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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8일 11시 04분 등록

No15.

2013.07.08

글쓴이: 오미경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삼국유사.jpg

 

밝음에서 태어나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그대의 운명

밝음과 어둠은 결국은

하나임을

 

그대는

과거는 과거가 아니고

현재는 현재가 아니고

미래는 그저 미래일뿐.

과거와 현재 미래는 결국 하나임을

 

죽음이 죽음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삶이 삶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거늘

삶과 죽음 또한 하나라는 것을...

 

 

Ⅰ. 저자 일연에 대하여

 

1-1. 일연이 태어나던 역사적 배경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년경)가 만들어진지 100여년이 지났다. 삼국사기는 고려 전기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은 사대부士大夫이다. 한자유입으로 중국문화가 송두리째 들어오면서 중화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나라의 정권인 한족의 멸망과 변방이라고 일컫는 몽골이 ‘원元’ 나라를 건국했다. 이는 세계관의 혼란과 사회가치관을 흔들었다. 이런 중국의 격변속에 고려 문신 귀족들의 차별에 불만을 가진 무인들이 정권을 잡은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1-2. 나 일연의 비문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1706년, 이계 홍양호가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내려왔다. 부임지에 도착한 그는 경주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의홍(지금의 군위) 현감에게 인각사에 있는 일연 비문의 탁본을 부탁했다. 부탁받은 현감은 인각사가 폐사되어 탁본할 길이 없다고 회신을 보냈다. 홍양호는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절이야 불타 없어졌지만 돌로 된 비석마저 없어졌겠느냐며 자기 수하의 아전들을 시켜 온 산을 뒤지도록 했다.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는 엄명과 함게, 아전들은 열흘만에 돌아와서 아뢰었다.

 

깊은 산과 오래된 절을 가보지 않은 곳이 없으나 끝내 인각사라는 절은 찾지 못했습니다. 우연히 도착한 어느 산에 신라 때의 폐사가 있었습니다. 승려에게 오래된 비석이 있는가 물었더니, 승려가 불전의 마루 밑에 동강이 난 비석 파편들이 있는데 그걸 말하는 게 아니냐고 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끄집어내어 보니 오래된 비석이었습니다. 물로 씻어 자세히 보니, 희미하게 ‘인각(麟角)’이라는 두 글자가 보였습니다.

-홍양호, ‘이계집’ 권16, ’제인각사비‘

 

홍양호는 매우 기뻐 탁본하는 사람을 보내 세 벌을 얻었다. 그러고는 비석이 훼손된 것은, 탁본하는 심부름으로 고통 받던 승려들이 부수어 감춰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승려들이 동강내어 불전 밑에 버렸으리라는 비석, 이것ㅎ이 바로 ‘고려국 의홍 화산 조계종 인각사 가지산하 보각국존비’이다. 나 일연의 삶을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다.

 

81세를 일기로 인각사에서 삶을 마친 일연, 그래서 그곳에 세워졌던 비문은 18세기 중엽에 이르게 되면 이렇듯 심하게 훼손된 채 컴컴한 절간 마루 밑에 나뒹굴고 있었다.

 

1-3. 나의 비문이 왕희지 글씨로 집자集子된 이유

 

 

인각사 비문의 글자. 그런 바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集子)하여 새긴 명필이었기 때문이다. 나 일연의 삶은 왕희지의 글자를 정성껏 비석에 새겼던 것인데, 당대 불교계에서 국존으로서의 차지하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일연은 원나라 압제기인 충렬왕 시절 불교계의 최고 자리인 국존에 오른 대단한 승려였다. 그리고 그런 지위에 걸맞게 충렬왕은 나 일연의 한 평생을 최대한 호화롭게 장식하여 비석에 새기도록 분부했던 것이다.

 

 

1-4. 왜 나 일연의 비문이 절간 마루 밑에 버려진 이유

 

조선시대 사대부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도 왕희지의 글시를 집자하여 새긴 일연의 비무네 지대한 괸심을 보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은 비석을 쓰러뜨려 놓고 마구 탁본을 해갔다고도 하고 중국에서 온 사신들은 으레 탁본을 요구해 돌아갔다고도 한다. 그러하니 힘깨나 쓰던 우리네 사대부들이야 말할 필요 있겠는가? 탁본하는 고역을 피하기 위해, 그 값진 비석을 동강내 감춰버렸을 승려들의 심정이 이해되기도 한다.

 

일연.jpg

 

1-5. 비문에 새겨진 나 일연의 초기 생애 -

나도 영웅의 탄생 과정을 그대로 거쳤단다

 

국존의 이름은 견명(見明)이고, 자는 회연(晦然)이며 나중에 일연(一然)으로 고쳤다. 속성은 김씨이며, 경주 장산군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김언필인데, 벼슬은 살지 않았지만, 스님 때문에 좌복야(左僕射)로 추증됐다. 어머니는 이씨이고, 낙랑군부인으로 봉해졌다. 처음에 어머니가 둥근 해가 집 안으로 들어와 배에 내리쬐는 꿈을 3일 밤이나 꾸었는데, 마침내 태기가 있더니 태화 병인년(1206년) 6월 신유일(11일)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준수하고 의표가 단정했으며, 굳은 입에 소걸음과 호랑이 눈을 가지고 있었다.

-민지, ‘보각극존 일연 비문’

 

비문의 첫머리다. 속명과 법명, 부계와 모계, 그리고 출생과 유년 시절이 차례대로 기술되어 있다. 어떤 연구자는 ‘견명->회연->일연’이라는 이름의 변화에서 ‘밝음(明)과 어둠(晦)의 대조’, 그리고 ‘밝음과 어둠의 아우름(一)’이라는 인식의 성숙 과정을 읽어내기도 한다. 흥미로운 착상이다. ‘밝음을 보았다’로 해석되는 ‘견명’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까닭은, 눈부신 해살이 배에 내리쬐는 꿈을 꾸고 임신했기 때문이다. 햇볕과 잉태! 이 같은 탄생설화는 고구려의 건국영웅 주몽을 낳은 유화의 신이한 사연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그녀도 유폐된 골방에서 햇볕을 쬐고 주몽을 잉태했다.

 

1-6. 출가이후 나의 생애

 

스님의 저서로는 ‘어록’ 2권과 ‘게송잡저’ 3권이 있으며, 편수한 책으로는 ‘중편조동오위’ 2권, ‘대장수지록’ 30권, ‘제승법수’7권, ‘조정사원’ 30권 드리고 '선문염송사원‘ 30권 등 1잭여 권이 세상에 나와 있다. 문인인 운문사 주지 청진이 스님의 행적을 적어 충렬왕에게 아뢰니 왕이 찬술토록 했는데, 나는 학식이 거칠고 얕아 지극한 덕을 펼치기에 부족한 까닭에 몇 년을 미루고 있다가, 요청은 그만둘 수 없고 명령은 거스릴 수 없어 삼가 이 서문을 쓰고 명을 짓노라.

-민지, ‘보각국존 일연 비문’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사찰 인간사에 지금도 동강난 채 서있는, 일여 비문의 마지막 대목이다. 일연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위의 대목을 보고 있노라면, 저술한 책만 봐도 예사 스니밍 아니었음을 깨닫게 한다. 1백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은 말할 것도 없고, 한 나라의 왕이 스님의 행적을 기리는 비문을 지어 길이 기리라는 명을 내렸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비문의 제목을 보니, 일연은 당시 불교계의 최고 정점인 국존의 자리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고려 11대 문종의 넷째 알들이었던 그는 출가한 뒤, 천태종을 고려에 열어 불교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일연도 그런 지위에 오른 고승이었다. 다만 원나라가 고려를 굴복시켜 자신의 휘하에 두면서, 나라의 스승인 ‘국사’라는 호칭을 원나라만 쓸 수 있으니 고려에서는 ‘국존’으로 바꾸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 것만 다를뿐이다.

 

1-7. 삼국유사로 이름짓게 된 과정

 

비범한 인물은 신이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는 것은 모든 영웅들의 탄생과정이며, 나 일연의 믿음이다. 나 일연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현실만이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질 수도 없는 또 다른 세계가 현실 너머에 엄연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세계관은 김부식이 표방했던 유가적 세계관, 곧 중세적 합리주의와 정면으로 맞선다. 그런 점에서 나 일연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배제해버렸던 비현실적인 사실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세계의 진실’을 새롭게 되살리고자 했다. 아니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빠뜨린 것을 수습한다(유사(遺事)고 했던 소극적인 차원을 훌쩍 넘어섰다. 신이한 세계를 입증하는 이야기를 광범하게 거두고 체계적으로 배치하여 김부식의 편협한 역사 인식에 맞서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국사기‘가 있음에도 ’삼국유사‘를 새롭게 썼던 진정한 이유다. 거기에 유가적 세계관과 불교적 세계관이 팽팽하게 힘겨루기를 하던 고려 후기의 시대적, 사상적 분투가 아로새져져 있음은 물론이다.

 

1-8. 내 삶에서 일어난 기이한 일화

 

나 일연이 깨달음을 경험한 때를, 비문은 1236년 그의 나이 31세였다고 알려 주고 있다. 그 한 해 전 가을, 일연은 마침 대대적으로 침공해 들어와 전국을 유린하는 몽고군의 말발굽을 피해 경상도 달성군의 비슬산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그 피해가 가장 컸다는 몽고의 3차 침입 시기였다. 나 일연은 문수 신앙의 수행법의 하나인 문수오자주를 염송하며 감응이 있기를 기다리며, 문수보살의 주문을 외우며 무사하길 빌었다. 그러자 정말 기적처럼, 문수보살이 벽 사이에서 나타나 피신할 곳을 일러주었다.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기는 다음 해 여름이었다. 청소년기의 월정사 경험과 장년기의 문수보살 체험, 이것이 오대산의 문수 신앙을 ‘삼국유사’에 감기고 싶은 개인적인 사연이었다.

 

 

1-9. 기이한 일화가 비문에 많이 생략된 이유

 

 

비문의 저본이 된 행장(行狀)은 제자 청분이 썼는데, 거기에는 나 일연이 생전에 보여준 신이한 행적이 매우 많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려의 중신이자 문장가였던 민지는 비문을 쓰면서 “(행장에는) 여러 이적과 기이한 꿈이 자못 많으나 말이 괴이한 곳으로 흐를까 두려워 줄이기로 한다”며 신이한 일들을 대거 생략했다.

 

1-10. 나는 어떻게 이야기들을 모았을까?

 

나는 승려다. 승려 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雲水行脚(걸음걸이각)이라고 한다. 나또한 거기서 예외일 수 없고, 그래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살았지만, 13세기의 혼란스런 고려 사회가 내 삶을 더욱 모질게 했다. 나는 내가 머문 지역에 전해 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 불교적인 것 괴에 단군 신화와 같이 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닥치는 대로 모았다. 나는 현대에서 말하면 민속학자였다. 96p

 

나의 특이한 기술벙법은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일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사건 하나로 한 왕대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118p

 

1-11. 일연의 시비가 있는 곳에는

 

일연이 임종을 한, 지금 경상북도 군위군의 인각사 앞에 일연 시비를 세운 것은 지난 1985년, 거기 이 시가 새겨졌다.(508p)

 

좋은 시간 금세, 마음은 어느새 시들고

근심은 슬며시 늙은 얼굴에 가득

이제 다시 메조 밥 짓다 깨닫던 이야기 들추지 않아도

수고로운 인생 일순간 꿈인 걸 알겠네.

 

 

Ⅱ. 삼국유사는 어떤 책인가?

 

2-1. 삼국사기는 어떠한 책인가?

 

삼국시대의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와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이다. 고려시대 들어서 글공부를 한 지식인들이 한문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사마천이 남긴 유명한 역사서 <사기>의 영향으로 자신들의 앞 시대인 고대사를 정리해서 책으로 펴내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삼국사기의 ‘사’는 史, 즉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탄생배경은 문자에 대한 자신감은 저술을 활성화시키는 촉진제다. 고려가 성립된 이후 그 앞 시대를 정리한다는 생각은 보편화되었고, 중국에서도 그랬다. 한문이라는 문자유입은 그 문화를 송두리째 가지고 들어왔다. 특히, 사마천의 <사기>역사서는 역사저술이라는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름도 사기에 기대어 김부식의 <삼국사기, 1145년>가 만들어졌다.

