에 있다.
3) 한 개인의 심리적인 성향은 자신의 꿈과 그의 운명적 사건들에 대한 통제를 통해서 변형될 수 있다.
335. “그 자아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누구나 ‘그와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진실을 알지 못한다.”
- 프란하다란야까 우파니샤드
335. ‘사람들은 각기 여러 신들을 섬기면서 “이 신을 숭배하라, 저 신을 숭배하라.”고 한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창조자로부터 나온 창조물일 뿐이며, 그 자신이 모든 신이다. ……그는 우주 속에, 심지어 우리의 손톱 끝까지 들어와 있으며, 그것은 마치 칼이 칼집 속에 들어 있거나, 불이 장작 속에 들어 있는 것과도 같다. 그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눈으로 보이는 것은 완전한 그가 아니다. 숨을 쉴 때 그는 ‘숨’이라 불리고, 말을 할 때는 ‘마음’이라고 불린다. 이것들은 그가 행하는 일에 따른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들 중에 어느 하나만 숭배하는 사람은 그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의 자아이며, 그 속에서 이 모든 것이 하나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를 숭배해야 한다. 이 자아는 저 모든 것의 발자국이며, 그것으로 한 사람은 이 모든 세상을 알게 된다. 이것은 잃어버린 가축을 그 발자국으로 찾는 것과 같다. ....자아를 가장 소중한 것으로 삼아 숭배하라. 그러면 자아를 가장 소중히 숭배하면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절대로 파멸하지 않을 것이다.’
337. 그노시스파의 「도마복음」에 실린 예수의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오며 모든 것은 나에게로 이른다. 나무 조각을 쪼개어 보면, 그 안에 내가 있다. 돌을 들춰보아도 그곳에서 나를 발견하리라.…… 내 입속에서 마시는 누구나 나처럼 될 것이고, 내 자신이 그가 될 것이다.”(95:24-28, 99:28-29) (337P)
337. 1부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들에 관련된 이미지(세계의 꿈, 세계를 꿈꾸는 자, 위대한 어머니 신, 신비로운 아이, 부활한 영웅 등)를 다뤘고, 2부와 3부에서는 특별히 고등 문화의 테마들(시공간의 수학적 순환과 그 순환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영혼의 깨어남)을 다뤘다면, 4부에서는 신화적 사고와 테마들의 심리학적 차원을 다룰 것이다. 이어서 5부에서는 주술적 의례에서 심리학적으로 기반을 둔 신화적 상징들을 활용에 대해 다룰 것이고, 마지막으로 6부에서는 삶이라는 꿈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주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 이 책의 구성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왜 일까?
4-2장. 인도하는 뱀
345. 그림261.<뱀신 암피아라오스>
병을 고치는 옛 성소들에서 이루어진 치료들에 관하여, C.케레니Kerunyi는 이렇게 언급했다. “환자에게는 자신의 내적인 치유력으로 스스로를 치료하는 기회가 제공된다. 이런 목적을 위해, 현대의 온천장이나 요양지에서처럼 주위환경을 될수록 외부 세계의 방해나 건강에 좋지 않은 요소들이 없도록 만들어졌다. 종교적인 분위기도 인간의 내적인 깊이가 그 자체의 치료하는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원칙적으로 의사는 개인적인 회복의 신부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사원에서의 잠을 통한 꿈의 치료를 보여주는 이 주목할 만한 장면에서, 신은 아스클레피오스가 아니라 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신탁의 신이다. 뒤쪽으로는 환자가 꿈을 꾸고 있으며,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은 그 환자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인데 마치 그의 앓고 있는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방출되어 나온 것처럼 보인다. 왼쪽에 있는 모습은 신에 의해서 치료가 진전된 것으로, 신이 그의 아픈 어깨를 만져주고 있다. 이와 동시에 침상에서는 같은 어깨를 뱀 한 마리가 핥아주고 있는데, (내가 이 그림을 정확히 읽은 것이라면) 이 뱀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 꿈과 치유, 깨어남...그림의 해석에 대해서 이 그림은 잘 봐둘 필요가 있다. 외워두자.
348. 그림265.<손바닥에 눈이 달린 손을 휘감고 있는 뱀>
350. 하지만 생명의 신으로 숭배되지 않고, 비천하고 저주받고 거부되는 에덴동산의 뱀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에덴 동산의 뱀이 다른 뱀들과 다른 점은 단지 그가 자신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주었다는 사실이다. 즉, 뱀 대신에 나중에 에덴동산에 온 다른 이, 즉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느님’(「사무엘 상」2:6, 한나의 노래)이 그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354. 그림276. <데메테르와 플루토스>
엘레우시스의 밀교의 여신이 그녀의 신성한 아이 플로우토스Ploutos 또는 플루토스Plutus를 데리고 있다. 헤시오도스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를 만난 필멸의 인간은 행복하여라,
그의 두 손이 넘치는 축복과 보물들로 가득하기에.”
(『신통기』973-974)
355. 그림278. <십자가에 매달린 뱀>
“모세가 황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처럼 인간의 아들도 들려야 한다. ....”
(「요한복음」3:14) 기독교의 시작에 따르자면 모세가 치료의 뱀을 들어올린 것(「민수기」21:5-9)과 예수가 십자자에 매달린 것은 둘 다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자가 후자의 전조로서 형상화된 것으로 읽힌다. 어쨌거나 그노시스적 사고에서 이 둘은 동일한 초월적 힘이 둘 중 하나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림278에 보이는 독일의 탈러화는 그노시즘이나 신플라톤주의적 사고가 유럽에서 유행하게 된 시기부터 사용되었으므로, 이 르네상스의 은화를 도안한 예술가 장인 히에로니부스가 정통적인 형상의 뒷면에 뱀이 지닌 구원적 지혜의 힘이라는 오랜 테마와 관련성을 암암리에 나타내려 했으리라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보았던 문양이다. 연금술 책에서 본 십자가에 매달린 뱀.
359. 죽음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사고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뱀의 이미지도 마찬가지이다. 첫 번째, 보다 보편적인 방식은 윤회, 영원회귀, 죽음과 재생 등으로 해석하는 것으로, 이지러지고 다시 차오르는 달이나 허물을 벗는 뱀과 갖은 것이다. 하지만 태양과 같이 꺼지지 않는 빛을 얻음으로써 이 영원히 지속되는 순환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초월하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요가의 목표이다.
361. 그림283.<C.G.융의 환자가 그린 그림> 그림284. <로마식 모자이크 마루의 모티프>
“이 그림은 중년 여인이 그린 것인데, 그는 신경증에 걸리지 않고 영적인 발전을 거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 활동적인 상상력을 활용했다. 이런 노력들이 그녀로 하여금 새로운 통찰력의 탄생, 즉 무의식(바다)의 깊이로부터 깨어나는 의식(눈)을 그리게 했다. 여기서 눈은 자아를 의미한다.”
