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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5일 11시 22분 등록

No16.

2013.07.15

글쓴이: 오미경

 

열정과 기질 Creating Minds

거장들의 삶에서 밝혀낸 창조성의 조건 하워드 가드너 Howard Gardner

 

 

열정과 기질.jpg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1% 영감, 70% 땀. 29%의 좋은 환경은 천재가 만들어진다.“

 

- 미국 심리학자 앤더스 에릭슨

 

인간은 다양한 면에서 재능을 가진다.

하워드의 다중지능이론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 7명을 예로 들어

창조적 인간과 다중지능이론을 결합해서

보여준다.

 

평범한 한 인간이 혼자의 재능만으로

결코 거장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나의 화두: 내 역사를 어떻게 창조해나갈 것인가

 

 

 

 

1. 저자에 대하여

gardner2.jpg  

1. 하워드 가드너 Howard Gardenr

 

하워드 가드너( Howard Gardner)는 현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 교수이자,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겸임교수, 보스톤대학교 약학대학 신경학과 겸임교수, Harvard Project Zero의 추진위원장, Good Work Project 책임자로 재직 중에 있다.

 

우리에겐 다중지능이론을 개발한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72년부터 데이비드 퍼킨스(David Perkins)와 함께 Harvard Project Zero의 공동 소장으로 연구해 오면서, 기존의 지능관에 대한 회의를 펼치고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여 1983년 "Frames of Mind: The 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s"라는 저서를 통해 7개의 지능을 주장하였다.

 

가드너 부모는 나찌 독일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해 왔으며, 가드너는 1943년 미국 펜슬베니아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즐겨 쳤으며, 이를 통해 많은 기쁨을 얻었다고 한다. 가드너는 1965년 하버드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런던대학의 경제학과에서 1년간 수학한 뒤, 다시 하버드 대학으로 되돌아와서 발달심리학을 전공하여 1971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바드 의과대학과 보스톤대학에서 Postdoc 과정을 밟았으며, 이 과정이 가드너로 하여금 두뇌손상을 입은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인지적 문제들을 연구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가드너는 인간의 잠재적 능력과 그것의 발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피아제(Jean Piaget) 이론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는 피아제 이론보다 더 깊이 인간의 정신을 파고 들었다. 피아제 이론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너무 좁게 설명하고 있다고 재평가하면서, 인간의 사고 전체를 이끄는 한 가지 형태의 인지는 없으며, 적어도 일곱 가지의 지능이 있고 이들은 마치 파이(pie)의 조각들처럼 서로 독립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하였다.

 

1981년 가드너는 HPZ를 지원하기 위한 5년간의 MacArthur Prize Fellowship을 받는데, 이 연구자금은 천재학자들만이 받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연구 자금을 수여하는 재단에서는 가드너가 인지발달 부분에 기여해 온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었으며, 훗날 그의 연구가 널리 인정받는데 힘을 실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외에도 가드너는 미국 심리학회에서 주는 William James Award, University of Louisville에서 Grawemeyer Award, 그리고 Claude Bernard Science Journalism Award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대부분의 그의 연구의 대상은 두 주류인데, 첫째는 일반 아동들과 영재아들이며, 둘째는 두뇌손상을 입은 어른들이었다. 가드너는 이 두 주류의 특성들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다중지능 이론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20여권의 책과 수백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대부분의 저서는 21개 외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고 한다.

 

Howard-Gardner-9-types-of-intellingence-1.jpg  

 

Ⅲ. 마음을 무찔르는 글귀

 

* 감역자의 글

[5-10]

아놀드 토인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주도된다”며 창조성의 중요성을 갈파했다.

--> 창조가 세상을 바꾼다.

 

이 책은 다중지능론을 주장했던 저자가 실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창조성의 비밀을 역동적으로 풀어낸 교양서다. 창조성과 관련된 실제 개인들의 심리적, 사회적, 시대적 조건 모두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심리적 기질과 그가 처한 주변환경, 그리고 시대적 특성을 곁들여 창조성의 본질을 날카롭게 조명해냈다.

 

이 책의 목표는 두가지다. 첫째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 둘째는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러면 ‘창조성이라는 무엇인가?’ 에 대한 의문에서, 가드너는 이 질문을 ‘창조성이란 어디에 있는가?’로 전환시켜 대답하고자 했다. 그는 <개인individual-일work- 타인other person> 이라는 창조성 소재 모형을 제시한다.

이 모형에 따르면 개인은 어떤 분야의 대가master가 될 만한 소질을 싹으로써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소질을 심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일의 체험기회(교육, 훈련)을 필수적으로 가져야 한다. 이러한 체험의 과정에서 타인(가족, 친구, 경쟁자, 후원자 등)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P가 형성되어야 한다.

 

가드너의 창조성 소재 모형을 단일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을 제시한다.

 

10년 주기론’은 그 중의 하나이다. 창조적 대가를 연구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대체로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창조성이 성숙하고, 10년간 창조성을 발휘하며, 다음 10년간 그 창조성을 다시 다른 분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런 사람들의 창조성 발휘를 가능하게 한 시대적 특징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가드너가 선택한 일곱 명의 창조적 거장들은 모두 현대의 인물들이다. 그가 관심을 가진 시대는 현대사회modern era로서, 현대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이 창조성 발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혀보려고 시도한다.

 

가드너의 시대적 특징에 대한 관심은 보다 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창조성의 발휘와 관련해서 시대를 뛰어넘는 공통점은 무엇이고, 시대에 국한된 특수성은 무엇인가? 둘째는 창조성을 발휘하는 인간의 심리와 족적 속에서 그가 살아간 시대의 특징과 의미를 연역해낼 수 있을까?

 

* 창조적 거장들의 삶을 지배한 실험정신

[13-19]

 

어린 시절부터 내가 흥미를 느낀 사람들과 주제를 다루면서, 내가 사랑하는 예술 작품과 시간을 보내고 오랫동안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온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게다가 나와 내 동료들이 인간의 창조성을 이해하기 위해 발전시킨 지적 도구를 마음껏 적용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21]

변치 않는 바다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단 하루에 불과한 무지개빛 인생.

 

자네가 읽은 책이 무슨 소용이겠나

답을 찾았지만 해답 없는 인생을 살았을 뿐

-체스와프 미워시Czeslaw Milosz

 

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30-31]

1974년에 초연된 톰 스토파드의희극 <익살>은 제 2타 세계대전 동안의 취리히를 배경으로 한다. <익살>의 진면목은 당시 스위스에 우연히 살게 된 역사적인 인물들의 초상을 그렸냈다.

 

“문학은 당의 문학의 되어야 합니다. ...저로 말씀드리면 야만인입니다. 표현주의니 미래파니 입체파니... 저는 이해할 수도 없고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합니다. ” -레닌이 말한다.

 

치라도 자기 생각을 내세운다.

“모름지기 예술가라면 지금까지 다들 예술고 알고 있는 예술 따위에 신경쓰면 안되지요. 바람직하지가 않습니다. ... 요즘에는 예술가가 어떤 사람인가 하면, 무엇이든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고 만드는 사람입니다. ”

 

조이스도 한마디 한다.

“당신은 지나치게 흥분했군요. 당신 재능의 한계도 모르그 그저 자기 생각만 고집하는구요. 뭐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만, 그런다고 당신이 예술가가 되는 것도 아니죠. 예술가란불멸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아주 기발한 방법으로 충족시키는 마술사와 같습니다.

 

<익살>은 서로 갈등하는 해석의 틀interpretive frame과 정치적 신조, 그리고 미학적 규범을 빠른 장면 전환으로 보여준다. 조이스나 레닌, 그리고 차라와 같은 현대의 핵심적인 이물들에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작품이다. 등장인물들이 논쟁하고 대화하는 내용은 20세기의 논쟁사를 끊임없이 달구었던 주제들이다.

 

* 이 책의 목표

[36-38]

일곱 명의 ‘현대의 거장들’에 관해 글을 쓰면서 나는 세 가지 중요한 목표를 염두에 두었다. 첫째, 15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이들 각자가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이를 통해 그들 나름의 특별하고 종종 기묘하게도 보이는 지적 능력과 성품,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 그들이 제기한 창조적인 의제. 힘겨운 노력, 그리고 그들이 성취한 업적의 특성을 밝힐 생각이다.

 

두 번째 목표는 창조적인 행위의 본질에 관해 대략적으로마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분야에 상관없이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하하는 법칙을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목표는 ‘현대’라고 부른는 시대에 관해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몇몇 재능 있는 사람들의 특정한 업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형성했고 또한 그들이 그 특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시대에 관해서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혁신에는 아이다운 천진성과 어른의 원숙함이 결합해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고유한 천재들이 어린 아이의 감수성을 체화하고 있다.

--> 감수성이 창의성을 불러온다.

 

 

[45]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과학자로서, 내가 논리, 수학 지능(아인슈타인의 경우)과

인성 지능(프로이트의 경우)이라 부르는 지능이 우수한 사람들이다. 다른 네 명의 대가들은 모두 예술 분야에서 혁신적인 도약을 이뤄냈으며, 각기 다른 지능을 대표한다.

피카소는 시각, 공간 지능이 우수한 회화의 거장

스트라빈스키는 음악 지능이 뛰어난 음악의 혁신가

엘리엇은 언어 지능이 탁월한 언어의 마술사

그레이엄은 신체, 운동 지능이 출중한 무용의 대가

 

대인관계interpersonal 방면에서 예수와 싯다르타, 마호메트, 공자, 소크라테스 등 과거의 위대한 혁신가들과 견줄만한 최근의 창조적 인물은 인도의 정치 및 종교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가 유일하다.

 

① 그가 몸소 관여해서 폭넓게 검토하고 세심하게 실험하면서 인간의 갈등을 폭력없이 해결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다.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는 소모적인 대결과 비열한 복종,그리고 폭력에 대한 호소 없이 귀중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방도를 찾는다.

---> 사티아그라하 (산스크리트어) 는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시작된 비폭력 저항 운동의 철학이다. 이러한 저항 운동으로 결국 인도에서의 영국 통치 및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의 인종 차별 정책이 종식을 맞게 되었다.'사티아'는 진리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이며, '아그라하'는 노력, 열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사티아그라하라는 말 자체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다.

 

② 간디는 수많은 사말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쳤는데, 좀 더 인상적인 사실은 몸소 용기있는 행동을 실천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에게 행동의 귀감이 되었다는 점이다.

 

③ 간디는 20세기의 전체주의 지도자들보다 더욱 건설적인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고, 상업주의나 대중매체의 영향에 비해 훨씬 의미 있는 영향을 미쳤다.

 

[55]

중요한 창조자들은 공통의 역사적 힘과 사건에 노출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의 활동 내용을 잘 알고 있었고 서로 간에 영향을 주고 받았다.

 

[59-60]

길포드 이후 창조성에 관한 결론

창조성은 지능과 다르다. : 창조성과 지능은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지능이 우수하지 않아도 창조성이 풍부한 사람도 있으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게다가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을 검사할 경우에는 일단 IQ가 120이 넘으면 심리측정학적으로 창조성과 지능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창조성 검사는 신뢰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여러 종류의 창조성 검사를 받을 때도, 그가 얻은 창조성 점수 사이에는 확고한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창조성 검사는 아직 그 유효성을 인정받지 못한 상태이다. : 창조성 검서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고 해서 반드시 전문 직업이나 여기(餘技)에서 창조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해당 분야나 소속 문화권에서 창조적이라고 평가받는 사람들이 반드시 창조성 검사에서 우수함을 입증하는 표시로 여겨지는 발산적 사로를 하는 것도 아니다.