 

문자에 대한 자신감은 저술을 하게끔 하는 촉진제다. 1145년 고려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린 김부식이 인종의 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펴냈다. 이 책은 김부식 외에도 당대의 문장가 11명-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 김충효, 정습명-이 함께 참여했다. 문장이 화려하고 형식의 틀리 잘 짜인 반면, 중국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사대주의 색깔이 있다.

 

2-2. 삼국유사가 쓰여질 당시 시대적 배경

 

100여년의 세월(1250년경)이 흐르는 동안 고려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문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고 느낀 무신들이 무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다. 이전에는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문관들이 정치를 주도해 왔다. 무신정변이후 이제는 칼을 쥔 무신들이 왕까지 마음대로 주무르는 시대가 되었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어온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는 사건이 생겼다. 당에서 송으로 이어진 한족이 세상의 중심이라 믿어온 이들에게 송나라의 멸망과 원나라의 성립이다. 세상의 중심인 한족인 중국도 변방의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자,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며 우린 나라는 중국 변두리에 불과하다는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의 문화를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바뀌는 분위기였다. 그 새로운 분위기란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 민족에게도 고유한 역사와 전통이 있고 언젠가 세계 중심에 우뚝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우리가 중국과 다르지만, 이렇듯 여러 모로 변화가 심했던 시대에 태어나(1206년) 혼란스러운 일들을 두루 겪으며 살았던 일연은 우리가 바로 이 땅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런 주인 의식, 주체적인 시각이 <삼국유사>를 쓴 계기가 되었다.

 

2-3.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제목에서 알아보는 의미차이

 

삼국유사(三國遺事) 책 이름에 ‘유(遺)’는 ‘후세에 전하고 남기다, 잃다. 버리다’의 뜻이다. ‘사(事)’는 ‘사실이나 사건, 그 일의 흔적’을 의미한다. 흔히 생각하듯이 역사(歷史)할 때의 ’사(史)‘가 아니다. 그러니 풀이하자면, <삼국유사>란 제목은, 이미 지어진 역사책에서 빠졌거나 고려조에 와서 잃어버린 일들에 관한 기록이다.

 

2-4. 일연이 삼국유사로 이름 붙인 이유

 

<삼국유사> ‘기이紀異(실마리기, 기이할 이)’편 첫머리에 이런 말이 나온다.

“대체로 옛 성인들이 예악(禮樂)을 가지고 나라를 일으키거나 ‘인의(仁義)’를 가지고 가르침을 베풀고자 할 때면 괴이한 힘이나 귀신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일어나려 할 대에 하늘의 명을 받듣다든지 앞일을 예언하는 책을 받는다든지 반드시 남과는 다른 것이 나타난 다음 큰 일을 이룰 수 있었다. ”

 

중국의 역대 제왕들은 예사롭지 않게 탄생했다고 하면서 우리의 시조가 보통 사람과 달리 비범한 모습으로 태어나고 신이한 능력을 보였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히려 새로운 나라가 세워질 때는 큰 변화를 알려주는 신비한 현상이 생기는게 당연하다고 이를 역사에 기록하겠다고 당당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전에 나온 역사책 <삼국사기>가 빠뜨리니 역사적 사건을 수습하고, 역사 이면에 감춰져 있던 전래의 신화, 전설을 거두고 있으며, 잊을 뻔했던 승려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래서 일연은 자신이 쓴 책에 <삼국유사>라는 제목을 붙였다.

 

2-5. 삼국유사는 어떻게 쓰여졌나?

 

일연은 신이한 세계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 <삼국사기>보다 훨씬 다채로운 삼국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 과정에서 일연이 참고한 문헌은 대단히 방대했다. 중국과 우리의 저명한 전적을 두루 포괄하고 있다. 기타 고기(古記), 향전(鄕傳), 비문(碑文), 고문서(古文書)등까지 활용했다.

 

2-6.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이함과 황당함의 차이

 

<삼국유사>를 통괄하는 특징적 면모는 신이함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이한 이야기라고 해서 무조건 거두었던 것은 아니다. 다음 두 일화로 유추해볼 수 있다.

 

a. 원효 스님이 두루 다니며 수행했던 시말(始末)과 불법(佛法)을 널리 폈던 성대한 자취는 당전(唐傳)과 행장(行狀)에 갖추어 실려 있어 여기서는 싣지 않고, 오직 세속에 전하는 한 두 가지의 이상스러운 일만을 기록하겠다.

-<삼국유사> 권4, <원효불기>-

 

b. 사복(蛇福)이 세상에 응해서 이 일만을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속에서 황당한 말로 가탁(假託)한 것이 많으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삼국유사> 권4, <의해>, <사복불언>

 

a는 원효와 관련된 행적 가운데 세속에 떠도는 신이한 일만을 기록하겠다는 뜻이다. b는 사복과 관련된 행적 가운데 세속에 떠도는 황당한 일을 기록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신이함과 황당함의 분별! 내가 볼 때는 그게 그것 같은데 일연은 이를 엄연히 구분하고 있었다. 현실 너머의 세계를 거두고 배제하는데 일연만의 준엄한 가치판단이 작동하고 있었다.

 

신이함과 황당함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예로 들어보자.

 

지귀志鬼는 신라 때 활리의 말몰이꾼이었다. 선덕여왕을 너무 사모하여 비쩍비쩍 말라갔다. 사연을 들은 여왕은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만나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지귀는 약속한 날, 절의 탑 아래에서 선덕여왕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선덕여왕은 아무리 해도 깨어나지 못하는 지귀의 가슴에 자신의 팔찌를 얹어두고 궁궐로 돌아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그 사실을 알고 오래도록 번민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불이 일어나 탑을 돌다가 불귀신으로 변했다. 선덕여왕은 술사(術士)에게 명하여 주문을 짓게 했다. 신라 풍속에 이 주문을 문에 붙여 화제를 막았다 한다.

-<수이전>, 심화요탑-

 

 

수이전에 실려 있는 심화요탑의 전문이다. 마음의 불이 일어나 탑을 휘감았다는 뜻이다. 미천한 사내가 존귀한 여왕에게 연정을 품었다가 불귀신이 됐다는 결말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파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깊어 불로 변했다는 상상력, 아니 그 기이한 사연은 깊은 연민과 함께 신비로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일연도 <수이전>에 실려 있던 이런 이야기를 읽었음에 분명하다. 그리하여 지귀에 얽힌 이야기를 <삼국유사>에서 거두었다. 하지만 일연은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혜공스님이]이 어느 날 풀을 가지고 새끼를 꼬아서 영묘사에 들어가 금당과 좌우의 경루와 남문 회랑을 둘러 묶고 강사에게 일렀다. “이 줄은 모름지기 3일 후에 풀어라.” 강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따르니 과연 3일 후에 선덕여왕이 가마를 타고 절로 들어왔는데 지귀의 가슴에서 불이 나서 그 탑을 태웠으나 오직 줄을 묶은 곳만은 면하게 됐다.

-삼국유사 권 4. <의해>,<이혜동진>

 

선덕여왕 때 불로 변한 지귀의 이야기라는 점은 같지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전혀 다르다. 일연은 선덕여왕에 대한 지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나 마음의 번민이 깊어져 불로 변했다는 기이함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일연이 눈여겨보았던 기이함은, 고승 혜공이 보여준 이적(異蹟)이었다. 지귀가 불로 변해 탑을 태워버린 신이한 현상이 아니라 불이 날 것을 알고 예방법을 가르쳐준 혜공 스님의 신이한 능력에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연은 스님이었다. 그렇다면 일연이 주목한 신이함이란, 신이함 그 자체가 아니라 불교적 경이로움과 연결되어 설명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런 문제 의식을 가지고 편목 전체를 훑어 내려가보면,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불교적 시각에서 읽어야 함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

 

 

2-7. 삼국유사의 구성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이 즉위한 지 8년 되던 해, 1282년 전후로 보는 경향이다. 보통은 일연 스님이 살아 있을 당시에 처음 책으로 나왔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무극이라는 제자에 의해서 쓰여졌다는 주장도 있다. 혹은 1290년경에 일연에 의해 쓰여졌고, 곧이어 그이 제자들에 의해 출판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삼국유사>는 분명 10세기 까지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이나, 13세기 일연이라는 인물에 의해 재구성되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제 1편 왕력(王曆) 연대기로의 왕력이다. 왕력은 다섯 칸으로 나누어진 연표다. 삼국유사 전체 기술의 기반이 되는 부분이다. 중국, 신라, 고구려(후고구려), 백제(후백제)와 가락국을 다스렸던 왕들이 언제 태어나고 왕이 됐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록했다.

 

제 2편 기이(紀異) 준역사서이다. 신이한 사적(事蹟)에 관한 이야기다. 삼국유사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서 ‘기이’란 그 나라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줄기가 되면서 특별한 이야기를 의미한다.

서문에서 밝힌바, 우리에게 뿌리가 되는 나라와 왕들을 비록 기이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나 굳이 수록하겠다는 것, 그래서 단군 신화가 처음으로 문서상에 기록되었다는 데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신이한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종교적 영험을 설득시키기 위한 은밀한 전제가 아니었을까?

1권에는 단군의 고조선 시대부터 삼한, 부여, 고구려와 삼국 통일 이전의 신라가 어떻게 발전하고 멸망했는지를 왕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제2권에는 신라 분무왕부터 경순왕까지 신라에서 일어난 일과 백제, 후백제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실었다.

 

제 3편 흥법(興法) 불교의 흥기에 관한 이야기다. 불교문화사적 관점에서 당대인의 삶을 기록했다. 어려 어려움을 겪으면서 삼국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기록했다.

 

제 4편 탑상(塔像) 여러 절이 세워진 내력과 이름난 탑과 불상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놓았다.

 

제 5편 의해(義解) 세속오계로 유명한 원광법사를 비롯해서 원효대사와 의상 대사처럼 뚜렸한 발자취를 남긴 스님들에 관한 신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 6편 신주(神呪) 귀신과 주술, 즉 신통한 주술에 관한 이야기다. 지극한 정성으로 부처가 되거나

 

제 7편 감통(感通) 신비한 일을 겪는 사람들 그리고 부처의 감응에 관한 이야기다.

제 8편 피은(避隱) 은거해 숨어든 사람 이야기. 번잡한 세상을 피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누린 사람들 이야기다.

 

제 9편 효선(孝善) 부모님을 온 마음을 다해 섬긴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2-8. 삼국유사 기술상의 특징

 

첫째, 역사적으로 기록할 만한 왕들을 차례대로 기록하면서,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사건 한 가지씩을 묶어서 각 항목의 내용으로 기술했다. 예를 들면, 미추왕과 죽엽군, 내물왕과 김제상. 이런 식이다. <삼국유사>가 정식 역사서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으므로 가능했지만, 한 왕대에 여러 가지 복잡한 사건이 얽혀 있다고는 하여도, 그것을 특징적인 사건 어느 하나로 집약하여 정리해 주는 이 방식에서 일목요연한 흐름을 짚어보게 되고, 저자의 분명한 역사관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둘째, 책의 후반부에는 어떤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일연 개인적인 느낌이나 생각을 시(詩)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것을 ‘찬(讚칭찬하고 명확히 밝히고 기록하다)’이라고 하는데 일연의 뛰어난 문학성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사마천이 ‘사기’를 기술하면서 마지막에 ‘태사공이 말하건데’와 비슷한 면을 엿볼 수 있다.

 

2-9. 삼국유사의 독법

 

<기이>편에 단군의 유래를 배치했다. 환웅의 아들 단군은 환인의 손자다. 그런데 일연은 ‘환인’ 아래에 ‘제석’이라고 주석을 달아 그 정체를 분명하게 밝혀두었다. ‘제석’이란 ‘석제환인다라釋提桓因다羅’의 약칭으로 수미산 위의 선견성에 살면서 그 아래의 사천왕을 거느리고 불법과 불제자를 보호하는 하늘의 임금이다.

 

일연의 이런 독법에 의거한다면, 단군은 제석의 손자였으니 단군의 후예라 자처하는 우리들이야 굳이 부연할 필요도 없다. 아주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작은 주석 하나와 그것이 놓인 위치가 함의하는 위력은 예사롭지 않다. 삼국유사는 전반부에 <기이>를 배치함으로써 후반부에 서술될 불교적 경이를 납득하도록 만들고 있고, <기이> 첫머리에 단군 신화를 배치함으로써 불교의 세계 속에서 삼국의 역사를 읽도록 만들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유가적 합리주의에 의해 배제되어 버린 신이의 세계를 되살려냄으로써, 일연이 고려의 국존으로서 말하고 싶어했던 진정이자 절묘한 서사적 전략이었으리라.