*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연금술사가 인체연성을 하면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공간이 갈라지면서 거기서 커다란 눈이 나오고 그리고는 그 속에서 뭔가가 사람을 집어삼키고 그곳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4-3장 여래의 도래
364. 요가를 통해 의식은 그 근원과 결합되며, 그리하여 인간은 그 근원과의 자기동일성에 대한 앎 속에서 살 수 있으며, 이것은 단지 한낮의 빛에 한정된 자아의 자기동일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달빛과 태양 빛에 관한 사고를 개조하는 것이다. 즉 달 아래 일시적인 의식을 반영하는 빛은 모든 의식의 영원한 태양적 원천과 결합되어야 한다.
364.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2:20
* 사울(바울)이 빛을 본 사건은 영적인 원천과 하나가 되는 계기. 그걸 겪고 사울은 다른 사람이 되었어.
365. 인도 요가의 목적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는 것인데, 이런 체험으로 이끌어주는 열쇠가 되는 경구는 「찬도기야 우파니샤드Chhandogya Upanishad」에서 성자 아루니가 그의 아들에게 일러준 말이다. “네가 바로 그것이다.” 내 아들아. 너는 이미 네가 알기를 원하는 의식의 빛이며 존재의 지반이며 진실의 지복인 네 자신이다.
367. 예컨대, 주변에 있는 사물이나 집을 들어보자. 마음 속으로 그 둘레에 원을 그리셔 세계로부터 격리시키자. 그 용도도 잊고 그 이름도 잊고 그것이 무엇으로 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부분 부분을 뭐라고 부르는지도 잊자.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단순이 그것을 바라보자. 그랬을 때,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막대, 돌, 고양이, 새, 그 무엇이든 간에 이런 방식으로 모든 개념에서 분리된다면 그것은 특정한 ‘의미’를 갖지 않는 경이로 비춰질 것이며, 그 자체로 처음이자 끝인 것, 즉 마치 보편자 ‘여래’처럼 비춰질 것이다. 붓다는 여래 ‘타따가타Tathagata'라고 불려지며 “만물이 부처이다.” 또는 제임스 조이스가 『율리시즈』에서 말한 것처럼 “강렬하게 바라보면 어떤 사물이나 신들의 영겁으로 다가가는 문이 되리라.” 그리하여 그것을 명상하는 동안,우리는 순수한 상태로 되던져진다. 주체가 객체를 향하듯, 그러면 각자의 신비의 국면들이 “도래하리라.”
* 원수연 만화 <Let Dai>에서 다이의 생일 날, 생일 파티를 위해 준비한 홀에서 둘만이 함께하는 신비한 시간을 맛보았던 것 같다.재희는 다이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그것을 표현했다. 파티에 차려진 음식들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 속에서 이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사과’라고 불린다면, ‘사과한다’고, ‘바나나’라고 불린다면 ‘바나나’라고. 뭐라고 불리건 그 순간 자신의 마음이 다이를 향하고 있고,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했다. 뭐라고 이름지워지는 것을 넘어서서 .......
그림288. <말라죽은 가지 위의 때까치>, 미야모토 무사시
그림289. <시든 연잎 위의 할미새>, 무치
그림290. <왜가리> 탄안 치덴
그림291. <찻잔과 솔>
그림292. <해바라기> 빈센트 반 고흐
그림293. <낡은 신발> 빈센트 반 고흐
그림294. <검은 태양> 이사무 노구치
그림295. <홀로 낚시하는 사람> 마위앤
* 저자는 앞에 설명한 어느 한 개체로부터 그것이 부처가 되는, 만물이 부처가 되는 것을 체험하는 순수한 상태를 알려주려고 이 그림들을 다음에 배치한 것 같다. 자연 속에서 순수한 어떤 존재가 된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그리는 대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좋아진다. 남도의 동백꽃처럼 암시렁도 아닌 꽃처럼. 그리고 구본형은『떠남과 만남』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으른 시간이 가장 충만한 시간이라 했다. 여기에 실린 이 작품들을 보는 시간이 바로 그러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지만 충만한 시간.
저자는 이렇게 그림 속에, 독자를 그 시간 속에 던져 놓고는 다름 장으로 넘어간다.
4-4장. 피안의 지혜
374. 요가는 임의대로 움직이는, 마음이라는 것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멈추는 것에 있다.
376. 물결치던 수면에서 조각조각 왜곡된 파편들에 불과하던 것이 오직 하나의 이미지로 지각될 것이다. 이 하나의 이미지는 요가에서 깨달은 자아의 이미지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은 이 궁극의 형상 - 형상들 중의 형상 - 으로서 이 세계의 현상들은 진실로 우리 자신의 앎의 형상이며, 요가의 목적은 그 앎과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376. 어떻게 바람을 잠재울 것인가하는 것이 요가의 첫 번째 과제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히 심리적인 문제로서, 주로 우리 정신의 관심을 표면에서 내면을 향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두 번째 과제가 생겨난다. 즉, 정신의 바람에 의해 흩어져 삶의 수면에서 노닐고 있는 사물의 표면으로 정신을 되돌리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과제는 이 변화하는 사물들의 즐거움과 자기 내면에 고정된 중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형식적으로는 두 가지 다른 지평으로 경험되는 것이지만 결국은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그것이 바로 궁극적이고 둘로 나눠지지 않는 피안의 지혜 ‘반야 바라밀다(지혜parajna, 피안parmita)의 처음이자 끝이다.
377. 중국의 요가 입문서인 『태을금화종지』에서 분명히 밝힌 것처럼
‘공(空)은 세 가지 정관 중 첫 번째이다. 모든 것은 텅 빈 것으로 관찰된다. 그러고 나면 미혹됨이 없어진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것을 안대 해도, 사물들은 파괴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공(空)의 한가운데 두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사물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 사물에 주의를 빼앗기기도 않는다. 이것이 중심에 대한 정관이다.’
378. 반야심경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密多)를 행하실 때에 오온(五蘊)이 다 공(空)한 것을 비추어 보시고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났으니라.
사라자야, 색(色)이 공(空)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사라자야,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양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더러워지지도 않고 깨끗해지지도 않으며, 불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느니라. 이러하므로 공 가운데는 색도 없고 수상행식도 없고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도 없고, 빛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없고, 눈으로 보는 세계도 없고 또한 의식의 세계도 없다.
무명(無明)도 없고 무명이 다함도 없고, 늙고 죽음도 없고 죽음이 다함도 없고,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도 없고, 지혜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얻을 것이 없는 까닭이 된다.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에 장애가 없고, 마음에 장애가 없으므로 공포가 없어 멀리 전도몽상된 것을 여의고 마침내 열반을 얻는다. 삼세(三世)는 모든 부처들도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가장 높고 뛰어난 바를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두루 모든 것을 관찰해 볼 줄 아는 지헤를 얻는 주문이고 크게 밝은 주문이며, 위(上) 없는 주문이고 같음이 없는 주문이니라. 능히 일체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니 진실하여 헛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을 설한다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 “가는 이여, 가는 이여, 피안으로 가는 이여, 피안으로 완전하게 가는 이여, 깨달을 지이다.!” ’
* 반야심경이 어떤 것인지 예전부터 궁금했었다. 종로에 있는 절에 갔을 때, 반야심경으로 설치 작품을 절 내에 세워둔 것을 보았다.모르니, 그냥 외형만 볼 뿐....그런데 찾아본 적은 없었다.