 

[71]

사이먼튼과 같은 역사계량학의 연구자들은 거대한 자료 더미를 조사해서 창조적인 인물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시기를 결정한다. 이 연구결과 생산성이 가장 높은 시기는 보통 35~39살 사이로 나타났지만, 정확한 시기는 분야마다 조금씩 다르다. 가령 시인과 수학자는 20대나 30대에 절정에 도달하는 반면, 역사가나 철학자는 이보다 수십 년 뒤에 정점에 이른다.

 

[79]

데이비드 멜드먼의 말을 빌어 결정화Crystallizing경험이라 부르고자 한다.

어느 분야의 전문 지식에 정통하려면 아무리 열광적으로 몰두했더라도 최소한 10년 정도는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창조적인 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분야에서 통용되는 지식에 통달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10년 정도의 꾸준한 노력이 선행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도약을 이룰 수가 없다.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자드리 역시 혁신적인 업적을 이루기 전에 최소한 10년의 수련기를 거쳐야 했다.

 

[83-84] 창조적인 인물이란 특정한 문화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작품을 창조하고 새로운 문제를 정의하는 사람.

① 어느 특정 분야에서만 창조적일 수 있다

② 창조적인 인물이 정규적으로 창조성을 발휘한다

③ 창조성은 문제 풀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작이나 새로운 질문의 고안도 풀이할 수 있다.

④ 창조적인 행위는 특정한 문화에서 받아들여질 때에만 제대로 인식된다. 시간상의 한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1. 지그문트 프로이드 세상에 홀로 맞선 사람

 

[118] 대화치료 talking care

이전 예전에 억압된 기억을 말로 풀어내면서 거기에 얹힌 묵은 정서를 발산하면, 증상을 없애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였다.

 

“어떤 원인이나 증상을 출발점으로 삼든, 종국적으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성적 체험이다”

[127]

<정신분석학 운동의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 외로웠던 시절, 요즘과 같은 압박감이나 분망한 일이 없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영광스러운 ‘영웅시대’처럼 느껴진다. 나의 ‘찬란한 고립’에는 분명 장점도 있었고 매력도 있었다.” 다른 혁신가들도 위대한 비약을 이루기 직전의 정신 상태를 회고할 때면, 감정상의 절정과 추락이라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억압이라는 교의는 정신분석학 이론 전체가 서 있는 주춧돌이다.”

 

[130] 그는 플리스에게 자기 집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진 대리석 서판이 있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1895년 6월 24일,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가 꿈의 비밀을 밝혀내다” 그는 꿈을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고 불렀으며, 그 비밀을 밝히는 것은 ‘한 사람의 생애에 평생 한 번 허용될까 말까 한 통찰’이라고 말했다.

 

“자연과학이 되어야 하는 심리학에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심리 과정을 정량적인 상태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 때 심리 과정을 규정하는 것은 미세한 물질인데, 이 물질은 서로 구별하고 명확하게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심리 과정을 더욱 명쾌하게 드러낼 수 있고, 설명상의 모순도 사라질 것이다. ”

 

[137] 자기분석은 프로이트 자신의 마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낳은 것만은 아니다. 그는 모든 인간의 의식에 내재한 특정한 힘과 내용도 밝혀냈다고 믿었다. 꿈의 분석 과정은 또한 프로이트이 외로운 시절에 그에게 힘이 돼 주었다. “내가 내린 결론에 망설임과 의심이 생길 때마다, 아무 뜻도 없고 뒤죽박죽으로 뒤엉킨 꿈을 분석해서 꿈속에서도 논리적이고 뜻이 분명한 심리 과정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밝혀낸다는 것은, 내가 올바른 기릉ㄹ 걷고 있다는 자신감을 느낄 수 있는 계기였다.” 그는 꿈을 수수께깨 같은 언어를 힘겹게 해독하고 있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환자는 바로 나 자신이라네. ”

 

[148] “<꿈의 해석>이 무언가 의미 있는 책이라는 걸 인정하는 글은 한 줄도 보이지 않아.... 책의 평판은 그저 그렇고 기껏해야 다들 침묵하는 바람에, 겨우 싹트기 시작한 나와 주위 환경과의 관계가 다시 한 번 파괴되었데. ”

 

[155] 융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예롭지만 고통스러웠던 고립’에 관해 심정을 토로한 후에이렇게 썼다. “고요한 확신이 내 마음에 들어차기 위해선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가 내게 응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바로 자네라네.” 프로이드는 아무 망설임없이 그이 조그만 모임에서 융을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들었으며, 1910년 새로 탄생한 국제 정신분석학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159] 나이가 들면 새로 만난 사람과 감정적으로 강한 유대감을 갖기가 어려운 법이고, 동년배 친구들을 잃게 되는 일이 많아지므로 이런 일에 무감각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 프로이트의 경우에는 세 가지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 하나는 오랫동안 홀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켰다는 점인데, 이런 혹독한 경험을 통해 프로이드는 다른 누군가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는 태도를 배웠을 것이다. 두 번째로 프로이드는 남들이야 어찌 생각했건 자신은 다른 사람과 유대 관계를 맺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사적인 관계는 아니고 보다 공적이고 지적인 관계였다. 마지막으로 프로이드는 스스로를 어려운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 사령관으로 여겼다.

 

[160] 하루에 여덟 내지 아홉 시간은 환자들을 보았고, 매일 산책을 했으며, 가까운 친구들이나 브나이 브리스의 동료들과 어울렸으며, 책을 읽고 고대의 유물을 수집했다. 그리고 거의 매일 밤 11시에서 새벽 1시나 2시까지 글을 썼다. 1910년에서 1930년까지 발표된 그의 저작을 나열만 해도 몇 페이지는 금방 채울 수 있을 정도다.

 

[165] 내 논의에서 그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특정 지능을 활용하여 창조성의 절정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인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성찰하는 자성 지능을 통해, 그리고 아무도 공감과 이해를 보이지 않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를 통해 그런 성과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 다음에 프로이드는 에너지를 새로운 방향으로 돌려, 자신을 적대하는세상에게 자기 이론의 진실성을 납득시켰다.

 

2.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영원한 아이

 

[171] 물리학자들이란 인간 피터팬이다. 그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호기심을 갖고 있다. 세상 물정에 밝아지면, 호기심을 갖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치게 많이 알게 된다.“

 

 

3. 파블로 피카소 Pablo Picasso, 1947. 신동과 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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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신동이란 기적에 가까운 재능을 타고 난 아이를 가리킨다.

 

[252]

신동의 출현은 특정 분야에 대한 어떤 문화권의 관심과 지원 이외에도, 언제나 여러 요인들이 ‘우연히 맞아 떨어져야co-incidence' 가능한 현상이다. 그러니까. ’재능이 갖춰진‘아이와 그 분야에 ’우호적인 문화‘뿐만 아니라. 풍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좋은 선생님과 사려 깊은 부모, 재주를 뽐내고 선보일 수 있는 풍부한 기회, 경쟁의 의무를 덜어주는 혜택, 대중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경로, 특정 분야에서 공인된 아동이 발판으로 삼아 도약할 수 있는 일련의 장애물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분야에서 ’전망이 있는‘ 아동이란 또래 친구들보다 이런 단계를 좀더 빨리, 그리고 무리없이 밟아나갈 수 있는 아동을 가리킨다. 어린 피카소의 삶에는 이 모든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253]

신동에서 어른 대가로 성장하는 일은 이론이 분분한 문제이다. 청년기를 거치면서 거의 모든 오늘날의 신동들은 음악가이자 심리학자인 잔느 밤베르거Jenne Bamberger가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라고 부른 어려움을 겪는다.

작곡가 헥토르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가 발언한 내용이 좀더 일반적인 경우일 터인데, 그는 일찍이 신동의 재주를 뽐냈던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ens에 대해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미숙함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비꼰 바 있다.

 

[255]

피카소는 시각적 세부와 색채의 배합을 알아내고, 공간 구성에 대해 사유하고, 현실적인 장면이든 그림 속의 장면이든 자신이 본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는 데 재능과 솜씨를 발휘했다. 다중 지능이론의 견지에서 보면, 피카소의 조숙함은 시각-공간 영역, 신체-운동 영역, 대인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256]

미술사가 메리 게도Mary Gedo는 “그는 숫자를 의인화했고, 자기만의 공상에 빠지곤 했다”고 지적한다.

 

[258]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집요한 실험정신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다양한 화면 구성을 시도하고 똑같은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그렸으며, 호소력 짙은 극적인 감정을 화폭에 담았다.

 

훗날 피카소가 주도하는 대상의 형태와 크기를 조각내고 왜곡하는 입체주의 화풍의 전조로서 좀더 중요한 요소는 아마도 숫자와 알파벳 기호를 이용한 묘사, 풍부한 입체화법, 시각적 유희, 엉뚱한 캐리커처, 앞뒤가 맞지 않는 병치 등일 것이다.

 

[259]

피카소의 실험적인 성향은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기질, 미술 소재로 작업하는 일에서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 점점 커지는 자기 능력에 대한 자신감, 그리고 좀 더 불행한 일이지만 미술 소재를 다루는 데는 익숙하고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지만 표준적인 학과 공부를 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끼는 능력간의 불균형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성장기의 체험과 잊을 수 없는 기억들

[260-262]

세 살 무렵에 지진이 발생해서 화재를 피하기 위해 한밤중에 집에서 피신해야 했던 일을 충격적으로 경험했다.

두 번째는 그가 열네 살 되던 해에 어린 누이 콘치타Conchita가 죽은 일이다. 콘치타는 디프테리아에 걸려 수 주일 동안 서서히 숨이 막히며 죽어갔다. 당시 피카소는 콘치타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이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겠다고 신에게 약속까지 했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거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미신적인 성향이 강했던 피카소는 전문 분야에서나 개인적인 삶에서나 무엇이든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느꼈고, 이런 만용에 가까운 힘을 가졌다는 사실에 응분의 죄책감도 느꼈다. 이와 같은 ‘신과의 거래’는 우리가 다루는 일곱 명의 창조적인 인물들의 살메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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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가 아버지의 성(性) 루이스Ruiz를 버리고 어머니 이름인 피카소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선택했다.

 

재능의 연마

[264-270]

그는 정치와 예술 영역의 사상을 접하고 이를 기꺼이 흡수했다. 그는 경박하고 피상적인 표현 방식을 넘어서, 선원과 부두 노동자들의 내면 심리와 자연 풍경이나 거리 풍경의 저변에 흐르는 감정을 탐구했으며, 가족들의 삶이나 밤의 거리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사람들의 갈등과 긴장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피카소는 다양한 심미적 모델을 재빠르게 탐구하고 직관적으로 모방하면서 자기에게 알맞은 측면을 손쉽게 골라냈다. 실제로 바르셀로나를 떠난 지 일년 동안 그는 그 나름의 독특한 색채가 있는 작품을 창조했다.

 

피카소는 채 스무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첫 전시회를 열었고, <라 가제트 다르La gazette dart>지의 비평가 펠리시엥 파구스는 피카소 그림에 대해 그 순결성과 색채 및 주제에 대한 열정,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 그가 흡수한 폭넓은 영향을 언급했다. 이 젊은 재주꾼을 칭찬한 후(“그는 아직 스무 살도 안되었는데 하루에 세 폭의 그림을 그린다고들 한다”)에 파구스는 예리한 경고의 말도 잊지 않았다.