 

2-10. 삼국유사의 한계

 

삼국의 역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나치게 신라쪽에 치우쳐서 기술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모든 문화가 신라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고구려나 백제의 이야기는 전해지는 게 드물었다.

또 일연 스님의 고향이 경상도였고 이 지역에서 오래 살았던 영향이다. 신라에 비해 북쪽 지역에 관한 내용이 너무 소홀하게 다뤄어졌다. 이 책에서 근거로 삼고 있는 여러 책들이 지금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든지, 또 끌어다 쓴 책의 기록과 맞지 않는 내용이 간혹 발견된다.

 

 

2-11. 삼국유사의 가치

 

첫째, ‘단군신화’를 가장 먼저 기록한 책이다. ‘단군의 자손’이라는 민족적 단결심을 조장하고 몽골 침입에 대항할 수 있는 한겨례라는 민족적 자긍심과 자존심을 심어주었다.

둘째, <삼국유사>에는 우리 고유의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형식인 향가 14수가 실려있다. 지어진 시기도 다양하고, 지은이도 다른 14수의 향가를 만날 수 있다. 향가는 신라 사람들이 즐겨 불렀다고 하는 노래인데, 지금 전해지고 있는 작품은 통틀어서 25수이다.

 

 

작품명

작가

연대

 

작품명

작가

연대

1

서동요

백제무왕

진평왕

8

도솔가

월명사

경덕왕

2

혜성가

융천사

진평왕

9

제망매가

월명사

경덕왕

3

풍요

작자미상

선덕여왕

10

안민가

충담사

경덕왕

4

원왕생가

광덕

문무왕

11

찬기파랑가

충담사

경덕왕

5

묘죽지랑가

두오

효소왕

12

도천수대비가

희명

경덕왕

6

헌화가

무명의노인

성덕왕

13

우적가

영재

원성왕

7

원가

신충

효소왕

14

처용가

처용

원성왕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향가는 ‘향찰’이라고 해서 한자를 이용하면서도 우리말의 순서와 소리의 느낌을 실려 쓰는 방식으로 적혀 있다.

 

선화공주니믄(선화공주님은)

남 그즈지 얼어 두고 (남 몰래 시집가 두고)

맛둥방을(맛둥 서방을)

바매 몰 안고 가다.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에 쓰이던 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우리의 고대 연구에도 더없이 귀중한 자료로 쓰인다. 또한 삼국유사는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불교와 관련한 기록들, 우리 조상들이 신성하게 여겨온 신앙, 무수히 많은 옛 이야기들. 곳돗의 땅 이름과 성씨(姓氏)등 다방면에 걸친 자료들이 풍부하게 실려있다. 그래서 삼국유사는 역사학뿐만 아니라, 국문학과 민속학(삼국시대의 복식, 건축 골품제에 따른 신분상의 일상사의 제약), 종교, 미술, 지리, 음악등 많은 분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의 보고이다.

 

일연은 단군조선에서부터 후삼국에 이르는 이 땅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우리민족이 중국 못지 않게 오랜 역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임을 밝히고, 나라 안팎의 혼란기-무신정권으로 인한 국내혼란기와 몽골의 침입과 삼벌초의 난에 강한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라고 밝힌다.

 

삼국유사 연구가 고운기는 누구인가?

 

고운기.jpg  

 

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길은 몸만 옮겨놓지 않는다.

몸이 가는대로 마음이 간다.

몸과 마음이 함께 가면 그 길은 길이 아니라 도(道)이다.

 

- 고운기

 

 

EBS 삼국유사 고전읽기에서 고운기 교수가 출연했다. 그때 그는 이 방송으로 수업을 대신한다고 했으면 게시판에 이름 남기는 것으로 출석체크한다고 했다.

 

"내 학문은 이 책에서 나와 이 책으로 또한 이룰 것이다."(余之學問 出於是書 而成於亦是書)고운기 교수가 1980년대 초 산 영인본 <삼국유사> 맨 앞장에 직접 적어 넣은 글귀다. 이 글처럼 그는 지금 일연과 <삼국유사>를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을 낸 자타가 공인하는 '삼국유사 전문가'이다.

 

지금은 작고하신 최철 교수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한문공부 하러 다니던 민족문화주친회의에서 <삼국유사>를 만났고, 시 창작 교수직까지 버리면서 일본 게이오대학에 방문연구원으로 가서 한·일 고시가 비교 연구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삼국유사>에 매달려 20여년 세월을 보내고 있다.

 

 

"<삼국유사>를 통해 일연은 우리 민족의 자주의식을 드러내려고 했죠. 고려도 중국에 기대지 않고 주체적으로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민중들에게 희미하게나마 민족문제에 대해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삼국유사>는 20세기 한국의 선험적인 시대인 13세기의 시대적 상황으로 20세기의 민족적 위기 극복에 적잖은 거울이 되었습니다."

 

"같은 책을 가지고 한쪽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정보원으로, 다른 한쪽은 제국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썼던 셈입니다."

 

고운기 교수는 <삼국사기> 또한 대단히 중요한 역사책이며 <삼국유사>와 가치의 경중을 따질 성질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기능을 갖는다고 설명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쓰면서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이 <삼국사기>이며, <삼국사기>에 안 나오는 얘기를 중심으로 썼기 때문에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보충하거나 극복한 책이라는 것. 그래서 둘이 함께 있어야 진정한 가치를 발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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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내가 저자라면

 

3-1. 목차

 

기이(紀異)

이 땅의 첫나라

고구려와 북방계

신라와 남방계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밤에 찾아오는 손님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권력의 끝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첫 성전환증 환자

왕이 되는 자

나라가 망하는 징조

지는 해 뜨는 해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견훤, 비운의 영웅

신비의 왕조, 가야

 

흥법(興法)

불교로 보는 역사

순교의 흰 꽃 이차돈

 

탑상(塔像)

신라의 중심 세계의 중심, 황룡사

문수 신앙의 근거지, 오대산

작은 절들에 서린 삶의 애환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낙산사의 힘

 

의해(義解)

운문사 이야기

원효, 해동 불교의 자랑

의상, 화엄의 마루

순례자를 위해 부르는 노래

스승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어떤 것

 

신주(神呪)

밀교의 한 자락

 

감통(感通)

평범한 사람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호랑이 처녀와의 사랑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피은(避隱)

숨어사는 이의 멋

 

효선(孝善)

불교가 보는 효도

 

향가, 가장 고귀한 것의 정화

일연, 혼미 속의 출구

 

사진찍기는 참 재미있다./ 양진

찾아보기

 

 

3-2.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226.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다.

 

378.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대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다.

 

3-3. 인상적이고 탁월한 착안점

 

글쓴이 고운기는 우리 ‘삼국유사’를 책속에서만 연구하지 않았다. 삼국유사를 들고 다니면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탑이나 절터, 해안가. 왕릉, 장소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삼국유사를 소리내서 읽어보고 그 장소에 가서는 천여년전의 옛 선인들의 음성을 들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 그들과 교감하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들으려고 했다. 그래서 저자의 또 다른 저서 ‘길위의 삼국유사’를 읽으면서 이 책이 저자의 혼을 담고 있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찾고자 하는 고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후배 양진에게 사진을 찍게 하고, 그 사진과 더불어 답사 현장에서 느꼈던 고운기의 사상이나 철학이 삼국유사를 읽어가는 독자에게 위로를 건네주고, 삶을 깊이있게 볼 수 있는 통찰력도 선사해주었다.

 

독자가 사진을 보면서, 삼국유사 책을 들고 그 장소로 달려가 그들의 이야기를 느껴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하고 있다.

 

시를 인용하면서도 국문학자 답게 감성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3-3. 내가 저자라면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어

고인을 못 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꼬.

 

-퇴계 이황, <도산십이곡>중에서-

 

고전이란 시간이 흘러도 많은 사람들이 소중하게 읽고 간직해온 책에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가야 할 길이 캄캄하고 아득할 때마다 앞서 걸어온 이들의 걸음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고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현전하는 서적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최고(最古)가 ‘삼국사기’이다. 우리 고대사를 가장 흥미롭게 담고 있는 최고(最高)가 ‘삼국유사’다.

 

처음으로 삼국유사를 접했다. 학창시절 고전 시간에 읽은 것들과 동화속에서 읽은 몇몇을 제외하고 체계적으로 순서적으로 해설까지 읽어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kbs에서 방영하고 있는 ‘대왕의 길’을 몇 번 본적이 있다. 비담의 반란, 선덕의 죽음에 이어 진덕의 왕계승. 유신과 김춘추의 관계등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방대한 자료를 고운기 해설과 함께 읽으니, 배경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많은 어려운 점들이 있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위 계승에 있어서 자세히 모르니, 봤던 페이지 다시 보고, 다시 보면서 되짚어 읽어야 했다.

 

짦은 시간안에 다 읽고 이해한다는 것이 어려웠다. 읽기는 읽었으되 다 정리하지 못함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권으로 읽는 삼국유사에서 우리 선조들의 사상과 삶을 엿보면서 삶다운 삶을 살아가는게 어떠한 것인가를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늘 가슴속에 질문을 품고 살다보면 어느 바람결에 나만의 답이 떠오르리라.

 

 

 

참고문헌 혹은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vdream80?Redirect=Log&logNo=150143120117

http://blog.naver.com/philscience?Redirect=Log&logNo=40165987688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5763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고운기 글/ 양진 사진, 현암사

길위의 삼국유사, 고운기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현암사. 고운기

김부식과 일연은 왜, 정출헌, 한겨례 출판

만화 일연 삼국유사 , 김영사

만화 김부식 삼국사기. 김영사

EBS 고전읽기, 우리가 알아야 할 삼국유사 1~10편

 

 

Ⅳ.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기이(紀異)

 

이 땅의 첫 나라

 

[11]

우리가 물이라면 샘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고 쓴 위당 정인보 선생이 쓴 개천절 노래다.

 

[12]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잡는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높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만 하다.

 

[16-17]

 

그 때 곰과 호랑이가 굴에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환웅 신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네쇼”라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낱을 주고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아라.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을 꺼렸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제대로 꺼리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

 

혹시 그 100일 동안 3과 7이 돌아오는 날짜를 꺼리라는 말은 아닐까? 아니면 3과 7 그리고그 반복은 완전 숫자로, 곧 ‘온 날’을 의미하고, 그것은 100일이 요즈음과 같은 숫자가 아니라 ‘온 날’로 보았을 때 서로 통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네 민간 신앙에서 3과 7이라는 숫자는 매우 중요한 데서 자주 쓰이고, 꺼린다는 것은 민간 신앙적 의식에서 특별히 조심한다는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환웅이 먹는 곳, 생활하는 것 등에서 어떤 의식을 저해 노고 그것의 준수를 요구했는데, 곰은 묵묵히 이행한 데 반해 호랑이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서 곰과 호랑이가 단순한 동물이 아닌, 그것들로 상징되는 어느 부족이라는 인류학적 해석이 덧붙여진다.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고자 각고면려한 곰 부족에게서 새로운 인물이 나온다. 그가 바로 단군이다.

 

[22-23]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일연의 단국에 대한 관심은 신화로서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나라의 존재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단군조선, 위만조선 등의 존재를 무시하고서, 이 땅에서 생겨나고 없어진 나라들을 온전히 설명 할 수 없다.

 

12세기 중반 <삼국사기>는 한반도에 살았던 지식인층이 중국으로부터 문자와 그와 관련된 여러 문화를 전수 받은 다음, 이제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다음 모든 자료를 없애 버렸다는 김부식의 행동 저 편에는 이 같은 의식이 잠재해 있었을 것이다.

한껏 폼을 내 만들어 놓은 <삼국사기>라는 명약이 우리만의 고유한 정신과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는 바이러스로도 기능할 줄은 아마도 그 찬술자들조차 몰랐던 것 같다. 세련된 장식으로 우리 역사를 볼품있게 세워 놓았지만 그로 인해 본질을 놓친 것, 부작용이란 다름 아닌 ‘우리의 실종’이었다.

 

[37]

고구려와 북방계

북방계의 시작, 부여

동명왕이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주여라 하였으니, 곧 고구려의 시초이다.