그림298. <눈의 여신> 기원전 2800년경, 시리아
그림299. <보살 우쉬니샤니타타파트라>, 흰 우산 왕관, 19세기, 티베트
*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 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의 최신 버전은 그림298과 닮았다. 그 책을 묘사하기를 여러겹으로 보이는 멋진 새의 형상을 한 홀로그램이다. 초기에 부팅이 시작되면 그것을 작동시킨 사람과 대화하기위해 여러 형상을 중에 대화상대에 가장 친숙한 하나의 모습을 갖게 된다.
초기에 날개를 펼친 홀로그램을 상상했을 때, 여기의 그림처럼 여러 여러 형상이 이렇게 한꺼번에 겹친 것으로 상상했다. 그리고, 그 새는 여러 시공간에 존재하고, 여러 센서를 이용하여 상대방과 소통하려 했기 때문에 ‘신’의 속성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다. 그 새(가이드 북)는 여러 시공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여러 시공간에서 각기 일을 행하고 있다.
우리에게 드러난 신도 그러한 게 아닐까, 여러 시공간에 존재하기에, 각기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일을 행하고 계신다.
새(가이드 북)는 그런 신의 속성을 캐릭터로 만든 듯 하다.
393. 그림300.<눈이 달린 천 개의 손과 열한 개의 머리가 달린 관세음보살>, 19세기, 중국
‘전설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이 고통 받은 세계를 내려다보고는 자비심으로 가득 차서 머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머리가 솟아났고(도상학적으로는 11개로 그려진다). 몸에서는 도움의 손길이 달린 천 개의 팔이 솟았는데 이것은 마치 휘황찬란한 공배와 같았고, 그 각각의 손바닥에는 무한한 시야를 가진 눈들이 나타났다.
395. 그림301. <연꽃을 든 관세음보살Avalokiteshvara-Padmapani>, 600~642년, 인도
제목에서 ‘파드마파니padmapani’는 ‘손에 든 연꽃’이라는 뜻이다. ‘아발로키테쉬바라Avalokiteshvara’의 뜻은 더 모호하며, 많은 해석들이 있다. 'ava'라는 어근의 의미는 ‘아래로’이고, 'lok'은 ‘바라보다, 관찰하다, 응시하다’의 듯이며, 'lokita'는 ‘본다’는 뜻뿐만 아니라 ‘보여지다,보이다’라는 뜻을 갖는다. 또 ‘loka’는 ‘세계’, ‘우주’, ‘우주의 영역’이라는 뜻이다. ‘ishvara’는 결국 ‘신’dml 듯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을 따르자면 ‘아발로키테쉬바라’는 ‘우리가 보는 것의 신’, 즉 현재 세계의 신이며 또한 ‘우리가 보는 신, 드러나는 신, 보여지거나 보여졌던 신’이다. 티베트인들은 ‘보는 신’이라고 읽는다. (이와 관련된 자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이른바 존배함의 죄악들로 고통 받는 존재들을 자비심을 가지고 지켜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산스크리트 용법으로 읽으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시는 신’이다.
* 이슈바라 : 신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동방의 민족들이 섬겼던 신의 이름. 여기에서 따온 것이구나. 제작팀이 공부를 많이 해서 종교나 사람의 심리, 철학, 연금술에 관련된 믿음, 역사적 사건, 천문학 지식 등을 모두 활용하여 시리즈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만든 사람들 또한 나름대로 철학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다. 그러니까 전하려는 메시지를 제대로 전했겠지.
4-5장 연꽃 사다리
그림330. <‘우주적 춤의 신’, 시바 나따라자Shiva Nataraja>, 12세기, 남부인도
428. 신화는 사실 사회를 움직이고 형성하는 공적인 꿈들이다. 역으로 한 사람의 꿈들은 그 자신을 움직이고 형성하고 있는 사적인 신들과 반(反)신들과 수호신의 힘으로 이루어진 작은 신화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삶을 무의식적으로 질서지우는 공포, 욕망, 목표와 가치들이 계시되는 것이다.
428. A가 깨어있는 의식, 미묘하지 못한 사물들, 형성된 것들(과거)과 관련되고, U가 꿈의식, 섬세한 사물들, 형성되고 있는 것들(현재)과 관련된다면, M은 꿈꾸지 않은 깊은 잠과 관련된다. 여기서 우리는 의식을 ‘잃고’, (인도의 텍스트에 묘사된 것에 따르면) 정신은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순전한 의식이 ‘분화되지 않은 덩어리, 또는 연속체’이다. 깨어있을 때는 단지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만 지각하고, 꿈속에서는 무엇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만 기작하는 것이, 꿈 없는 깊은 잠속에서는 모든 구속에서 떨어져나와 원초적이고 분화되지 않고 특화되지 않은 카오스와 잠재성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 상태로부터 제시간에 있어야 할 모든 것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슬프지 않은가! 모든 것을 담고 있던 정신은 꿈속에서 상실된다.
429. 요가의 목표는 그 깨어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더 이상 깨어있는 세계이건 꿈속이건 간에 이런 저런 사물에 의거함이 없고, 불교의 가르침에서 ‘어머니의 빛’이라고 하는 내재한 빛과 만나는 곳으로 가라앉는 것이다.
432. 그림 337.<자신의 연구실에 있는 파우스트 박사>, 렘브란트
* 이걸 볼 때, 이상했다. 그림속 인물의 시각을 따라서 남자의 시선이 가는 곳에 밝은 것이 있어 나도 그고을 보게 된다. 나는 그 빛안에 나온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다가 이건 파우스트가 악마를 만나는 장면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위에 설명을 봤다.설명을 보고 파우스트인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이 그림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선후가 확실하지 않다.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기억속에 파우스트라는 글자는 다른 위치에 있었으니까. 아마도 그 순간에 내 기억들이 뒤섞인 모양이다.
책을 보는 데 무척 영적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상한 경험들 때문이다.
파우스트가 만난 뭔가를 적어서 보여주는 글자..... 그건 악마였다. 그런데, 그게 정말 악마인가? 이야기 상에서는 그건 파우스트의 영혼을 가져가려는 악마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그건 ‘악마’라 불리는 ‘신’이 아닐까. 왜냐하면 당시에는 ‘신’, ‘악마’로 이분법적으로 나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의 철학으로 하더라도 이렇게 빛으로 나타나는 존재는 ‘신’이다. 영적으로 뭔가를 체험하는 존재에 대해서 타 종교에서는 신과 악마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건 때에 따라서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절대자 신일 뿐이다. 다른 차원을 경험하는 인간에게 이런 영적 존재는 매우 위험한 것일 수 있다. 깨달음으로 존귀한 존재가 되거나, 어둠과 빛에 파묻혀 자아를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렇게 위험스런 존재를 ‘악마’라고 했을 지도 모르겠다.
