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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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은 일반인들이 대상이 아닌, 현장에서 영업하는 보험에이전트를 대상으로 쓰는 글입니다.
특히 보험에이전트가 VIP시장 공략을 위해 왜, 어떻게,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실무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김홍영, 강미영 연구원의 주도로 급조된(?) 모임에서 약속한 결의(!)를 지키기 위함입니다. 날팸은 쓴다~
제1장 동면
제1절 개인영업, 딜레마에 빠지다.
괴물이 출현하다.
한국경제는 90년대 후반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경제적 한파를 경험하게 된다. 바로 그 유명한 IMF 구제금융이라는 녀석이다. 한국 경제는 과거에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지독한 몸살들을 온몸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고금리, 고환율, 급속한 투자와 소비 축소, 대량실업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당시 한국 보험시장도 이런 초유의 환경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보험감독원은 재무건정성이 부실한 생명보험회사에 대해 경영정상화 계획서 제출을 명령했으며, 계획서를 이행하지 못한 회사들을 가차없이 퇴출하였다. 먼저 4개 보험회사(국제생명, BYC생명, 태양생명, 고려생명)가 퇴출되었으며, 대한생명은 3조 5,500억의 공적자금을 세 차례나 수혈받았다. 동아생명이 금호생명에, 태평양생명이 동양생명에, 한국생명과 조선생명이 현대그룹에, 영풍생명은 영국 푸르덴셜에, 한일생명은 KB생명에, 대신생명은 녹십자생명에 팔렸다. 이후 SK생명은 미래에셋생명에, LIG생명은 우리아비바생명에 넘겨졌다. 지금 보면 이름도 낯설은 회사들이기는 하지만, 건강하지 못한 보험회사는 추풍낙엽처럼 날라가 버렸다. IMF 이후 보험업계에는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적자생존의 논리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살아남을 회사는 남고, 죽을 회사는 조용히 사라졌다.
내가 직접 가방을 들고 보험영업을 시작한 것은 이런 IMF라는 유령이 지배하는 시기였다. 2000년 4월, 구조조정이 한창 진행되는 시기에 보험업계에 입문했다. 당시에는 이러한 보험업계의 구조조정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오로지 관심은 샐러리맨의 한계를 벗어나, 새롭게 변화하고 싶은 욕망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욕망을 채워나갈 수 있는 곳을 고민하다, 선택한 곳은 바로 미국계 회사였던 P사였다. 이 회사는 다른 보험회사와 많이 달랐다. 대졸남성조직이라는 타이틀을 필두로 전문적인 보험영업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회사가 지향하는 경제적 성공과 가치적 성공이라는 두 가지 테마는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고 새롭게 출사표를 던졌다. 일하는 것이 쉬는 것이었고, 쉬는 것이 일하는 것이었다. 지금도 문득문득 그때가 오랜 사진처럼 되살아나곤 한다. 성공을 향한 열정, 변화를 향한 갈망 그리고 새롭게 보험역사를 쓴다는 자부심. 이 모든 것들이 중첩되어 살아 움직였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꿈틀거림은 성과로 이어졌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당시 함께 근무했던 동료 대부분이 보험컨설턴트의 첫 번째 목표인 백만달러 원탁회의(MDRT) 회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억대연봉은 당연한 것이었고, 수입차를 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화려한 시절이었다. 축배의 향연은 계속될 것으로 믿었고,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13년이 흘렀다. 지금도 변함없이 보험으로 밥을 먹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주변 누구도 축배의 향연이 계속될 것이라 자신있게 말하지 않는다. 침묵할 뿐이다. 그만큼 지금의 영업환경이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다.
잠시 아래의 도표를 보자. 2000년 기준으로 전체 생명보험판매 채널별 초회보험료 비중은 설계사 62.9%, 임직원이 34.2%를 차지했다. 대부분의 생명보험 판매는 전속설계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 보험판매 채널별 초회보험료 비중 추이(단위:%) >
구분 |
2000 |
2003 |
2005 |
2008 |
2010 |
설계사 |
62.9 |
40 |
39.1 |
39.7 |
23.3 |
대리점 |
2.9 |
7.4 |
9.6 |
10.4 |
7.8 |
임직원 |
34.2 |
9.9 |
4.7 |
3.1 |
1.2 |
방카슈랑스 |
- |
39.7 |
46.3 |
46.8 |
67.5 |
기타 |
|
3.1 |
0.3 |
0.1 |
0.2 |
자료 : 생명보험협회, [생명보험], 각 연호
2003년, 생명보험업계는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정부가 추진했던 금융겸업화의 일환으로 은행의 보험판매가 시작된 것이다. 이때부터 은행, 증권, 상호저축은행, 특수은행 및 신용카드사 등의 판매망을 갖춘 금융회사에 보험판매가 허용된 것이다. 금융겸업화의 명분은 금융소비자의 선택권과 보험료 인하를 통한 혜택 그리고 편의성을 제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적 기대효과와는 달리 방카슈랑스는 은행의 수익원 다변화와 극대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은행의 파괴력은 놀라웠다. 방카슈랑스를 도입한 2003년 첫 해에 생명보험 판매 40%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기록의 이면에는 은행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꺾기 판매가 유효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충격적인 경제기사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2012년 12월 말 기준으로 전체 생명보험 상품 판매 비중에서 방카슈랑스가 차지하는 비율이 74%를 넘어선 것이다. 무려 74%다! 반면에 설계사의 판매비중은 19.5%로 떨어졌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15만 명이 넘는 생명보험 컨설턴트들이 전체 시장에서 20%도 안되는 파이를 가지고 나눠먹고 있는 것이다.
무서운 사실은 방카슈랑스의 파상적인 시장확대가 멈추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방카슈랑스의 74%라는 점유율은 무사(武士)로 치면 한 자루의 칼로 승부한 결과다. 즉 연금, 저축성보험, 질병보험으로만 거둔 성과다. 만약 은행이 보장성보험이라는 칼자루를 추가로 사용할 수 있다면, 그 공격력은 상상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방카슈랑스의 약진은 은행에 막대한 수익원을 안겨주었으며, 반대로 보험컨설턴트의 수입과 판매비중은 약화되었다. 한국 보험업계를 이끌었던 보험컨설턴트의 일용한 양식을 방카슈랑스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10년 만에 먹어치운 것이다. 무섭다, 방카슈랑스. 문제의 심각성은 이 괴물의 식탐이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로 뛰면서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의 일용한 양식을 어디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