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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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현실적이고 보다 내 마음이 끌리는 것을 연구해 정리하려다
2007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간의 여행이 나에게 준 것을
그대로 먼저 올리고 싶었다. 내것이 아닌 것을 아직은 다 버리지 못한 채로
10년에 범벅해 주무려놓은, 깨끗한 단락조차 만들지 못한채 쏟아낸 결과물이지만,
많은 것을 바꿔놓은 여행의 마지막 날에 우리 "깨일이"앞에서 읽어내려간
글 그것이다. 더없는 절실함으로 겉치레를 벗어낸 10년동안의 회고를 다시 올리겠다.
정말 아름답고 치열했던 30대가 내일이면 끝이다. 우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나는 숫자 하나를 더해 40이 된다. 내 인생 최고의 10년이었고 다가올 40대에 또 다시 한번 ‘최고’라는 형용사를 붙일수 있을 그 디딤돌이 되어줄 10년이었다. 나에 대해 건방지고 불안했던 서른살이 시작되는 무렵 나는 결국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꿈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그 곳이 내 출발점이었다.
막연한 꿈이었던 작가가 되었다. 나는 이제 그다지 재정적이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쓸수 있게 되었고 통역일을 하며 패션업계에 몸담게 되었고 지난 해 말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조용히 준비한 서재 겸 거실같은 분위기의 카페를 열게 되었다. 서른 살에 5년간의 교사일을 마무리하면서 출간한 문제집은 고민의 시간을 제공해준 교사일의 마지막 깔끔한 매듭이었고, 여전히 적지않은 수의 학생들이 그 영어책으로 인해 영어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작은 내 자랑이다. 30대 첫해 교사일과 병행하면서 6월 문학동네 신인작가부분에 글을 마감시키고 떠났던 뉴욕여행. 혼자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1년전부터 약속했던 지인들과 함께였다. 11월 통역대학원시험을 앞두고였다. 도착한지 이틀 되던 날이었던가. 눈을 떴는데 5시였고 나는 24살에 맨발로 걸었던 브루클린 다리가 홀로 너무 만나고 싶어졌었다. 메모 한 장을 남기고서 센트럴파크 서쪽에 위치한 민박집에서 나왔지만 버스를 타고 싶진 않아 공원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싱그러웠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공원엔 나와 같은 표정의 사람들이 희망이랄지 설렘이랄지 또는 다른 생각의 자락 하나씩을 들고 뛰거나 걷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앉아있었다. 타임스퀘어를 지나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스트랜드 중고서점을 지나고 윌스트릿을 지나 브루클린 다리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시계가 없어 몇시간을 걸었는지 알수 없었지만 저릿저릿한 발바닥은 왠지 모를 쾌감이었고 나는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고 다리로 올라갔다. 큰 마음을 먹고 시작한 한해였지만 불안함과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지도 모를 경우를 대비한 비겁함으로 교사일을 병행하면서 통역, 글쓰기를 준비하느라 광대가 줄타는 심정이었던 나는 맨발로 선 브루클린 다리위에서 그만 너무 가벼워져 버렸다. 빈 속으로 더듬어갔던 6개월전처럼 빈 속에 맨발로 선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고 이기지 못할 일이 없는 듯했다. 그때 나의 마음은 너무도 행복충만한 그것이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들은 거의 지인들의 뉴욕여행 가이드였지만 패션학원이나 대학학과를 찾아가 그들이 가진 한국에 대한 정보를 들어봤던 것과 연극, 뮤지컬 분야의 한국진출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생각하면 큰 자산이 된 듯하다.
2007년 말 이화여대통역대학원 합격자가 발표되고 난 뒤 언제나 크리틱하게 잘못된 부분을 잡아주시고 칭찬은 많지 않으셨던 은천성 선생님께서 짧게 very good이라고 해주셨던 순간, 부족한 마음에도 자랑스러워하며 학원홈페이지에 합격수기를 남길 때는 정말 가슴이 뜨거웠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매달릴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만큼 학교일과의 병행끝에 거둔 성취였기에 누구보다 내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시작한 본격적인 통역공부는 통대준비보다만만치 않았지만 한국어외 또다른 모국어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처절하게 매달렸고 2009년 졸업과 동시에 나에겐 드디어 합법적으로 통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만약 내가 단지 영어동시통역만을 원했더라면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10년전 오늘날에 대해 그렸던 큰 꿈이 있었기에 나는 비단 영어공부에만 매달리지 않았고 일어, 불어는 동시통역까진 아니지만 순차통역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통대 재학시절이었던 2008년 겨울, 누가 추울 때 파리를 가지말라고 했던가. 겨우 5일간이었지만 초보자수준으로 겨우 듣기만 되던 나는 줄리앙을 5일 내내 괴롭히면서 가볼 수 있는 패션관계쪽은 다 방문해보았고 의료기계분야에서 일하는 그는 너는 곧 불어도 모국어처럼 쓸수 있을거라고 힘을 주었다. 그는 여전히 나의 좋은 불어조언자다.