익산 시내에는 공부를 하다가 미쳐버린 사람이 하나 돌아다닌다. 그는 가끔 정상적으로 돌아와서는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것 같다. 눈 앞에서 공중에서 현란하게 변하는 끈의 움직임, 변화를 지켜보는 것으로 소일을 한다. 이런 것을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세계에서 말하는 방식으로 한다면, 악마에게 영혼을 먹혀버렸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의 것에 의식을 머물게 할 수 없으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파우스트 박사에게 나타나서 그를 유혹하고, 그를 다른 차원으로 살게 하는 존재가 이분법으로 구분되는 ‘악마’라는 이름으로 하찮은 존재로 여겨지는 것에는 반대한다.
록 뮤지션 중에 하나도 ‘십자로에서 악마를 만났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록음악이 시작되었다. 우린 그걸 영적 경험이라고 하지 않나.
447. 여섯 번째인 ‘조건 지어진 삼매경’, ‘사비칼파 사마디savikalpa samadhi’ 와 마지막 일곱 번째 차크라인 ‘조건없는 삼매경’, ‘니르바칼파 사마디nirvahklpa samadhi’가 남는다. 라마크리슈나는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자 다가오는 자들이게 이렇게 묻곤 했다. “당신은 형상을 가진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가, 형상 없는 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가?” 그리고 위대한 무아경 박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차크라6에서 차크라7로 가는 과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마지막이자 가장 높은 떠남의 성취는 신을 향하여 신을 떠나는 것이다.”
* 신을 향하여, 신을 떠나는 것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의 마지막 장면에서 처럼???? 눈에 보이는 불상을 떠나 세상으로 떠난 주인공처럼 ????
448. ‘정신이 이 지평에 이르게 되면, 밤낮으로 신성한 계시들은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도 여전히 ’나‘에 대한 약간의 의식은 남아있다. 그 특별한 신의 현현을 보면, 사람은 기쁨에 들떠 모든 것에 스며드는 신성한 존재와 하나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것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램프 불과 같다. 그 불빛은 만질 수 있을 것 같아도 유리가 사이에 있어 막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있는 곳에 ‘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 밀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에크하르트가 말했듯이 동일성이다. 즉, “신은 사랑이고, 사랑 안에서 그는 신 안에 있고, 신은 그의 안에 있다.”
* 성경에는 God is Love, so then We wil love each other. ...... 뭐 이런 구절 있었던 것 같다. 바울서신 중에 말이다. ‘신은 사랑이다. 그러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자.’
448. 라마크리슈나가 말했던 그 유리처럼 투명한 장벽을 제거할 수 있다면 신과 우리자신은 폭발하여 빛이 될 것이다(그림349~350). 그것은 순전한 빛, 하나의 빛, 이름과 형상, 사고와 경험, 심지어는 ‘존재’와 ‘비존재’라는 개념마저도 뛰어넘는 빛이다.에크하르트는 말했다. “신 안에서 그 영혼은 아무것과도 공통점이 없으며, 무엇에게도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그리고 “그 영혼 속에는 거의 신과 가까운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이며 결합되어 있지 않다.”
* 지금 듣고 있는 클래식 음악 바흐가 그런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 음악가는 그 순간에 있다가 평상시로 돌아오면 어찌 살아가는지 궁금했었다. 연주를 할 때, 작곡을 할 때, 신이 불러주는 그것을 받아적고, 자신과 신이 하나되어 선율을 만드는 그 고양한 의식의 세계를 경험하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때는 어떻게 그걸 견디나 궁금했었다.
저자가 그림349와 350이라고 하는 그림들은 성소에 놓인 만다라들이다. 이것을 그린 이들도 음악가처럼 그 순간에 위에서 언급한 아무것도 공통점이 없는 그러한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그림349. <금강석화의 만다라>
그림350. <살아있는 빛의 천사 성가대>, 9세기 성 힐데가르트의 성무일과서
* 만다라, 이걸 빛의 폭발이라 표현하다니....... 그래 이건 빛 일 수밖에 없겠다.
이 그림 앞에서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 머리 속에 빛이 켜질 테니까.
그림353. <피에트로사 접시>
11. 입문의 과정을 마친 입문자는 새로운 능력을 부여받고, (그 징표로) 그릇을 하나 지니고 있다. 그의 머리카락은 길게 자랐고, 그의 오른손은 그이 배꼽에 있는데 이것은 임신한 여인임을 나타낸다. 하지만 가슴을 보면 분명히 남성이다. 그러므로 양성구유적인 테마가 드러나며, 이것은 남성의 지식과 여성의 지식의 대립되는 방식을 결합하는 영적 경험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런 관념에는 내적으로 잉태된 새로운 삶에 대한 사고가 융합되어 ldT다. 깨달음의 상징적 중심인 머리에 쓴 왕관 위에는 영혼의 날개가 달려 있다.
입문자는 이제 낮의 세계로 돌아갈 준비가 다 된 것이다.
16. ...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입문자는 우주의 움직임 너머 움직이는 자에 대한 지식을 소유하게 된다.
4-6장 땅으로 돌아가라
470. 그림358. <육도윤회도六道輪廻圖>, 19세기, 티베트
중앙에는 ‘삼독(三毒)’이 순환하고 있다. 세 가지 독은 어리석음(돼지), 탐욕(수탉), 악의(뱀)이다. ...
바깥쪽 원에는 여섯가지 윤회의 세계들과 가각의 영역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보살들이 있다.
1. 천상계
2. 아수라계
3. 아귀계
4. 지옥계
5. 축생계
6. 인간계
이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가장자리에는 ‘십이연기(十二緣起)’가 그려져 있다.
1. 무명(無明, 인도되는 눈먼 여인)
2. 행(行, 도공)
3. 식(識, 원숭이들)
4. 명색(名色, 나룻배로 실어나르는 사람)
5. 육처(六處, 창문이 달린 집들)
6. 촉(觸, 연인들)
7. 수(受, 화살에 눈이 찔린 사람)
8. 애(愛, 술마시는 사람)
9. 취(取, 틈새로 손을 뻗는 사람)
10. 유(有, 나무 옆에 있는 사람)
11. 생(生, 아이 낳는 여인)
12. 노사(老死, 들개와 독수리에게 뜯어먹히는 시체)
* 아래층의 꼬맹이가 악을 써가며 운다. 울음소리 절반, 고요 절반이다.
아이의 악을 쓰는 소리 중간중간에 아빠의 나무람소리가 들렸다. 오후인 지금은 밖에서 과자를 사오다가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악을 써댔던 모양이다. 아이는 채워지지 않은 욕구를 가로 막은 엄마에 악을 써가며 우는 것으로 저항한 듯하다. 제발로 걸어서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엄마는 아이를 안고 미안해 하며 집으로 들어간다. 아이가 아프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렇게 울고 나면 열이 올라서 아플 것 같다. 아이도, 엄마도 아프지 않을까. 엄마가 미안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첫째 조카는 엄마나 할아버지, 할머니..... 하여간 누군가 옆에 딱 붙어서 놀고, 업어줘야하고, 계속 징징거렸다. 우는 것 외에는 소통방법을 몰랐던 아이다. 지금은 둘째하고 잘 논다. 누군가가 옆에 있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아이다.
