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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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나의 것이라고 가슴이 벅차오를 때의 느낌을 언제 가져보았을까? 세상이 나의 것이란 느낌을 받게 했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다. 한때 화가였던 주인공 미셸은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그녀는 눈을 잃은 슬픔으로 가족과 연인에서 멀어지고 방황 중이었다. 알렉스는 옷 한 벌, 신발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노숙자로 보수공사중인 퐁네프 다리에서 살고 있었다. 알렉스는 파리에서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버려진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미셸과 알렉스는 우연히 퐁네프다리에서 만났고 사랑에 빠진다.
미셸과 알렉스는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다리에서 쓰레기더미들과 함께 뒹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생활은 멘탈붕괴였다. 그들은 카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커피에 수면제를 타서 돈을 훔치고, 루브르 박물관에 몰래 들어가고, 경찰의 보트를 훔치는 등 범죄를 저지른다. 미셜은 이러한 삶속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시력을 잃는 것이 더 두려워 방황하는 자신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며 마지막 시력이 남아있는 순간까지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려 할 뿐이다.
어느 날 밤 퐁네프다리 위로 아름답고 거대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프랑스 대혁명 200주년을 맞아 기념하는 불꽃놀이였다. 불꽃의 화려함 속에서 미셸과 알렉스는 미친 듯 춤을 춘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의 선율에 따라 불꽃이 만들어내는 찰라의 아름다움과 하나되어 춤을 춘다. 이 순간 바로 그들은 공사 중인 퐁네프 다리위에서 열광적인 몸짓으로 그들의 존재를 표현한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이 그들의 것이었다.
시력을 잃어가면서 삶에서 도피하려는 미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노숙자로 살아가는 알렉스, 인적이 끊어진 공사 중인 퐁네프다리,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먼지로 뒤덮인 기억의 창고에 처박힌 영화 ‘퐁네프 연인들’.
존재한다는 것은 잊혀져가는 것이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빛깔과 향기에 합당한 이름을 불러주게 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의 것이란 느낌은 바로 나의 빛깔과 향기로 이 순간을 매혹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나의 기억에서 잊혀져있던 퐁네프다리를 다시 아름답게 일깨워준 작가가 있다. 대지미술가 크리스토이다. 크리스토는 1985년 파리 센느 강의 퐁네프다리를 천으로 덮고 끈으로 묶는 퍼포먼스를 했다. 이 퍼포먼스를 기획하고 설득하는데만 10년이 걸렸다. 많은 반대와 어려움을 극복해내면서 크리스토는 퐁네프다리는 천으로 덮고 끈으로 묶을 수 있었다. 크리스토는 보름동안만 퍼포먼스를 했다. 보름이 지나 포장을 제거했고 다리는 원상으로 돌아갔다. 보름 동안 포장되어 있던 다리를 통해 크리스토는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자 했다. 예술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곳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길과 건물들 속에 살아 숨쉬는 것이며 또한 예술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순간적이라는 사실과 쓸모없고 잊혀져가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부각시킴으로써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된다는 메시지다. 이러한 예술을 통해 사람들은 향수에 젖게 되면서 잊고 살았던 자신을 찾게되고 회복하고자 한다. 한작가의 천을 덮는 행위를 통해 잊고 있던 퐁네프 다리가 되살아나고 옛 추억도 되살아난다. 한 때 불꽃으로 피어올랐던 순간들이 떠오르고 다시 삶에 불꽃을 쏘아올리고 싶다는 욕망도 피어오른다.
일상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이다. 죽음에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새로운 환상을 창조해야 한다. 크리스토는 다리에 베일을 씌움으로써 새로운 환상을 창조으로써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미의 창출이 무엇인가를 각인시켜주었다. 어찌보면 글도 환상을 창조하는 것이지만, 글이 만들어내는 상상의 세계는 무미건조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정신적인 샘물로 여겨진다. 요즘처럼 사실적이고 건조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환상을 창조하는 것은 더 가치 있는 작업이다. 환상을 창조하되 자신의 빛과 향기로 창조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