 

그는 바로 이런 성급함 때문에 경박한 기교의 대가에 그칠 위험이 있다. 다작(多作)과 풍작(豊作)은 폭력과 활력이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르다. 창조력이 왕성한 예술가가 그렇게 된다면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일 것이다.

 

피카소가 처음 인정을 받은 시기를 청색 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에 그는 파리의 비참한 생활상을 주로 그렸다. -거지들, 슬픔에 잠긴 부부, 가난한 가족 등 비참한 삶의 전형적인 모습과 이들 인물도 개별적인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묘사했다. 그는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 파괴된 가정, 북적이는 대도시에서 군중과 유리된 익명의 인물 등에 이끌렸다. 이를 두고 비평가들은 ‘끔찍한 아름다움이라 부르거나 ‘메마른 슬픔’ 혹은 ‘삶에 대한 비관적인 느낌’이라 불렀다. 심지어 그는 매춘부들을 철저히 탐구하기 위해 생 라자르 감옥에 가기도 했다.

 

피카소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처음으로 진지하게 연애-‘장밋빛 시대’-를 하기 시작했다. 색상이 다소 밝아졌고, 서커스단의 생활과 인물을 주로 그렸는데, 이들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모습은 아니어도 참혹할 정도로 가난한 형편도 아니었다. 피카소의 주된 주제는 이제 절대 빈곤에서 보헤미안적 예술가의 삶으로 이동했다.

 

아폴리네르와는 일종의 공생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사고방식이 비슷했고, 서로 보완되는 관심사와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예술적 노선이 비슷했다. 존 리처드슨의 견해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예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서로에게 촉매 역할을 했다. ”

 

[273]

<인생>은 카사페마스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피카소의 노력과 그에 대한 혼란스러운 반응을 나타낸다. 이는 카사페마스의 장례식 장면과 그의 천국행을 그린. 엘 그레코풍의 1901년작 초혼에서 많은 요소를 빌어온 것이다.

 

피카소는 인물의 형상이나 자세, 정조를 원하는 모습이 나올때까지 끊임없이 바꾸었다.

 

[279-286]

아폴리네르는 두 부류의 예술가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자연에 의존하는 ‘모든 걸 한데 모으는 all-put-together' 스타일의 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에 의존하는 성찰적이고 지적인 ’조립가 structurer'형의 예술가이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 1906>은 그림을 그린 과정이 유별났다. 피카소는 모델이 된 친구에게 여든 번 이상이나 앉아 있기를 요구했는네, 정작 그림을 그릴 때는 여름 여행을 떠나서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의 형태를 지우고, 스타인과는 떨어진 장소에서 사실적인 얼굴을 가면 같은 얼굴로 바꿔서 그림을 완성했다. (초상화가 스타인을 닮지 않았다는 비난을 듣자 피카소는 세기의 농담이라고 할 만한 유명한 말로 대꾸했다고 한다. 별로 걱정할 필요 없어. 결국은 스타인이 저 그림을 닮게 될 테니까.

 

거트루드초상화.jpg  

 

피카소가 파리의 트로가데로Trocdero 박물관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가면 예술에 영향을 받았음은 분명하다.

 

파카소는 수십 년 후에 브라사이에게 “내가 세잔을 아냐고요? 그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94~1967년까지 보관하던 175권의 드로잉 노트가 발견되었다.

 

1950년대에 제작된 조르쥬 클루조의 <피카소, 천재의 비밀>이란 영화

 

내 작품은 일기와 같다. ” 이들 드로잉 노트의 첫 번째 대중 전시회를 ‘나는 노트이다’라고 부른 것은 적절한 일이다.

 

“이처럼 형체의 비틀림이 본질인 그림, 낫 모양으로 휘어진 선으로 부피감을 표현한 그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게르니카 작품을 본 미술사가이자 미술 비평가 티모시 힐턴Timothy Hilton

 

[287]

"그림은 자유다. 도약하면 밧줄을 놓쳐 추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이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고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도약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일깨워야 한다. 그들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미지를 창조해야 한다. “

 

[289-

입체주의를 낳은 동반자 관계로 피카소와 브라크는 의기를 투합해서 공동작업에 나섰다.

거의 반세기가 지난 후에 브라크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몽마르트에 살면서 거의 매일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다. ....피카소와 나는 당시 누구도 말하지 않던 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우리들한테는 참으로 즐거웠던 일에 관해 얘기를 주고 받았다. .... 같은 밧줄에 몸을 묶고 함께 산에 오르는 느낌이었다. ... 서로의 얘기에 푹 빠져 있었다.

 

[291]

메리 게도는 피카소가 다른 사람의 격려와 지지를 받고 싶은 욕구가 상당히 강한 편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욕구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매달리고 의존했던 성향이 아주 없어지지 않은 탓일 것이다.

 

[293-295]

“우리가 입체주의를 창시했을 때는 입체주의를 창안하겠다는 의도는 없었고, 그저 우리의 내면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자연과 인간 세계를 능숙하게 그릴 줄 알았던 피카소가 대상의 독특한 특징에 주목하여 재현성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면, 브라크는 추상성을 한층 더 밀고 나갔다.

 

1912년 중반부터 1913년까지 파카소와 브라크는 신문지와 악보, 마분지, 담배 상표 등 온갖 잡다한 오브제를 캔버스에 붙이거나 쉽게 알아보기 힘든 문자나 단어를 화폭에 표현하는 등의 실험적인 작품을 내놓았다.

 

[307-322]

화가란 결국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의 소장품에서 본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들고 싶은 수집가가 아니겠는가. 시작은 이렇게 하더라도 여기서 색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관람자에게 아무런 감정상의 동요도 일으키지 못하고 관람자가 그저 대충 훑어보는 예술작품은 아무 의미가 없다.... 관람자가 비록 상상 속에서라도 어떤 반응을 보이고 스스로 창조에 대한 열망을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 관람자를 마비 증상에서 일깨워야 한다. ”

 

“결국은 무언가에 거역하는 작품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 나는 가슴을 찌르는 그림을 그린다. 폭력, 심벌즈의 쨍그렁 소리....폭발... 훌륭한 그림, 아니 모든 그림(!)에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면이 있어야 한다.

 

“완성된 작품이란 있을 수 없다. 한 작품의 상이한 상태가 있을 뿐이다. ”

 

“내 그림은 모두 탐구다... 이 탐구에는 논리적인 순서가 있다. 내가 번호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간 순서에 따라 실험을 하고, 여기에 번호와 날짜를 적어두었다. 이런 점을 고맙게 생각할 날이 올 것이다. ”

“예술가의 작품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언제, 왜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작업했느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 언젠가는 과학이 존재할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과학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터다 .창조적인 인물을 탐구해서 인간 일반에 관해 알고자 하는 그런 과학이다.

 

“그림이란 기본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다. 외양은 어떨지 몰라도 처음의 구상은 거의 온전하게 남는다.”

 

“정신적 가치가 삶을 영위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토대인 예술가들은 인간성과 문명의 가장 숭고한 가치가 위기에 처한 갈등 상황에 대해 오불관언(吾不關焉)의 태도를 보일수도 없고 보여서도 안 된다. 항상 나는 이렇게 믿어왔다.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백치(白痴)이다. ... 정치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심장을 뒤흔드는 정열적이거나 행복한 사건에 민감한 사람이다. ... 그림은 집따위를 꾸미는 수단이 아니다. 그림은 적을 공격하고 적의 공격을 방어하는 전쟁의 수단이다. ”

 

[325]

“피카소는 일을 할 때는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자신만의 독자적인 주제는 없다. 그는 다른 화가의 작품에서 주제를 취한다.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단지와 접시를 장식할 뿐이다. 철부지 애들처럼 군다. 다시 꼬마 신동이 된 모양이다. ”

-전기 작가 존 버거John Berger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시각 예술의 마법사였다.

 

[328-332]

“나의 죽음은 배가 침몰하는 일과 같다. 거대한 배가 침몰하면 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빠질 것다. ”

 

“피카소는 그림을 그릴 때 색깔을 고르듯, 시기와 목적에 따라 적당한 친구를 고른다”

-사바르테스

 

“나는 데생을 터득하고서 색채에 눈을 돌렸는데, 당신은 색채를 터득하고 데생에 눈을 돌렸군요” 피카소가 마티스에게 했던 말

 

다른 사람들을 오만하게 무시하는 면에서는 피카소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없는 듯하다.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때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피카소는 온 힘을 다해 질로를 파멸시키려고 했디만 자신의 맹렬한 공격에도 흔들림없는 모습을 보고는 마지못해 그녀를 존중하기로 했던 것 같다.

 

4.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음악가이자 정치가

 

[334]

“음악은 그 본질상 무언가를 표현하는 데는 무력하다. ”

 

‘시학poetics'이란 글자 그대로 음악을 만드는 행위poiesis를 지칭한다. 정치라는 외부적인 자극 요소가 없이는 음악 창작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웅변한 실례이다.

 

[342]

“무엇을 배우든 신참자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다. 처음에는 학습 과정을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이것은 자기만의 표현 방법을 자유롭고 힘차게 추구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삼아야 한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나의 제자인긴 해도, 결국 누구의 추종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음악 재능이 너무나 탁월하고 독창적인 까닭이다. ” -림스키 코르사코프

 

[346] 스트라빈스키는 디아길레프에 관해 이런 글을 남겼다.

“그는 새롭고 신선한 구상을 단숨에 알아채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에 몸을 던질 줄 아는 대단하고 신기한 능력을 지녔던 사람이다. ”

 

[350] 새 음악 소사전은 스트라빈스키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불새>의 성공은 스트라빈스키의 인생 행로를 바꿔놓았다. 당시 국제적인 예술 중심지로 이름 높았던 파리에서 발레뤼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스트라빈스키의 독창적이니 작품은 발레음악의 명곡 반열에 올랐다. 실로 그는 하룻밤 사이에 러시아 작고가의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알려졌으며, 아후 몇 년 동안 그의 음악은 고향 러시아에서보다 서유럽에서 더 유명하고 진가를 인정받았다.

 

<불새>가 성공하면서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은 이제 국제적인 무대로 진출할 수 있었고, 이후 20여 년 동안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는 일종의 공동운명체가 되었다.

 

[356] 봄의 제전: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

1910년 봄 <불새>의 스코어를 마무리하던 중에 스트라빈스키는 꿈을 꾸었다. “이교도의 성스러운 제전이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마을 원로들이 빙 둘러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봄의 신에게 희생 제물로 바쳐진 소녀가 춤을 추다가 죽어갔다. 이것이 <봄의 제전>의 주제가 되었다. ”

 

“새 발레는 원시 부족의 제의 장면에서 시작한다. 여름 밤에 벌어지는 제의 는 다음 날 첫 햇살이 비출 때까지 이어진다. 의식 무용을 위주로 안무를 구성한 작품인데, 뚜렷한 극적 이야기 없이 원시 부족의 삶을 재현하는 첫 시도가 될 것이다. ” -로에리히

 

[369] 시학에서 정치로

“아직 막을 올리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는 관현악단에게 이런 마음을 토로했지요. 앞으로 자신의 잠재력이 무한히 펼쳐질 무대를 앞두고 있는 민감한 영혼이라면 누구나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이죠”

 

음악계의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처음부터 스트라빈스키의 특징이었다.

