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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17일 13시 51분 등록

류블랴나에서사부님2009년여름.jpg

 

얼마 전에 찾아낸 사진 한 장.

 

사부와의 여행에서 잊지 못할 해프닝 중의 한 장면을 담고 있는 사진입니다. 

2009년 여름에 갔던 슬로베니아, 여행 말미에 수도 류블랴냐에 머물게되었지요.

우리는 광장에서 사부를 광대로 분장시키고,

우리 자신들도 드레스 코드를 빨강으로 하고

'되나가나 무작정' 컨셉으로 거리 공연(노래와춤)을 했답니다.

광장을 둘러싼 사람들이 바닥에 놓아둔 우리 모자에 동전을 던져주었지요.

우리가 누구라는 것을 잊고 철저히 익명이 보장되는 자유의 공간에서

우리는 더할 수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사부님, 행복해보이지 않나요?

 

 

그때의 일을 저는 <크로아티아여행기>에 다음과 같은 글로 담아두었습니다.

 

-------------------


춤은 모든 인간에게 잠재된 언어다 – 도리스 험프리

 

사랑하는 그대에게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릅니다. 마지막 날 류블랴나에서 거리 공연을 하겠다고 5기 연구원들은 버스 안에서 틈만 나면 노래 연습을 했습니다. ‘공연’만을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그들의 노래 솜씨는 어설프다고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거리’공연이라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나는 누구보다 거리 공연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한국의 보컬 단체들이 유럽의  페스티벌 무대에 설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지난 10년 동안 나의 일이었으니까요. 음악은 세계 공통 언어입니다. 거리는 어디서나 만나는 열린 무대요, 흥겹게 부르는 노래 소리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붙잡게 마련입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합창의 힘은 더욱 크지요. 광장 문화 속에서 성장한 유럽 사람들에게는 그런 축제의 정신이 낯설지 않지요. 

 

버스 안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그들을 보며 이미 내 머리 속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그들은 준비하는 동안 충분히 자신들을 즐겼습니다. 그들에게는 그 과정이 이미 축제였습니다. 버스 안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동참하였습니다. 덕분에 공연단의 사이즈가 제법 커졌습니다. 공연 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음악에 빠질 수 있다면 그 공연은 이미 성공한 공연이 아닐까요. 관객과 상관없이 폐쇄된 공간에서 기계적으로 하는 공연은 따분하기 그지 없습니다. 원래 사람들 안에는 축제의 스피릿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꺼내 줄 장소로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 만큼 좋은 곳은 없습니다. 생맥주 한 잔과 함께 자신 안에 숨겨진 디오니소스의 열정을 꺼내 드는 곳도 바로 그런 축제의 광장이 아닐런지요.
 
