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재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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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하늘에는 몇 개의 달이 떠 있습니까?
*이미지 출처 www.yes24.com
지난 주말에는 <변화경영연구소>의 전체 총회가 있었다. 구본형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이후에 이 연구소를 어떻게 이끌어나갈 것인지에 대해서 전체 연구원들이 모여 진지한 토의와 회의의 과정을 가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시켜서 온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자발적으로 시간을 내어 주말의 황금 같은 시간을 쪼개 모였다. 회의와 토론의 자세들도 진지하고 성숙했다.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이 또한 서로 다른 의견임을 이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큰 소리로 소리쳤을 나는, 이번 총회만큼은 약간 멀리서 보고 싶었다. 직접 의견을 내어 참여하는 것보다 어떠한 의견이 모아지를 보는 것도 짜릿한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들고 갔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였다. 1권과 2권은 출판 되자마자 읽었는데, 두 권 이후 약 일 년만에 출간된 3권은 나오자마자 사놓고 읽지 않은 터였다. 나는 다른 책도 아닌,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왜 굳이 연구원 전체 총회에 들고 간 것일까. 내 자신의 선택을 나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변화경영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총회에 왜 소설책을 나는 들고 간 것일까.
이 책은 우선, 낭만과 환상, 특유의 사랑이야기로 팬들을 매료하는 하루키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하루키의 소설은 일단 쉽고 가독성이 있기 때문에,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 일 때문에 독서를 짬짬이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책읽기를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선생님의 부재로인해 혼란한 시기에 어쩌면 나는 무언가에 몰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 한가지 하루키의 특징을 들자면, 등장 인물들이 소위 '쉬크(chic)'하다. 지지리 궁상을 떠는 법이 없다. 인물들은 잘 살거나 못살거나, 혹은 직업이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자기애가 충실하고, 현실에 대해서 그리 비관적이지 않다. 자신의 운명을 잘 받아들인다.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라고 하는 법이 없다. 그저 받아들이고 행동한다. 이런 인물들은 독자로 하여금 과잉 감정을 소비하지 않게 한다. 즉, 소설에 있다가 현실로의 복귀가 빠르다는 뜻이다. 여행 중에 읽기에 딱 좋은 소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매력이다.
이 소설은 헬스클럽 매니저이면서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30대 여성 '아오마메'와 대학 입시학원 수학강사이면서 소설가 지망생인 '덴고'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루키는 초등학교 동창인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각 장마다 번갈아 교차 서술한다. 이 주인공들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스피드한 전개와 디테일한 장치들이 압권이다. 잔인한 행위를 일삼는 일본의 신흥 종교에 노출되어 생명을 위협받는 두 사람의 존재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아모마메와 덴고의 사랑. 나는 문득 총회에 참석하기로 결정하면서, 그들의 한 번도 나누지 못한 아련한 사랑을 떠올렸다. 그들은 1Q84라는 가공의 시간에 공존하면서, 하늘에 떠있는 두 개의 달을 보며 서로를 그리워한다. 2권의 마지막 장을 읽어 내려가며, 나는 문득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몇 개나 떴을까. 사랑하는 우리는 과연 서로 같은 달을 보고 있는가. 어렸을 적부터 신흥종교의 폭력 속에 살아야만 했던 한 소녀와, 수학천재로 주위의 주목을 받았던 한 소년. 그들의 순수한 사랑은 1Q84라는 시간 속에서만 하나의 달을 볼 수 있다. 현실의 세계와 1Q84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사랑인 것이다.
이들의 사랑을 보며 문득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 사랑이었다'는 아오마메의 말이 떠올랐다. 의식하지 못했을 뿐, 눈치 채지 못했을 뿐, 사실은 같은 달과 별을 바라보았던 소중한 만남과 인연들, 그리고 잊혀 지지 않는 기억들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암살자로 일하는 아오마메, 작가 지망생 덴고가 서로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머뭇거렸던 추억을 각기 다른 세계에서 기억한다. 잠깐의 일을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품은 것이다.
나 또한, 구본형 선생님과 잠깐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 감동을 가슴에 품었을 지도 모른다. 마치 아오마메와 덴고의 잠깐 동안의 추억을 서로 간직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달을 보지만, 결국엔 1Q84에 같은 달을 보고 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그 달을 보기를 갈망한다. 나 또한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여러 가지 삶의 자세를 서로 다른 달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 그리고 휴식시간 내에 짬을 내어 이 책을 읽어내려 갔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그들의 사랑. 그리고 돌아가신 선생님을 그리워하며 주말에 모여든 연구원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연구원들의 토론은 더 없이 진지하고 순수했다. 총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1Q84의 시간으로 들어가는데 배경이 된 음악인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의 볼륨을 높였다.
택시 라디오에서는 FM방송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곡은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 정체에 말려든 택시 안에서 듣기에 어울리는 음악이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 음악이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는걸 금새 알았을까. 아오마메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리고 어떻게 나는 그것이 1926년에 작곡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걸까.
그녀는 딱히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아니었다. 야나체크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곡의 첫 소절을 들은 순간부터 그녀의 머리에 여러 가지 지식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열린 창으로 한 떼의 새가 방안에 휘익 날아든 것처럼. 또한 그 곡은 아오마메에게 뒤틀림 비슷한 기묘한 감각을 몰고 왔다.
아픔이나 불쾌함은 없었다. 단지 몸의 모든 성분을 자근자근 물리적으로 쥐어짜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아오마메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신포니에타>라는 음악이 내게 이런 불가해한 감각을 물고 온 것일까.
"야나체크." 아오마메는 무의식중에 말했다.
말한 뒤에야 이런 말은 하지말걸, 하고 생각했다.
"뭐라셨죠?"
"야나체크. 이 음악을 자곡한 사람."
- 무라카미 하루키 <1Q84>중
꽉 막힌 고속도로 차 안에서 야냐체크의 <신포니에타>를 들은 것은, 어쩌면 나 또한 사랑하는 덴고를 기다리는 아오마메가 되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동네 학교 운동장에 나갔다. 하늘에는 허옇게 달이 떠 있었다. 분명 한 개의 달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디선가 저 달을 보고 계실 구본형 선생님을 생각했다. 아오마메와 덴고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달을 품고 있었지만, 결국엔 같은 달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듯이. 이렇게 아름다운 책 한권을 읽고, 음악을 듣고,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열정과 감사의 마음이 충만한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인생이 그저 흐르는 대로 살고 있지 않는 것을 느낀다. 내 안에 운동장 너머로 떠 있는 저 달이 어느새 가슴속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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