 

[375] 소품 작곡

전쟁 이전에도 스트라빈스키는 일본 예술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의 서정시는 일본의 회화나 판화만큼 내게 감명을 주었다. 시점과 공간의 문제를 회화적으로 해결한 것을 느끼고 나는 이와 비슷한 것을 음악에서 찾아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

 

[378-383]

스트라빈스키는 <결혼>의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작곡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 그는 영감으로 멜로디를 구성하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자신의 음악적 구상을 제대로 표현하고 자신의 마음에 맞는 음악적 효과 및 표현 효과를 내려면 악기 파트와 단편적인 악절릉ㄹ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결정하기 위해 그에 가장 알맞은 악기 및 기악 앙상블로 실험해 보고, 또 고전 음악이나 민요의 단편적인 악절을 차용하여 멜로디를 구성했다.

 

<결혼>은 스트라빈스키가 현대와 러시아의 과거에 다리를 놓은 작품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스트라빈스키는 그 자신에게 최고의 스승이었다.

“그는 음악사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굳게 마음 먹었다. 당시 그가 매혹되고 영감을 받은 것은 무엇이든 때와 여건을 불문하고 활용하여 스트라빈스키 자신의 색깔이 담긴 새로운 작품으로 창조하기로 굳게 마음 먹은 것이다. ”

 

“피카소는 내가 작곡을 맡기로 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폴치넬라>의 무대를 디자인해 달라는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냥 재미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

 

“피카소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나는 무엇을 가장 칭찬해야 할지 모르겠다. 색채감, 디자인, 창의력 등 이 비범한 사내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

 

“ 시간상으로 우리와 더 가까운 시기가 더 먼 시기보다 일시적으로는 우리와 더 많이 떨어져 있는 게 세상 이치다. ”

 

스트라빈스키와 피카소가 과거와 자극적인 대화를 지속적으로 했다는 점은 두 사람이 오랫동안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그들은 과거로부터 배우고 과거를 재창조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한층 더 심화시킬 수 있었다.

 

“엘리엇과 내가 낡은 배를 수리하지 않았는가? 낡은 배를 수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진정한 임무다. 예술가는 이미 말해진 것을 그 자신의 방식으로 다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386-390]

스트라빈스키는 강렬한 종교적 감정을 느꼈고, 이는 평생 동안 그의 내면에 남아 매일매일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다.

“나의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다. 나는 매일 그 재능을 활용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신에게 기도한다. 어린 시절에 이미 이 재능은 내가 잠시 보관하는 것에 불과함을 깨달았을 때,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맨 처음에 말한 생각이 중요하다. 재능은 신이 주신 것이라는 ”

“ 종교적인 음악을 작곡하려면,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악마도 믿어야 하고 교회의 기적도 믿어야 한다. ” 스트라빈스키가 로버트 크래프트에게 하는 말

 

그는 오랜 세월에 걸쳐 하루에 적어도 열 시간 동안 일을 했다. 오전에는 피아노로 바흐의 푸기를 연주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이후 네댓시간 동안 작곡에 몰두하고, 오후에는 관현악편곡과 기악편곡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매우 체계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작업대는 작곡가의 작업대라기보다는 외과 의사의 작업대를 닮았다. 음계 이름과 음, 쉼표 등이 모두 완벽하게 기재된, 깔끔하고 정확한 그의 스코어는 마치 지도와 같다. ”-전기 작가 미하일 드루스킨 Mikhail Druskin

 

그는 작곡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도구를 근처에 두고 이것들을 솜씨 좋은 장인처럼 능숙하게 활용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작곡 행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성찰했다.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 ”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나간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의 우연성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뜻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메모를 해두고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활용한다.”

 

그는 <페트루슈카>의 작곡 과정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신체 지능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작품을 작곡할 대 무엇보다 나를 매료시킨 것은 손가락이 알아서 상이한 리듬의 에피소드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 손가락을 얕봐서는 안 된다. 악기와 늘 접촉하는 영감의 원천이 바로 손가락이다. 그게 없으면 무의식적인 아이디어를 떠오릴 수가 없는 것이다. ”

 

“더 많은 곡을 쓰느라고 바쁘지만 않으면 영원히 내 음악을 반복해서 검토했을 것이다. ”

 

“사람들은 내가 배르디처럼 곡을 쓴다고 말한다. 헛소리다! 제대로 음악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를 고정된 위치에 못박아두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는 못 한다! 다음 곡을 쓸 대는 전혀 다른 것을 시도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할 터이다. ” 이런 태도는 피카소와 그레이엄 등 많은 성찰적인 예술가들의 견해와 부합한다.

 

스트라빈스키는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대필작가의 도움을 받아 음악 철학에 관해 중요한 저서 두 권을 출판했다. 하나는 자서전 <내 생애의 연대기, 1936> , 1939년과 40년에 하버드 대학교이 찰스 엘리엇 노턴 강연회의 원고를 1942년에 출판한 <음악의 시학>이다.

 

역설적인 의미로 가득한 <음악의 시학>의 마지막 대목에서 스트라빈스키는 이렇게 쓴다

“나의 행동 반경을 좁힐수록, 그리고 내 주위에 장애울을 더 많이 쌓아둘수록, 나의 자유 역시 더욱 커지고 풍부해진다. 속박을 없애면 그만큼 내가 발휘할 힘도 줄어든다. 더 많은 제한을 부과할수록 우리는 영혼을 구속하는 사슬에서 더 자유로와진다. ”

 

“탁월하고 위대한 예술가의 원동력은 대담한 용기이다. 내가 이런 점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대담한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거기에는 어떤 제한도 두지 않는다. ”

 

“일반 청중은 더 이상 내 음악에 열광하지 않는다. .... 청중의 그런 태도가 내 길을 막지는 못한다. ”

 

5. T.S. 엘리엇 경계선에 위치한 거장

 

[404-422 ]

“커다란 강 근처에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교감할 수 없는 뭔가를 품고 살아간다. ”

 

“엘리엇은 라포르그이 작품에 ‘친화성’을 느꼈다. 라포르그는 고통과 일상 대화와 고압적인 논평을 다양한 목소리로 표현한 시인이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 보스턴 거리를 배회하고 방황하고 있던 그는 거리가 수축하고 갈라지면서 자신이 거대한 정적의 심연 속에 빠져든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환각적인 경험에 대해 훗날 엘리엇은 ‘신과 교감을 했다고 볼 수도 있고, 일시적으로 정신이 결정화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엘리엇이 “내가 본 최후의 지성인”이라고 이렇게 썼다

“1914년 에즈라 파운드를 만난 일은 내 삶을 바꿔놓았다. 그는 내 시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고, 오래 전부터 받기를 단념했던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기질은 달랐어도 출신 배경이 같았던 두 사람은 급속히 친해졌다.

엘리엇은 파운드의 에둘러 말하기, 이미지의 파편화, 독자를 충격하는 병치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엘리엇은 능통한 어휘구사나, 어조와 형식에 대한 감각, 유머 활용, 죽음과 상실 및 시간의 흐름이라는 주제에 대한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엘리엇은 숫자 놀음과 판에 박힌 업무를 즐기기까지 했으며, 진부한 은행원 일에 소홀함이 없었다.

 

[425-430]황무지 작시(作詩) 과정과 배경

엘리엇은 3개월 동안 거의 홀로 지내면서, 3,000행에 육박하는 시의 초고를 완성했다.

초고는 암시성이 풍부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방만했던 것도 사실이다.

“삶에 대한 개인적이고 거의 무의미한 불평에 불과한.... 리드미컬한 볼멘소리” 라고 칭하면서 <황무지>의 가치를 깎아내렸디만, 유럽과 미국의 어느 세대에 있어서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었다.

 

“연관성이 없거나 희미하게만 있는 장면들, 그 눈부시고 간결한 장면들이 이어지면서 독자들은 자기 의식의 개별적인 고유성이 비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썼다. -콘레드에이킨

 

“모든 세대를 고양시키는 동시에 유린한” 작품이라고 에드문드 윌슨은 말했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시” -칼 샤피로

 

“폭과 깊이와 아름다운 표현을 갖춘 작품이다. 위대한 시로 평가받기에 모자람이 없다”

-1922년 10월 26일 <타임스 문예부록>

 

“위대한 시인은 모두 요절했다. 소설은 중년의 예술이고, 에세이는 노년의 예술이다. ”

-소설가 마샤 대이븐포트

 

엘리엇의 목표는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글 중에서 최고를 한 자리에 모으는 것”

 

엘리엇은 개인적인 불행을 끊임없이 일에 몰두하는 방법으로 극복했다. 대서양 양안에서 소위 동인지를 간행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하루에 열두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을 일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며 밤 늦게까지 편지를 쓰고 책을 검토하고 글을 썼다. 수백 편이 넘는 글 중에는 익명으로 발표한 것도 있는데, 여전히 많은 글이 모아지지 않은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일에 대한 이러한 열정은 야심과 욕망에서 나온 면도 있었지만, 손에 덜컥 쥐어지는 자유 시간에 대한 두려움과 더 이상 시를쓰지 못한다는 공포에서 나온 면도 있었다.

 

[443 엘리엇의 사상과 철학

“완벽한 예술가일수록, 번민하는 자아와 창조하는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

동시대 모던니스트인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의 견해에 공명하면서, 그는 미숙한 시인은 선배의 작품을 그저 모방만 할 뿐이지만 성숙한 시인은 그 핵심을 훔쳐내서 더욱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낸다고 지적했다.

 

시인의 마음은 무수한 감정과 말씨와 이미지 등을 붙잡아 저장해둘 수 있는 용기(容器)와 같다. 이러한 요소들이 무의식적이고 정리 되지 않는 산만한 형태로 남아 있다가 , 서로 융합하여 새로운 화합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기억할 수 있는 시를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했다. 즉, 무의식의 리듬에 기반해서 창조되고, 그 리듬에 부합하는 시를 가장 좋은 시라고 생각한 것이다.

 

시인은 정서를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시인에게 필요한 것은 특정한 정서를 명확히 표현하는 일련의 객관 대상이나 상황, 사건인데, 해당 정서를 환기하려면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외부적인 상(像)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객관적인 상관물을 창조할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훌륭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비상한 감수성과 뛰어난 언어 구사력을 결합시킬 줄 아는 시인이 없다면, 우리가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것을 느끼는 능력까지도 퇴화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어린 시절 넋을 잃고 빠져들었던 감각적인 장면이나 보스턴 거리에서 겪은 신비한 체험을 시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던 경험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엇의 문학에 대한 견해, 특히 시에 대한 견해는 당연히 개인적인 체험과 선입견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그는 시작 과정, 특히 자신의 경우를 비롯한 당대으 시작 과정을 깊이 있게 통찰했다.

 

[451-457]

엘리엇은 언제나 드라마, 특히 시극(詩劇)에 관심이 많았다. 극에서

“우리는 등장 인물들이 자신을 신중하게 밀어넣는 성격적 패턴 이면의 패턴을 감지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삶에서 환한 햇빛(기쁨)에 흠뻑 젖는 아주 드문 순간에만 감지할 수 있는 패턴이다.

 

그는 일종의 파우스트적인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가진 것을 모두 포기하기를 요구한다. 가족도 버리고 오직 예술만을 좇아야 한다고 요구한다. 예술은 인간이 어는 가족이나 계급, 당 혹은 동인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자신일 뿐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경계인이란 오직 공동체를 전제하고서야 성립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창조적인 인물의 생애에서는 경계인이라는 느낌을 갖는 순간과 공동체에 속한다는 느낌을 갖는 순간과 공동체에 속한다는 느낌을 갖는 순간이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궤적을 엿볼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들은 어느 정도는 세계 전체에 속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으로만 홀로 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양극을 오가는 모습이야말로 창조자의 생애에 긍정적인 비동시성과 부정적인 비동시성을 동시에 가능케 한 요인일 것이다.

