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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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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6월 11일 10시 47분 등록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우편물이 배달되었다.

수신인은 나이다. 회사이름이 아닌 개인 이름으로 온 우편물이다. 누런 서류봉투에 들어 있을 소장. 이런 소장을 내가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직장 동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ooo 기억해?” 전혀 기억이 없는 이름이다. “잘 모르겠는데요…그분이 누군데요?” 나는 나의 기억력을 믿지 않는다. 디테일을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고 특정장면만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이름석자를 듣고 사람을 기억하기 어렵다. 내게 있어 기억이란 것은 손바닥의 모래처럼 빠져나가기 쉬운 것이다. 이런 내게 동료는 기억을 살려준다. “그분 어머니가 000.”

 

….’

 

기억이 난다.

 

동료가 말하는 분의 어머니를 만난 것은 그때로부터 15년쯤 전()이다. 과장 시절에 근무하던 지점에서 만난 분이다. 자녀들은 출가하여 모두 살림을 났다. 낮은 목소리에 사람 좋아 보이는 편안한 얼굴을 하고 계신 분이었다. 관리고객이 수백 명이 되었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 분을 기억하는 것은 특별함이 있어서이다. 회사의 VIP고객이었고 출가한 자녀들 명의로 예금통장을 관리하고 계셨던 분이다. 연세가 들어감에 따라 혹시 모를 사태(상속)를 대비하여 상속재산이 자녀들에게 적당하게 배분되도록 하자는 마음에서 분산하여 예금을 관리했던 것이다. 부부가 함께 지점에 들르진 않으셨다. 모든 거래는 어머니가 통장과 도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하셨다. 가끔 집으로 전화를 걸어보면 할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시는데 목소리로도 점쟎은 어르신이란 느낌이 전해오던 분이다.

 

평소처럼 전화를 드렸다. “이번 주는 내가 지점에 들를 시간이 없어” 하신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묻는 내게 어머니는 “가벼운 수술이 필요해서 23일정도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걱정할 만한 것이 아니니 병원 다녀와서 보자고 하시면서 전화를 끊으셨다. 며칠이 경과하고 전화를 넣었는데 중년의 남자가 전화를 받는다. 평소 그 집에서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이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전화를 받는 남자는 “누구세요?”하고 물어온다. 설명을 한다. “며칠 전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병원에 볼일이 있다고 하셔서 다시 전화를 드려본 겁니다.” 전화를 받는 남자는 자신이 아들이라고 했다. 아들이 전화를 받는다? ‘무슨 일이 생긴 게야. 느낌이 좋지 않아“어머니는 퇴원을 하셨나요?” 지금 혼수상태라는 답이 돌아왔다. 중환자실에 계신다고 했다. 큰 수술이 아니어서 가볍게 생각했는데 회복을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위독한 상황이니 외국에 있던 아들들이 귀국을 한 모양이다. 중환자실에 면회를 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지금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내가 면회를 갔던 것. 그것만 기억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회복을 하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셨다. 그 고객과의 인연은 그것이 끝이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에 없지만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났고 관리하던 고객들은 후임자에게 인계를 해주었다.

 

금융기관은 대부분의 고객이력을 관리한다. 어떤 금융상품을 선호하는지, 거래경험은 어떤지, 커피는 설탕을 넣는지, 어떤 음료를 좋아하는지, 당뇨는 있는지 없는지, 차량은 무엇인지등등 고객성향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관리한다. 내가 근무했던 회사는 특별히 고객관리시스템이 빨리 정비된 회사였다. 인사이동으로 직원이 바뀌어도 후임자가 고객관리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자료를 가지고 있다. 또 직원은 자신이 지점을 이동하면 새로운 지점에서 새로운 고객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럽던 시절이라 후임자에게 넘겨준 고객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다.

 

지점장님그 남자가 당시 돌아가신 분의 아들인 모양인데그 사람이 왜요?”