 

[39] 동명왕의 탄생 설화

금와는 이를 기이하게 여겨 방안에 깊이 가두었다. 그런데 햇빛이 비추자 몸을 움직여 피라게 했으나, 해 그림자가 또 쫒아와 비추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잉태하여 알 하나를 낳았거니와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시조 동명성왕’

 

[49]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이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이들은 나중에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뎌,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59-62]

박혁거세가 13살인 때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섰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연이 모두 같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신라는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다. 고구려의 동명왕이 그보다 20년 뒤진 기원전 37년, 백제의 온조왕은 40년 뒤진 기원전 18년에 출발하였다. 중국의 한나라 때였다.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92]

* 히미코와 같은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해와 달의 정령이 우리 나라를 버리고 지금 일본으로 가 버린 까닭에 이같은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다. 연오는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켜서 된 일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왕비가 짠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낸다면 될 것이다. ”

 

[96]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의 이야기

 

영일迎日(맞이할 영)은 해를 맞는 고장이다. 동네 이름에서부터 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을 법하다. 영일은 신라와 일본의 교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치지한다. 해와 일본이 자연스레 결합되어 나온 것이 연오랑과 세오녀이다. 해와 달이 사람사는 세상에서 우주의 그 어는 별보다 중요한 것임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은 고대인에게 더욱 절실했다.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 별 곧 일월성신日月星辰이다.

일관(점치는 사람)이 이르기를 ‘일월지정一月之精’이라 했다. ‘정’을 편의상 ‘정령’이라 번역했다. 해와 달은 빛이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쓸모 없듯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 없는 물건이 된다. 본다는 것은 그 정령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정령이었다.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

 

[100-102]

* 아름다운 설화 속의 정령.

 

더욱이 바닷가 마을, 이 땅에 해와 달이 가장 먼저 뜬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 토착 신앙의 바탕을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는 설화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일연은 귀비고, 영일현, 도기야의 작명 내력을 밝히며 끝을 맺는다. 비단을 왕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다.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이라 이름지었다. 또는 도기야-포항과 영일 사이 어는 바닷가. 라 한다“는 대목이다. 눈여겨보면 알겠지만, 이는 일연 자신이 직접 답사한 곳의 이야기를 적을 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종결법이다.

 

---> 최백호의 노래 <영일만 친구>

 

바닷가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어릴 적 내 친구

 

푸른 파도 마시며 넓은 바다의

아침을 맞는다

 

누가 뭐래도 나의 친구는

바다가 고향이란다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

갈매기 나래 위에

시를 적어 띄우는

 

젊은 날 뛰는 가슴 안고

수평선까지 달려나가는

 

돛을 높이 올리자 거친 바다를

달려라 영일만 친구야

 

영일만 친구야

 

연오랑과 세오녀는 그리스신화 아폴론과 아르키메데스 남매이야기와 비슷하다.

한국에서는 연오랑과 세오녀는 부부로 나온다. 연오랑과 세오녀에 들어있는 오烏는 까마귀새이다. 아폴론의 신조는 까마귀였다. 원래 이 새는 하얀새였다. 아폴론의 인간 애인 클로니스가 바람피는 것을 아폴론의 신조 까마귀가 주인에게 고자질했다. 화가 난 아폴론이 생각할 틈도 없이 클로니스를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죽어가면서 클로니스는 말한다. “내가 아기라고 낳고 죽일 것을...”이 말은 들은 아폴론은 클로니스의 배에서 아이를 꺼낸다. 이 아이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다. 화가 난 아폴론은 하얀 까마귀를 검은색으로 바꿔버린다.

여기서 의문점은 까마귀이다. 아폴론의 신조 까마귀오烏가 연랑 세녀 글자가운데 들어가있는 점이다. <Ebs. 고전읽기에서 구본형 선생님이 하신 말씀>

 

신라 아달라왕 때라고 자신있게 밝힌 일연은 바닷가 마을에 사는 연오가 어는 날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서 그곳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며, 부인 또한 남편을 찾으러 나섰다가 같은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가 곧 두사람은 다시 만나고 왕과 왕비로 짝을 이루었다고 이야기한다. 지금은 포항시에 편입된 영일 지방이 무대가 된 이 이야기는, 영일에서는 어부에 지나지 않았어도 일본에서는 왕이 되었으니, 1천 8백여년 전 혈혈단신 이민자가 ‘재팬드림’을 이룬 성공담처럼 보인다.

(연오랑과 세오녀 延烏郞과 細烏女- 이끌연, 까아귀오, 사내랑, 가늘세- 조에서)

 

나(고운기)는 그들을 해와 달의 정령을 의인화한 것으로 보았었다. 한 집단은 정신세계의 어떤 고갱이가 필요하다. 그것으로 이른바 하나된 세계를 만들고, 그것으로 흐트러지지 않는 사회질서를 다잡아 나간다. 연오와 세오가 일본으로 갔다는 것은 신라 사회의 그런 정신적 질서가 상실되었음을 말한다.

다른 상상을 해보면 이즈음 고학력 중산층의 이민 붐을 보면서, 벌써 그때도 제 나라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살기가 팍팍한 이들을 이민을 꿈꾸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바다를 건너 저 세상으로 간 것이며, 연오가 떠난 자리에 세오가 와보니 바위 위에 남편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는 상황을 보면 언뜻 죽음이 연상된다. 일본까지 찾아온 신라의 사신들에게 ‘하늘의 뜻을 말하는 대목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신공희人身供犧(희생할희)의 설화화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본디 하늘에 제사 재내는 가장 훌륭한 제물은 사람이다. 사람을 그럴 수 없어 대신 소나 양 같은 희생물들이 나온다. 과연 1천8백여년 전, 이 바닷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사실은 바닷가에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다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된 어떤 부부가 있었다 하자. 그리고 사람들이 그들이 슬픈 넋을 위해 그들 방식의 예식을 베풀어주는 행사가 있었다 하자. 하늘의 해와 달이 다름 아닌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알았다 하자. 그 이야기가 전해지고 확장되고 굳어지며서, <삼국유사>는 바다 건너 다른 나라에 가 왕이 된 부부로 그들을 기록했던 것은 아닐까?

- 길위의 삼국유사 205-209p-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103-106]

 

최근 세계 언어학계에서는 한국어를, 어족을 알 수 없는 특이한 말로 제쳐둔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의 경상도 방언과 일본어는 더 닮았다. 발음이나 억양 그리고 특징적인 어미 처리등이 그렇다. 사실 경상도에서는 해류만 타고도 일본 서쪽 해안에 쉽게 닿는다.

‘일본’이라는 정식 국호를 가지기 전에 그들은 스스로 왜(倭)라고 불렀다. 그 왜나라의 처음 신라 침공은 <삼국사기>만 가지고 따져도 벌써 혁거세왕 8년 (기원전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가.

 

* 밤에 찾아오는 손님- 야래자夜來者 설화의 전통

 

[120-138]

설화 문학에서 말하는 하나의 유형 중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이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뫂래 차자 들어야 할 운명이다. 드러내 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주인공을 낳게 된다.

진지왕이 4년만에 폐위된 이유를 일연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이유를 댄다.

 

복사꽃처럼 어여쁜 도화랑의 부모는 딸을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간 머물렀다. 늘 다섯 빛깔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이 지난 다음 홀연 자취를 감추고, 여자는 그로 인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출산을 하려할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남자 아이 하나를 낳아 이름을 비형鼻荊(모형나무형)이라 하였다.

 

다섯 빛깔이 오방五方을 상징한다면, 천하가 감싸준다는 것이고, 향기는 귀한 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니, 이것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징조다. 아니나 다를까. 천지가 진동하며 태어난 아이가 있었으니, 그가 곧 비형이다.

 

진평대왕은 그가(비형)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길렀다. 나이가 열다섯에 이르자 집사에 임명하였다.

비형랑은 날마다 밤에 나가 놀다 돌아왔다. 왕은 날쌘 군사 50여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늘 월성을 뛰어넘어 황천荒川(거칠황)의 언덕 위로가 귀신들을 이끌고 놀았다.

군사들이 이 일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과 논다는데 정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고랑에 다리를 만들어 보아라.”

비형랑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 무리들에게 하룻밤에 돌을 다듬어 다리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이 귀교鬼橋다.

 

진평왕과 비형은 사촌 형제간이다. 이 불행한 비형랑의 사나이는 반은 사람이니 낮에는 사람처럼 살고, 반은 귀신이니 밤에는 귀신처럼 살았다.

비형이 왕의 명령을 받아 하룻밤에 지은 다리가 귀교라고 하였다. 지금도 이 마을 사람들은 탑정동 일대를 ‘두두리豆豆들’이라 하고, 또는 ‘귀더리 들’이라고 한다. 두두리는 귀신이라는 뜻이고, 귀더리란 귀다리 곧 귀교인 듯하다. 귀신들이 노는 들, 그리고 그들이 세운 다리가 있는 곳으로 정리된다.

 

귀하신 왕의 혼으로 아들을 낳으니

비형랑 그 사람의 방이 여기네

날고 뛰는 가지가지 귀신들아

이 곳에 머물지는 말아라.

 

 

일연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 노래를 붙여 귀신을 쫒는 습속이 생겼다‘고 사족을 붙였는데, 그것은 마치 ’처용랑과 망해사‘ 조에서 사람들이 처용의 얼굴을 붙여 나쁜 귀신을 쫒아냈다는 풍속과 같다.

 

불명예스럽게 왕의 자리에서 쫒겨난 진지왕을 데려다 그 혼의 힘으로 특이한 아들을 낳게 하고, 이렇게 해서 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못다 이룬 보상하게 했던 것일까?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견훤 탄생 설화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 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리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에 스스로 견훤리라 불렀다.

 

이는 백제 무왕의 탄생 설화와 비교해 보면 분명해진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비교할 만한 일본의 전설이 있다. 일본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에 실려 있는 미와야마에 얽힌 전설이다.

 

이쿠타마요리비메는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발랐다.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위엄있고 헌걸차서, 당시 누구와도 비할 수 없었다.

한밤중이었다. 누군가가 슬며시 찾아왔는데, 서로 마음이 맞아 함께 지내는 동안.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임신을 하였다. 부모는 딸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놀랐다.

“너, 임신하였구나. 남편도 없이 어떻게 임신을 하였느냐?”

“잘 생긴 한 남자가 있어요. 이름은 잘 모르구요. 밤마다 와서 함께 지내는 사이에 어느덧 임신을 하였답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 사람이 누군가 알고 싶었다.

“붉은 흙을 침상 앞에 뿌려 놓아라. 실패에 감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 옷자락에서 꽂아도 두고.”

여자는 가르쳐 준대로 하였다.

아침이 되어 보니, 바늘에 꿴 실은 방문 열쇠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남은 실은 세 치 뿐이었다. 곧 열쇠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간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실을 따라 간 곳을 찾아보자. 미와야마에 이르러 그 곳 신사神社에 멈추었다. 그래서 신의 아들임을 알았다.

 

견훤의 경우 남자의 정체가 큰 지렁이인 반면 미와야마의 경우 뱀인 점이 다르다. 그러나 전체 이야기의 구조은 이처럼 꼭 같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들은 서로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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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139-158]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을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기인>편의 ‘거문고의 갑을 쏘라조다. 소지왕 10년 (488년)에 일어난 이 사건에서 우리는 불교에 대한 신라인들의 거부감을 읽을 수 있다.

 

왕이 천천정에 행차하였다. 때마침 까마귀와 쥐와 함께 와서 우는데, 쥐가 사람의 말을 했다.

“이 새가 가는 곳을 고르시오.”

왕은 말 탄 병사를 시켜 쫒게 했다.

남쪽으로 피촌에 이르자 돼지 두 마리가 싸우고 있었다. 잠시 그것을 구경하고 문득 까마귀가 간 곳을 놓치고 말았다. 길가에서 헤매고 있을 때 마침 한 노인이 나타났다. 연못 가운데에서 나와 편지를 바치는데 겉면에, “뜯어서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뜯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고 쓰여 있었다. 병사는 돌아와 그것을 왕에게 바쳤다.

“두 사람이 죽는 것보다야. 뜯지 않아 한 사람이 죽는게 낫겠지.”

왕이 그렇게 말하자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두 사람이란 일반 백성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왕도 그럴 것 같아 뜯어보게 하였다. 거기에는 “거문고의 갑을 쏘라”라고 쓰여져 있었다.