 

--->황무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시로, 모두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 1부는 <죽은 자의 매장>, 2부는 <체스 놀이>, 3부는 <불의 설교>, 4부는 <수사>, 5부는 <천둥이 한 말>z 로 되어있다. 이 작품은 정신적 메마름,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 생산이 없는 성(性), 그리고 재생이 거부된 죽음에 대한 시이다.

 

1부 죽은 자의 매장 The Burial of the Dead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

 

2부 체스놀이 A Game of Chess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죠? 아무것도 보지 못하죠.

아무것도 기억 못 하죠?'

나는 기억하지

그 눈이 진주로 변한 것을

'당신 살았어요, 죽었어요? 머리 속에 아무것도 없나요?'

 

3부. 불의 설 The Fire Sermon

 

보라빛 시간, 눈과 등이

책상에서 일어나고 인간의 내연 기관이

택시처럼 털털대며 기다릴 때,

비록 눈이 멀고 남녀 양성 사이에서 털털대는

시든 여자 젖을 지닌 늙은 남자인 나 티레지어스는 볼 수 있노라.

 

보랏빛 시간, 귀로를 재촉하고

 

뱃사람을 바다로부터 집에 데려오는 시간

차 시간에 돌아온 타이피스트가 조반 설거지를 하고

스토브를 켜고 깡통 음식을 늘어놓는 것을,

창 밖으로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마르고 있는

그네의 컴비네이션 속옷이 위태롭게 널려 있다

 

4부. 수사 Death by Water

 

페니카아 사람 플레버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 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비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로 들어가면서.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쪽을 내다보는 자여

플레버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5부. 천둥이 한 말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횃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은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 소리

옥과 궁궐

먼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6. 마사 그레이엄 무용계에 혁명을 몰고 온 여자

 

[467-469] 이사도라와 세인트 데니스에 대한 간략

이사도라는 신체를 무엇보다 감정을 표현하는 매개로 여겼다고 한다. 그녀는 무용을 위대한 음악 작품의 반주에 맞춰 공연하는 진지한 예술 형식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의 신화와 예술 그리고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에서 영감의 원천을 발견한 이사도라는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춤을 추었다. 스카프를 두르고 맨발로 춤을 추었던 그녀의 무용은 특히 러시아에서 열렬하게 받아들여졌다.

용기 있는 성격에다 미학적인 모험을 추구하였던 이사도라는 당연하게도 무용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녀의 기술적인 혁신은 많은 사람의 추종을 불러올 만큼 숙련성이나 일관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사도라의 성공 요인은 제자나 ‘양녀’들에게 전수해 줄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주로 그녀의 카리스마 넘치는 태도와 ‘몸의 본능적인 움직임’에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이사도라는 통상적으로 새로운 무용 전통의 창시자라기보다는 고독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사도라는 무대에 널린 쓰레기를 모두 청소했다. 그녀는 거대한 빗자루였다. 그녀로 인해 비로소 무대가 깨끗하게 청소된 것이었다.”- 무용 비평가 애드니스 드 밀

 

이사도라와 거의 동년배인 세인트 데니스는 중국, 일본, 자바, 태국, 인도의 무용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녀는 음악의 특정 세부에 주목하면서 무용 동작을 통해 악기 소리와 리듬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신비주의 성향에 물들어 있던 세인트 데니스는 이사도라처럼 인간의 격정과 생명력을 몸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라 순수 영혼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했다.

 

[471] 그레이엄이 무용수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

그레이엄은 1911년 4월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하우스에서 이국적인 춤을 추는 로스 세인트 데니스라는 무용가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를 보았다. 힌두교의 주신 크리슈나는 연인 라다로 분한 세인트 데니스의 유명한 모습이 포스터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레이엄은 금빛으로 반짝이는 팔찌를 끼고 옥좌 모양의 단상에 책상다리로 앉아 있는 화려한 옷차림의 세인트 데니스를 보았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공연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고, 아버지는 그레이엄이 놀랐을 정도로 쾌히 승낙했다. 아버지는 딸에게 바이롤렛 코르사주를 선물하기까지 했는데, 마사는 이것을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했다. 그레이엄은 다양한 여신의 모습으로 나타나 홀로 춤추며 무대를 휘어잡는 매혹적인 여인의 모습에 넋이 나갔다. 장엄하고 화려한 옷차림과 표정이 풍부한 눈, 인상적인 모습에 혼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 순간 내 운명은 결정되었다. 나는 여신처럼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을 더 이상은 기다릴 수가 없었다”고 훗날 그녀는 회상했다.

 

[473-483] 그레이엄이 무용수로서 정상에 오르는 말

신속하게 자기 분야를 마스터하는 것은 거장들의 일반적인 특징인데, 그레이엄 역시 곧 주연 무용수가 되었고, 강사가 되었으며, 관능적인 무어인의 집시 풍 무용인 <세레나타 모리스카>의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숀의 가르침을 모두 배운 그레이엄은 이후 평생동안 세인트 데니스의 인간상과 인격 그리고 무용에서 지속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나는 정상에 오를 것이다. 누구도 아무것도 나를 막지 못한다. 그리고 나 홀로 그 길을 갈 것이다.”

 

“오늘날의 삶은 신경을 자극하고 날카롭게 후비는 뒤죽박죽 엉켜 있는 삶이다. 마치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하다. ..... 내 무용에 표현하려는 것이 바로 이런 삶이다. ”

 

[483-486] 그레이엄에 대한 호평과 혹평

 

미스 그레이엄의 무용 프로그램에는 열정과 항의가 생생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용가로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하는 셈이다. ... 관객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 마사 그레이엄의 지적이고 전문적인 실험실용 탐구.

-마틴

 

“무용은 더 이상 예술의 의붓자식이 아니다” - 윗킨스

 

“가랑이를 벌린 음악 유파” - 루스 세인트 데니스

“마사 그레이엄을 믿지 않아요. 응흉한 뱀 같은 여자입니다. ”- 도리스 험프리

 

[487-488] 중요한 관계

독일계 미국인으로서 오랫동안 데니숀 무용단의 반주자이자 작곡가 및 비공식적인 스승이었던 루이스 호스트가 그녀의 삶에서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다. 호스트는 유럽 음악, 그리고 독일인 루돌프 반 라반과 마리 비그만의 선구적인 무용을 소개해 주었다. 니체의 철학에 접하게 해주었으며, 야구장과 권투장에도 데려갔다. 호스트는 그레이엄의 연인이자 조언자로서 그녀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에 걸맞는 이상적인 존재였다. 그레이엄은 새로운 표현 언어를 창조하는 중이었다. 이 언어는 몸 동작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이해와 당대의 사건에 대한 예민한 인식, 그리고 미국과 유럽의 고전적인 저작에 대한 폭넓은 식견에 뿌리를 둔 언어였다. 호스트는 새로운 언어를 구성하는 이 다양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이런 요소가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젊은 예술가한테는 담쟁이처럼 넘어갈 벽이 필요한 법이오, 나를 그 벽으로 생각하시오. ” -호스트

 

[494] 그레이엄의 다재다능함

그레이엄 무용단의 일원이자 나중에 그녀의 전기를 쓴 에르네스틴 스토텔

“독부가 마사 그레이엄을 기억하면, 거역할 수 없고 신비로운 감동의 영상이 되살아난다. 깊이 움츠렸다가 갑작스레 숨을 토해내는 듯한 간결하고 힘찬 몸짓, 팔다리의 가볍고도 신속한 놀림, 좌우로 급히 움직이는 동작, 발끝을 치켜 든 자세에서의 도약, 허공을 가르는 발차기 동작, 군더더기 없는 착지와 빠른 자세 회복 등 신비스러울 만큼 매혹적인 동작은 우리의 신경계를 직접 자극한다. ”

 

“그녀는 <프론티어>에서 셰이커 가구나 홈스펀 의복처럼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지닌 자기만의 표현을 통해 솔직하고 모든 것을 일소하는 자유, 맞바람을 뚫고 나아가는 자유의 정신을 창조했다. ” - 링컨 커스틴

 

“모든 영혼은 서커스다”- 마사 그레이엄

 

[505] 10년의 법칙과 전환기

처음 10년은 해당 분야의 기예를 익히는 기간이고 (그레이엄의 경우는 1916~1925), 두 번째 10년은 가장 인상적이고 혁신적인 작품을 창조하는 기간이며(1926~1935), 세 번 째 10년은 또 다른 절정의 작품, 그러니까 앞선 시기의 혁신에 기반을 둔 작품이가 그런 혁신을 좀더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해당 분야 전체에 연결시킨 작품을 창조하는 기간이다.

 

[508] 남의 비평에 대한 그레이엄의 반응은?

 

그레이엄은 여성 혹은 미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옹호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는 겉으로 비치는 자기 모습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비판을 견뎌내고 위험을 감수하면서 창조 활동에 전념했다. 무용단의 매력적인 지도자였던 그녀는 자기 주변 사람들이나 멀리서 알게 된 사람들 모두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레이엄은 쉴새 없이 모든 일에 관여했다. 그녀에게 있어 공연이란 삶 자체였고, 자신의 페르소나를 완전히 실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의 삶이 요구하는 긴장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514]

고전주의 시기는 그레이엄이 저작물에 관심을 많이 쏟은 시기였다. 그녀는 그리스 고전 및 고대를 다룬 많은 저작을 풍부하게 읽었을 뿐 아니라, 신화와 제의, 무의식을 다룽 저서, 특히 프로이트와 융 및 이들 학파의 저서를 탐독했다.

 

“마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자신의 감정이었다. 그녀는 춤을 추면서 자신의 감정을 조금식 발산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감정을 다른 무용가에게 전달하는 일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었다. ” -호킨스

 

노트는 그레이엄이 자기 작품의 어떤 ‘공간’을 전개시킨 장소이다. 이는 그녀가 작품에 구현하고자 했던 생각과 감정을 환기하는 문헌 자료의 인용 구절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이다.

 

[520] 그레이엄의 원칙

그레이엄은 이런 자신의 원칙을 전달하는 데 필요한 연습방법을 고안했다. 그녀는 무용수가 아무런 제어 도구 없이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지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학생들은 등의 힘과 골반의 동작개시 역할, 그리고 바닥의 압력을 모두 의식해야 했고, 감정은 손이나 팔의 제스처가 아니라 근육의 수축과 이완, 긴장, 경련 등을 통해 표현해야 했다. 훈련의 중요한 부분은 뱀처럼 똬리를 트는 동작이었는데, 몸을 감았다 풀었다 하면서 신체의 유연성과 힘을 기르게 했다. 그레이엄은 바람직한 움직임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생생한 이미지를 활용했는데, 근육의 긴장은 낭떠러지에 서서 하늘을 보는 것과 같고 이완은 땅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521-530] 아이디어와 철학

"엄정하고 힘든 테크닉, 그러니까 무용 동작의 과학에 따라 신체를 단련해야 하고, 다양한 경험으로 정신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

 

“자연스러움과 간결함을 갖추기 위해선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니진스키는 단 한 번의 탁월한 도약을 위해 수천 번이나 도약연습을 했다. ”

 

“예술가과 비예술가의 차이점은 감정을 느끼는 능력에 있지 않다. 비밀은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을 객관화하고 명백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시는 강렬한 감정이 아니라 언어로 만드는 것이다. ”

-W.H. 오든 역시 야심만만한 젊은 시인에게 비슷한 충고를 한 바 있다.

 

“아무리 추상적인 작업을 할 때라도 거기에는 극적인 라인을 넣어야 한다. 그것은 한 사람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나는 무용을 삶에서 분리시킨 적이 없다.”