그렇게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남편을 따라 영국에 가게 되었다. 몇 해전부터 예정되고 계획된 일이기에 꿈을 따라가고 있다는 예감에 설레기만 했다. 희곡을 전공하면서 잊었던 문학에의 사랑이 되살아나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우리끼리 각색해 만들었던 연극 무대는 정말 잊을 수 없다. 그 때 영국에서 모은 이쁜 소품들은 지금 우리카페의 한 구석들을 장식해주고 있다. 아 영국에 머무르는 기간동안 내 방학때 거의 의형제 수준인 발레리, 샤무엘과 다시 만났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내 나이 23세, 샤무엘 20세, 발레리 26세에 만난 우리들은 그 이듬해 로마에서 다시 만나 1주일 여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30세 2월에 중국에서 일하던 샤무엘이 잠시 서울을 방문에 만난 걸 제외하면 셋이 만난 건 꼬박 10년만의 일이었다. 각각 독일, 이탈리아에서 일하고 있는 이제 30, 33, 36세가 되어버린 우리들은 10년의 세월이 가져다준 주름과 더불어 여유있는 웃음을 가지게 되었기에 함께하는 그 여행이 우리 셋 모두에게 큰 의미였던거 같다.
대학원공부를 시작하고 학부시절부터 믿음의 시선을 거두시지 않으셨던 강태경교수님과 도서관올라가는 길 카페에서 커피 한잔씩을 받아들고 나무둥지에 자리잡고 앉았던 날이 기억난다. 학부졸업후 4년만에 찾은 제자를 누구보다 반겨주셨던 분. 꿈 프로그램에서 완성한 내 나름의 10년 계획을 들으시고 응원해주셨다. 내가 현대영미희곡때 받은 감회를 되새김질 하노라니 그저 삶을 배움에 대해 갈구했던 제자를 떠올려주셨다. 이젠 교수에 대한 ‘반드시’라는 욕심없이 내 길을 가면서 시작한 공부를 그래서 더 훌륭하다 해주셨다. 배움의 삶이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 보여주시는 분이다.
몇차례 등단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마침내 출간된 나의 책에 나의 성장을 지켜봐오셨던 분들의 추천사를 받아든 순간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예전에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성장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아슬한 줄을 발가락 끝에 잔뜩 힘을 주고 옮겨가고 있는 자식을 행여나 떨어지면 밑에서 받아주기라도 할 요량으로 염려와 지지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신, 그래서 덜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게 해주신 분들에게 인사드리는 기분이랄까. 이루어낸 책이라는 성과물 때문이 아니라 내 30대를 불안하지만 내색않고 믿고 지켜봐주셨음에 대한 벅찬 감사의 눈물이었음을 아셨을는지 모르겠다. 그랬다. 30년 살아온 것보다 더 한 일이 많았던 10년이었고, 내 마음에 무엇보다 솔직했고 내 스스로에게 냉정하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10년이었다. 마지막 매듭을 짓고 가리란 욕심에 놓지 못했던 학교 업무로 늦게 잠든 밤에도 그 다음날 있을 학원수업 준비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던 그 갈등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 하루만 그냥 고개 숙이고 발표말자. 그럼 2시간 더 잘 수 있어. 산다는 게 뭐 별거 있다고 이렇게 힘겹게 일어나야해? 이러다 건강해치면 다 소용없어‘ 하지만 많은 고민끝에도 어느 꿈하나 버리지 못한 것은 나였고 그게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내야 했다. 몇초도 되지 않을 순간에 이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고 마침내 갈등은 종지부를 찍고 나는 힘겹게 일어나 아직도 푸른빛인 창가에서 기지개를 켰었다. 나를 더 이상 변명하지 말자. 아무리 남들 눈에는 위험해 보일지라도 진정 혼을 담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을거라고 믿자는 각오로 아침 공부를 시작했고 그렇게 지내온 10년. 29세 늦가을, 29라는 그 숫자를 제목에 달아주신 김달국 선생님과 그 분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되었던 꿈프로그램에 너무 감사한다. 멘토는 물론이고 내 평생의 꿈벗이 된 이들, 그리고 지난 10년간 많은 지침서들로 나를 버티게 해주시고 응원해 주신 구본형 소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나는 꽤나 다른 길에서 선택의 문제를 놓고 여전히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주 열린 카페 오픈식에 이들만을 초대했던 것은 표현 미숙한 나만의 깊은 감사였었다. 그러지 않아도 작은 카페가 그들의 존재감으로 너무도 작아보였고 그리고 너무도 따뜻했었다. 아 그 까페를 열때 장소물색부터 도와준 남편, 10년전 나의 진로고민을 불확실함속에서 믿어주고 10년간 가장 큰 응원자였던 그에게도 깊이 감사한다.
