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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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저널은 추수가 끝난 뒤 이삭을 줍는 것과 같다.
저널을 쓰지 않았더라면 들에 남아서 썩고 말았을 것이다.
먹기위하여 살 듯, 저널을 쓰기 위하여 산다면 환영할 만한 삶은 아닐 것이다.
내가 매일 저널을 쓰는 까닭은 신들을 위해서이다.
저널은 우편 요금 선불로 내가 신들에게 날마다 한장 씩 보내는 편지다.
나는 신들의 회계 사무소에서 일하는 회계원이다.
밤마다 일일 장부에서 원부로 그날의 계산을 옮겨 적는다.
저널은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길 가의 나뭇잎 이기도 하다.
가지를 붙잡아 잎사귀 위에 내 기도를 적어 놓는다. 그리고 나서 그 가지를 놓아준다.
가지는 제자라로 돌아가 잎에 적힌 낙서를 하늘에게 보여준다.
저널을 내 책상 안에 고이 간직해 두지 않았더라면 나뭇잎과 마찬가지로 만인의 것이 될 수도 있다.
저널은 강변에서는 파피루스 같고, 초원에서는 푸른 서판 같으며, 언덕에서는 양피지 같다.
가을 날 길을 따라 떼지어 손을 흔드는 잎사귀들처럼 어디에서나 값없이 얻을 수 있다.
까마귀나 오리, 독수리가 펜에 꽂을 깃촉을 물어다 준다.
바람은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잎을 흔들어 댄다.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지 않을 때에는 흙탕과 진흙 속을 더듬어 갈대로 글을 적는다.
이 글은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글이다.
소로우는 1937년 10월 22일 부터 1961년 11월 3일 까지 매일 저널을 기록하였다.
그가 이렇게 적은 저널의 양이 공책으로 무려 39권.
그는 1962년 5월 6일 콩코드에서 사망하여 슬리퍼 할로우 공원 묘지에 묻혔다.
주옥같은 글이라는 말이 있다.
소로우를 설명할 때는 그가 이미 정리하고 발표한 글로 옮겨 적는 것이 최선인 듯 하다.
그는 1940년 7월의 저널에
"하루의 조수여, 파도가 해변에 모래와 조개를 남기듯이 이 일기장 위에 퇴적을 남겨다오. 그리하여 나의 육지를 키워다오."
그러니 이 저널은 "그의 영혼의 물살이 오고간 달력" 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책상 위에는 나탈리 골드버그, 윌리암 진서, 조지 오웰, 줄리아 카메룬, 스티븐 킹, 데릭 젠슨, 타치바나 다카시까지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책이 차고 넘치게 쌓여있다.< 죽기전에 유명 작가 되는 법>이란 책도 있다.
그 많은 말들이 합창하는 말 중에 "모델복을 필사하라"는 후렴구가 있다.
필사필사필사필사필사.....
필사 속에 내 글은 더 쫄아들고, 반복해서 필사를 하다보니 그만 그 글들이 외워져버려
내마음인지 그의 마음인지 내 글인지 그의 글인지 마구 헷갈린다.
피천득도 옮기고 공선옥도 옮기고 박완서도 김연수도 김영하도 조정래도 신경숙도 필사한다. 물론 부분만.
그러나 내 마음의 풍금은 언제나 다른 소리를 낸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
내가 존경하는 사람들이 존경을 하는 작가이니 이미 할아버님 작가이시다.
그러나 나도 이사람의 글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그의 글을 옮겨 적어 보았다.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고 나는 또 당신을 생각해요."
아아, 그 당신, 오늘 같은 날씨에는 정말 스트레스다.
영혼의 물살이 오든 가든 오고 가지말든, 달력이 채워지든 말든
나는 내가 모델로 삼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와 이젠 그만 헤어지고 싶다.
소로우 처럼 쓰지 말고 나처럼 쓰고 싶다.
나, 말이다. 완전 무명에 , 완전 초보에, 출간 기획서도 두려워서 남에게 못 보여주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나.
나의 소심 문체.
그러나 한때는 싸부의 칭찬을 받았던 이 조근조근 무릎체로 공책 40권을 채우고 싶다.
그러나 그 전에 나도 한번 통곡장으로 나가야 겠다.
내 맘대로 안되는 내 글의 운명에 조의를 표하러 말이다.
학생 시절,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Walden 중에 Solitude 부분을 무슨뜻인지도 모른채 달달달 외워서 시험때 무작정 써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때는 그렇게 빠져있던 이 책에 약 10년 전, '왜 그렇게 좋아했지?'라며 홱 하며 돌아섰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도 책을 받아을일만한 시기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여드름 나던 시절, 모르는 단어를 찾아가며 연습장에 한 문장 한 문장 적어내려갔던 Walden을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지금, 다시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이제는 Walden 호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회사 근처의 석촌호수가 더 중요한 것임을 알고 있기에,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또 다르겠지요.
콩두야....
좀 있다가 <달려랴 작가야> 나 가려구....
그 전에 소로우,,,한편 더 보내줄게. 좋은 하루.
소로우의 일기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하여 살았는가?
소로우가 숲 속으로 들어간 것은 삶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고, 오직 삶의 본질적인 문제에 직면하며, 삶이 가르쳐 줘야하는 것을 내가 배울 수 없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할 때 내가 헛되게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처럼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삶이 아닌 삶은 살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삶을 체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삶을 깊이있게 살기를 원하였고 , 삶의 골수를 모두 빨아먹기를 원하였으며, 스파르트 인처럼 강인하게 살아서 삶이 아닌 모든 것을 내쫓아 버리고 싶었다. 풀밭을 넓게 베어 내고 털을 짧게 깎듯 철저히 노력하고 삶을 한구석으로 몰고 가 최소한의 요소들로 축소해 버린 뒤 , 만약 그 삶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 보잘 것없음 그대로를 진정으로 체험 하여 세상에 알리고 , 반대로 삶의 숭엄함이 드러나면 그것을 그대로 체험하여 다음번의 세상 여행때 그것에 대하여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악마적인 것인지 신의 것인지 이상하게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중요한 목적이 "영원히 신을 찬미하고 신으로부터 기쁨을 얻는 것" 이라고 다소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우리는 아직도 개미처럼 비천하게 살고 있다. 우화를 보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개미에서 인간으로 변하였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난쟁이 부족처럼 학들과 싸우고 있다. 그것은 착오에 덧붙인 착오며 누더기 위에 덧기운 누더기다. 우리의 최고의 덕은 쓸모없고 피할 수 있는 불행의 경우에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삶을 사소한 일로 흐지부지 헛되게 쓰고 있다. 정직한 사람은 셈을 헤아릴 때 열 손가락 이상을 사용할 필요가 거의 없으며 , 극단의 경우에는 발가락 열개를 더 사용하면 될 것이고 , 그 이상은 하나로 묶어 버리면 될 것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일기> 중에서 옮겨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