 

동료의 갑작스런 전화에 이유를 물어보았다. 얼마 전에 그 아들이 내점하여 예전 거래내역을 출력하고 당시의 전표를 복사해달라고 해서 자료를 주었다고. 어머니가 돌아가실 당시 업무처리를 하는 과정에서 돈이 사라졌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그 근거를 찾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나중에 계산해보니 오백만원이 사라졌는데 당시 어머니자산을 관리하던 직원이 그 돈을 빼돌린 것이다는 확신을 갖고 있더라고 했다. 소송을 할 생각인데 소장을 접수하기 전에 그 직원을 만나봐야겠다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해서 알려줬노라고 했다. 절대 그 직원한테는 말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동료는 그 남자의 갑작스런 방문에 내가 놀랄 것 같아서 이야기해준다며

 

전화를 받은 며칠 후 정말로 노인 한 분이 지점을 방문했다. 얼굴을 보니 기억은 없었지만 나를 찾아올 사람 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짐작은 갔다. 육십 중반의 노인. 얇은 몸에 주름이 가득한 얼굴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표정이다.

 

자신을 소개하면서 기억이 나느냐고 묻는다. 물론 나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정말로 기억에 없다. 기억이 날 리가 없다. 한번도 그 남자를 자세히 본 적이 없을 테니 말이다. 자신을 소개했다. 어머니이름을 이야기하고 본인이 그분의 장남이라고. 본인은 미국에 사는데 이제 사건의 소멸시효가 얼마 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왔노라고 한다. 무슨일이냐고 물었다. 그 남자는 지점에서 복사해준 전표를 꺼내놓았다. 출금액과 입금액이 차이가 있는 전표 두 장이다. 특정계좌에서 출금하여 대체 처리한 전표인데 오백만원이 차이가 난다. 출금전표를 살펴 본다. 500만원의 흔적이 보인다. 출금전표에 지급해야 하는 현금이 있는 경우 내부직원끼리 알아볼 수 있도록 기재하는적요란이 있다. 그곳에 100*5 그리고 수표번호, 발행은행이 적혀있다. 100만원권 수표 5, 500만원을 수표로 인출했는데 발행은행과 수표번호를 기재해놓은 것이다. 설명을 했다. 전표로 보아 수표로 지급을 했는데 수표번호가 있으니 번호를 추적해보면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확인 가능하다. 수표번호를 추적해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남자는 나를 쳐다보며 한마디 한다. “좋게 해결 할려고 찾아 왔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도대체 뭘 좋게 해결하나!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인가! 내가 잘못한 것이 있어야 좋게 해결을 하지.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좋게 해결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수표번호 확인하면 바로 알게 될 일을 가지고” 나의 말에 그 남자도 기가 찬 모양이다. “할 수 없지! 법대로 할 테니 그리 알아라”고 가버린다.

 

그 후에 날아든 봉투이다. 정말 소장을 접수한 모양이다. 대한민국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소송을 할 수 있는 나라구나. 누가 봐도 뻔한 것을 가지고 소송을 하자고 든다면 소송꺼리가 아닌 것이 뭐에 있을까 싶다. 봉투를 뜯어보았다. 소송서류에는 원고의 자필로 쓴 글이 십여 장에 달했다. 읽어보기도 싫어서 대충 훓어 보고 봉투에 다시 넣어버렸다. 언제까지 답변서를 내지 않으면 원고의 주장을 인정하고 500만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소송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다. 앉아서 말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은 일이 이렇게 변호사를 끼고 소송을 제기하면 정해진 기간 안에 답변서를 써야 하고 상대방이 반박문을 다시 접수하면 또다시 답변서를 써야 하는 소모전이 시작된다. 이런 소송에 답변서를 써야 하는 내가 한심스럽다. 엎친데 덮친격이라고 하나. 좋지 않은 일은 서로 손잡고 같이 오는 모양이다. 많은 일들이 겹치기로 나를 괴롭히던 시기에 소장을 받고 보니 헛웃음만 나왔다. 할 수 없다. 이럴 때 제일 좋은 방법은 돈으로 해결하는 일이다. 내가 답변서를 쓰느라고 한자한자 고민하면서 글을 쓰느니 전문가에게 의뢰를 하는 것으로 얼른 결론을 보았다. 내가 답변서를 쓰다가는 화만 돋구는 꼴이 된다. 마구 욕을 하면서 쓸게 뻔한 일이고 엄벙덤벙 쓰다가는 일만 꼬이게 만들 수도 있다.  

