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뎀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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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저녁 9시 42분을 좋아한다. 달리다 쉬다 하면서 동네 공원 앞 운동장을 15바퀴 돌고, 줄넘기를 300번 하고, 공원에 줄줄이 놓인 운동기구를 사용법에 맞춰 하고 나서, 공원 옆 놀이터 그네에 올라 앉는 시간이다.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면서 그네에 시동을 건다. 점점 높이 올라가던 그네는 다리 운동을 멈추는 순간 올라가던 속도를 멈춘다. 나를 철봉 높이까지 밀어 올리던 그네가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갈 때쯤 나는 다시 다리를 접었다 편다. 오늘은 이제 그만! 내가 그네에서 내려오고 싶을 때까지 이 시간은 계속 된다.
두 달 째,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서서 운동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쏙쏙 들어가는 뱃살이 주는 뿌듯함도 아니요, 피곤해서 골아 떨어지는 단잠도 아니다. 바로 운동의 마지막 단계인 그네타기 때문이다. 미끄럼틀 위의 풍향계가 가리키는 바람의 방향과는 상관 없이 그네의 오르락 내리락에 따라 바람이 느껴진다. 아주 오랜 기억을 더듬어 동요를 흥얼거려본다. 어둠 속에서 낯선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도 배웠다. 내 그네 옆 자리에는 매일 다른 사람이 앉는다.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지 않아도 마음을 열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됐다. 첫 날 만난 친구는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아이였는데, 그 아이가 탄 그네 높이만큼 올라가려고 속도를 조절했다. 우리는 같은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같은 속도로 내려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둘 다 신나게 웃었다. 어제 만난 친구는 자기가 그네를 서서 탈 수 있다는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 했다. 그 친구가 그네 위에 꼿꼿이 올라 섰을 때 위험하다고 그네는 앉아서 타야 한다고 충고하고 싶었지만 손 꼭 잡아야 해. 라며 웃고 말았다.
이 시간이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그네타기는 내가 하루에 하는 일 중에 유일하게 내 마음껏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이제 그만!을 외칠 때까지 계속 해도 된다. 어느 날 되돌아 보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시간과 공간 또 사람들의 시선으로 통제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잘못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온통 잘못만 저지르는 것도 아닌데, 왜 내 마음껏 살아보지 못하는 걸까.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하루라는 시간이 다 흘러가는데도 무엇 하나 내 마음껏 해 본 게 없다는 자각은 나를 한없이 슬프게 한다. 그리고 그네타기는 그 깊은 슬픔에서 나를 건져내 준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작은 시간이 나에게는 위로가 된다. 이 하나를 나에게 허락하고 나면 하지 말라고 나를 옭아매는 일들 열 가지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하루에 하는 수 십, 수 만가지 중 단 하나라도 내 마음껏 해 볼 수 있다는 단순함이 주는 충만함이다.
하루에 하는 일 중 한가지는 내가 하기 싫을 때까지 해 보자는 이 결심, 실천하기에는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좀 특별한 시간, 준비된 상황에서만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이 취미, 어쩌면 나는 오래 전부터 즐겨왔다. 나는 욕실에서 딱딱한 비누를 손에 넣고 돌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손을 씻으러 갈 때면 오랫동안 비누를 손 안에서 돌리면서 녹인다. 지금은 5살이 된 조카가 3살이었을 때, 그 아이의 손을 씻겨준 적이 있다. 잡으려고 하면 자꾸 미끄러져 도망가는 비누가 재밌고 신기해서 욕실이 떠나가도록 까르륵거렸다. 비누를 손에 넣고 돌릴 때마다 그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이 좋아서 내 얼굴에서 빙긋 웃음이 사라질 때까지 비누를 손에서 돌려본다. 내가 욕실에서 비누 거품을 손에 가득 묻히고 있을 때 그 누구도 나를 찾은 적이 없다. 나를 즐겁게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그러니 내가 맘껏 즐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때는 마냥 그 시간이 좋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보다도 뭔가를 내 마음껏 즐겨볼 수 있는 자유로움이 더 나를 위로 해 준 것 같다.
누구에게나 이런 작은 순간들이 있으리라. 하루에 과연 몇 가지 행동을 할까? 그 중에 딱 하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만큼 오랫동안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일을 선택하고 싶을까? 한 순간이라도 나에게 기쁨이었던 순간, 그 시간들을 늘려보는 거다. 아무도 나의 즐거움을 방해할 수 없는 일과 시간을 찾아내어 맘껏 할 수 있도록 나에게 허락하는 일, 해 보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근사한 시간이 된다. 책 읽을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운동할 시간이 충분치 않다고 우리의 하루에서 기쁨이 모조리 사라질 수는 없다. 아주 작은 기쁨, 내 마음껏 해 볼 수 있는 한가지를 찾아 즐기는 것만으로도 내 기분을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니 나에게 그 시간을 허락하자. 걱정하지 말아라.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어려운 만큼 형편 없는 사람도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니까.
아 참, 내가 두 달 내내 하루도 빠짐 없이 운동을 했다고 상상하지는 마시라. 저녁 약속 있는 날 빼고, 비 오는 날 빼고, 야구가 연장 12회까지 꽉꽉 채워서 너무 늦게 끝나는 날 빼고. 괜히 귀찮은 날 빼고. 그리고 하루도 빠짐 없이 했을 뿐이다. 이 취미의 가장 큰 매력은 내가 하기 싫은 날에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