어머니께서는 둘 째는 잘먹고 놀고를 편안히 하여 보는데 수월하다 하시고, 첫째는 옆에서 계속 뭔가를 해줘야하고, 제대로 먹지도 않는다하여 돌보는 데 성가셔한다.
Ⅴ. 희생 The Sacrifice
5-1장 자발적인 희생양
490. 「빌립보서」에 보면 사도 물이 회중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춰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립보서」2:2-5)
490. 바울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똑같은 마음을 지니라며 격려하였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이 예수께서 보여주신 태도입니다.……(「빌립보서」2:2-5)
500. 그림373~374. <마야인의 인간 희생 장면>
5-2장. 희생의 주술적, 도덕적, 밀교적 규칙들
511. 『황금가지』에서 프레이저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는 종교를 자연의 운행이나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조정한다고 믿어지는, 초인간적 힘에 대한 회유나 위무로 이해한다.이렇게 정의할 때 종교는 이론과 실천의 두 가지 요소, 곧 인간보다 우월한 힘에 대한 믿음과 그 힘을 달래거나 기쁘게 하려는 시도로 구성된다. 두 가지 중에서는 분명 믿음이 우선한다. 우선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어야 그것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음이 그에 상응하는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신학일 뿐이다. ....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일정하게 다스리지 않는 사람은 결코 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종교적 믿음 없는 단순한 실천 역시 종교가 아니다. ......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나 두려움 때문에 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 사람은 종교적이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랑 때문에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행동이 공동선에 일치하느냐 어긋나느냐에 따라 도덕적일 수도 있고 비도덕적일 수도 있다.
* <20세기 소년>에 야쿠자들이 모여사는 골목에 성당에 계신 신부님.... 그는 신부가 되기전, 중국 땅에서 쫒기다가 홍수 난 마을을 구하려는 한 신부를 만난다. 그의 행동을 보고 그 쫓기는 야쿠자 두목은 하나님을 접한다. 후에 그 신부는 야쿠자들을 받아주는 신부가 된다. 그 당시에 그가 말하길, “신부님, 당신이 내게는 기적이고 하나님입니다.” 그리고는 그는 삶을 바꾼다. 이때의 야큐자는 종교적일까? 그 이후의 그의 행동이 종교적일까, 공동선 일까?
511. 1층위 : 종교적인 층위의.......
2층위 : 신비주의자나 시인의 층위 : 신이나 인간을 궁극적 경계로 간주하기 않고 법신에 대한 자신의 깨달음의 범주를 확장하려고 노력하면서, 존재의 경이에 대한 경외감으로만 자기-변형이라는 어려운 과업에 몰두하는 자들
이 세 가지 중 마지막 층위에는 종교적인 것과 함께 도덕적인 무엇이 있다. 한 사람이 모든 것속에서 모든 것과 자기 동일성의 신비를 인식하는 한, 그 사람은 단지 믿음이 아니라 경험 속에서 모은 존재들의 동일성을 분유(分有)하고 있다는 감각을 획득할 것이다.이것은 결국 모든 자기복종의 궁극적인 바탕이며 영감의 원천이 될 것이다. 그것이 현상적 인간보다 더 높은 원리에 있어서건, 다른 인간존재의 이익을 위한 자발적 희생에서건 간에 말이다.
* 아마도 이런 구분을 <강철의 연금술사>에서는 1층위의 사람을 레트쿄의 교주, 이슈바라교의 신도로, 2층위의 인간을 ‘연금술사’로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3층위는 이야기 전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 교황은 시스티나 성당 내부에 벽화를 ‘미켈란젤로’에게 그리라고 했다. 다른 예술가들이 많은데 조각가에게 그런 명령을 하셨다.교황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다. 아니면 느끼셨다거나.
미켈란젤로는 결국은 그 벽화를 몇 년에 걸쳐서 곳곳까지 세심하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는 늙었고, 눈이 나빠졌고, 몸이 많이 쇠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2층위의 시인의 다음 층위...‘자기복종’의 단계에 돌입하여 영감의 원천과 하나됨을 경험하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5-3장 피의 제단
5-4장 신화
564. 프레이저가 보여준 것처럼, 아도니스 전설에서 멧돼지는 신 자신의 한 국면이다. 프레이저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자기 자신을 위해 희생된다.” 우리가 본 전설에서 디아르무이드는 핀에 희생된다. 멧돼지는 핀이 분로를 보여주는 매개동물이지만, 디아르무르드의 어떤 면이기도 하다.
568. 신비적 차원에서 하나란, 시공간적 차원에서는 둘이며, 우리의 ‘지식(신비적 용어로 하자면 우리의 ‘무지’)’의 형식으로 보자면 다수이다. 여기 깨어있는 의식의 장에서 우리는 서로서로 분리되어 있다. 즉, A는 not A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자의식에 고착되어 있는 한, 이것이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일 것이다.
568. “이 무지의 분리를 보상해주는 것은 ‘희생’이다. 희생된 자의 자기양도와, 분리된 신을 온전한 하나의 전체로 다시 세움으로써 다수의 자아들은 하나의 원리로 응축된다.”
* 희생재물이 나무에 걸려 위로 올려질 때, 우리의 시선이 그 하나로 모아질 때.... 그때 다수의 자아들은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원리에 마음이 합해진다. 그러니까 희생재물은 분리된 자아를 응축시키는 매개물이다. 그리고 이때의 희생재물은 타인에 의한 살해가 아니라, 자기희생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언니가 고기를 싸서 내 입에 넣어주는 순간 나는 묘한 감정을 느꼈고, 그 떨림이 서로를 연결해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차칸양이 총무로서 일을 도맡아서 하고, 심부름을 하고, 손수 밥을 지어서 같이 여행하는 팀에 나를 조용히 끼워주었던 것도.
* 다행이다. 어리석은 내게도 갖가지 모습으로 다가왔었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들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신에게 감사드린다.
568. 그것이 신화적 이미지로 상징화되고, 모든 대립물들을 한데 모여들게 하여(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이 있는), 이 신비로운 사건이 희생이나 그에 필적하는 신성결혼과 같은 상징적 모험을 통해 실현되고, 인식되고, 장엄하게 기념되는 것은 바로 산꼭대기에서 이다.[마치 미국인들의 주머니 속에 모든 달러에 찍혀 있는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상징처럼]
바로 그곳에서 지식의 눈이 대립물의 일치coincidentia oppositorum를 보기 위해 열린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하다!
569. 쿠마라스와미 박사가 설명한 것처럼, 신화적 신비의 연극에서는 “살해자와 용, 제물을 바치는 자와 희생자는 무대 뒤, 즉 어떤 모순적 양극성도 없는 곳에서 하나의 정신에 속한다. 하지만 무대 위, 신들과 거인족의 끝없는 전쟁이 계속해서 상연되고 있는 곳에서는 필멸의 적들인 것이다.”
