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ampo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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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2-3. 신화 --- 끝나지 않은 길 (The Unending Journey |
1. 천복 발견-그윽한 행복감 (몇 장의 이미지들)
2. 대극(맞섬)-그곳에서 한판 뜨다(분노의 까르마)
3. 자각(깨다)-깨달음의 생명수를 마시다(경외와 순종)
4. 신화만들기-웅녀의 변신이야기(나의 신화 제의)
서은경 쓰다 (201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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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생명수를 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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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험은 그것을 ‘그저 바라보는’ 순간, 깨달음을 준다.
경험이 자신에게서 떨어져나가 객관화 되면, 나의 눈앞에는 ‘패턴처럼 반복하는’ 나의 어떤 모습이 영상처럼 흘러간다.
특히 낯선 환경, 예측불허의 상황이 펼쳐지는 공간에 나를 가져다 놓으면 더욱 선명하게 내가 보이기도 한다. 짐 보따리를 크게 싸고 오랜 기간 먼 길을 떠나는 여행은 짐을 싼 크기만큼, 자신의 ‘묵은 자아'도 한 짐 떨쳐 버리고 돌아올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우리는 끝없는 여행길에서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 다시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돌아가는 길, 이 세상과 눈 맞추는 방법을
터득하는 길을 찾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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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의 인도 타지마할 여행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객지의 낯선 상황 속에서 나의 몸에 붙어있는 묵은 행동 패턴을 발견한 것이다. ‘분노!’ 내가 무엇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마다 자주 일어나는 ‘내 감정의 패턴’이었다. 무언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그 상황에 불편함을 느끼며 늘 ‘분노’라는 감정이 습관처럼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 그 분노라는 감정이 마치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내 몸에 착 감겨있어서, 그간 나는 ‘분노의 여신’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녀에게 휘둘리며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과 늘 한바탕 전쟁 치룰 태세로 살아왔던 것이다.
나는 사회생활, 결혼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여 산전수전 공중전을 치루며 너무도 애를 쓰고 산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서. 못내 그리워하며 수 십 년을 기다려서 도착한 그 곳, 아름다운 타지마할 앞에서 나는 하마터면 제대로 구경 한번 못하고 돌아서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뻔하였다.
타지마할 문 앞에서 한바탕 아수라장을 만들며 인도인 그들을 이해할 수 없어 하고 있을 때, 딸아이가 내가 말했다.
“엄마, 그냥 비디오카메라 안 찍으면 되잖아요. 저 사람들이 말에 따르면 되잖아요.”
딸아이의 그 말에, 나는 뒤통수를 맞는 듯 나의 상황과 모습이 보였다.
내가 수많은 인도인 앞에서 동물원 원숭이 꼴이 되어 있었다.
내 아이 앞에서 떼를 쓰며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못난 내 모습을 발견하자 그 순간 극도의 쪽팔림이 밀려왔다.
엄마인 내가 부끄러웠다.
나는 모두가 바라듯 나를 꺾고 그곳의 법칙을 따라야 하는 순간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상황과 장소에서 우리는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으로 늘 삶을 살아왔기에 그곳에서 억지에 가까운 고집을 부리며
분노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
나는 늘 차분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인도인들에 무장해제(?) 당했다.
그 상황에서 나를 구원해준 내 딸의 자그맣고 보드라운 손을 꼬옥 잡고, 아직도 분노의 여운이 남아 약간은 씩씩거리며
인도인, 그들이 만든 아름다움의 극치, 타지마할 앞으로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아 타지마할이여......
점 점 점 점 내게 다가온다.
찬란한 순백색의 반짝거림...
나는 어느새 '몰아지경'에 빠져 타지마할의 아름다운 자태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며 자아가 위축되듯, 인간이 만든 위대한 예술품, 타지마할 앞에서
나는 '내가 없어짐'을 경험하고 있었다.
‘언제 내가 길길이 날 뛰며 ‘분노’하기라도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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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그윽한 행복감을 느낀다.
내 안의 예술적 재능을 자극하는 타지마할!
‘색채와 공간 배치에 대한 나의 욕구’는 타지마할을 볼 때마다 이름 모를 자신감으로 차오른다.
또한 나는 내가 사랑하는 타지마할 앞에서
깨달음의 생명수를 마셨다.
반복하던 분노의 까르마(업)를 내려놓고 경외하며 ‘순종’을 배웠다.
타지마할 사건 이후, 나는 내 안에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을 바라 볼 수 있었고
인도를 다녀온 뒤, 내 안의 분노의 여신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나는 타지마할 사진을 늘 내 가까이에 둔다.
내 창조적 에너지가 소진되거나 분노의 감정이 밀려올 때
사진을 꺼내 본다.
요즘 나는 '환타지적 색채와 신나는 공간미'가 가득한
생생히 살아있는 ' 집 한채'를 구상 중이다.
아마도 그 집은
벽돌 놓고 외장 칠하며
나의 글로 지어질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