 

법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건의 전말을 대충 이야기하고 소송대리를 해 달라고했다. 수수료는 50만원이다. 50만원에 내 시간을 저축하는 거다. 내 에너지를 쓰지 않는 거다. 스스로 생각을 하며 법원으로부터 날아온 서류일체를 법무사에게로 전달했다. 글을 검토한 법무사가 전화를 해서 하는 말이….”원고가 소장을 제법 잘 썼던데요. 잘 모르는 판사가 보면 원고의 주장이 일리 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분명히 사건의 정황이 부장님이 말하는 것이 맞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소장을 잘 썼다니…무슨 소설 쓰나? 글만 잘 쓰면 없던 일이 있었던 일로 둔갑이라도 한단 말인가…. “당연히 잘 썼겠지요. 그 사람 직업이 기자였으니까. 우리나라 중앙일간지 편집국장까지 한 사람이 글을 오죽이나 잘 썼을라구요” 괜히 법무사에게 화풀이를 한다. “허허…그냥 그렇다는 말입니다. 제가 답변서 잘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마디 더한다. “요즘 판사들 이상한 사람 정말 많아요. 그런 사람한테 잘 못 걸리면 패소할 수도 있고, 우리가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런 건()을 가지고 몇 년씩 소송하는 사람도 있어요.”  몇 년째 소송대리를 하고 있는 고객사례를 말해준다. 하기야 사법고시를 패스했다고 해서 다 정상은 아닐 테니….

 

두 번의 법원 걸음으로 판결을 받았다. 원고패소. 당연한 결과인데 법무사는 잘 되었노라고 한다. “혹시 모릅니다. 그 사람 항소할지도” 항소기한까지 기다려봐야 한단다.

 

나 원 참….

 

그 남자와 법원에서 두 번 판사 앞에 섰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 남자는 자신이 말이 안 되는 건을 가지고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지는 알까? 아마 모르겠지. 알고도 이러지는 않을 테니. 정말 내가 500만원을 가로챘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내게 협박을 하여 돈을 좀 뜯어 낼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소송을 하는 건가?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자신이 제출한 소장에 적힌 대로 내가 돈을 가져간 것이 분명한데 모두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것이 된다. 다시 한번 그 남자를 바라본다. S대를 나와 신문사 편집국장까지 한 사람. 지금은 환갑이 넘은 나이. 추레한 모습이 형편이 좋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송에서 패한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할까?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의 저자는

 

기억은 우리가 인생에 남기는 지문이다라고 한다. 우리 인생에 남겨진 지문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플라톤은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형태의 기억, 우리의 모든 과거가 완벽하게 보존되는 도달 가능한 영역이 있다고 믿었다. 프로이트는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 된 것이 기억이라고 주장하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마치 영화필름이 돌아가듯 자유 연상을 통해 두뇌의 일부분이 재생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기억에 관해 가지고 있는 개념은 거의 프로이트와 플라톤, 이 두 남자의 사상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 에리자베스 로프터스는 이 위대한 사상가들에게 도전할 결심을 했다. 그녀의 육감이었을까? 기억은 모래처럼 빠져나가기 쉽고, 쥐새끼처럼 간사한 것이었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로렌 슬레이터234]

 

사람의 기억이란 것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에 나는 공감을 한다. 가끔 나는 잘 설계된 네비게이션의 말을 듣지 않는다. 나의 기억을 믿는 것이다. 아리따운 여성의 안내를 듣지 않고 내 기억대로 운전을 한다. 그러다가 내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분명히 내 기억에는 이 길인데…’ 현실은 내 기억과 다르다.

 

확신에 차서 소를 제기한 것이라면 이 사람은 병이 있는 거다. 돈이 필요해서 협박을 하는 거라면 그것도 분명 병이다. 이러나 저러나 정상이 아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떻게 늙어갈 것인가? 생각해 본다. 멋진 늙은이가 되고 싶다. 세월의 흔적을 애써 지우려 하지 않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깊은 늙은이 말이다. 귀는 열고 입을 닫는 그런 노인 말이다.

가능하면 입은 닫고 지갑을 열 수 있으면 더욱 좋겠다.

IP *.175.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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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2 16:58:02 *.51.145.193

행님 참 다양하게 겪으시네요^^.

재미있어요~~ㅋㅋㅋ

 

프로필 이미지
2013.06.20 09:18:14 *.131.205.97

고생이 많으셨네요.

똑같은 것을 보고도 달리 해석하는 게 우리 인간이란 생각이 드네요. 저도 그래서 주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도 해서...ㅋㅋㅋㅋ

 

그런데... 고객관리가 시스템으로 잘 갖춰진 곳이면, 이런 일에 대비한 법무지원팀이 있을 텐데..... 모두 본인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면... 이건 좀 이상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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