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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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화두
9기 유형선
삼국유사를 읽고 있다. 너무도 유명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은 불교를 국교로 했던 고려시대에 임금의 바로 곁에서 국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승려였다. 스스로 말년에 지은 '일연'이라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 읽다 보니, 고이 기억하고 싶은 대목이 있어 정리해 본다.
일연의 어린 시절 견명(見明)이었다. 세상을 밝게 보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 다시 보아도 참 예쁜 이름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와 함께 자라던 일연은 9살부터 절 밥을 먹다가 14살에 승려가 된다. 승려로서의 처음 이름은 회연(晦然)이었다. 晦 - 어둡고 희미하고 어리석다는 의미의 회, 然 그러할 연. 세속의 이름과 정반대의 의미를 이름으로 받으면서 일연의 깨달음을 위한 노력은 용맹하였으리라.
일연이 21세에 승과에 합격한 후 여러 사찰에서 머무른 시기에 고려의 사회는 혼란기였다. 최충헌, 최우 등의 무신이 정권을 잡았던 때였고, 또한 대몽 항쟁기였다. 이때 그가 속해 있던 가지산문은 무신 정권에 대한 항쟁과 그들에 의한 핍박으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일연은 9살 때 부터 무려 20여년을 산속 절에서 보내면서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한 결과 32세 때 포산 무주암에서 <생계불감 불계불증 (生界不減 佛界不增: 중생의 세계는 줄어들지 않고, 부처의 세계도 늘어나지 않는다)> 을 화두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삼국유사 전문가 고운기 교수는 '일연'이라는 이름에 불교의 깊은 진리가 숨어 있다고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에 기록하고 있다.
"일연은 처음 이름이 견명(見明)이었고, 불교의 이름을 회연(晦然) 이라고 지어, 밝음과 어두움을 대조시켰다. 옛 사람들이 이름 다음에 자를 지을 때 흔히 하는 방법이다. 그러다가 만년에는 이 둘, 곧 밝음과 어둠을 하나로 보겠다는 뜻에서 새로운 이름에 일자를 넣었다. 밝음이 어두움이요 어둠이 곧 밝음이며, 어둠과 밝음은 종국에 둘이 아닌 하나라는 불교의 깊은 진리가 일연의 개명 과정에는 숨어 있다."
일연의 화두는 ‘중생의 세계는 줄어들지 않고 부처의 세계는 늘어나지 않는다’는 문장이었다. 아무리 도를 닦아도 중생의 세계는 줄어들지 않고, 아무리 도를 닦아도 부처의 세계는 늘어나지 않는다면, 결국 도를 닦는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묻는 화두이다. 밝음의 세계와 어두움의 세계, 이승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가 결국 한 가지라는 깨달음, 요컨대 두 가지 이분법의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통합의 시각"을 얻은 깨달음을 고려의 선승 일연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삼아 고이 간직하려 하였다.
올 해를 시작하며 내 스스로 다짐했다. ‘나 스스로를 혁명 하리라!’ 2013년 7월, 올해도 벌써 하프라인을 돌아 가고 있는 오늘, 나 자신의 일상을 바라본다.
하루 하루 갈수록 직장인으로 살면서 스스로를 깨우치며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직장은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새로움은 늘 또 하나의 파괴에서 출발해야 하기에 호락호락 하지 않은 법이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를 기다려 가며 보아줄 직장은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이 꿈의 직장으로 이야기하는 구글이나 제니퍼소프트 같은 직장문화는 병풍에 그려진 예쁜 꽃처럼 보기는 좋지만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나 내 인생을 직장이 대신 살아주는 것 아니지 않는가? 평생직장이란 말도 사라져버린 지금, 홀로 서기 위해 내 자신을 변화시켜야 하는 현실 또한 하늘에 떠 있는 태양처럼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존재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결국 혁명의 출발은 '나'를 찾는 여정으로 발을 들이는 길이며, 이것은 인문학이 추구해 온 길이기도 하다. 이런 길을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 불러 본다. 내면의 또다른 자아가 비웃는다. 경쟁사회이며 약육강식의 자본질서 속에서 한가한 신선놀음을 하고 있을 때냐고 묻는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내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삶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삶이냐고 되물어 본다. 이른바 자고 먹고 일하는 고단한 현실이 곧 나를 찾고 나를 사랑하는 길이 될 수는 없는가 묻는다.
부처가 되는 길과 인문학의 길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면 듣는 이가 웃을 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인문학을 좋아하여 가까이 지내온 나에게는 그리 다른 말로 느껴지지 않는다. 부처의 길도, 인문학의 길도 모두 내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이라 여겨진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평생 추구할 나의 화두이다.
2013-07-08
坡州 雲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