왕이 궁으로 돌아와 거문고의 갑을 쏘게 하였다. 그랬더니 내전의 분수승과 궁주가 몰래 정을 통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은 참형을 당하였다.

 

노인이 편지를 들고 나와 바쳤다고 해서 서출지書出池라고 부르는 연못은 지금도 경주 남산 밑 피리촌에 있다.

내전의 분수승’으로 대표되는 불교에 대한 고위 관료들의 적대감이 표현되었다.

편지를 바친 노인의 존재가 전통적인 세력을 대표한다고 보면 더더욱 그렇다.

 

 

법흥왕을 이은 진흥왕대의 꾸준한 노력이 차차 새로운 분위기를 형성해 간다. 특히 진흥황이 즉위할 때 나이가 15세여서 태후가 대신 정치하였는데, 태후는 곧 법흥왕의 왼손자 입종갈문왕의 부인으로, 세상을 마칠 때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일연은 ‘진흥왕’조에 적고 있다. ----------->계속

 

145. 왕은 타고난 성품이 풍류를 즐기고 신선을 높여, 백성들 집안의 여자 아이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골라 원화로 세웠다. 교정낭과 남모낭의 싸움으로 원화를 폐지했다.

 

“풍월도를 앞세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좋은 집안의 남자 가운데 행실이 바른 자를 뽑고 화랑이라 하도록 했다”고 하였다. 거기 처음 추대된 국선이 설원랑이다.

 

일연은 어떤 이의 말이라 하면서, “미(未)는 소(弰)와 소리가 서로 가깝고 시(尸주검시)

는 력(力)가 모양이 서로 가깝다. 그렇게 매우 닮은 것을 응용을 헤매게 한 것이다. 부처님이 유독 진자의 정성에만 감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 인연이 있기에 자주 나타나 보이셨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미시를 분명히 불교적 존재로서 미륵으로 보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한편, ”지금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함께 붙여 놓아, 도교적 민간 신앙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미시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다. 그만큼 신라의 화랑이, 더 나아가 신라의 불교 수용 후의 역사가 복합적임을 말해 준다.

 

자장은 황룡사 구층탑을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중국의 오대산에서 만난 문수보상이, “황룡사의 호법룡은 내 큰아들입니다. 석가모니의 명령을 받아, 거기 가 절을 지키고 있지요. 본국에 돌아가거든 절 가운데 구층탑을 지으시오. 이웃 나라들이 항복해 오고, 구한이 조공을 바칠 것이며, 왕실이 영원히 평안하리라”라고 말한다. 한편 원효은 보다 직접적으로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에 참여한 듯하다.

 

진흥왕이 구사한 외교 수완으로, 이후 신라가 삼국 통일까지 걸어가면서 변함없이 지켰던 어떤 대원칙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일본이 가까워지면서 신라로서는 협공을 받는 입장이 되었는데, 거기서 고구려까지 적이 된다면 그야말로 사면이 포위되는 결과를 낳고 만다. 백제나 일본과는 오랫동안 좋지 않은 관계였다. 이제 그런 관계를 개선하기 보다는 고구려와 가까워지는 것이 더 쉽고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법하다. 고구려는 남진 정책을 써도 주로 백제쪽을 노리고 있었다.

 

[157-158]

‘선덕왕이 절묘하게 알아차린 세 가지 일’ 조에서는 저 유명한 당 태종이 보낸 모란꽃 그림 이야기를 쓰고 있다.

 

처음에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생의 세 가지 색깔로 된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앗을 세 되 보애주었다. 왕이 꽃을 그린 그림을 보더니,

“이 꽃은 분명 향기가 없을 것이오.”

하고, 뜰에 씨앗을 심으라 하였다. 꽃이 피고 열매 맺기까지 기다려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신하들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왕은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 “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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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지존의 자리에 오른다는 것>

천년 고도의 당 경주에는 계림, 반얼성, 안압지, 불국사, 석굴암 등 수많은 유적지가 밀집해 있다. 그중 월명사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사천왕사에는 선덕여왕의 능이 있는데 이곳은 선덕여왕이 도리천으로 지목하며 묻어달라고 부탁했던 곳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서 선덕여왕의 재위 마지막 해인 674년을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즉 봄 정월, 비담과 염종이 “여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했다는 것, 그달 8일 ,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 그리하여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에 장사지냈다는 것으로 기사는 짧다.

 

중국의 당 태종이든,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은 비담이든, 유언비어를 퍼뜨린 왕거인이든, 후삼국의 시대를 열었던 견훤이나 궁예든,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숱한 떼든, 아니 이들을 역사서에 리곡했던 김부식이나 일연이든 모두 남자였다. 많은 남성들이 고까운 시선으로 보았든, 참기 힘든 불만을 품고 있었든, 신라시대에 세 명의 여성이 왕위에 올랐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신라가 성리학적 이념으로 물든 조선에 비해 여성의 지위 또는 권한을 상대적으로 넉넉하게 보장해주었다는 하나의 사례로 읽힐 법하다.

 

<성차별과 혈연적 집착이란>

 

성골남자로 왕위를 이어야 하는데, 적합한 성골 남자가 없다면 진골 남자보다는 성골 여자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성적 차별보다 혈연적 순수성을 우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니, 신라 사회의 골품제도가 얼마나 엄혹한 인간 차별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는가 짐작할 수 있다.

 

김부식은 “시조 박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 28명의 왕을 성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진골이라 한다”라고 했다. 일연도 “진덕돵 이상은 신라 중대이니 성골의 왕이고, 이하는 신라 하대이니 진골의 왕이다”라고 했다. 김춘추의 즉위는 신라시대를 중대와 하대로 나누는 분기점이었으니,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왕이 음란해서 정치를 말아먹어?>

 

하늘의 이치로 말하면 양(陽)은 굳세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데, 어찌 늙은 할멈이 안방에서 나와 나라의 정사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신라는 여자를 세워서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어지러운 세상의 일이다.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서경>에서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고 했다.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선덕왕-

 

왕이 평소 각각 위홍과 더불어 간통하더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항시 안으로 들이고 일을 맡몄다. 이내 대구화상과 더불어 향가를 모아 수집하라 명하고 이를 <삼대목(三代目)>이라 했다. 위홍이 죽자 시호를 추존해 혜성대왕이라 했다. 이후부터는 몰래 아름답게 생긴 소년 두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했고, 그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나라의 정책을 위임했다. 이로 인하여 아첨하는 무리가 방자하게 뜻을 펴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다. 상과 벌이 공평하지 않았고,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삼국사기 권 11, 신라본기, 진성왕

위홍을 비롯한 미남자들과의 부정한 행실로부터 진성여왕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고 있는데, ‘부정한 행실’이야말로 여자를 궁지에 몰아넣을 때 남성들이 자주 써먹던 단골 메뉴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영웅(英雄)은 호색(好色)’이라는 미사여구로 남성의 끝없는 여색을 도리어 칭송하는 태도와 견주어봐도 좋겠다.

 

사실 어떤 사람은 간통 상대자인 위홍이 진성여왕의 삼촌이었음을 상기시키며 그녀의 음탕함을 부풀리기도 한다. 하지만 풍속이란 시대에 딸, 나라에 따라 다른 법이다. 신라시대에는 동성 사이의 결혼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의 딸자식이라든가 고종 또는 이종 사이에 결혼하는 것도 예사로 여겼다. 왕족의 순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 족내혼(族內婚)이 자연스럽게 행해졌던 것이다. 비록 김부식이 신라 내물왕이 조카딸과 결혼한 것을 두고 중국의 예법으로 볼대 잘못된 일이라며 나무랄 수밖에 없었던 근엄한 유학자였다지만, 신라의 풍속이란 본디 그러햇다는 점을 인정했으면서 유독 진성여왕의 경우만 삼촌 위홍과 “놀아난” 것을 탓하는 것은 부당하다. 더욱이 일연이 <삼국유사> ‘왕력’에서 밝히고 있듯, 위홍은 진성여왕의 남편이가도 했던바 부부사이에 친근히 지낸 것을 꾸짖는 것이 어찌 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암탉이 울어야 알을 난다. 요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엄마다.

 

<여왕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고까운 시선>

 

[선덕여왕] 원년 2월에 대신 을제로 하여금 나라의 정사를 총괄하게 했다.

[진덕여왕] 원년 2얼에 이찬 알천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수승을 우두주의 군주로 삼았다.

[진성여왕] 왕이 평소 각각 위홍과 더불어 간통하더니 이때에 이르러서는 항시 안으로 들이고 일을 맡겼다.

-삼국사기, 권 11. ‘신라본기’

 

선덕여왕은 전권을 을제에게 맡겼고, 진덕여왕 역시 알천에게 전권을 맡겼다. 진성여왕 때의 위홍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 세 여왕의 시대에 진정한 권력은 이들 남성으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어느 시대이든 적임자를 골라 정무를 총괄하게 하고, 이들의 보좌를 받아가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 임천동, 술종공, 호림동, 염장공, 유신공 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에 있는 오지암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했다. …… 신라에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서 의논을 하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삼국유사, 권 기이 , ‘진성왕’

 

 

위엄있는 유력자들이 모여서 나랏일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에 국가의 지존인 진덕여왕도 참여했던가? 아니다.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나랏일을 모의할 때마다 힘 있는 대신들은 신령한 그곳에 모였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진덕여왕이 머물고 있는 궁궐은 무엇이란 말인가? 막강한 권력을 위임받은 상대등 알천공 이하 유력한 남성 그룹에게, 궁궐과 그곳의 주인인 진덕여왕은 ‘왕따’였던 것이다. 물론 그곳에서 논의했다는 나라의 큰일은 바로 정치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라를 다스린 지 4년 만에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우AM로 나라 사람들이 사륜왕을 폐위시켰다.

-삼국사기 권 1, 기이, ‘도화녀 비형랑’

 

나라 사람으로(國人)으로 표현된 유력한 남성들은 어떤 사람을 왕으로 만들 수도 있고, 왕으로 있던 사람을 끌어내릴 수도 있었다. 사륜왕은 왕위에서 쫒겨났고, 선덕여왕은 왕위에 올랐다. 신령스런 그곳에 모여 논의하면 반드시 이루어졌다는 말은, 모인 그들의 실질적인 힘을 입증하는 동시에 그때 그곳에서 결정된 사항은 신의 이름으로 관철됐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비범함으로 채색된 선덕여왕에 얽힌 일화들>

 

1. 지귀가 선덕여왕을 사모해서 가슴에 불이났다.

 

지귀志鬼는 신라 때 활리의 말몰이꾼이었다. 선덕여왕을 너무 사모하여 비쩍비쩍 말라갔다. 사연을 들은 여왕은 영묘사에 불공을 드리러 갈 때 만나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지귀는 약속한 날, 절의 탑 아래에서 선덕여왕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선덕여왕은 아무리 해도 깨어나지 못하는 지귀의 가슴에 자신의 팔찌를 얹어두고 궁궐로 돌아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그 사실을 알고 오래도록 번민하다가, 마침내 마음의 불이 일어나 탑을 돌다가 불귀신으로 변했다. 선덕여왕은 술사(術士)에게 명하여 주문을 짓게 했다. 신라 풍속에 이 주문을 문에 붙여 화제를 막았다 한다.

-<수이전>, 심화요탑-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이미 오십이 넘었으니 그런 늙은 할머니에게 불같은 연정을 품었다는 지귀의 사연은 약간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추측을 넘어서는 명확한 근거아 있다. 그건 이 이야기가 본래 선덕여왕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조금 길지만 본래의 이야기를 간추려 인용해본다.

 

인도의 어는 국왕에게 ‘구모두’라는 딸이 있었다. 그 나라에 ‘술파가’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는데, 창문에 비친 왕녀를 본 뒤 사랑하게 됐다. 날이 갈수록 근심이 쌓여 식음을 전페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단념하라고 달랬지만, 술파가는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 했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어 맛있는 생선과 새고기를 항상 왕녀에게 바치고 값을 받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왕녀가 그 까닭을 묻자.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상사병으로 죽게 됐으니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왕녀는 천사天祠에 있는 천상天像 뒤에서 만나주겠다고 약속했다. 술파가는 목욕을 하고 천상 뒤에 가서 기다렸다. 약속한 날이 되자 왕녀는 해차를 차려 천사로 갔다. 이때, 천신은 왕의 딸이 미천한 사내에게 욕을 보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부를 깊은 잠에 빠뜨렸다. 왕녀가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술파가는 일어나지 않았다. 왕녀는 하는 수 없이 구슬 목걸이를 술파가의 가슴에 벗어두고 나왔다. 잠에서 깬 어부는 왕녀가 왔다 간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만나보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 번뇌하던 어부는 불이나 타 죽고 말았다.