569. 인도의 신화에서는 물속에 뛰어드는 자가 우주의 잠을 자는 자 그 자신으로, 그의 내적인 눈앞에 계속 순환되는 ‘꿈-사라짐’과 ‘재생’이 바로 우주 전체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상황은 앞서의 경우와 비슷하다. 즉, 같은 신이 황금 깃털이 달린 태양의 새를 타고 날아올라 위험에 빠진 코끼리를 구출하기 위해 그의 꿈속의 줄거리와 컨텍트 속으로 들어갔던 이야기(그림5)에 필적한다. 단지 거기서는 한 명의 꿈속 등장인물을 구출했던 반면, 여기서는 꿈 전체를 구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잠자는 사람이 자신이 매우 마음을 쏟았던 밤의 영상이 사라지려는 것을 느끼고는, 그것을 되찾고자 환상적인 꿈의 가면을 쓰고 갑자기 밤으로 뛰어드는 자기 자신을 봐야 하는 것과 같다.
* <강철의 연금술사>에서 빛의 호엔하임은 길을 나섰을 때 꿈을 꾼다. 꿈속에서는 젊은 피나코 록크벨이 나와서 모닥불 옆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 옆에서 술을 권하고는 세상을 구하는 일에 나서지 말라고 만류하고, 또 나서라고 한다. 이때 자신의 모습을 한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가 와서는 그런 피나코 록크벨의 얼굴을 잡아 뜯어버리니 그 안에서 난쟁이에게 저항하는 호헨하임의 얼굴이 드러난다. 갈등하는 자신의 마음이 둘의 모습으로 나와서 만류하고 부추기고, 저항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사랑하는 여인 젊은 트리샤 에릭이 나타나서는 이 평화로운 세상을 돌려달라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그 옆에 호엔하임이 사랑하는, 호엔하임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타나서 들판에 가득 차고는 그를 격려한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그는 계속 길을 떠난다. 그의 꿈은 삶과 다르지 않다.
코끼리를 구하는 비슈누가 자신의 꿈에 직접 뛰어들었다면.... 그 꿈속은 누구의 것인가... 원래 세계는 비슈수의 꿈 속이라고 하던데. 그는 왜 꿈속으로 다른 모습으로 나와서 직접 뛰어들었나?
572. “만세! 만물의 신이시여! 이제 나를 이곳에서 끌어올려 주소서. 영원히 계속되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이미 앞서간 많은 시간들에 당신이 나를 끌어올려주셨듯이. 오 신이시여! 나는 당신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만들어졌고, 하늘도 그렇게 만들어졌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당신으로부터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도 당신의 진정한 본성을 알지 못합니다. 신들조차도 당신이 취한 형상을 통해서만 그대를 숭배할 뿐입니다. 정신으로 이해한 모든 것, 감각으로 인식한 모든 것, 지각으로 알아낸 모든 것은 단지 당신의 이름이자 현상일 뿐입니다.
나의 창조자여!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당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가 은신할 곳도 당신에서입니다. .......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며, 우주이며, 희생물이며, 신의 음절 옴OM이며, 희생의 불길이며, 경전이시며 그 지식이신 그분에게 승리의 영광을! 찬양합니다! 태양과 별들과 행성과 전세계여. 형상이 없거나 형상이 있거나, 눈에 보이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여. 내가 말했거나 아직 말하지 않은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당신이십니다. 존재 중에 가장 숭고한 존재이신이여! 그대에게 영광을,그대에게 영광을! 모두 찬양하라! 찬양하라!”
그러자 그는 우주의 상서로운 지지자인 우주적 밤의 바다를 통과하여 빛나는 모습으로 다가왔고, 대지의 여신에게 환영받았고, 베다를 암송하는 것과 같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강력한 멧돼지의 모습으로 돌진했다. 그의 눈은 빛나는 연꽃처럼 반짝였고, 우주 산만큼 거대한 그의 몸은 연잎처럼 검었다. 그는 그곳에 이르러 거대하고 빛나는 흰 엄니로 그의 꿈속의 여신을 어두운 곳에서 들어올렸다.
* 아름답다! 영적이다!
*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을 꾸었다.
나는 아주 깊은 물에서 놀았다. 물이 맑아서 아래까지 투명하게 보였고, 일부에서는 검은 해초가 보였다. 그러나 그 물이 아주 깊은 물임을 알았다. 나는 물에서 놀았지만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그냥 물에 떠너 헤엄을 쳤다. 발이 바닥에 닿을 지도 모르는 경계에 이르러서는 발을 딛어보려했으나 여전히 그곳은 깊었고, 나는 가라앉았다. 당황했고, 누군가가 나를 잡아서 더 이상 빠지지 않게 해주었다.
나는 왜 물 속 깊은 곳까지 들어가지 않고 표면에서만 놀았을까? 깊은 곳이 내 발밑 아래에 있고, 눈에 비쳐 보인다 할지라도 여전히 무서웠나보다. 꿈속에서 조차도 나는 물 속과 물밖에 하나라는 것을 몰랐으니까.
* 영화 ‘인셉션’에서는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 젊은 제자가 꿈속 세계를 마음껏 변형시켜본다. 그것이 꿈이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에 마음껏 모든 규칙들을 깨고 새로 만들어서는 그곳에서 논다. 그런 상상력과 자유로움이 있었기에 꿈 속의 공간을 설계할 수 있었으리라. 그녀를 영화에서는 ‘설계자’라고 불렀다.
Ⅵ. 깨어남 The Waking
576. 뛰어난 대장장이인 ‘춘다’라는 신도의 초대에 응하여 멧돼지고기를 먹는 바람에 붓다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것은 많은 해석자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하지만 죽어가는 신의 원형에 관한 세계의 역사, 그리고 그 신의 죽음이 죽음의 신의 지배력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우리고 알고 있는 이상, 여기서 죽음에 으리게 하는 멧돼지의 역할은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될 수 있다.
579. 유다의 역할을 하는 춘다, 베드로 역할의 아난다Ananda, 그리고 자발적인 희생양으로서 붓다까지.
579-580. * 붓다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
대장장이 춘다를 불러 말했다. “춘다, 나에게는 당신이 준비해놓은 싱싱한 돼지고기를 대접해 주시고. 그리고 신도들에게는 맛있는 밥과 떡 같은 다른 음식을 대접해주시오.”
......
“남아있는 싱싱한 멧돼지고기를 구덩이에 파묻으시오. 여래를 제외하고는, 지구상의 그 누구도, 마라Mara의 천당이나 범천의 그 누구도, 승려와 브라만들, 신과 인간들 가운데 그 누구고 그 고기를 먹고 소화시킬 수 없소.”