류블랴나 시내에 도착하기 전에 전체 미션 하나가 지령되었습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좋으니 빨간 것으로 자신을 코디할 것! 빨간 색은 여행하는 사람의 가방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색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용케 빨간 색들을 찾아내 달고, 매고, 입고 나왔습니다. 공연하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다가 우리는 프란시스코 성당이 마주 보이는 프레세렌 동상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곳 아래 설치된 둥근 계단은 공연하기에 완벽해 보였습니다. 광장 앞으로 열려진 그 공간은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 잡기에도 더 할 수 없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몇몇 처자들은 분장을 한다며 화장실로 내달렸습니다. 공중 화장실은 세 개의 다리가 한 자리에 모여있는 그 유명한 트리플 브리지 아래에 있었습니다. 거울과 세면대가 부착된 넓은 공간은 분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지요. 돈을 받는 아저씨는 난데없이 쏟아져 들어와 법석을 떠는 이방의 여자들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우리들에게는 그런 아저씨의 모습 하나도 재미의 원천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사부는, 사비차 폭포를 보러 가던 날 숲에서 주어온 산신령 지팡이를 들고 빨간 코의 광대로 멋지게 변신해 있었습니다.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두터운 입술은 꽤나 섹시하였습니다. 그 빨간 립스틱 속으로 그의 신분은 숨어버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대한민국 변화 경영의 일인자가 아니었습니다. 완벽한 거리의 광대를 자처하며 그는 광장을 마냥 쏘다녔습니다. 파란 눈의 이국 소녀가 머뭇거리며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한국에서 배낭 여행 온 아가씨도 그에게 다가와 사진찍기를 청했습니다. 우리 일행 중의 한 대원이 모자를 벗어 광장 중앙에 놓았습니다. 다른 일원은 그곳에 자신의 동전을 수북이 집어 넣었습니다. 또 다른 일원은 <UNICEF>라고 적은 종이를 모자 위에 붙였습니다. 우리의 공연이 자선 공연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반갑습니다>라는 노래의 멜로디를 차용해 ‘헬로 베니아, 슬로베니아~’를 합창하는 것으로 우리의 공연은 시작되었습니다. SW의 기타와 JD의 하모니카 반주에 맞추어 <꼬부랑 할머니>,<조개 껍질 묶어> 같은 옛날 노래들이 줄줄이 연주되었습니다. 길가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발걸음을 멈추고 우리 앞에 둥그렇게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늘어나는 사람들의 숫자에 고무되어 우리들의 노래는 더욱 발랄해졌습니다. 모자에도 동전이 쌓여갔습니다. 그때 저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나갔습니다. 몸이 시키는대로 춤을 추었습니다. 노래의 운율을 타고 내 몸은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나는 춤을 사랑합니다. 배워본 적은 없지만 춤을 추고 싶은 충동은 언제나 내 몸 속에 숨어있습니다. 이렇듯 환희의 순간이 찾아오면 나의 몸은 뇌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먼저 반응을 합니다. 춤추는 동안 오장육부가 열리고 영혼과 몸이 완벽히 소통하는 그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나는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실 남을 의식해, 혹은 스스로의 교양을 놓지 못해 내 몸은 평소 많이 굳어있습니다. ‘춤을 춰라,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이것은 춤에 관한 한 가장 위대한 강령입니다. 계속 춤을 추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춤을 출 수만 있다면 누가 뭐라든 이미 최고의 무희입니다.

 

공연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졌습니다. 우리는 더욱 신이 났습니다. 체면과 부끄러움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오히려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람들의 분방함이 그들을 감염시켰습니다. 어떤 이는 우리가 앉은 계단으로 다가와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변경연 댄스녀(女)들의 댄스가 이어졌습니다. 무리 속에서 아저씨들이 나와 댄스녀들과 댄스 파티를 벌였습니다. 국적 없는 스텝을 밟으며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그들 입에서는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공연이 끝나자 누군가 말을 했습니다.

 

‘내 년에는 더욱 멋진 공연을 준비하자.’

 

아무래도 몇 년 후에는 영국의 애딘버러나 프랑스의 아비뇽 같은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대, 우리는 한 번도 함께 춤을 추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대, 그대는 춤을 좋아하시나요?

 

 

거리에서 나는 레나를 만났지 (그날의 사부의 시)

그녀는 푸른 눈을 가진 꼬마 아가씨
내가 그녀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도망칠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어
그러나 내게서 그 파란 눈을 뗄 수 없었지
내가 손을 조금 흔들어 주었어
그리고 미소도 보내 주었지
그녀도 조금 웃었지  내가 웃은 만큼
난 조금 더 세게 손을 흔들었고
몇 살이냐고 물었어
그녀가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지
내가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지
레나, 그게 그녀의 이름이었어
류블랴나의 광장에서 나는 레나를 만났었네
누군가 사진을 찍어 주었지
레나와 나의 사진을 
그녀의 일생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그 사진 한 장을 
그녀가 처음 나를 보던 그 눈
두려움과 온갖 의문으로 가득한 태초의 눈을
류블랴나의 광장 거리공연에서
나는 레나를 만났었네 

IP *.64.23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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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7 14:29:49 *.64.231.52

위의 글은 사부와 공저하려했다던  <크로아티아 여행기>의 한 꼭지입니다.

30여편 이상의 꼭지를 써두었는데, 여러분 반응이 괜찮으면 하나씩 풀어보겠습니다.


아이디를 단경(旦京)으로 바꿨습니다. 로이스-소은(蘇隱)이라는 닉에 이어 이번에는 단경입니다.

단경은 '서울의 아침'이라는 뜻이지요.

저는 제 식대로 '서울의 아침을 깨운다'로 풀이합니다.   

초아 선생님이 감춰진 내 안의 것을 소생시키라고 <소은>이란 이름을 지어주신 후에

4기 연구원 시절 제 글들을 읽으시고 <단경>이라는 호를 하나 더  지어주셨습니다.

