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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5일 00시 02분 등록

세차게 내리던 비가 잠시 호흡을 고르는 틈을 타서 숲을 거닌다. 물기를 한껏 머금은 건강한 나무의 기운, 잎사귀, 새소리 그리고 사각거리는 나의 발자국과 뒤따라오는 흔적들. 도시의 삶에 찌든 찌꺼기들을 배출하듯 산책을 하였다. 이런 날에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나도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기가 은근히 그리워진다. 창가에 부딪치는 방울방울이 꼬마 아이들 미끄럼을 타는 마냥 슬라이딩을 하는 가운데, 찻집 안에는 연인들 혹은 가족들이 깔깔 거리며 수다를 나눈다. 대화, 차 한 잔, 그리고 스피커에서 울려 나오는 친근한 팝송 한가락.

그날도 이런 날씨였다. 이런, 우산을 잊고 나왔다.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 살 하나가 부러진 비닐우산을 집어 들고 슬리퍼를 끌며 전화를 걸러 나간다. 실탄인 동전을 파란색 추리닝 주머니에 잔뜩 챙겨 넣고. 공중전화 부스 앞에는 명절 고향 가는 차표를 끊는 날인마냥 벌써 많은 이들이 장사진이다. 그래도 어쩌나 줄을 서야지. 기다리다보니 고민의 선택 시간이 찾아온다. 옆줄 인원이 적은데 바꾸어서 설까. 이럴 땐 그분에게 여쭈어 보는 것이 최고이다. ‘어느 줄에 설까요. 하느님께 물어봅시다.’ 그렇군. 두 번째 줄이야. 그런데 아뿔싸. 머피의 법칙은 여기서도 적용되는 법. 원래 서있던 줄에서 쾌속으로 사람 숫자가 줄어든다. 재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야 될까. 언쟁이 벌어진다. 전화기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는 통에 뒷사람이 부스 문을 두드렸더니 그것이 눈에 거슬린 모양이다. 살벌하다. 전화 한번 걸다가 자칫하면 싸움이 날판. 험악한 분위기속에 드디어 나의 차례. 빨간색 수화기를 들고 동전 투입 그리고 다이얼을 손가락으로 돌린다. 짜르륵 착. 짜르륵 착. 기재된 숫자에 따라 원위치로 돌아오는 흐름의 여운. 느림 혹은 빠름. 그 속도는 우리네 삶을 닮았고 현재의 시대는 과부하의 강요를 요구하기도 한다. 결과물을 내기 위하여 좀 더 생산성 있게 좀 더 스피드하게. 느린 속도로 감겨지는 그 다이얼 소리가 나의 가슴에 닿는다. 그것은 통화를 하기 전에 일어나는 일종의 워밍업 예식. 본게임에 들어가기 전 긴장됨의 무장해제를 시키고 어떤 내용과 무슨 말을 할 것인지를 사전 내면적 갈무리를 하게 해준다. 때론 조금의 답답함과 안타까움, 즉답과 즉시 반응을 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약간의 인내심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세상에 정답은 없듯 그때는 우리네 삶이 그러했듯 그렇게 기다렸었다. 신호가 간다. 꼴깍 침이 절로 넘어간다.

“여보세요.”

반가운 목소리이다.

“어떻게 지내니. 나는 잘 있다. 너도 잘있제.”

몇 마디 대화하지도 않았는데 시외전화라는 명목 하에 그놈은 돈에 환장한 몬스터로 변신한다. 철컥 철컥. 며칠을 굶었는지 잘도 동전을 먹어치운다. 어쩐다. 통화를 하면서도 나의 손은 추리닝안의 주머니 속을 헤집어 본다. 하나둘 동전 개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젠장.

“여보세요, 여보세요…….”