 

나는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느끼기를 원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현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그레이엄도 다른 사람들의 구상과 이미지를 원용한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나는 도둑이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다. 플라톤, 피카소, 베르트람로스 등 누구라도 최고의 인물들에게서 생각을 훔친다. 나는 도둑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 나는 내가 훔친 것의 진가를 잘 알고, 늘 소중하게 간직한다. 물론 나만의 재산이 아니라 내가 물려받고 물려줘야 할 유산으로 여긴다. ”

 

“기억에 의존합니다. 내가 인생을 이해한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이해한 방식에서 많은 걸 얻지요. 우리가 읽고 마음 깊이 흡수한 것이 보석처럼 우리의 존재를 이루는 겁니다.” 무용을 시작하는 것은 다양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레이엄은 그것을 끔찍하다고 , ‘거대한 고통’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작곡가 에드가 바레즈가 그녀 면전에서 했던 말을 반복해서 말하길 좋아했다.

“모든 사람이 재능을 타고 나지만, 대부분은 겨우 몇 분 동안만 그 재능을 간직한다. ”

 

“여러분을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위해서 활기찬 인생을 사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나의 삶, 그리고 작품 활동은 필연입니다..... 마치 동물처럼 다른 생각 하나 없이 오직 이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선택은 없습니다. 동물이 일체의 속임수나 야망 없고 먹고 마시고 새끼를 치는 것처럼 말이죠.”

 

그레이엄은 인생을 모두 작품 활동에 바쳤다. 그녀의 친구 에그니스 드 밀은 그녀를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마사는 자신의 삶에서 모든 감정적 애착, 모든 집착, 모든 위안 그리고 여가 시간까지 배제시키려고 했다. 여기엔 가족과 아이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 그녀는 일에 자신의 일부를 아낌 없이 바쳤다. 일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내가 오만하고 허영심이 많으며 반드시 숭배받아야 하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그레이엄은 자신이 만든 드라마에서 살아야 했다. 그 드라마의 일부분으로 자신들을 제공한 사람들과 함께 말이다. ” -무용가 로버트 코언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그레이엄 역시 내가 다른 창조자들에 관해 설명한 것과 같은 종류의 파우스트적인 계약을 맺었던 것 같다. 만약 그녀가 작품 활동을 계속하는 특권을 누려야 했다면, 세속적인 즐거움과 친밀한 인간관계에 대한 희망을 모두 무용의 제단에 바쳐야 했다.

 

그레이엄 무용단에 관여하는 것은 직업을 갖는 것이 아니라 성전(聖戰)에 참여하는 것과 같았다. 그레이엄은 헌신과 대담함이 부족한 사람들을 조금도 이해하지 않았다.

누구나 실패할 권리는 있다. 실패했더라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용기만 있다면 실패를 발판으로 새로운 단계로 오를 수 있다.... 한 가지 대죄(大罪)가 있다면 그건 범용mediocrity이다. 이게 내 믿음이다. ”

 

“사람들이 생각하게 하고 싶다. 내 일에 대한 논쟁은 언제든 환영이다. 아무도 나의 무용 작품을 논하지 않으면, 도대체 내가 했던 일에 실패할리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무용가의 도구는 탄생과 죽음의 운명에 매여 있는 그의 육체이다. 그가 사멸하면 그의 예술도 사멸한다. ”

 

[535-539] 그레이엄의 업적

반세기를 넘는 기간 동안 그녀는 무용의 지도자이자 영감이었으며 양심이었다. 대략 200편에 이르는 그녀의 무용 작품은 ‘전설’이라 불러도 하등 손색이 없다. 전기 작가 스토텔은 말한다.

“엄청난 작품 목록이다. 한 명의 안무가가 창조한 작품으로는 그 규모가 최대이고 그 독창성이나 다양성이 우리의 외경심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네서 오직 희곡의 세익스피어와 회화의 피카소만이 이와 견줄 만한 업적이다. ”

 

“살아있는 동안 전설이 되고 미국 무용업계의 최대 거목이 된 것은 미스 그레이엄의 행운이다. ” -무용 비평가 클리브 반즈

 

 

7. 마하트마 간디 신념을 실천한 정치 지도자,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

 

[542]영국 통치하의 인도

지역별로 사분오열된 인도아 2억 5천만 인구가 몇천명에 불과한 영국의 상인들과 공무원, 군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이는 역사상 개인 소유의 무역 회사가 인구가 밀집한 공대한 아대륙을 철권으로 통치하고 사익을 위해 착취한 유일한 사례였다. ”- 역사가 윌리엄 쉬러William Shirer

 

[543-550] 도덕적인 소년 간디

“나는 보통 이하의 능력밖에 갖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다. 날카로운 지성을 지닌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괘념치 않는다. 지성의 발달에는 한계가 있지만 마음의 성장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해외에 거주하는 동안 간디는 엄청난 독서와 풍부한 산 체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했다.

 

간디는 레이찬드바이의 세속적인 성공과 결점 없는 성품, 종교 지식, 철학적 갈망, 자기 성찰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중에 간디는 “라지찬드라만큼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사람은 없다”고 술회했다

 

기회가 문을 두드리면 아무리 먼 곳으로 떠나야 하고 또 자신과 가족에 어떤 대가를 치르게 해도 그 기회를 붙잡는다는 점이다.

 

[551-572] 남아프리카에서의 성숙

 

만년에 간디는 자신이 남은 인생 동안 매진하게 된 정치 운동이라는 사명의 기원이 마리츠버그이 기차역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지새운 그날 밤에 있다고 회고했다.

“나는 인도인 정착자들의 힘든 상황을 글로 읽고 귀로 들어서 뿐만 아니라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는 자존심 있는 인도인이 살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고, 어떻게 이런 상태를 개선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내 마음은 점점 더 사로잡혔다.

 

1905년경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영국의 사회 이론가 존 러스킨과 러시아의 소설가 레오 톨스토이의 저서와 미국의 사회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북종에 관한 글을 읽어 나갔다. 곧이어 간디는 적극적 실천가답게 자신의 사상과 종교를 직접적으로 실행할 길을 찾아나섰다.

 

그는 오직 작은 공동체에서만 실행이 가능한 단순한 삶. 전통적인 가치를 존중하는 금욕적인 삶을 요청했다. “진정한 자유는 영국이 이기심과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문명을 버리는 것, 아무런 목적도 없고 헛되기만 할 뿐인, 그리고 .... 기독교의 정신을 부정하는 그런 현대 문명을 버리는 것에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

 

간디는 사티아그라하가 단지 수동적인 저항에 그쳐서는 안 되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명의 힘이 되어야 한다고 깨닫기 시작했다.

 

간디의 결정적인 순간들

간디가 유년기에 도덕적인 감화를 받은 사건, 채식주의자 협회에서 불운한 앨린슨 박사를 변호한 일, 마리츠버그이 기차역에서 지새운 밤, 더반에서의 첫 번째 항의 집회, 사티아그라하 사상의 정수, 톨스토이 농장에서의 첫 번째 단식, 남아프리카 체류의 마지마 기식에 교도소에 수감되고 대중 행력을 이끈 일 등이 그것이다.

 

“나는 영국법을 어겨야 했다. 내가 복종하는 것은 그보다 더 높은 법, 내 양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의 영국에 대한 첫 번째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다. ”

 

그는 신념의 세게strength를 강조하기 위해 자기의 존재, 자기의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간디는 이 새로운 무기-비폭력-의 극적인 성격과 잠재력 그리고 그 단순함을 새삼 깨달았다.

 

1922년 3월 간디는 반란을 선동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인도 민중에게서 실제적인 자유를 완전히 빼앗아가는 법안”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하늘에 신이 계신다면, 이런 반일륜적인 범죄에 대해 영국과 인도의 양국민이 어떤 대답을 내릴지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과거의 어떤 정부보다 인도에 더 큰 해악을 끼친 정부에 대해 반감을 품는 것은 미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디는 행동이 바로 자신의 분야임을 증명했다.

 

“위대한 공상가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간디 역시 명상적인 천품과 ,활동성 그러니까 열정적으로 활동적인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와 능력을 결합했다. ”

-간디의 전기작가 브라운

 

[573-574] 사상의 기초

소로에게서는 시민 불복종 사상과 개인이 국가의 압력에 저항하는 방법을 배웠다. 러스킨에게서는 인간 행위의 사회적 차원을 이해하는 통찰로 얻었다. 특히 그는 러스킨을 통해 노동(고상한 노동에서 미천한 노동에 이르기끼지)의 중요성, 특권층과 빈자들의 관계, 경제적 요인과 인간적 요인의 갈등에 대해 면밀하게 관심을 기울일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톨스토이의 저작이었다. 톨스토이를 읽은 경험으로 말미암아 그는 영원히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서 폭력에 호소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보다는 의무, 그리고 모든 인간 문제에서는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종교가 없는 정치란 우리가 피해야 하는 완전한 쓰레기나 다름없다. ”

“인생의 어는 부분도 종교와 떨어질 수 없으며 정치는 거의 모든 점에서 인도의 생명 있는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정치에 참여한다.”

“종교는 정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종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그러나 아무런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577] 사티아그라하의 본질과 실천

간디가 처음으로 사티아그라하에 대해 공개적으로 말한 곳은 남아프리카였다. 그는 참과 사랑에서 태어난 힘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오랜 세월 인도인들이 자기에게 가해진 불의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같은 지역내에 존재하는 사람들 간의 보다 인간적이고 동등한 관계를 확보하기 위해 실천했던 방법이었다.

“폭력을 사용해서 정부가 법안을 폐기하도록 강제한다면, 나는 몸의 힘을 사용하는 셈이다. 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 대가로 주어지는 처벌을 달게 받는다면, 나는 영혼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엔 자아의 희생이 수반된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지 말고 상대의 분노를 감내할 것. 상대의 공격을 앙갚음하지 말 것.

 

“6미터 높이의 밧줄 위에서 몸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줄타기 곡예사는 밧줄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주 작은 실수가..... 그에겐 죽음을 의미한다. ....사티아그라하의 실천자는 이 보다 더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582-605] 간디의 개인적인 측면

 

‘진리실험 Experiments with Truth"에서 정확하고 거짓 없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동기를 성찰했다. 이러한 고백적 글쓰기는 두 가지 효과를 자아냈다.

첫째, 이를 통해 간디는 자신의 역사와 현재 처해 있는 상황, 자기 및 인도 민중 그리고 인류 전체에 대한 자신의 포부를 온전히 자기 내부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글들은 자신의 삶을 주변의 가까운 동료들뿐 아니라 그의 실천 방법에 관심이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한 실험은 내 삶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다. 나의 정신적 평화와 자기 실현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 부분이다. ”

간디는 자신을 드높이겠다는 생각과는 상관없이 스스로를 하나의 모델로 생각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의심과 파괴적인 행도을 버리도록 고무하는 매개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적인 행동을 하고 글을 썼다. 3등칸 기차 여행, 실잣기. 지역 방언으로 말하고 글쓰기, 식이요법 감독 등 모든 일에서 그는 그것을 성찰하고 새로운 생활 방식을 시도하면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했다.

 

"나는 아무런 재산도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부자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은 참으로 여유 있고 편안한 삶이다.... 나는 가난한 탁발 수도승이다. ... 기도가 내 삶을 구원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간디가 가난하게 사는 데는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다.”