“잘 알겠습니다. 주인이시여!” 대장장이 춘다가 붓다에게 대답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돼지고기를 전부 다 구덩이에 묻었다. 그리고 그는 붓다가 앉아 있던 곳으로 가서 그 옆에 공손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붓다는 대장장이 춘다에게 종교적 담화로 가르침을 주고 각성해주고, 격려해주고, 기쁘게 해주었다. 그러고 나자 붓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대장장이 춘다가 마련한 음식을 먹은 붓다는 병에 걸렸다. 이질 같은 병이었고, 병세가 심각하여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고통이 들이닥쳤다. 하지만 붓다는 맑은 정신과 침착한 태도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견디며 존재한 아난다를 불렀다. “아난다여, 이리 오시오. 쿠시나가로 가게 해주오.” 존귀한 아난다가 대답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붓다는 다시 존귀한 아난다를 불러 말했다. “자, 아난다여,이제 누군가가 대장장이 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도록 이렇게 말하는 일이 생길 것이오. ‘여래께서 당신의 음식을 마지막 식사로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춘다 당신에게 불행이자 큰 손해입니다.’ 아난다여, 대장장이 춘다가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도록 이렇게 말하시오. ‘춘다여, 여래께서 당신의 음식을 마지막 식사로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은 당신에게 행운이자 소득입니다. 저는 붓다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춘다여, 바로 그분의 입으로 이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 이 두 가지 음식은 똑같이 이로움이 있고, 어떤 다른 음식보다 더 훌륭한 열매이며 더 많은 이로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음식이 무엇이냐? 여래는 그 음식을 먹고 나서 지고하고 완벽한 통찰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음식을 먹고 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 음식은 똑같은 열매와 똑같은 이득을 가지고 있고, 어떤 다른 음식들보다 더 훌륭한 열매와 더 많은 이득을 지니고 있습니다. 대장장이 춘다가 지게된 이 카르마는 수명에 이바지하고, 좋은 탄생에 이바지하며, 행운에 이바지하고, 명성에 이바지하고, 천국과 최상의 힘의 상속에 이바지한 것입니다.’ 아난다여, 이렇게 말해서 대장장이 춘다가 어떤 양심의 가책도 갖지 않도록 하시오.”
* 아멘.
이 책 너무 성스럽다.
582. “네가 태어나기 전에 지니고 있었던 얼굴을 내게 보여라”
582. “불꽃이 바람을 맞아 사라지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듯, 성인께서도 이름과 육신으로 풀려나 사라지시니, 그곳이 어디인지 아무도 모르네. ... 그분이 사라지신 곳에는 아무 형상도 없네. 그렇다면 그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으리. 만물이 다 멸절되고 (존재나 무존재에 관한) 모든 논쟁도 다 사라지는 그때.”
582. 쇼펜하우어는 시적이고 사색적인 글 「개인의 운명에 있어서 확연한 의지에 관하여」에서 이 광대한 우주 전체, 이 경이로운 ‘시간과 공간으로 조건지어진 현상의 다양성’에 고나한 이미지를 제시한다. 즉 이미지는 “하나의 존재가 꾸는 광대한 꿈으로서, 그 꿈속의 등장인물들도 모두 꿈을 꾸고 있는, 그리하여 만물이 맛물려 있고 다른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는” 이미지이다.
585. 꿈 그 자체를 이해하는 지평에서 보면, 갈등은 서로 다투는 등장인물의 의지 사이에서 경험된다. 그리고 이 제한된 컨텍스트 속에서 바람직한 결론은 보통 속박하고 제한하는 더 낮은 힘을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더욱 높은 힘을 가진 영웅의 승리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고한 이름들, 형식들, 꿈의 경계에 있는 의지에 대한 양식들의 한계까지 해체하고 초월하는 것이 목적이 되면,바람직한 결과는 반대로 영웅이라는 형식 그 자체의 희생이 된다. 그 자체로 한계 짓고 속박하면서, 이것은 더 높은 차크라들의 양식이자 열망이 된다. 그렇게 되면 그 목적은 영웅의 용 퇴치가 아니라 반대로, 용에 의한 영웅의 제물 되기이다. 다시 말해 희생의 내면화를 통한 자아박탈이 되는 것이다.
588. 우리의 삶-꿈의 세계, 그 경계를 이루는 범주들이 초월될 때, 만물이 멸절되고 모든 논쟁이 멸절될 때, 그곳에는 더 이상 논쟁을 위한 장이나 ‘죽느냐 사느냐’하는 햄릿의 질문은 남아있지 않게된다. 존재의 소용돌이를 나타내는 티베트-불교의 표상인 바퀴(그림358)의 중심에는 ‘무지’를 의미하는 돼지의 모습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제한된 의식의 조건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데 붓다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을 결정짓는 기만적인 공포와 열망과 다툼들을 빚어내는 형태의, 꿈으로 경계 지어진 현혹의 상태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588. 붓다를 멧돼지의 살과, 육체적 감각과 관련된 일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몸에 의해 거기에 부과된 살의 감각을 지닌 한계들과 의식의 일반적인 동일시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키는 것은 그 멧돼지의 본성에 대한 인식 - 상징적으로, 멧돼지의 살고 그 자신의 몸에 붙은 살과의 동화 - 이었다. 잠을 자는 위대한 신의 자세로, 자신의 육신을 태워 소멸시키는 완전한 의식의 불길을 통해(그리고 그 불길에 의해서 불꽃이 잦아들면서, 이 세계의 타오르는 형상들도 불타오른다.) 그는 더 이상 아무도 아닌 자가 된다. 사실 그는 한번도 그 누구였던 적이 없다. 그의 깨달음을 통해 배웠듯이 “만물은 무아(無我)다.”
* 구본형 사부님께서 돌아가시는 사건이 있었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를 더 생각해 본 게 아닐까. 주변 분들을 만나면서, 죽음에 대한 의미를 들었고,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부님의 공부방법과 제자들을 가르치신 방법이 희생재물이 되는 삶이라고 느껴졌다. 신화를 공부할 때 자신이 좋아하는 신화 하나를 찾아서 변형시켜오라고 하신 것은 무의식에 숨은 자신을 찾아서 그것을 형상화해보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은 그 신화를 닮아갈 것임을 아셨던 게 아닐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꿈꾸는 삶이라는 것을.
591. 우리는 어느 칼라하리 부쉬맨의 입을 빌러 이 책의 서막을 열었다. “우리를 꿈꾸는 꿈이 있답니다.” 그리고 이제 쇼펜하우어의 펜 끝에서 나온 주문을 외며, “하나의 존재가 꾸는 광대한 꿈으로서 그 꿈속의 등장인물들도 모두 꿈을 꾸고 있는” 은하수와 우리 자신으로 이루어진, 전 우주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591. 오늘날 우리가 꾸고 있고, 그것이 우리를 꿈꾸는, 그 꿈은 무엇인가? 어떤 르네상스적 깨어남이 티치아노의 붓과 셰익스피어의 거침없는 펜에 영감을 불어넣고, 갈릴레오와 뉴턴과 달나라를 향한 우주비행사들의 비행을 가능하게 했는가?
592. 그림422. <2만 해리 밖에서 바라본 지구>, 달로 여행하던 아폴로 8호에서 찍은 사진(1968. NASA)
‘지구여, 그대는 하늘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말해다오, 무얼하고 있는지, 고요한 지구여.