통화가 끊어졌다. 어쩐다. 뒤에 사람을 흘낏 돌아다본다. 인상 더럽게 생겼다. 어떡하지. 양해를 구해야하나. 그렇지 않으면 다시 새롭게 끝으로 가서 기다란 줄을 서야 하는데. 앞서의 사건 여운이 있기에 망설이다가 양해를 구해본다.

“제가 멀리 지방 애인하고 통화하다가 끊어졌는데 한통화만 더하면 안 되겠습니까.”

얼굴 미간이 쭈그러진다. 별로 당기지 않는 눈치이다. 짜식. 저는 연애 안 해봤나. 손목시계를 쳐다보더니 크게 인심 쓰는 양 양보를 한다.

“그럼, 3분 안에 마치는 겁니다.”

다시 동전투입. 이럴 때는 외국이 부럽다. 왜 우리나라는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걸까. 다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솜털같이 보들보들한 사연들이 나의 애간장을 태운다. 한주의 풍경. 어떻게 살았는지. 별일은 없었는지. 밥은 잘 먹는지.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좋지 않을 때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그녀. 끼니를 잘 챙겨 먹으라는 그 말에 가슴이 짠하다.

“그래, 다음 주 심야 버스로 내려갈 테니까 그때 보제이.”

뚜뚜뚜. 이런 할 말이 남았는데 시팔. 욕이 나온다. 아쉽다.

 

자명종 소리에 졸린 눈을 비비고 라디오 전원을 켠다. 나의 하루는 파트너인 그와 함께 시작이 된다. 그런데 그것이 고장이 났다. 그러다보니 밥을 먹고 난 후 물을 마시지 않은 냥 무언가 허전하다. 그 허전감을 채우기 위해 TV를 켠다. 간밤 일어난 사건 소식과 실시간의 신속한 뉴스. 그럼에도 허전하다. 얼마 후 친구로부터 새로운 파트너를 소개 받았다. 역시 물 건너온 제품이 다르구먼. 물리지 않는 사각형 빈티지의 핑크빛 스타일. 전원 스위치, 볼륨, 다이얼. 심플하다. 원하는 주파수를 맞추고 음량을 높인다. 스피커 용량이 제법 크다. 사람에게는 여러 감각이 형성되어 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NLP(Neuro-Linguistic Programming)에서는 이 감각이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다고 본다. 마늘님의 경우에는 시각이 발달되어 있다. 한번 보고 스케치한 것은 사진기를 찍듯이 웬만하면 기억을 해낸다. 이 능력은 자동차 운전을 하는 경우에 무척 요긴하게 활용된다. 내비게이션을 사용치 않아도 한번간 곳은 어렵지 않게 목적지를 찾아갈 수 있기에. 나의 경우는 반대이다. 흔히들 말하는 길치이다. 몇 번이나 찾아가도 아리송이며 안개 길을 헤맨다. 혼자 길을 찾아가는 경우에는 여지없이 진땀을 흘린다. 그렇기에 눈으로 보고 무엇을 익히는데 남보다 배의 학습 노력이 요구되어 진다. 반면 나는 청각이 예민하다. 아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언제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 그것을 들었는지가 기억이 올라온다. 어릴 적 획일화된 시각을 활용한 교육이 아닌 청각을 응용한 접근법으로의 공부방법이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적잖은 수혜혜택을 누렸을 것이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해서 나는 라디오란 매체를 좋아한다. 자그마한 기기에서 흘러나오는 DJ의 목소리와 여러 음악들은 그때의 시간과 공간 역사 속으로 초대장을 발송한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던 영화 <써니>에는 풋풋한 여고생들이 자신들의 사연을 방송국에 보내는 씬이 있다. 밤의 디스크 쇼 음악 방송에서 이를 나레이션하는 이종환 DJ 그리고 환호하는 소녀들. 표현의 자유가 많지 않았던 그때였기에 라디오는 해방의 창구 역할도 하였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그를 비롯하여 두시의 데이트의 김기덕,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이문세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DJ들은 그 시대의 마음과 애환을 어루만졌다.