-용수(龍樹), ‘대지도론’ 권 14

 

용수의 ‘대지도론’이 B.C.200~150년경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되니, 이야기의 연원은 참으로 깊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그토록 오래전, 머나먼 인도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어떻게 해서 동아시아의 가장 구석 신라에까지 전해져 선덕여왕이 겪은 일처럼 회자되었는지 그 연유를 헤아려보는 데 있다.

 

2. 향기없는 세송이 모란꽃

 

일연은 선덕여왕의 비범한 예지력을 보여주는 세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나는 앞서 인용한 ‘향기 없는 모란꽃 그림’이고 나머지 둘은 ‘옥문지에 숨어 있는 적을 알아낸 것과 ’죽으면서 자기를 묻을 수미산 도리천의 위치를 알려준 것‘이다.

 

???제 27대 덕만의 시호는 선덕여대왕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당 태종이 홍색, 자색, 백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되를 보내왔는데, 왕이 그림의 꽃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며 이에 씨를 정원에 심도록 명했다.

 

!!!당시에 여러 신하가 어떻게 알았는가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니 향기가 없는 것이고, 이는 바로 당나라 왕이 나의 짝이 없음을 희롱한 것이다. 꽃을 삼색으로 보냄은 아마도 신라에 세 명의 여왕이 있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니 선덕, 진덕, 진성이 바로 이들이다. 당제도 헤아림의 밝음이 있었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별기에 이르기를 이 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기이’ 선덕왕지기삼사

 

 

이런 비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성골 남성만이 가능했던 왕위 계승의 전통을 깨뜨리고 여자로서 지존의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을 시사한다.

 

3. 옥문지에서 개구리가 울어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서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은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 명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했다. 두 각각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백제의 장군 울소라는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활로 쏘아 죽이고, 이후 백제 병사 1천 2백 명이 오자 역시 쳐서 모두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 개구리가 노한 형상은 병사의 형상이며 옥문은 여자의 음부를 말한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이 백색이며, 백색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는 것을 알았다. 남근은 여자의 음부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쉽게 잡을 수 있었음을 알았다“ 했다.

-<삼국유사> 권 ‘기이’ 선덕왕지기삼사

 

 

4. 나를 도리천에 묻어달라

 

??? 셋째는 왕이 아무런 병도 없는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짐은 모년 모월일에 죽을 것인즉, 나를 도리천에 장사를 지내도록 하여라”했다. 군신들이 그곳의 위치를 몰라 “어느 곳입니까?”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낭산狼山 남쪽이다”했다. 모월일에 이르러 과연 왕이 승하하시므로 신하들이 낭산의 양지바른 곳에 장사지냈다. 그후 10여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이 사천왕사를 왕의 무덤 아래에 창건했다. 불경에 이르기를 사천왕사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삼국유사> 권 ‘기이’ 선덕왕지기삼사

 

!!!사천왕사가 지어지게 된 내력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동맹국이었던 신라까지 삼켜버리려 했다. 세계제국이던 당나라의 영토 확장욕은 이토록 끝이 없었다. 당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오리라는 제보를, 당시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명랑법사로부터 전해 들은 신라는 당황하여 어지할 줄 몰랐다. 그때 해법으로 제시된 것이 사천왕사를 지어 불력(佛力)으로 대처하는 방안이었다. 사천왕이 수미산을 지키는 수문장이라는 데서 착안한 것이었다. 신라를 불국토라고 생각하던 신라인으로서는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사천왕사를 어디에 지을지가 문제였다. 그때 문무대왕은 선덕여왕을 모신 낭산 기슭을 곧바로 생각해냈다.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낭산을 수미산으로 지목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미산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짓는데 그곳이 아닌 다른 곳은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냉정하게 되짚어보면 선덕여왕은 뒷날 사천황사가 지어질 것을 예견한 것이 아니라 뒷사람들이 선덕여왕의 말을 근거로 삶아 사천왕사를 지어 놓고는, 오히려 선덕여왕이 비범한 능력을 보인 일화라고 신비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선덕여왕이 낭산 남쪽을 수미산 도리천으로 지목해 그곳에 묻어달라고 유언한 뜻은 무엇이었던가? 그건 가섭불 시대에 어떤 여인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수도를 하다가 열반에 든 뒤, 도리천주가 됐다는 불교 설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 교시가Kausika라는 여인은 친구 32명과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도를 닦고 불탑을 쌓아 공덕을 찬탄했는데, 뒤에 여인은 도리천주가 되고 나머지는 도리천주를 보좌하는 삼십이천에 좌정했다고 전해진다.

 

선덕여왕이 자신을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은 바로 이런 내력에 근거한 것이었다. 선덕여왕은 살아생전 영묘사, 첨성대 등 수많은 사찰과 석물을 조성하며 불법 숭호에 열심이었던 임금이다. 아마도 자신이 가섭불 시대에 도리천주가 된 바로 그 여인이 신라 땅에 환생한 것이라고 자처했던 듯하다. 그렇다면 도리천에 묻어 달라는 선덕여왕의 유언은 본래 신라를 불국토로 여겼던 신라인의 깊은 불심이 만들어낸 이야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가 뒷날 선덕여왕 늘 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면서 선덕여왕의 예지를 입증하는 이야기로 초점이 바뀌었어던 것이다.

 

5. 여성이 정치를 하는데 웬 말들이 많아

 

‘모란꽃 일화’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선덕여왕에 대한 당 태종의 조롱이었다는 ‘수이전’ 편자의 해석도 문제적이다. 김부식과 일연은 선덕여왕의 탁월한 지감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이 일화를 읽었지만, 그 뒷면에는 남성의 조롱이 끝없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일화들이 의미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선덕여왕이 신이한 능력을 진닌 여왕이었음을 말해주는 신화가 그토록 많았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여자로서 왕위에 오른 충격적이고도 경이로운 사건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부풀려진 신화로 이해해야 할 터이다. 어는 때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지존의 자리에 추대하기 위해 그녀 측근에서 조작하기도 했겠고, 어는 때는 여자 임에도 당당하게 왕위에 군림하던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이 과장하기도 했겠고, 어는 때는 여왕이 있었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했겠다.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갖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면서든, 혹은 고귀한 자도 미천한 자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면서든.

 

이쯤 되면 선덕여왕의 신화가 말해주듯, 그런 경이롭고 아름다운 기적이 정말 신라시대에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기적을 굳게 믿고 있는, 그리하여 선덕여왕의 행적을 기리던 뒷사람들의 간절한 마음가짐이다. 진성여왕의 오빠였던 정강왕은 여동생 진성에게 왕위를 물려주는게 부당하다는 많은 남성 신하들의 반대를 이런 말로 단호히 물리쳤다. “예전의 선덕과 진덕도 여자였다!”라고. 그리하여 진성이 여자임에도 지존의 자리에 오를 명분을 마련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시대에 3명의 여왕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사회를 갈망하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소중한 기억이 되겠다.

 

 

[159-177]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김유신의 동생이요 김춘추의 부인이 문희다.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도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꿈을 사서 얻은 행운

 

처음에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을 꾸었다. 서쪽 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서울 성안을 가득 채웠다.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문희가 이를 듣고 말하였다.

“내가 이 꿈을 살까?”

“어떤 선물을 줄래?”

“비단 치마를 팔면 되겠어요?”

“좋아”

동생은 옷깃을 풀어 주었다. 그러자 언니가 말했다/

“어젯밤 꾼 꿈을 네게 붙여 주마.”

동생은 비단 치마로 값을 치렀다.

열흘 쯤 지난 다음이었다. 김유신이 김춘추와 정월의 오기일에 유신의 집 앞에서 축국을 하였다. 춘추의 치마가 밟혀 옷깃 여민 곳이 찢어지자 유신이, “우리 집에 들어가 꿰매자”라고 하였다. 춘추가 따라 들어가니, 유신이 보희에게 바느질을 하라고 시켰다.

“어째 자잘한 일로 귀공자에게 함부로 가까이 갈 수 있겠어요.”

보희는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문희에게 시켰다. 춘추는 유신의 속뜻을 알아차리고 드디어 가까이 했는데, 그 후 자주 내왕을 하였다.

 

오줌을 누는 꿈 이야기가 왜 좋은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는 사실 여기에만 실린 독점물이 아니다. <고려사> 의 첫 부분, 왕건 집안의 내력을 소개하는 대목에 뜻밖에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작제건은 왕건의 할아버지이며, ‘지는 해 뜨는 해’에 나오는 거타지 바로 그 사람이다. 보육 또한 삼한의 산천에 오줌이 넘쳐흘러 문득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는 문희의 용모를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단장에, 빛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를 눈부시게 하였다”고 적고 있다. 춘추가 단번에 문희에게 푹 빠질 만도 하건만, 그래서 두 사람이 야합을 한 것까지는 순조로웠으나, 정식 결혼에는 한 가지 장애가 놓여 있었다. 춘추와 문희의 신분 때문이었다.

 

김유신은 가야 출신이다. 가야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신라에 복속된 것은 법흥왕 d19년(532년)의 일이다. 김유신이 태어나기 60여 년 전, 유신의 증조부 구해는 수로왕의 후손이었느데,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가족들을 데리고 경주로 와서 살았다.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결혼이 불가능할 것을 안 유신의 아버지 서현공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유신의 갈등이다. 왕이 될 만한 이로 춘추 밖에 없었고,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나중 문무왕이 되는 법민은 626년생이다.

김춘추가 왕실 내에서 강력한 입지를 굳혀 가는 동안 김유신은 군부를 장악한다. 특히 김춘추는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다.

 

김춘추는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 법민, 인문 등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나라에 보내 그 곳의 주요 인사들과 안면을 익히게 하였다. 그러나 왕위는 그렇게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선덕여왕이 15년 진덕여왕이 7년을 하는 동안 춘추는 기다려야 했다. 진골은 편협한 신라 왕실이 한층 더 개방적으로 나가는 데 크게 공헌한 제도이기도 하다.

 

드디어 춘추의 나이 51세, 진덕여왕이 승하하자 기회는 그에게 돌아왔다. 자신의 오른팔 김유신은 이제 누구도 거역 못하는 군부의 최고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김유신은 신이(神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힘으로 안되면 지략으로, 지략으로 안되면 신술(神術)을 써서라도 주어진 이릉ㄹ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178-195]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이 문무왕 3년이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문무왕 8년이다.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마지막에 화장을 해 바다 한가운데 묻어 달라 한 사람이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꾀어 신라를 괴롭히게 하고, 문무왕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여 당나라 군사를 쳐부순다. 당나라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반란군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싸움을 일으키되, 실제로 주적(主敵)은 당나라 군사로 삼았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왕이 죽을 때 남긴 조서에는 “풍상을 무릎쓰다 보니 마침내 고질병이 생겼으며, 정무에 애쓰다 보니 더욱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문무왕은 624년생, 죽은 해의 나이 겨우 56세다.

한편 그이 조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눈에 뛴다.

 

옛날 만사를 어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이 금치 못하겠으되,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서 화장을 하라고 유언한다. 이 대목은 다분히 김부식의 손에 의해 유교적으로 치장된 것이다. 결국은 불교식 장례를 명한 것인데, 일연은 문무왕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영융 2년 신사년(681년)에 돌아가셨다.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소 지의 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

“용은 짐승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나더라도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문무왕의 이같이 거룩한 생각은 그 아들 신문왕에게 이어져 더욱 아름답게 꽃 핀다. 문무왕의 이름이 법민인 데 비해 신문왕의 이름은 정명(政明)이다. 두 이름을 합쳐보면 법정(法政) 민명(敏明), 두 왕에 걸쳐 정치와 법이 밝고도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이름에 넣어 소망한 것이지만, 실제 신라 천 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가 그 전성기를 구가한 것으로 보아 틀림없을 때, 이름은 이름 값을 하고 있다.