 

저널리스트 윌리엄 쉬러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위대한 인물이 앞에 서면 어떤 엄청난 일이 갑자기 그들의 칙칙한 삶에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으며, 천으로 허리만 두른 이 성자와 같은 인물이 자신들을 보살피고 자신들의 비참한 삶을 이해하고 델리나 지방 주도의 힘센 백인 신사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을 도와줄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 간디의 천재성은 영적인 인물이 사람들을 이끄는 전통적인 호소력과 사람들로 하여금 민족의 이상을 위해 복수심이나 이기심과는 상관 없이 스스로 삶을 희생하게 끔 인도하는 전혀 새로운 행동 방식을 결합한 데 있다.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을 말했고 말한 것을 실천에 옮겼다. 그의 정신과 영혼과 몸은 일치했다. ” -아나수야 사라바이

 

간디가 나누었던 가장 중요한 대화는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신과의 대화였다.

그는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자신의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독재자의 칼끝을 무디게 하는 방식은, 더 예리한 무기로 대적하는 게 아니라 내가 물리적으로 저항하리라는 예상을 뒤엎는 것이다.... 내가 제시하는 영혼의 저항을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엔 당황하겠지만 결국에는 상황을 이해할 터인데.... 이것은 그에게 모욕적인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정신을 고양하는 일이다. ”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의 폭력의 즉각적인 효용성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부처의 비폭력 행위의 효과는 오랫동안 유지되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진다. ”

 

“정의로써 대항함으로써 이번 싸움에서 나는 세상의 공감을 얻고 싶다.”

 

총독 관저의 다과회에 초청된 간디는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을 상기시키기ㅣ 위해” 몸에 지니고 간 불법 소금을 차에 집어 넣었다.

 

“마하트마 간디가 가는 곳마다 수천 명의 환영 인파가 나타났고 한 무리의 사진기자와 기자들이 그의 발꿈치만 쫒아다녔으며, 그의 동정은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간디는 매우 무리한 일정을 소화했다. 하루에 열 번 이상 모임에 참석하면서도 실을 잣고 글을 읽고 쓰고 기도하고 동지들과 회합하는 일도 빠뜨리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인도 국민을 대변하고자 합니다. 말도 못하고 헐벗도 굶주리는 인도인들을 대변하고자 합니다. 나는 협상하기 위해 런던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캐나다나 남아프리카와 같은 영연방 자치령 지위는 선택사항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간디는 비폭력을 신봉했지만, 점차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고 있음을 암시했다.

“자유는 여러분의 생득권이듯 우리의 생득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피를 흘리는 것을 우리는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여러분께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자유를 얻는 데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갠지즈 강을 피로 물들인다 해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

 

"그는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가장 잔혹한 폭력이 저질러지는 장소로 들어갔다. 그는 사티아그라하의 유일한 실천자가 되었고, 몸소 시위를 하고 설교를 하고 단식을 거행함으로써 폭력에 대한 싸움에 온몸을 던졌다. “ -브라운

 

“간디는 예수였고, 이제 그들은 간디의 사도로서 무심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려고 노력한다. ” -인도계 미국 작가 베드 메타

 

제 3부 창조성의 조건

10.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620] 개인의발달에 맞춘 분석늘

1. 성인이 된 이후에 발휘한 창조성과 연관하여 각 인물의 유년기를 검토한다는 점

2. 생애 전반에 걸쳐 창조적인 능력이 발달하는 국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

3. 자신의 재능을 갈고 닦어 획기적인 업적을 내는 순간에 초점을 맟춘다는 점

 

[623-636] 창조자Exemplary Creator의 초상

 

E.C는 이미 10년 이상 어느 분야를 완전히 통달하기 위해 노력한 상태이고 그 분야에서 거의 최전선에 와 있다. 가족이나 젊은이들과 겨루고 싶은 시급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가족이나 전문가에게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뛰어난 젊은이들과 겨루고 싶은 시븝한 충동을 느끼게 된다. 청년이 된 E.C는 자신이선택한 분야의 활동이 활발한 중심 도시로 과감하게 이주한다. 그는 대도시에서 자신과 관심사가 비슷한 젊은 동료들을 놀라울 정도로 빨리 만나게 된다. 그들은 함께 해당 분야의 이곳저곳을 탐사하고, 모임을 결성하고, 선언문을 발표하고, 서로 간에 자극을 주면서 새로운 경지에 오르고자 노력한다. E.C,는 직접 자신이 선택한 분야로 직행하기도 하고 결정화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이런저런 경력을 다양하게 쌓기도 한다.

 

엄청난 에너지와 헌신절인 노력이 있다면, 그는 첫 번째 혁신을 이룬 지 10년쯤 후에 두 번째 혁신을 이룰 기회를 맞게 된다.

 

E.C. 유형의 인물들은 실제로 자신감과 기민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 근면함, 일에 대한 집중력 등을 지니고 있다.

자신감과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 나르시즘과 합쳐질 수 있으며, 모두가 자기도취하 할 만큼 지나치게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편이어서 남을 희생하고라도 자신의 목적을 완수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노골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홀대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저 홀로 있기를 원했을 뿐이다. 피카소는 반대편 극단에 위치한다.

 

피카소와 그레이엄은 표현성이 풍부한 작품을 만들었을 만큼, 침실이나 작업실에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남들은 도착이라 할지 모르나 나는 내 작품을 미친 듯이 사랑한다. 마치 고행자가 배를 할퀴는 마모직셔츠를 사랑하듯이 말이다. ”

-프랑스 소설가 구스타브 블로베르

 

* 반항적인 태도가 가능한 두 가지 요인

1. 조상과는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재능과 솜씨가 뛰어났다는 점.

2. 유년기에 창조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모델을 만났다는 점

 

* 다른 사람들의 세계와는 담을 쌓고 지냈다고 말하는 두 가지 패턴

1. 많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내던 시기에서 극도의 고립 속에서 중대한 발견을 이루는 시기를 거쳐 결국 나이가 들면 다시 더 크고 더 포용적인 세계로 회귀했다.

2. 극도의 고립을 겪는 시기에 한 명 혹은 그 이상의 사람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그에게서 필요한 도움과 격려를 얻었다는 점.

 

[637]*인생 패턴

창조성의 10년 규칙

10년간의 견습 기간을 거쳐야 중대한 혁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도약은 대개 일련의 시험적인 단계를 거쳐 이루어지는 편이지만, 일단 도약을 하게 되면 과거로부터 결정적인 단절을 이룬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프로젝트>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엘리엇의 <황무지>, 그레이엄의 <프론티어>, 간디의 아메바비드 파업을 결정적인 도약으로 간주한다.

 

표 640p 참조

 

[641] 4단계 모형

그레이엄 윌러스이 유명한 4단계 모형

준비단계preperation -> 부화단계incubation -> 조명단계illumination -> 개정단계revision.

 

[642]창조자의 상징체계들

프로이드는 인간의 꿈과 행동에 대한 과학적 개념을 언어로 표현했으며 간단한 도식으로 나타냈다. 아인슈타인은 복잡한 공간적 비유와 신체 이미지, 그리고 수학 방정식을 통해 사유했으며, 사유가 끝난 후에 이를 언어로 나타냈다. 피카소는 세상 사물의 색채와 질감, 선과 형태를 다루었는데, 점차 이런 것을 그 자체의 내재적인 특질에 따라 화폭에 담아냈다. 스트라빈스키 역시 음색과 리듬, 가락, 음질 등 소리의 세계에서 이와 유비되는 요소를 다루었다.

 

[676] 새로운 세기의 시작이란. 기회의 시간이자 과거의 짐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뜻에 따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이며 표면 아래에 꿈틀거리고 있는 긴장과 불확실성을 표현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봄이 제전>에서 인생의 의미란 오직 죽음에서만 찾을 수 있고 죽음은 황홀경과 다를 바 없으며 창조는 파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는 것 같았다.

 

“현대성이란 파편화된 삶이며 시간의 급속한 변화이고 조각난 경험이다.

“현대성이란 덧없고 우연한 것이다. 이게 예술의 반이라면 나머지 반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다. ” -화가 콩스탕탱 기에 관한 글에서 예술의 현대적인 특질

 

현대예술은 끊임없는 변화라는 맥락에서 탄생한다.

 

 

간주곡 1 [242-247] 프로이드, 아인슈타인

두 사람은 모두 탁월한 학자이며 사상가로서, 평생 동안 지식 탐구에 몰두했다.

학자들이란 세계 (물리 세계, 사회 세계, 정신 세계)의 현상을 기술하고 설명하는 과업을 맡은 사람들이다. 인문학자들은 문학과 예술, 개인들이 생애, 역사적 사건과 같은 구체적인 현상에 주목하고 이 분야에 어울리는 이론 모델을 활용한다. 반면 과학자들은 실체의 종류와 사건의 유형을 설명할 수 있고 나아가 특정한 조건 하에 이러한 물체와 사건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있는 이론 모델을 세우려고 노력한다.

자신들의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프로이드는 금욕적으로 성관계를 단념했고, 아인슈타인은 충만한 가정 생활을 일부러 혹은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프로이드는 유아기의 사건을 성년의 감정과 인격을 좌우하는 주된 추진력으로 여겼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아이의 마음을 중시해서 아이들이 물리학에 대한 직관적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했다.

 

간주곡 2 [458-464] 파블로 피카소, 이고를 스트라빈스키, T.S.엘리엇

 

1. 이들은 모두 브루주아 집안에서 태어나서 가족이 높이 평가한 예술 장르에서 활약했다. 세 예술가는 젊은 나이에 예술 중심지로 이주했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는 파리고, 엘리엇은 런던으로 갔는데, 곧 가장 혁신적인 예술가와 지식인 그룹의 중심 인물로 부상했다.

2. 이들의 예술적 업적은 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들과 가까운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루어졌다. 파카소에겐 조르쥬 브라크가 있었고, 스트라빈스키에겐 디에길레프 발레단이, 그리고 엘리엇에겐 에즈라 파운드와 비비언 엘리엇이 있었다.

 

3. 창조력의 원천을 잃지 않고 새로운 작품을 추구하기 위해 일종의 협약, 아주 인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를 보존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가학적으로 대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친분 관계를 희생해서라도 법정 싸움의 불씨를 지피는 데 주저치 않았다.

엘리엇은 프로이드처럼 금욕적인 삶을 선택하고 동시에 가학적이라 할 만큼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무시했다.

 

4. 지적 능력에 있어서 폭넓은 편차를 보인다. 엘리엇은 교수가 될 만한 능력이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미학과 철학상의 특정 주제에 관심이 많았다. 학문적 관심이 가장 미약했던 피카소는 당대의 이론가과 지식인들에게 마치 고양이에게 쫒기는 쥐처럼 휘둘리 SRKA이 있었다.

 

5. 종교 문제에 관련해서도 주목할 만한 차이점을 보이낟. 스트라빈스키와 엘리엇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카톨릭교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피카소는 기성 종교보다는 미신에 의존하는 성향이 짙었다.

 

예술가들은 건강이 허락하는 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다.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는 마사 그레이엄과 마찬가지로 이런 길을 선택했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창조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10년을 주기고 작품 세계를 쇄신하는 놀라운 창조력을 보여 주었다. 이런 면에서 엘리엇은 다소 예외적인 사람이다. 스트라빈스키나 피카소처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40대에 들어서면서 사실상 시쓰기를 그만둔 것이다. 물론 엘리엇은 계속 글을 썼고, 극작가라는 다소 위험한 길에 들어섰으며, 문학의 여러 분야에 실질적인 문지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장인 정신이 투철한 예술가였다. 매일같이 작업실에 들어가 거의 홀로, 완성까지 몇 달 혹은 몇 년씩이나 걸리는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이러한 작품은 예술 수단과 장르의 실험을 통해 창조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들이 그것을 세상에 내보내기 전까지는 그들의 소유로만 남아 있을 뿐이고, 작품을 창조한 상징체계(회화, 음악, 언어)에는 이들 예술가의 면모가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술 작품들은 더 넓은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되었다. 회화는 전시되었고, 음악 작품은 공연되었으며, 시는 출판되었다. 이러한 활동에 의해 예술가들은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셈인데, 이 세계에는 유력한 예술 중개인도 포함되어 있다.