이제 마흔이다. 나는 다음주 뉴욕으로 홀로 여행을 떠난다. 실은 공항에서 맞아도 되지만 뉴욕이 너무 그립고 카페에 필요한 소품 구입차 3일 이전에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공연하게 된 프랑스 극단에서 영국 배우 때문에 영어, 불어, 한국어 통역이 동시에 필요했던 차에 연락이 와 같이 입국하면 오는 길에 친숙도도 높이고 한국에 대해 더 좋은 정보까지 주면 좋지 않겠냐고 설득해 그들의 입국 날짜 3일전에 가기로 한 것이다. 벌써 설렌다. 10년 전 여름에 그랬듯 나는 4시간은 족히 걸어도 아프지 않을 편한 운동화를 제일 먼저 가방에 집어넣을거다. 첫 등단은 소설이었지만 작년에 나온 책은 패션, 연극 분야전문의 최소 3개 국어 이상의 통역가일에 관한 것이어서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온라인상의 공간을 만들고 앞으로의 10년간은 이 분야에 대한 어학원을 추진하는데 많은 시간이 할애될 듯하다. 참으로 멋진 세상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내 눈앞에 있는 책장에 내가 쓰고 번역한 책이 다섯 권이나 꼽혀있고, 외국어 세 개를 자유자재로 하고, 자그맣지만 너무도 편안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회고를 쓸 수 있을 줄이야 짐작이나 했던가. 똑같았던 24시간이 2박 3일간의 짧은 시간을 통해 전혀 다른 질의 24시간이 되었고 내가 원하는 10년을 만들게 했다. 이젠 한치의 의심없이 꿈의 힘을 믿는다. 함께 해주는 가족과 벗들와 스승들의 감사함을 안다. 진실되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두려움없이 그 길을 따라가고, 함께 가는 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웃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IP *.204.66.34
2007년 1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간의 여행이 나에게 준 것을
그대로 먼저 올리고 싶었다. 내것이 아닌 것을 아직은 다 버리지 못한 채로
10년에 범벅해 주무려놓은, 깨끗한 단락조차 만들지 못한채 쏟아낸 결과물이지만,
많은 것을 바꿔놓은 여행의 마지막 날에 우리 "깨일이"앞에서 읽어내려간
글 그것이다. 더없는 절실함으로 겉치레를 벗어낸 10년동안의 회고를 다시 올리겠다.
정말 아름답고 치열했던 30대가 내일이면 끝이다. 우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이제 나는 숫자 하나를 더해 40이 된다. 내 인생 최고의 10년이었고 다가올 40대에 또 다시 한번 ‘최고’라는 형용사를 붙일수 있을 그 디딤돌이 되어줄 10년이었다. 나에 대해 건방지고 불안했던 서른살이 시작되는 무렵 나는 결국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하고 꿈프로그램에 참여했었다. 그 곳이 내 출발점이었다.