 

아들 신문왕은 왕위에 오르자 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를 짓는다. ‘기이’ 편의 ‘만파식적’ 조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다. 일연은 절의 기록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 놓고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무찌르고자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바다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 2년(682년)에 일을 마치고, 금당의 아래를 밀어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었거니와,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마련한 것이다. 유언대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이름하였다.

 

문무왕과 신문왕 그리고 감은사와 대왕암, 이견대의 관계가 명백히 나타난 부분이다.

 

신문왕 2년(682년), 5월 그믐의 일이다. 감은사 가까운 바닷가에 작은 산이 떠서 오간다는 희한한 보고가 올라왔다. 일관은 바다 용이 된 문무와과 33천의 하나가 된 김유신이 큰 선물을 주려는 징조라고 풀이했다. 신문왕에게 두 사람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였다.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 가마를 타고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신하를 시켜 살펴보도록 하였다.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의 머리 같은데, 그 위의 대나무 한 그루가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가 되었다. 신하가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에 가서 잤다.

다음날 정오, 대나무가 합쳐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바람과 비로 어두워지는데, 7일간이나 갔다. ……

“이 산이 대나무와 함께 쪼개지기도 하고 오므라지기도 하니, 어쩐 일입니까?”

“비유컨대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가 나지 않고, 두 손바닥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라는 물건도 오므라진 다음에야 소리가 나지요. 훌륭한 임금이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가 피리를 만들어 불면 세상이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은 바다 가운데 큰 용이 되어 있고, 유신은 다시 천신이 되어서, 두 분 성인이 한 마음으로 이런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물을 내어놓고, 날더러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놀라 기뻐하며, 다섯 가지 색깔이 칠해진 비단이며 금과 옥으로 제사를 드렸다. 신하를 시켜 대나무를 잘라 바다에서 나오자, 산과 용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를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일연은 마지막에 이렇게 첨가한다.

 

1.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 실종되었던 부례랑이라는 화랑이 살아 돌아온 기적 때문에 이름을 고쳐 ‘만만파파식적’이라 부른다는 기사가 딸려 있다.

 

2. 백률사의 대비상이 영험 있음을 말하고자 피리 이야기도 나온다. 효소왕 때까지 국선 제도가 살아 있었음을 알게도 되거니와, 국선이 적군의 포로가 되자 대비상의 도움으로 피리가 날아가 구해왔다는 데서, 어느 결에 만파식적과 불교가 습합되었음을 알게 된다.

 

효소왕은 백률사에 많은 시주를 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벼슬과 상금을 주었는데,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서는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했다. 벼슬이 높아져 더 이상 오를 데가 없으면 한 글자씩 덧붙이는 신라의 관습이 있다.

 

--> ‘탑상’ 편의 ‘백률사’조에 실려 있다. 효소왕 때 국선이었던 부례랑이, 국경지대에서 무리와 노닐다 말갈족에게 포로가 되는 사건이 벌어지는 때에 맞추어, 왕의 창고에 보관하고있던 만파식적이 홀연 자취를 감추었다. 궁중은 발칵 뒤집힌다, 국선도 국선이려니와 피리의 행방이 더 문제다. 낭의 부모는 백률사의 대비상 파에서 가서 간절히 무사귀환을 기원하는데, 어느새 피리가 나타나고 그 뒤에 아들이 서 있지 않는가. 낭은 잡혀간 나라의 듪판에서 짐승을 칠 때에, 웬 스님이 피리를 들고 나타나더니 자신을 여기까지 다시 데려왔노라 말한다. 피리의 신령스러운 영험으로 알과 ‘만만파파식적’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3. 만파식적의 이야기는 원성왕 (785-798)때 한 번 더 나온다. 왕의 아버지 효양 대각간이 만파식적을 아들에게 넘겨 주었는데, 이것을 얻었으므로, “하늘의 은혜를 두터이 받았고, 그 덕이 멀리 빛났다”는 대목이다. 왕은 일본 사람들이 이 피리를 보자고 많은 금은보화를 가져와 간청해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물리쳤다.

만파식적이 마지막으로 보이는 원성왕대의 기록이 787년 이후로 이 피리에 대한 소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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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정주 출신으로, 우리 근대문학 초기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쓴 김여제의

만만파파식적의 울음’이다.

 

그대의 적은 운율이

만인의 가슴을 흔들던 저 날,

가직이 그대의 발아래 엎드려

황홀동경의 눈물을 흘리던 저 무리

아아 어디 어디

저 수만의 혼은 아득이는고!

어디 어디

다 떨어진 비명(碑銘)이나마 남았는고!

때아닌 서리.

무도(無道)한 하늘.

모든 것은 다 날았도나!

아아 만만파파식적.

 

모두 3연으로 된 시의 1연이다. 그 옛날 만파식적의 전설을 시로 옮겨 놓은 인상적인 첫 대목이다. 이를 일러 최초의 자유시라 부르자는 것이 관련 연구자의 견해이다.

김여제는 ‘식민지의 지식인’인 꼬리표를 달고 다녔다.

또 하나 조선조 중엽에 지어진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경주부’조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압축되어 그 존재를 전해준다. 거기에 붙인 이석형의 시가 새롭다.

 

계림의 지나간 일 일찍이 들었는데, 묻노라.

옥적은 어느 시대에 만들었던고?

이야기 들으니, 신라의 태평시절에

태평풍월을 관현(管絃)에 실었네.

 

그때의 물건들 다 사라지고 지금가지 남기는 오직 이것.

귀신이 지켜서 완전무결하게 영구히 전하지 않았나?

내 생각을 모아 노래 한 곡조 부르려 하나,

곡조도 되지 않고 가사(歌詞)도 졸렬하네.

 

감은사와 대왕암, 그리고 선왕으로부터 신문왕이 받은 만파식적은 왕권의 강화를 염원한 저들의 정교한 스토리텔링 속 소품이었다.

 

권력의 끝

[196-213]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에 죽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 된 5년 뒤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년쯤 뒤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 문제는 마지막 혜공왕대에서 일어났다. 혜공왕이 재임한 16년 동안 다섯 번의 반역 사건이 일어나고, 결국 그것으로 왕도 죽임을 당할 뿐만 아니라, 왕위 계승이 태종 무열왕 후손에서 떨어져 나간다. 왕실의 비극은 그 외척의 비극을 수반했을 것이다. 김유신이 죽현릉을 찾아 울분을 호소한 바로 다음 해의 일이다.

죽현능의 주인공은 미추왕이다.

 

득오의 ‘모죽지랑가’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리고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인 동시에 삼국 통일 후 당해야 했던 화랑 출신들의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가 버린 봄을 그리워하자니

모든 것이 울어야 할 슬픔

아름답게 빛나시던

그 모습 갈수록 스러져 가도다

눈 돌릴 사이

만나보기 어찌 이루랴

님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다북쓱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님 그리는 마음은 다북쑥 구렁에서 잠을 자야하는 현실의 고단함. 또는 이 생을 마치고 돌아가면 한줌 흙 위에 피어날 풀과 꽃들만도 못한 무상함 앞에서 슬픔만 더할 뿐이다.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꽃과 여인 그리고 사랑의 노래

[224-226]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神物)들에게 끌려갔다”고 적고 있다.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꺽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 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라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이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이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

[226-

또 바다 가까이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바다용이 잽싸게 부인을 끌어다 바다로 들어가 버렸다. -삼국유사, ‘수로부인’조에서-

 

너무 아름다운 여자와 살아도 억울하다. 아름다운 이의 자태는 언제나 ‘눈도둑’들에게 노출되어 있어서, 훔쳐가도 잃은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순정공은 그 이상의 일을 당했다. 아예 부인을 빼앗긴 것이다. 여기에 한 노인이 나타나 ‘여론의 힘’을 가르쳐준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 표현되어 있다. ‘중구’란 곧 오늘날의 여론, 또는 민중의 소리라고나 할까?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그 죄 얼마나 큰가

내 만일 거슬러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을 쳐서 끌어내 구워서 먹을 테다

 

노래는 여러 사람의 행동을 일사분란하게 통일시키는 데도 필요했을 것이다. 다음 시대, 본격적으로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한 생산물로 유지하는 시대에 노래는 민요가 되었고, 민요가 노동 현장에서 불렀을 때 노래의 제의적 성격이 감소되는 대신 기능적 성격은 충분히 살아있게 된다. ‘해가’는 신가에서 민요로 넘어오는 중간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238-242]

월명사의 ‘도솔가’를 읽어보자

오늘 여기서 산화가를 불러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곧은 마음이 시키는 대로

미륵좌주 모셔 서 있거라.

 

첫째, 월명사는 화랑이었다. 그는 자신을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승려가 된 것은, 통일 후의 화랑들이 신분 변화를 보이는 예 가운데 하나다.

둘째, 월명사는 산화공덕에 필요한 노래를 향가로 밖에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는 화랑이 향가를 지어 부르는 주 작가층이었다는 사실과, 승려가 된 다음 굳이 인도식 염불을 외우지 않고도 승려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세 번째는 굳이 향가로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부르고, 그것이 효과를 나타냈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라 불교의 주체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제망매가>

 

생사의 갈림길

여기 있으니 두려웁고

“나는 갑니다“말도

못하고서 갔는가

어느 이른 가을 바람 끝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은 모르겠네

아, 미타찰 세상에 만날 나는

도 닦아 기다리리.

 

다만, 삶의 고통은 죽음이라는 운명적 환경이 만들어 준 것, 도 닦는 사람이라고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 한 잎에도 속절없는 인간의 생애를 비유한 솜씨가 비상하기만 하다. 바람은 다름 아닌 ‘이른 바람’이다. 아마도 이 대목이 핵심이리라. 태어나는 데는 순서가 있어 형 아우가 정해지지만, 죽는 데는 순서가 없는 것이고, 언젠가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한들, 이다지 이르게 찾아온 죽음이 비록 생사를 넘어서려는 구도자에게라 할지라고 심금을 울릴 일 아니겠는가.

 

[275-277] 달도 차면 기운다

왕의 입장에서, 이제 효용 가치를 넘어 또 다른 위협 세력으로 떠오른 장보고를 다른 신하들이 견제해 주기를 은근히 지대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배반과 배반, 속임과 속임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말년이다. 그것은 곧 실제 상황으로 벌어진다.

 

장보고는 8~9세기에 걸쳐 청해진 곧 지금의 진도, 완도, 신안 지방을 근거로 해상 왕국을 일으킨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이 지역이 중국와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요충지였으므로, 여기를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동지나해의 해상권을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장보고의 죽음도 죽음이려니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해상 왕국의 붕괴는 여러모로 아쉬움을 남긴다. 그의 최후가 어이없게도 권력다툼의 일개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데에서 더욱 안타깝다.

 

[278-281] 처용랑과 망해사

 

“서울에서 전국에 이르기까지 지붕과 담이 즐비하게 이어지고, 초가집이란 한 채도 없었다. 연주와 노래 소리 끊이지 않고, 사시사철 맑은 바람 불고, 비는 적당히 내려 주었다”고 태평스런 시대의 배경을 그리고 있다.

 

---> 소돔과 고모라 같던 서라벌의 향락과 사치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면서, 남편이 자리를 비운 집으로 외간 남자를끌어들이는 부인의 이야기를 차마 그렇게는 직설적으로 쓰지 못하고 돌림병의 침입 정도로 완화시킨다. 그래서 ‘처용가’는 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의 나내는 매우 아름다었다. 역신(疫神)이 이 여자에게 푹 빠져, 사람으로 변장을 하고 밤에 그 집을 들어와 남몰래 함께 자게 되었다. 처용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이르러, 침상에서 두 사람이 자는 것을 보고는,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렇다.

 

서울의 밝은 달밤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인가

본디 내 것이었던 것을

빼앗아 감을 어찌하리.

 

이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 앞에 나와 무릎 꾾고 말했다.

“내가 그대의 처를 탐내서 지금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시니, 감복하고 탄복할 일입니다. 맹서컨대, 지금부터 이후로는 그대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 때문에 나라안의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한 것을 몰아내고 좋은 일을 맞아들였다.

-삼국유사, ‘처용랑과 망해사’조에서

 

낯선 서울 땅에 와서 헤매다 제 처가 역신과 동침하는 현장을 목격해야 했던 불행한 사나이의 노래다.