 

누구의 잣대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양분화로 나뉜다. 디지털을 다루는 이들은 최신식 문명의 이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첨단 세대이고, 아날로그 족에 속하는 이들은 왠지 덜떨어진 구식 냄새가 나는 동시대의 세계에 뒤쳐진 세대로 인식이 되는 작금. 손안에 자그마한 스마트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기본적인 통화의 기능 외에 문자를 보내고, 사진을 찍으며, 영상을 촬영하고, 스케줄 관리와 각종 정보검색 등을 실시간으로 실현케 한다. 은행갈 일을 없게 만들고 영화를 보고 대면상이 아닌 화면상으로 문자와 대화의 삼매경에 빠지게 하며, 수많은 자기만의 방들을 만들어 니편 내편을 갈라 팔로어들의 땅따먹기 경쟁이 벌어진다. 적극적 동참을 하지 않는 나의 경우에도 가끔 식이라도 그 공간을 기웃거리고 들여다본다. 그렇지 않으면 주류의 리그에서 이방인이 될 수 있으니. 그러다보니 거기에 익숙지 않고 잘 끼지 못하는 이들은 소외 아닌 소외를 당한다. 그들은 24시간을 자신과 연계시킨 인맥들과 멈추지 않는 대화를 시도한다. 언제든지 말을 걸고 언제든지 응답을 할 수 있는 영역. 어쩌면 모두가 꿈꾸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를 지적하며 소통을 강조하는 것일까. 열려진 공간에서의 참여가 이루어지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주인공인 자신을 위한 허용된 영역이지만 예전보다 훨씬 좁아진 테두리에서의 외침, 나아가 인스턴트식 관례로 형성된 진정성의 부재가 아닐까. 소통을 나누기위해 오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수화기를 들 때의 그 들뜸, 그 애절함, 그 기대감이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간직되어 있는 것일지. 그래서인지 아날로그의 존재감은 여러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 TV에서 눈에 뜨이는 현대 자동차 CF. 중장비의 건설과 포니 자동차로 대변되는 이미지 탓인지 아무래도 우람한 남성미와 하드적인 냄새가 났었던 기업. 우스갯소리로 현대, 삼성, LG 직원들은 외부적인 차림에서 표가나 구분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샤프한 삼성, 올드한 LG, 투박한 현대가 그것이다. 그러했던 현대가 정차후 30초만 늦게 내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의 정취를 느껴보라고 하고, 새벽숲길 바람을 윈도우로써 맞이하게 하며, 청각 장애인들에게 음악을 듣게 할 수 있는 시트를 개발하는 내용을 내보낸다. 제품의 기능, 기술력, 성능, 하드적인 면만을 강조하던 회사가 어느 순간 디자인에 우선을 두고 그 위에 감성이란 도구의 옷을 입힌다. 신성장동력으로 이성적인 시각이 아닌 감성을 입혀 따뜻함을 전해주는 스마트 전도사로 변신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건넨다. 원래 차는 그렇게 타는 거란다. 원래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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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08:09:50 *.175.250.219

빈 우체통을 들여다보며 편지를 기다리던 일.

한참을 기다려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했는데 원하는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고 말 붙이기 어려운 어른이 전화를 받으면 그냥 끊어비린일.

집안에 한 대 있는 전화기는 늘 안방에 있었고 언제 올지 모르는 전화를 기다리며 모든 신경이 벨소리에 가 있던 일.

 

오래된, 잊혀졌던 일들이 이른 아침 호수에 물안개 피듯이 올라오게 만드는 글이네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넘나드는 사람을 원하는 시대...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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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7 16:23:16 *.216.38.13

칼럼을 읽으니 전화기에 줄 서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이메일과 컴퓨터가 없던 시절, 편지로 연락하고, 카페에 메모장을 남겨놓던 시절이 스쳐지나갑니다..  

좋은 칼럼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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