막연한 꿈이었던 작가가 되었다. 나는 이제 그다지 재정적이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쓸수 있게 되었고 통역일을 하며 패션업계에 몸담게 되었고 지난 해 말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조용히 준비한 서재 겸 거실같은 분위기의 카페를 열게 되었다. 서른 살에 5년간의 교사일을 마무리하면서 출간한 문제집은 고민의 시간을 제공해준 교사일의 마지막 깔끔한 매듭이었고, 여전히 적지않은 수의 학생들이 그 영어책으로 인해 영어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작은 내 자랑이다. 30대 첫해 교사일과 병행하면서 6월 문학동네 신인작가부분에 글을 마감시키고 떠났던 뉴욕여행. 혼자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1년전부터 약속했던 지인들과 함께였다. 11월 통역대학원시험을 앞두고였다. 도착한지 이틀 되던 날이었던가. 눈을 떴는데 5시였고 나는 24살에 맨발로 걸었던 브루클린 다리가 홀로 너무 만나고 싶어졌었다. 메모 한 장을 남기고서 센트럴파크 서쪽에 위치한 민박집에서 나왔지만 버스를 타고 싶진 않아 공원을 따라 하염없이 걸었다. 싱그러웠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공원엔 나와 같은 표정의 사람들이 희망이랄지 설렘이랄지 또는 다른 생각의 자락 하나씩을 들고 뛰거나 걷거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앉아있었다. 타임스퀘어를 지나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스트랜드 중고서점을 지나고 윌스트릿을 지나 브루클린 다리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시계가 없어 몇시간을 걸었는지 알수 없었지만 저릿저릿한 발바닥은 왠지 모를 쾌감이었고 나는 운동화를 벗어 손에 들고 다리로 올라갔다. 큰 마음을 먹고 시작한 한해였지만 불안함과 결국 아무것도 해내지 못할 지도 모를 경우를 대비한 비겁함으로 교사일을 병행하면서 통역, 글쓰기를 준비하느라 광대가 줄타는 심정이었던 나는 맨발로 선 브루클린 다리위에서 그만 너무 가벼워져 버렸다. 빈 속으로 더듬어갔던 6개월전처럼 빈 속에 맨발로 선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게 없었고 이기지 못할 일이 없는 듯했다. 그때 나의 마음은 너무도 행복충만한 그것이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들은 거의 지인들의 뉴욕여행 가이드였지만 패션학원이나 대학학과를 찾아가 그들이 가진 한국에 대한 정보를 들어봤던 것과 연극, 뮤지컬 분야의 한국진출 정도를 짐작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지금생각하면 큰 자산이 된 듯하다.
2007년 말 이화여대통역대학원 합격자가 발표되고 난 뒤 언제나 크리틱하게 잘못된 부분을 잡아주시고 칭찬은 많지 않으셨던 은천성 선생님께서 짧게 very good이라고 해주셨던 순간, 부족한 마음에도 자랑스러워하며 학원홈페이지에 합격수기를 남길 때는 정말 가슴이 뜨거웠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매달릴까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만큼 학교일과의 병행끝에 거둔 성취였기에 누구보다 내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시작한 본격적인 통역공부는 통대준비보다만만치 않았지만 한국어외 또다른 모국어를 만들자는 마음으로 처절하게 매달렸고 2009년 졸업과 동시에 나에겐 드디어 합법적으로 통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만약 내가 단지 영어동시통역만을 원했더라면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없었을 거다. 10년전 오늘날에 대해 그렸던 큰 꿈이 있었기에 나는 비단 영어공부에만 매달리지 않았고 일어, 불어는 동시통역까진 아니지만 순차통역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통대 재학시절이었던 2008년 겨울, 누가 추울 때 파리를 가지말라고 했던가. 겨우 5일간이었지만 초보자수준으로 겨우 듣기만 되던 나는 줄리앙을 5일 내내 괴롭히면서 가볼 수 있는 패션관계쪽은 다 방문해보았고 의료기계분야에서 일하는 그는 너는 곧 불어도 모국어처럼 쓸수 있을거라고 힘을 주었다. 그는 여전히 나의 좋은 불어조언자다.