 

---> 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왔거니와 그 가운데 일곱째 아들이 처용이다. 용은 그 아들을 왕에게 붙여 주면서 서울고 데려가 곁에 두면 클게 도움이 될 것이라 말한다. 왕이 그 같은 용의 가르침을 따랐음을 물론이요, 제 고향을 떠나 낯선 곳에 온 처용을 위해 벼슬도 주고 아름다운 아내도 소개해 준다. 바로 이 아내가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다음 왕조인 고려시대까지도 처용의 힘은 살아 있어, 탈을 만들고 그것을 쓰고 춤을 추고, 처음 노래는 그보다 몇 배가 길어져 불리는데, 정작 처용의 소식이 없다.

 

해괴한 시절은 왕조의 말년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구현하고자 애쓰는 진리와 자유의 간절한 소망이 빛을 바래는 순간, 욕망과 탐심이 정의의 자리에 슬그머니 앉는 순간, 혼돈의 안개는 가득 우리 사회의 해변에서 길을 막아선다.

 

[281]

처용은 지방호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지방 호족의 자식을 서울에 볼모로 잡아 두는 기인 제도가 신라에 있었거니와, 왕이 울산에 간 것이 모종의 정치적 사건 때문이라면, 일이ㅣ 해결되고 난 다음 자식을 데리고 가는 것은 전형적인 기인 제도의 볼모다.

 

[378]

먼 뱃길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서 석탑, 그것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우리는 인생을 항해에 비유하곤 한다. 바람과 파도 속에서, 또 대로 찬란한 태양과 밤하늘에 빛나는 별의 인도를 받으며 건너는 고해(苦海)다. 그 길을 지켜 주는 석탑.

 

[379-384]

왕후는 왕과 함께 150여 년을 살다가 죽었다. 서력 189년 3월 1일이라고, ‘가락국기’는 적었다. 나라 사람들이 마치 땅이 꺼진 것처럼 탄식하며, 구지봉 동북쪽 언덕에 장사지냈는데, 정작 가장 슬퍼한 사람은 수로왕이었다.

왕은 늘 베개 위에서 홀아비의 슬픔을 노래하며 오랫동안 탄식하였다. 결국 왕후가 죽고 꼭 10년이 지난 서력 199년 3월 23일에 죽었다.

‘가락국기’의 본디 지은이는 마지막에 명(銘, 조각할 명)을 지어 노래했거니와, 거기 이런 대목이 나온다.

 

기울지도 치우지도 않고

오직 한결같이 정밀했네

 

길 가던 나그네는 길을 사양하고

농사꾼은 밭 갈기를 양보해

사방이 모두 편안해지고

모든 백성이 태평성대를 맞았네

 

이윽고 풀잎의 이슬이 마르는 것처럼

장수하던 나이를 보전치 못해

천지의 기운이 변해지고

조야가 모두 슬퍼했네

 

그 발자취 금과 같았고

그 명성 옥 소리처럼 떨쳤네.

 

[411]

일연이 이차돈의 죽음을 노래한 찬에서 우리는 일연의 속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의에 죽고 삶을 버림도 놀라운 일이거니

하늘의 꽃과 흰 젖이여, 놀란 가슴을 치는구나.

어느덧 한 칼에 몸은 사라진 뒤

절마다 쇠북소리는 서울을 흔든다.

 

시인은 결연히 노래한다. 사라진 것은 오직 몸일 뿐이요, 쇠북소리에 실린 그의 자취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고.

 

[414]

일연은 대각국사 의천이 1091년 경복사에서 쓴 다음과 같은 시를 덧붙여 놓고 있다.

 

열반의 무릇 평등한 가르침이

우리 스님에게서 전해 받았네

애달프다, 방이 날아온 다음

동명왕의 옛 나라 위태로워졌네

 

삼국의 흥망을 불교역사주의적 관점에서 보려했던 일연의 태도는 의천의 이 같은 입장과 더불어 결론 내려지고 있다.

 

[417]

하루해를 온전히 받아 모신 신라의 돌에 등을 기대었을 때, 그 돌이 소곤거리는 말을 저는 잊지 못할 겁니다. 너의 등을 덮여 주려고, 너의 영혼을 위로해 주려고 천 년을 기다렸단다.

 

[454]

눈에 대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이게 했다는 학의 깃털은 곧 그를 출가로 이끄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그 깃털의 진짜 주인은 오대산의 다섯 성중이요, 그 가운데서도 문수보살이었으리라. 처음부터 문수보살의 계도가 걸려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인연이다. 도를 이루려고 해도 이루려는 자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이런 이야기렝서 확인할 수 있다. 도를 이루려는 일만이 아니다. 무릇 의지만으로 하는 사람의 일이란 얼마나 고달픈가.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그렇게 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 인연은 그렇게 오는 게 아닐까?

 

[456]

 

내 마음 오늘

절에 가서 절을 한다

잎 한 장 한 장 만들어지는 동안

온기가 없어 차가운

오랜 그 옛날 마룻바닥에 엎드려

 

일어난다 다시 쳐다본다

즐겁고 깨끗하고 늘 있는 나는

지난 봄이 사라진 숲 속에

가을의 마지막 시간 속에

덧없음만 항상하고 아름다워라

 

나 이 길로 다시 돌아오라고

새싹의 아픔으로 돌아가라고

잎 한 잎 한 잎 떨어지는 동안에도

모든 것 향해 절할 수 있도록

내 마음 오늘

절하며 간다.

 

시의 끝에 나는 이렇게 메모를 했다. “마음이 찾아갈 정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질투와 미움의 화신, 누구도 한 마음으로 즐겁고 깨끗하게만 살 수 없다. 치밀어 오르는 질투와 걷잡지 못할 미움, 그것이 기실 누구에 의한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생긴 문제일진대, 미움도 질투도 피가 끊는 젊음이라 변명하는 동안 영혼 깊은 데에서는 상처만 커간다. 그래 찢어진 마음이 찾아가 덧없음을 깨닫고 아름답게 치료받을 곳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470]

 

굴정역의 둥지 들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문득 한 사람이 매를 날려 꿩을 쫒게 하는 것을 보았다. 꿩은 금악향으로 날아 지나가더니 자취가 없었다. 매의 방울 소리를 듣고 찾아갔다. 굴정현의 관청 북쪽에 있는 우물가에 이르자, 매가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 안에 있는데 온통 핏빛이었다.

꿩은 두 날개를 펼쳐 두 마리 새끼를 감싸고 있었다. 매도 불쌍히 여기는지 잡지 않는 모양이었다. 충원공이 이를 보고 측은히 여기면서 느낀 바 있어 이 땅을 살펴보라 하니, 절을 지을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왕에게 아뢰었다. 관청 건물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그 땅에 절을 지었다. 이름을 영취사라 하였다.

 

정산국은 지금의 동래다. 온천으로 유명하기는 벌써 그 때부터였는가 보다.

자신은 죽더라고 새끼들을 지키겠다는 어미 꿩의 애타는 모습이 충원공의 마음을 흔들었다. 더 이상 공격을 하지 않는 매의 모습이 더욱 감동적으로 겹쳐졌을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이 모두 놀라웠다. 한낱 짐승으로도 자비를 아는 짐승이며, 욕심을 내자면 한없을 인간으로도 깨우침의 무릎을 꾾을 줄 아는 사람이 어우러진 장면들이다. 꿩이나 그 새끼 몇 마리를 살렸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살린 어떤 메커니즘이 중요한 것이다. 신라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드런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자랑스럽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72-486]

백월산 연기 설화로 시작하는 이 조는 부득과 박박이 각각 미타불과 미륵불을 근실히 구하다 함께 왕생하는 이야기다. 두 사람은 본디 아내를 데리고 살다가 역외가상(域外假想)이 있어 속세의 인연을 버리고 산중으로 숨는다.

 

어느 날, 해는 저물어 가는데 나이 스물에 가깝고 얼굴이 아리따운 한 낭자가 산중 박박의 처소를 찾는다. 그러면서 하룻밤 자고 가기를 청한다. 박박은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절은 개끗해야 하는 것이니, 여자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낭자는 피곤한 심신을 이끌고 부득의 처소를 찾는다. 부득은 머뭇거리면서 이 밤중에 어디서 오는가 묻는다.

 

부득은 “이곳은 여자와 함께 있을 곳이 아니나, 중생을 따르는 것도 역시 보살행의 하나일 거싱오, 더구나 깊은 산골짜기에 날마저 어두웠으니, 어찌 소홀히 대접할 수 있겠오.” 라고 말하며 여자를 들인다. 게다가 부득은 여자를 자고 가게 했을 뿐만 아니라, 밤이 깊어 여자에게 산기(産氣)가 있자, 이 난처한 경우에도 정성스레 시중을 들어 준다. 이 때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지극해서’였을 뿐이다. 그런데 낭자의 출산을 위해 준비해 준 목욕물이 금빛으로 변한다. 낭자는 스스로 자기가 관음보살이라 밝히고, 스님의 대보리가 이뤄지도록 돕겠다고 말한다.

 

간밤 계를 더럽혔으리라 생각하고 비웃어 주려 부득의 처소를 찾아온 박박은 막상 도착해 부득을 보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다. ‘나는 마음 속에 가린 것이 있어서’ 성인을 만나고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시인한다. 변통 벗는 원리원칙은 득도의 순간을 막고 말았던 것이다. 부득의 도움으로 남은 목욕물에 몸을 담근 박박도 함께 금빛 보살이 된다.

 

여자는 먼저 박박이 사는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런 노래를 지어 바쳤다.

 

가다 보니 해는 떨어지고 온 산이 저물어

길은 끊어지고 마을은 멀어 사방이 막혔다오

오늘 밤 몸을 맡겨 암자 아래 자려 하니

자비로운 스님께선 화내지 마세요

 

거절을 당한 여인이 부득에게 또 다른 노래를 바친다.

 

날 저문 산길에

가는 곳마다 사방이 막혀 있네

소나무 대나무 숲은 그늘이 걸어 가고

골짜기 시냇물 소리는 낯설기만 한데

자고 가기를 바라는 것은 길을 잃어서만 아니요

스님께 계율을 일러 주려 함이네

내 청을 들어만 주실 뿐

어떤 사람인가는 묻지 마오.

 

중생의 뜻을 따르자고 박절히 내쫒지 못한 것, 맑은 마음을 지키며 벽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염불을 외운 것, 아이를 낳으려는 여자 옆에 애처러운 마음으로 가만히 등불을 피워 놓은 것, 두려운 마음 한편 가득했으나 새로 물을 끊여 산후의 여인을 씻긴 것 등 부득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비록 관음보살이 도와주지 않았더라고 이미 도를 이룬 자의 마음씀을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 그 자체가 관음보살의 헌신인지도 모른다.

 

일연은 달달박박을 두고 쓴 시다.

 

푸른 빛 떨어지는 바위 앞, 문 두드리는 소리

날 저문데 주가 구름 속 빗장 문을 당기는가

남쪽 암자 가까운데 그리고 갈 것이지

푸른 이끼 밟고서 내 뜰을 더럽히지 마오.

 

여자를 암자에 들여놓지 않겠다는 것은 일편 계를 지키는 출가자의 바른 행동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속에는 이기적인 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기심은 독선만 키울 뿐이요 자비심이란 찾을 수 없게 한다. ‘남쪽 암자로 가라’든지, ‘푸른 이끼 밟은 발’이라고 낭자를 몰아친 것이 그 증표다. 계율이 인간보다 앞서는, 그래서 매정하게 보이기만 하는 도의 낮은 차원을 일연은 이렇게 표현했다.

 

골짜기 날은 이미 어두웠는데 어디로 가리

남창에 자리 나니 머물다 가오

밤 깊어 백팔 염주 염불도 깊어만 가는데

이 소리 시끄러워 길손의 잠 깰까 두려워라.

 

노힐부득을 두고 쓴 시다.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다면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참 보살행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참 보살행이란 중생의 곤고한 처지에 동참한다는 것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는다. 자꾸만 갈라지는 생각과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염불소리는 밤 깊을수록 높아갈 수밖에 없다.

 

일연이 쓴 찬시 속에서 이런 절묘한 표현을 얻는다. 또한 편찬자로서 모아 놓은 시들, 곧 향가, 한시, 민요 등은 모두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이야기의 맥락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살이의 고통이 무엇이며 역사의 바른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고민하고, 그것은 뜻밖에도 그가 쓴 찬이나, 인용해 놓은 다른 시와 민요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삼국유사’야말로 이러한 시로 인해 완성되는 책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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