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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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 역사 --- "역사의 현장, 지금 만나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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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역사 속 한 장면 - 일본군 위안부, 자발이냐 꾀임에 의한 동원이냐?
3-2. 어떻게 쓸 것인가 – 역사기록,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먹먹함
3-3.
3-4. 만나러가야 할 길 – 나를 붙잡아 끄는 역사 속 사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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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길을 걷는다.
먹장구름 잔뜩 낀 회색 하늘은 하루 종일 웅웅거리며 내 머리 위로 비를 쏟아 붓는다. 비가 와도 나는 묵묵히 혼자 길을 걷는다. 그런데 자꾸만 뒤가 퀭긴다. 멈춰 섰다. 휙 뒤를 돌아보았다. 퍼붓는 소낙비 사이로 내가 보이는구나. 내가 살아온 삶의 여정이 ‘과거(過去)’라는 이름으로 희미한 형체만 보이는 저 산 너머까지 줄줄줄 줄을 서며 놓여있다.
과거와 역사
과거는 즐거운(甘)과 고통(苦), 편안함(安)과 노여움(危) 등을 간직한 살아온 나날들의 ‘모든 사건(事件)’들이다. 소낙비에 가려 과거의 모습들은 어렴풋하다. 하지만, 내 몸의 세포들을 강렬하게 자극하고 지나갔던 ‘어떤 사건(事件)’들은 여전히 내 몸의 느낌 속에 촘촘히 박혀 나를 자극한다.
혼자 걷는 나의 어깨를 툭툭 친 놈이 바로 요 녀석들이다. 나는 ‘과거(過去)’라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요 녀석들 중 몇 몇을 소나기 사이를 뚫고 들어가 현재(現在)로 데리고 나온다. 이들은 내 인생 여정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준 과거 시간의 조각들이다. 내 삶의 ‘주요 사건(事件)’이고 지울 수도 숨길 수도 없는 ‘극명한 사실(事實)들’이다.
나는 기록을 한다.
현재를 걷고 있는 나를 자극하는 과거의 어떤 사건을.
이 순간 나는 내 인생의 ‘역사가(歷史家)’가 된다. 나의 역사(歷史)가 쓰여 진다.
나의 ‘과거’는 소낙비를 뚫고 나와 ‘역사’라는 이름으로 내 역사책에 ‘깔 맞춤’ 정리된다.
스스로 역사가 되기
집에 왔다. 여전히 나는 혼자다.
필사(必死)의 삶을 불멸(不滅)의 이름으로 남기고 싶은 건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만이 아니다. 로마의 시인이자 역사가 ‘오비디우스’만이 아니다. 그들의 ‘영원(永遠)의 향한 몸부림’에는 애절함과 한이 베여있다. 그들을 만나면 존경스럽지만 어떤 서글픔이 나에게 전염된다.
나는 그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 좀 더 유쾌하기 살고 싶다. 삶의 격정은 있으되 크게 동요하지 않는 내공 있는 내가 되고 싶다. 내가 닮고 싶은 역사가는 어디 없을까?
사료
나는 얼굴과 팔에 묻은 소낙비 물기를 닦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나도 역사가들처럼 내 인생을 영원 속에 기록하고 싶다.
내 인생의 ‘주요 사건과 사실’들은 역사기술을 위한 ‘사료(史料)’다. 역사가가 과거로 들어가 장을 봐 온 ‘엄선된 재료’이다.
나는 이 사료들을 어떤 방식으로 정리할까 이것저것 고민해 본다.
첫 번째 방법은, 사료로 증명되는 객관적인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기록해 두고 내 역사에 대한 이해와 판단은 내 역사를 궁금해 하는 후손들의 몫으로 남겨둔다. 하지만 이것은 재미와 유쾌함을 추구하는 내 삶의 방식에 안 맞다.
둘째는 엄선한 재료, 사료들 중에서 현재의 내 삶 이력을 폼 나고 의미 있게 해 주는 것들만 뽑아서 다루는 것이다. 어떤 관점을 가지고 나의 역사를 잘 배열한다. 이 방법은 역사의 객관적 사실과 나의 주관이 만났으니 내 역사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모두 채워진 듯하다.
그런데 이것 또한 영 불만스럽다. 주관적 판단에 따라 객관적 사실을 나열하다보면 이야기에 듬성듬성 구멍이 난 자리가 보인다. 더구나 판단과 객관, 사실의 저변에 가려져 깡들이 무시당하는(?) 내 삶에 스며있는 감수성들이 ‘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를 써줄 것을 원한다. 그렇다면 조심스레 한 걸음 더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
역사적 상상력
셋째, 역사적 상상력(想像力)을 불러와서 ‘있음직한 이야기‘를 역사에 도입하는 것이다. 과거에서 따온 역사 재료를 현재와 연결시키되 거칠고 뻣뻣한 사료들에 ’상상력’이라는 색채를 입혀본다.
역사와 소설은 분명히 다르다. 역사에는 엄연한 객관적인 사건과 실제적 사실의 재료인 ‘사료’가 있다. 소설은 허구(虛構)의 세계다. 그런데 내 인생의 역사를 쓰는데, 사료만으로는 과거의 중대하고 특별한 사실을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할 수가 없다.
역사가, E. H. 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말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내가 만나는 것이다.
역사의 앞 뒤 사건의 인과관계(因果關係)를 살펴서 ‘아마 이랬을 거야’하는 개연성을 더하며 과거의 사실을 추측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 내가 원하는 방법이 숨어있다. 소설의 허구적 이야기 기술이라는 ‘작가의 상상력’과 ‘역사의 사실적 사건’이 만나서, 진짜 사실보다 더 진짜를 꿰뚫는 ‘통찰이 담긴 내 인생의 푸른 역사’가 쓰여 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나는 <삼국유사>를 쓴 승려 역사가 ‘일연’의 역사서술 방식이 내 눈에 끌린다. 일연은 우리 민족의 시조 단군에 얽힌 고조선에 대한 기록을 비롯하여, 삼국시대에 숨어있는 평범한 민초들의 이야기, 왕들에 얽힌 굵직한 사건들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풀어놓는다.
그의 역사 이야기는 독자적이고 주체적이며 잔잔한 아름다움이 있다. 역사를 기술하되 개인의 감정적 격정에 치우지지 않고 인생의 감(甘), 고(苦), 안(安), 위(危)를 그려놓는다.
자존(自尊)이 중심에 잡힌 상상적 역사 쓰기.
나는 일연의 역사서술 방식을 이렇게 부르고 싶다. 거기에는 과거의 온갖 역경과 고난도, 현재 이 순간을 살아가는 ‘삶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그는 사료라는 역사 재료에 역사적 상상력을 양념으로 치면서, 이미 죽은 과거를 현재의 나를 따뜻하게 통찰하는 혜안(慧眼)으로 사용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먹먹함
소낙비가 그쳤다.
하루 종일,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를 발견한다.
요 며칠 간, 소나기 굵은 빗줄기가 나의 내면을 사정없이 갈기고 지나갔다. 참을 수 없다. 먹먹하다. 내 안에 풀리지 않는 터질 것 같은 덩어리들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소나기의 거침은 야생(野生)과 닮았다.
비 내리는 밤, 나는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현재로 교신한다. 내 안에 살아있는 야생을 조심스레 다루며 내 푸른 역사의 조각들을 맞춰보고 싶다.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필멸의 삶을 불멸의 이야기로 만들 나의 기록은 계속 되어야 한다. 늘 두려움이 밀려오지만, 생각만 해도 짜릿하게 빨려드는 ‘역사적 상상’의 힘을 빌려.
2013년 7월 8일
서은경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