그렇게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나는 남편을 따라 영국에 가게 되었다. 몇 해전부터 예정되고 계획된 일이기에 꿈을 따라가고 있다는 예감에 설레기만 했다. 희곡을 전공하면서 잊었던 문학에의 사랑이 되살아나 생활과 공부를 병행하는 일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우리끼리 각색해 만들었던 연극 무대는 정말 잊을 수 없다. 그 때 영국에서 모은 이쁜 소품들은 지금 우리카페의 한 구석들을 장식해주고 있다. 아 영국에 머무르는 기간동안 내 방학때 거의 의형제 수준인 발레리, 샤무엘과 다시 만났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내 나이 23세, 샤무엘 20세, 발레리 26세에 만난 우리들은 그 이듬해 로마에서 다시 만나 1주일 여행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30세 2월에 중국에서 일하던 샤무엘이 잠시 서울을 방문에 만난 걸 제외하면 셋이 만난 건 꼬박 10년만의 일이었다. 각각 독일, 이탈리아에서 일하고 있는 이제 30, 33, 36세가 되어버린 우리들은 10년의 세월이 가져다준 주름과 더불어 여유있는 웃음을 가지게 되었기에 함께하는 그 여행이 우리 셋 모두에게 큰 의미였던거 같다.
대학원공부를 시작하고 학부시절부터 믿음의 시선을 거두시지 않으셨던 강태경교수님과 도서관올라가는 길 카페에서 커피 한잔씩을 받아들고 나무둥지에 자리잡고 앉았던 날이 기억난다. 학부졸업후 4년만에 찾은 제자를 누구보다 반겨주셨던 분. 꿈 프로그램에서 완성한 내 나름의 10년 계획을 들으시고 응원해주셨다. 내가 현대영미희곡때 받은 감회를 되새김질 하노라니 그저 삶을 배움에 대해 갈구했던 제자를 떠올려주셨다. 이젠 교수에 대한 ‘반드시’라는 욕심없이 내 길을 가면서 시작한 공부를 그래서 더 훌륭하다 해주셨다. 배움의 삶이 얼마나 근사한 것인지 보여주시는 분이다.
몇차례 등단 시도가 실패로 끝나고 마침내 출간된 나의 책에 나의 성장을 지켜봐오셨던 분들의 추천사를 받아든 순간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예전에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성장하고 있는 까닭이었다. 아슬한 줄을 발가락 끝에 잔뜩 힘을 주고 옮겨가고 있는 자식을 행여나 떨어지면 밑에서 받아주기라도 할 요량으로 염려와 지지어린 시선으로 지켜봐주신, 그래서 덜 불안한 발걸음을 옮기게 해주신 분들에게 인사드리는 기분이랄까. 이루어낸 책이라는 성과물 때문이 아니라 내 30대를 불안하지만 내색않고 믿고 지켜봐주셨음에 대한 벅찬 감사의 눈물이었음을 아셨을는지 모르겠다. 그랬다. 30년 살아온 것보다 더 한 일이 많았던 10년이었고, 내 마음에 무엇보다 솔직했고 내 스스로에게 냉정하고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았던 10년이었다. 마지막 매듭을 짓고 가리란 욕심에 놓지 못했던 학교 업무로 늦게 잠든 밤에도 그 다음날 있을 학원수업 준비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던 그 갈등의 순간은 지금도 생생하다. ‘오늘 하루만 그냥 고개 숙이고 발표말자. 그럼 2시간 더 잘 수 있어. 산다는 게 뭐 별거 있다고 이렇게 힘겹게 일어나야해? 이러다 건강해치면 다 소용없어‘ 하지만 많은 고민끝에도 어느 꿈하나 버리지 못한 것은 나였고 그게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내야 했다. 몇초도 되지 않을 순간에 이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고 마침내 갈등은 종지부를 찍고 나는 힘겹게 일어나 아직도 푸른빛인 창가에서 기지개를 켰었다. 나를 더 이상 변명하지 말자. 아무리 남들 눈에는 위험해 보일지라도 진정 혼을 담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을거라고 믿자는 각오로 아침 공부를 시작했고 그렇게 지내온 10년. 29세 늦가을, 29라는 그 숫자를 제목에 달아주신 김달국 선생님과 그 분의 손에 이끌려 가게 되었던 꿈프로그램에 너무 감사한다. 멘토는 물론이고 내 평생의 꿈벗이 된 이들, 그리고 지난 10년간 많은 지침서들로 나를 버티게 해주시고 응원해 주신 구본형 소장님이 아니었더라면 아마 나는 꽤나 다른 길에서 선택의 문제를 놓고 여전히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 주 열린 카페 오픈식에 이들만을 초대했던 것은 표현 미숙한 나만의 깊은 감사였었다. 그러지 않아도 작은 카페가 그들의 존재감으로 너무도 작아보였고 그리고 너무도 따뜻했었다. 아 그 까페를 열때 장소물색부터 도와준 남편, 10년전 나의 진로고민을 불확실함속에서 믿어주고 10년간 가장 큰 응원자였던 그에게도 깊이 감사한다.
