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땟쑤나무
- 조회 수 1990
- 댓글 수 17
- 추천 수 0
김상무의 책상 위. 몇몇 서류와 노트북, 그리고 필기구 몇 개.
아침 일찍 출근했지만, 딱히 할 일이 없는 그이다. 벌써 3개월째.
회사에 매일 출근하고 있지만, 특별한 일은 없다.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여기 저기 기웃거리거나, 누군가의 업무를 땜빵하거나 조언하는게 전부다.
얼마 전까지 정식임원이었던 그는 석달 전 1년 계약으로 회사와의 관계를 갱신했다. 타이틀은 고문.
정체되어 있는 회사가 변화를 주기 위해 구조조정을 실시한 것이다. 경영진과의 원만한 관계, 평소 회사 생활의 성실함으로 그나마 이정도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저런 상념에 사로 잡혀 있을 즈음, 저 앞에서 배나온 김부장이 터벅터벅 걸어온다.
"상무님 뭐하세요?! 아, 이제 고문님이라고 불러야지요? ^^ 지금 뭐 할거 있으세요 고문님?'
"아니, 별다른거 없네만, 왜? 도와줄거 있나?"
"네, 사실 좀 부탁드릴게 있는데요.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잠깐 외근 좀 나갔다 와야하는데, 일본에서 찾아올 손님이
있어서요. 죄송한데 고문님이 잠깐 응대 좀 해주시면 안될까해서요. 고문님 일본어도 좀 하시니까."
"어?! 어.... 그..래. 내가 잠깐 만나면 되지. 언제쯤 오는데?!"
"30분 뒤에 올꺼에요. 금방 갔다올테니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고문님!"
또 김부장 저놈이다. 저놈은 툭하면 나에게 부탁한다. 타이틀이 고문이기는 하지만, 나름의 영역이 있는 법인데,
저 놈은 그런 개념이 없다. 그저 잉여인력이겠거니 생각하고 나를 자신의 전담 땜빵맨 정도로 생각하는 듯 하다.
하기야 말이 고문이지, 특별한 프로젝트도 없고, 남의 일 땜빵해주는게 맞지....
김고문의 책상은 허전하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그와 비슷하다.
투둑투둑 투투투두둑.... 쏴..쏴..... 귓가를 건드리는 소리들. 빗소리일까. 눈을 떴다.
흐릿한 듯 선명한 이미지. 마치 미래의 나의 모습을 보는 듯 한 장면들. 꿈이었구나.
잠시 잠깐의 잠에서 깨어났지만 밤은 더욱 더 깊어져 있다. 그나마 시원하게 내리는 비가 불안정한 내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스탠드 불빛 아래 펼쳐져 있는 책, 삼국 유사. 13세기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쓴 삼국시대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충신 박제상의 죽음, 김유신과 김춘추, 한단지몽과도 같은 조신의 꿈, 죽지랑과 득오, 원효와 의상.......
책을 읽으며 유난히 오래 가슴에 머물렀던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바로 죽지랑과 득오 그리고 익선의 이야기였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기가 오면서 전쟁영웅이었던 화랑들의 입지가 무너지고 무시당하는 이야기,일종의 토사구팽이다.
쓸모가 있으면 부름을 받고 쓸모가 없으면 버림을 받는게 인생이라지만, 조금은 씁쓸한 인생의 단면, 인생무상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현대판 토사구팽격인 김상무가 내 꿈에 나타났다. 하지만 죽지랑과 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에 가슴한켠 여전히 씁쓸하다. 그래서 나는 꿈의 결론을 바꾸어보고 싶어졌다. 나는 다시 책상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김상무가 노트북을 펼쳤다. 그리고 노트와 펜을 꺼내들었다. 어차피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그였다.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는 조직과 직원들을 유심히 관찰하기로 했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때론 활기차게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고 때론 노트북에 무언가를 적기도 했다. 직원들은 도대체 김상무가 무얼 저리 열심히 하는지 궁금해 했지만, 그에게 별다른 얘기를 건내진 않았다.
얼마나 흘렀을까. 직원들은 김상무로부터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개인적인 안부의 편지이기도 하고 때론 업무적인 조언을 담은 편지이기도 했다. 평소 글 쓰기를 좋아 했고, 사람들의 고민상담을 즐겨 해왔던 그였다. 오랜 시간 직원들을 지켜봐온 그였으니, 직원들의 마음을 읽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편지들 매일 한통씩 꾸준히 쌓여만 갔다.
하나 둘, 직원들이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하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조금씩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듯 싶었다. 그리고 곧 직원들 사이에서 그가 보내는 편지가 화제가 되는가 싶더니, 회사 전체로 퍼졌다. 그렇게 하기를 6개월. 그계약 만료 시점이 다가왔지만, 경영진은 그와의 계약을 1년 연장하기로 했다. 그의 편지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도 좋았고, 업무적으로도 활용할 아이디어들이 제법 나왔기 때문이다.
김상무는 늙어 쓸모가 없어진 사냥개였다. 그리고 주인에게 먹힐지도 모르는 운명에 쳐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관심사를 자신의 상황에 맞게 구체화하였고, 실행하였다. 그리고 주변의 호응을 끌어냈다. 이제 한동안은 토사구팽 당할 처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김상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