2009년이니 벌써 오래 전 일이네요. 

필명으로 쓰려고 나름 아껴둔 이름입니다. 

이제 이 이름으로 새로 시작해보려고합니다.

 

연구원의 좋은 글에 다음 주부터 <여행과 사람들>이란 컬럼을 시작합니다.

단경이란 이름으로 쓸 것입니다.

응원, 부탁합니다.

제가 좀 회복하면 여러분들에게도 응원 많이 보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재동씨나 다른 어떤 분,

류블랴나 공연할 때 사부님이 레나에게 다가가 말 거는 장면을 사진에 담은 사람 있으면 알려주세요. 

그 사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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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7 16:06:21 *.216.38.13

누님. 단경이란 이름은 왠지 처마끝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이 연상되네요. 

그만큼 단아하면서도 황홀한 빛을 발하겠지요.

다음주부터 연재할 <여행과 사람들> 칼럼 집필 축하드려요.

황홀감을 주는 칼럼, 기대할께요! 

기 팍팍! 전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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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8 08:42:11 *.30.254.29

선배님의 마음편지를 받아서 읽을 때부터

팬이었죠.  기대하겠습니다.  ^^

 

요즘, 아티스트 웨이를 다시 읽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생각난답니다..하하하

 

단경...좋은 이름입니다.

화이팅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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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8 12:08:56 *.252.144.139

어이쿠, 이러다 정말 책 나오겠어요.

책이 별건가요, 이런 글들이 쌓이면 책이죠.

단경 선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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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8 13:37:50 *.201.99.195

아아 ~

공연이 끝나고 싸부의 붉은 입술을 휴지로 닦아드릴 때,

입술 뾰죽 내밀고 얌전히 서있던 싸부 생각이 나는군요.  

빨간 코는  통채로  코를  슈우~욱 뽑아버릴 수 있었지만.... ㅋㅋ

단경,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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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8 16:33:05 *.131.45.203

입술은 제가 발라드렸지요.

혜향의 립스틱으로. 혜향이 도저히 부끄러워서 못 바르겠다기에.

예쁘게 발라지기를 가만히 기다리시던 모습..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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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8 15:22:06 *.43.131.14

로이스님과 여행에 대한 글이 몹시 어울립니다.^^

크로아티아 여행기가 로이스님이 출산할 여행기의 맏이가 될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천안에서 있었던 연구원 총회 때 검은색 정장에 남미 베낭여행에서 사온 수제 헝겁 꽃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담날 아침에 오셨었잖아요? 그 전날 저녁에 일찍 자면서 로이스님의 여러 모임에 참여해본 저는

로이스님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좀 그리웠더랬어요.

몽골 여행 때도 여행을 좋아하는 로이스님이 계시니 그 자체로 멋질 것 같아요.

 

나의 글을 잠잠히 지켜보다 '이름'을 건네는 인연, 저도 탐나요.  

 

로이스님으로 인해 저는 많은 것들을 경험했어요. 

연구원 게시판 칼럼 란에 글을 올리는 것도 로이스님으로 인한 것이구요. 

저는 어찌 보면 로이스님이 뿌린 씨앗 중 하나의 열매를 먹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응원합니다. 로이스 & 단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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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8 16:28:56 *.131.45.203

맞어요. 드레스코드 빨강. 저 나무지팡이..차안에서 내내 노래하던 시간...

슬로베니아에서 동양사람 보면 놀랄거리며 친해지기 위해 슬로베니아를 넣은 노래를 만들었었지요.

그 공연 생생하게 떠오르니 스승님이 더욱 보고 싶어지네요.

 

단경. 단아하고 차분한 이미지가 그려지네요.

여행기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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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9 07:29:03 *.105.125.165

DSC_1266.jpg

 

혹시 이 아이가 레나라는 아이인지요?

누나가 언급하신 사진은 제게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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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9 14:59:32 *.1.160.49

선배님, 숨이 멎을 만큼. 멋. 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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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4 10:40:50 *.108.69.102

이렇게 글을 잘 쓰고, 열정적이고, 유능한 로이스가 '의기소침'... 이런 단어 입에 올리면 영 안 어울려서

매치가 안 된다우.^^

 

로이스,  변경연 여행을 그대로 책으로 쓰면 되겠네요.

삶의 정점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황홀한 순간,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여행...

책으로 거듭날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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