- Giuseppe Ungaretti, 달에서 바라본 지구에 바치는 시.
3. 내가 저자라면
1) 이 책의 구성에 대해서
저자는 저자 서문에서 아무 곳이나 마음이 끌리는 곳을 펼쳐서 읽어도 좋다고 언급했다. 이미지를 따라서 흥미로운 곳에서부터 출발하라고 이른 것 같다. 하지만,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방향을 가지고 구성한 책이다. 저자 서문에 구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으며, 또한 책의 중간부분인 4부에 다시 한번 구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 책이 구성에 대한 저자서문에 나오는 요약>
12-13. 1부에서는 꿈을 통해서 신화를 향한 문을 열어놓은 것이다.
2부에서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이라는 원대한 3대 ‘세계 종교’를 완성시킨 유럽과 근동, 인도, 극동, 중남미의 신화이다. ..... 신화의 건축물들을 확인해볼 것이다.
3부에서는 적용과 해석을 통해 동양과 서양사이의 차이점을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언급할 것이다.
4부에서는 요가를 통환 신화의 상징을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는 동양적 접근방식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5부에서는 이 책에서 가장 정점을 이루는 부분으로 희생된 신에 대한 세계 각지의 민속과 문자기록들에 대한 비교 조사이다.
6부에서는 꿈으로서의 신화, 삶으로서의 신화와 더불어 ‘깨어남’이라는 역설적 신비에 대해서 고찰해 볼 것이다.
* 저자 서문에 나온, 책의 구성에 대하여 요약
저자가 4부 내면의 빛의 변형을 기술하다가 책이 구성을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어 여기에 옮긴다.
337. 1부에서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기초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들에 관련된 이미지(세계의 꿈, 세계를 꿈꾸는 자, 위대한 어머니 신, 신비로운 아이, 부활한 영웅 등)를 다뤘고, 2부와 3부에서는 특별히 고등 문화의 테마들(시공간의 수학적 순환과 그 순환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영혼의 깨어남)을 다뤘다면, 4부에서는 신화적 사고와 테마들의 심리학적 차원을 다룰 것이다. 이어서 5부에서는 주술적 의례에서 심리학적으로 기반을 둔 신화적 상징들을 활용에 대해 다룰 것이고, 마지막으로 6부에서는 삶이라는 꿈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이라는 주제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인류 전체가 꾸는 거대한 꿈으로 이끌어서 그 꿈(신화의 이미지)을 해석하고 그리고 꿈에서 깨어남이라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 저자가 4부에서 언급했듯이 깨어남이란 ‘인간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 주제를 말하고자 저자는 많은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2) 이 책의 서술 방식과 그림들
자자는 질문을 던지고는 그것에 대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다른 학자들의 말을 가져다가 인용하거나, 성경이나 경전의 문구를 그대로 인용하거나, 그림을 보여주고 그림 속의 상징들을 해석해 주었다. 때로는 그림을 그냥 보여주고 독자가 느끼도록 했다.
저자가 한 질문은 많은데, 그에 대한 답을 뚜렷하게 ‘그것은 이것이다’라는 식으로 기술하지 않았다. 오직 보여주고 느끼고,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도록 만들었다.
각장의 시작부분이 그림으로 시작하고, 그림의 부분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한 연후에 끝부분이 그림을 제시하고 끝나는 것이 많다. 저자는 독자에게 스스로 따라가도록 그림으로 열어두었다.
저자의 그림에 대한 해석은 매우 자세하고, 그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나 경전의 문구를 상세하게 인용하고 있다. 방대한 내용을 주석처리로 하지 않고, 본문에, 그림밑에 그대로 같이 실어서 보기에 편하고 이해하기도 쉬웠다. 그러한 부분을 예를 들면, 반야심경은 전문을 옮겨 놓고 있고, 붓다와 춘다와의 일화도 긴 이야기만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또한 강가에 사는 처녀로 모습을 바꿔서 도를 전한 보살의 긴 이야기도 그대로 적었다. 각각의 그림들에 나오는 각각의 아이템들은 번호를 붙여가며 그 상징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사용된 그림은 매우 다양하다. 유적들의 사진에서부터 도판 그림, 그리고 현대적인 그림들까지 다양하게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 지구라트 유적들을 담은 오래된 사진,
- 중세의 기독교 내용을 담은 그림
- 동양화의 산수화, 화조도
- 불교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 힌두교 사원의 벽화 그림사진
-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낡은 구두 그림, 고갱의 천국 그림, 모네의 수련, 잭슨폴록의 물감뿌리기 기법으로 그려진 <가을 느낌>
- NASA 우주선이 지구를 찍은 사진
- 기독교의 성서 내용이나 그 구절의 의미를 작가가 해석한 대로 느낌을 표현한 그림들.
역자의 말대로 이 책은 이미지를 읽지 않고는 내용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신화의 이미지’를 충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미지의 비중이 굉장히 크다.
저자는 이미지를 풍성하게 사용하고 있다. 설명해 해당되는 이미지를 단 하나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를 보여주고 있다.예를 들면 그림.288에서 그림.295까지 모두 명상에 관련된 그림들이며, 만다라를 보여주는 사진은 349~351까지이다. 논쟁적인 어떤 말보다는 풍성한 이미지의 속에서 그러하다라고 인정하며 저자를 따라가게 만든다.
그림이 중요한 요소인 듯 하니, 각부의 시작그림을 언급하고 가자. 각 부는 어떤 그림이 첫 그림으로 나오는지를.
1부. 꿈으로서의 세계 - 별 사진이다. 까만 바다를 연상시키는 막막한 우주 사진.
2부. 우주의 질서에 대한 생각 - 서양의 별자리를 표시한 그림 2개
3부. 연꽃과 장미 - 수련... 짐작으로는 모네의 수련작품이 아닐까?
4부. 내면의 빛의 변형 - 캔버스에서물감이 번져나간 것이 보일 정도로 크게 확대된 그림으로 어떤 그림인지 알 수 없다.
5부. 희생 - 고갱이 그림이다. 타히티의 바닷가에서 파도가 이는 물 속에서 놀고 있는 장면이 크게 들어가 잇다.
6부. 깨어남 - 씨앗일까? 수평선에 떠오르는 해일까? 일부를 확대한 그림이라서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3) 저자는 끝에 질문을 한다
591. 오늘날 우리가 꾸고 있고, 그것이 우리를 꿈꾸는, 그 꿈은 무엇인가? 어떤 르네상스적 깨어남이 티치아노의 붓과 셰익스피어의 거침없는 펜에 영감을 불어넣고, 갈릴레오와 뉴턴과 달나라를 향한 우주비행사들의 비행을 가능하게 했는가?
맨 마지막 단락, 마지막 문장이다.
이 질문에 답은 독자의 몫이다. 그런데 이건 지식으로 답하기엔 너무 어렵다.
그러면 어떤 꿈을 꾸라는 것인지, 책 전체를 통해서 질문하는 것 같다. 그 답을 찾으라고, 그 메시지를 전하려고 이 책을 쓴 게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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