 

마사 그레이엄이나 마하트마 간디는 특정 시기에 그들의 공개적인 행동performance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에 따라 평가받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간주곡 3 [610-615] 마사 그레이엄, 마하트마 간디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마하트마 간디

 

다른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에 거리를 둘 수 있었지만, 그레이엄은 기본적으로 공연가performer였다. 그녀의 예술적 공헌은 특정한 역사적 순간, 그리고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과 긴밀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중요한 점에서 그녀는 간디와 유사한 창조자라 할 수 있다. 인도의 지도자 간디 역시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펼친 활동과 이 활동 내용에 대한 사람들(그를 접한 사람들과 그의 행적을 멀리서 알게 된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린 창조자였다.

 

그들은 육체로서 창조 활등을 한 사람들이다. 신체적인 외양, 그리고 자신들의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들의 창조 활동의 핵심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풍모를 지녔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공연(연설)에 매료되어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건강을 챙겨야 하고 어느 정도는 자기 현시를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 관객과 동료들의 반을을 살펴보고 거기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끊임없이 몸의 이상을 걱정하며 살아간다. 단식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스텝을 잘 못 밟아 작품을 그르칠 수 있다는 두려움, 혹은 그럴싸하게 보이지 못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실존의 순간마다 그들은 엄청난 부담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 무용과 현대 정치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분야를 연결하기 위해 신체와 실존의 순간existential moment 을 강조했다.

그레이엄은 예술가였다. 그녀의 많은 작품은 부용 형식의 여러 상징체계, 이를테면 언어와 음악, 구상, 무대장치, 그리고 그레이엄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이러한 요소를 전달하는 방식 등을 통해 표현되었다. 그녀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이러한 상징체계를 하나씩 혹은 서로 결합해서 탐구했고, 자신의 생각을 호스트와 무용단과 함께 시험했다.

 

간디는 일급 사상가였다. 사티아그라하는 매 단계와 그것의 결과를 신중하게 고려하면서 철학 이론만큼이나 세심하게 구상한 것이다.

그레이엄과 간디는 둘다 그들의 사상과 신체로 형성된 공간에서 활동했다. 두 사람 모두 진을 빼는 일을 하다보니까 주기적으로 투쟁과 공연 무대에서 물러나 자신의 행적을 성창하는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간디의 저항과 파업과 단식에는 그이 인품과 개인사가 고스란히 서려있다.

그레이엄에게 공연은 그 자체로 목적이 있었던 반면, 간디에게 실행이란 정치와 사회 및 종교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들 창조자 가운데 오직 간디만이 어떤 집단이나 분야에 속한 성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성의 힘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말을 걸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이력과 재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뜻이 통하는 그런 이야기와 사상과 존재 방식을 창조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한 분야를 쇄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새로운 인간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그것을 설득력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유로 간디의 업적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Ⅱ. 내가 저자라면

 

2-1. 이 책의 전체적 뼈대와 저자는 왜 이 책을 썼을까?

 

이 책은 다중지능론을 주장했던 저자가 실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창조성의 비밀을 역동적으로 풀어낸 교양서다. 창조성과 관련된 실제 개인들의 심리적, 사회적, 시대적 조건 모두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심리적 기질과 그가 처한 주변환경, 그리고 시대적 특성을 곁들여 창조성의 본질을 날카롭게 조명해냈다.

 

이 책의 목표는 두가지다. 첫째는 창조성의 본질을 밝히는 것. 둘째는 이런 창조자의 배출을 가능하게 한 현대사회라는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그러면 ‘창조성이라는 무엇인가?’ 에 대한 의문에서, 가드너는 이 질문을 ‘창조성이란 어디에 있는가?’로 전환시켜 대답하고자 했다. 그는 <개인individual-일work- 타인other person> 이라는 창조성 소재 모형을 제시한다.

이 모형에 따르면 개인은 어떤 분야의 대가master가 될 만한 소질을 싹으로써 가지고 태어나는데, 이 소질을 심화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적절한 일의 체험기회(교육, 훈련)을 필수적으로 가져야 한다. 이러한 체험의 과정에서 타인(가족, 친구, 경쟁자, 후원자 등)으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의미 있는 인간관P가 형성되어야 한다.

 

가드너의 창조성 소재 모형을 단일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을 제시한다.

 

10년 주기론’은 그 중의 하나이다. 창조적 대가를 연구한 결과 그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대체로 10년간의 준비를 거쳐 창조성이 성숙하고, 10년간 창조성을 발휘하며, 다음 10년간 그 창조성을 다시 다른 분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이런 사람들의 창조성 발휘를 가능하게 한 시대적 특징을 규명하려는 것이다. 가드너가 선택한 일곱 명의 창조적 거장들은 모두 현대의 인물들이다. 그가 관심을 가진 시대는 현대사회modern era로서, 현대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이 창조성 발휘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밝혀보려고 시도한다.

 

가드너의 시대적 특징에 대한 관심은 보다 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창조성의 발휘와 관련해서 시대를 뛰어넘는 공통점은 무엇이고, 시대에 국한된 특수성은 무엇인가? 둘째는 창조성을 발휘하는 인간의 심리와 족적 속에서 그가 살아간 시대의 특징과 의미를 연역해낼 수 있을까?

 

 

일곱 명의 ‘현대의 거장들’에 관해 글을 쓰면서 하워드는 세 가지 중요한 목표를 염두에 두었다. 첫째, 15년에서 1935년에 이르는 반세기 동안 이들 각자가 살았던 세계를 들여다보고 싶다. 이를 통해 그들 나름의 특별하고 종종 기묘하게도 보이는 지적 능력과 성품,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 그들이 제기한 창조적인 의제. 힘겨운 노력, 그리고 그들이 성취한 업적의 특성을 밝힐 생각이다.

 

두 번째 목표는 창조적인 행위의 본질에 관해 대략적으로마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분야에 상관없이 인간의 창조적인 행위를 통하하는 법칙을 추려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목표는 ‘현대’라고 부른는 시대에 관해서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몇몇 재능 있는 사람들의 특정한 업적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형성했고 또한 그들이 그 특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던 시대에 관해서도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사람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는 과학자로서, 내가 논리, 수학 지능(아인슈타인의 경우)과

인성 지능(프로이트의 경우)이라 부르는 지능이 우수한 사람들이다. 다른 네 명의 대가들은 모두 예술 분야에서 혁신적인 도약을 이뤄냈으며, 각기 다른 지능을 대표한다.

피카소는 시각, 공간 지능이 우수한 회화의 거장

스트라빈스키는 음악 지능이 뛰어난 음악의 혁신가

엘리엇은 언어 지능이 탁월한 언어의 마술사

그레이엄은 신체, 운동 지능이 출중한 무용의 대가

 

목차

 

감역자의 글

감사의 글

들어가는 말

 

제1부 창조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1. 취리히에서의 우연한 만남

일곱명의 창조적인 사색가/ 이 책의 목표/ 구성적 주제/ 동시대인들에 관한 연구/ 한 시대의 조명/ 현대

 

2. 창조성의 연구 방법

창조성 연구와 지능 연구/ 창조성에 대한 인지적 접근/ 성격과 동기부여의 관점/ 역사계량학의 관점/ 창조성에 대한 나의 접근법/ 구성적 주제-재론/ 구성적 틀/ 경험적 조사 문제/ 새로 발견한 주제

 

 

제 2부 현대의 창조적 거장들

3. 지그문트 프로이드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간주곡1

5. 파블로 피카소

6.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7. T.S. 엘리엇

간주곡2

8. 마사 그레이엄

9. 마하트마 간디

간주곡 3

제 3부 창조성의 조건

10. 다양한 분야의 창조성

구성적 틀-재론/ 전형적인 창조자의 초상/ 주요 쟁점-재론/비동시성 평가/ 새로 발견한 주제/남은 문제들

 

에필로그-현대와 현대 이후

옮긴이의 글

부록- 참고문헌, 인명 찾아보기/ 주제 찾아보기

 

2-2. 특히, 감동적이었던 장절,

 

“화가란 결국 무엇이겠는가? 다른 사람의 소장품에서 본 그림을 그려서 자신의 소장품으로 만들고 싶은 수집가가 아니겠는가. 시작은 이렇게 하더라도 여기서 색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피카소

 

“나의 전문 분야는 행동이다”

-마하트마 간디

 

“누구나 실패할 권리는 있다. 실패했더라고 더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용기만 있다면 실패를 발판으로 새로운 단계로 오를 수 있다.... 한 가지 대죄(大罪)가 있다면 그건 범용mediocrity이다. 이게 내 믿음이다. -마샤 그레이엄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작곡 행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성찰했다.

“창조적인 음악가로서 나는 매일매일 짐을 풀 듯이 내 마음속의 아이디어를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나는 작곡가라는 운명을 타고났고 다른 것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작곡을 했다.... 나는 영감이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영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물론 처음엔 잘 모를 수도 있다. ”

(“영감이 내게 오지 않으면, 나는 그것을 맞으러 마중나간다”)

스트라빈스키는 작곡의 우연성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뜻밖의 참신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면 메모를 해두고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활용한다.” - 스트라빈스키

 

“완벽한 예술가일수록, 번민하는 자아와 창조하는 자아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

동시대 모던니스트인 피카소와 스트라빈스키, 그레이엄의 견해에 공명하면서, 그는 미숙한 시인은 선배의 작품을 그저 모방만 할 뿐이지만 성숙한 시인은 그 핵심을 훔쳐내서 더욱 개성적이고 훌륭한 작품으로 빚어낸다고 지적했다. -T.S 엘리엇

 

2-3. 내가 이 책을 읽고 어떻게 나의 삶에 체화할 것인가.

 

나는 생각해보았다. 왜 이 책을 역사편에 넣었을까? 7명의 세계 거장들의 삶이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거장들이 이룬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이들의 평범함이 위대함으로 가는 어떤 규칙들이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나의 평범함이 위대함으로 가는 길을 나에게 적용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7명의 거장들은 어떻게 보면 자기 분야에서 대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맞는 재능을 발견하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과 자신의 땀과 열정으로 고독한 시기를 보냈던 시기들이 있었다. 나의 역사를 써야겠다. 나의 평범함의 역사가 내 개인의 역사를 써나가는데 이 책을 바탕으로 나의 재능을 살펴보고 넓으면서도 다양하게 탐구하라는 의미일게다. 넓게 파다보면 나에게 걸리는 게 있을 것이고, 그 넒음속에서 나와 맞는 것이 나타났을때는 깊게 파다보면 나도 창조적 전문가를 거쳐 한 분야에서 대가를 이루는 창조적 사상가로 거듭 날 수 있겠다.

 

역사를 어떻게 창조해나갈 것인가, 양질전환의 법칙

읽은 책과 나를 어떻게 연결시키고 내 삶과 역사에 체화할 것인가.

사람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어떻게 길들이느냐에 따라 내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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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5 11:30:59 *.50.65.2

질문합니다. 비디오 영상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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