이제 마흔이다. 나는 다음주 뉴욕으로 홀로 여행을 떠난다. 실은 공항에서 맞아도 되지만 뉴욕이 너무 그립고 카페에 필요한 소품 구입차 3일 이전에 가기로 했다. 한국에서 공연하게 된 프랑스 극단에서 영국 배우 때문에 영어, 불어, 한국어 통역이 동시에 필요했던 차에 연락이 와 같이 입국하면 오는 길에 친숙도도 높이고 한국에 대해 더 좋은 정보까지 주면 좋지 않겠냐고 설득해 그들의 입국 날짜 3일전에 가기로 한 것이다. 벌써 설렌다. 10년 전 여름에 그랬듯 나는 4시간은 족히 걸어도 아프지 않을 편한 운동화를 제일 먼저 가방에 집어넣을거다. 첫 등단은 소설이었지만 작년에 나온 책은 패션, 연극 분야전문의 최소 3개 국어 이상의 통역가일에 관한 것이어서 이 분야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모으는 온라인상의 공간을 만들고 앞으로의 10년간은 이 분야에 대한 어학원을 추진하는데 많은 시간이 할애될 듯하다. 참으로 멋진 세상이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내 눈앞에 있는 책장에 내가 쓰고 번역한 책이 다섯 권이나 꼽혀있고, 외국어 세 개를 자유자재로 하고, 자그맣지만 너무도 편안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 회고를 쓸 수 있을 줄이야 짐작이나 했던가. 똑같았던 24시간이 2박 3일간의 짧은 시간을 통해 전혀 다른 질의 24시간이 되었고 내가 원하는 10년을 만들게 했다. 이젠 한치의 의심없이 꿈의 힘을 믿는다. 함께 해주는 가족과 벗들와 스승들의 감사함을 안다. 진실되게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두려움없이 그 길을 따라가고, 함께 가는 이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자신에게 웃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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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주
'내 "획기적이고";;; 소중한 생각을 누가 가져가면 어떻하나'라는 우물안 개구리마냥 철없는 밑바닥 심보를 꿈벗이란 이름으로 깨주셨기에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었고, 2박 3일간의 시간동안 생각의 나눔으로 그 이름의 참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홈페이지에 올리는 것의 의미도 이제야 알게 된 듯 합니다. 다시 속세^^의 생활이 시작되고 밤낮으로 생각을 다듬고 더듬어 가고 있는데 여기에 아직 올릴 만큼으론 부족한 듯 합니다. 글을 올리려면 그만큼의 단단하고 선명한 그림이 마음속에 그려져야 가능함을, 다름 아닌 그것을 과제로 주셨음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제 꿈을 먼 구름이 아니라 눈 앞에 그릴 수 있도록 해주시고, 그 꿈을 향해 어슬프나마 한발 내딛게 해주시고, 그 걸음 지켜봐주시고 함께 가주시는 분들..너무 감사드립니다. 멋진 하루 되세요!!!
VR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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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영갑 / 1957 ~ 2005 ![]() | 걷기 | 2007.02.25 | 6281 |
165 | 나의 10 대 풍광 - 2007년 정월 version [25] | 구본형 | 2007.02.22 | 6927 |
164 | 다시 쓰는 "꿈의노래" [6] | 이은미 | 2007.01.25 | 43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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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 | 놓칠수 없는 나의 꿈, 나의 인생 [6] | 유동식 | 2007.01.20 | 4547 |
159 | 내 꿈의 첫 페이지(ver.0.8) [7] | 엄승재 | 2007.01.16 | 38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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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 | 나의 직업 나의 미래 -version 2.6 [6] | 자로 | 2007.01.03 | 4449 |
156 | 2007년 나의 직업 나의 미래 version 3.0 [4] | 자로 | 2006.12.14 | 4225 |
155 | 나의 직업 나의 미래 version 2.5 [4] | 자로 | 2006.11.06 | 4286 |
154 | 꿈 벗 재단 브리핑 - 두 번째 [2] | 자로 | 2006.10.31 | 4143 |
153 | -->[re]여러분의 기질과 재능과 경험을 먼저 기부하세요 [6] | 구본형 | 2006.11.04 | 4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