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인
- 조회 수 2039
- 댓글 수 4
- 추천 수 0
하루의 경계인 자정이 오면 찬란했던 하루는 고요히 숨을 거두고 깊은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날이 태어난다. 하루의 죽음과 탄생의 순간에 가끔 듣고 싶은 두 곡의 음악이 있다. 먼저 듣고 싶은 곡은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이다. 페르골레시는 바로크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명이다. 스물여섯 살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훌륭한 음악하나를 세상에 남겨놓고 떠났다. 그가 남긴 최고의 아름다운 음악은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의 주검 앞에선 어머니의 마음을 그린 것이다.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와 더불어 로시니의 ’스타바트 마테르‘도 유명하나 로시니의 작품은 한참 뒤에 나온 것이다.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가장 사랑하는 곡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게도 로시니의 작품보다는 페르골레시의 작품이 더 좋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슬픈 마음이 아름답게 감동적으로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온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루의 죽음과 탄생의 순간에 듣고 싶은 또 하나의 음악은 쇼팽의 ‘녹턴(nocturn)'이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통한다. 서양 음악사에서 쇼팽만큼 피아노를 사랑했고 피아노를 위해 죽어간 작곡가는 없다. 피아노와 함께 살았던 그의 39년의 짧은 생애 또한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이었다. 쇼팽은 생애동안 21곡의 ’녹턴‘(Nocturn, 야상곡)을 작곡했다. 쇼팽은 자신의 녹턴을 ’피아노로 부르는 노래‘라고 했다. 내게 있어서 쇼팽의 녹턴은 나의 마음에 평온을 만들어 주는 노래다. 깊은 잠에 빠져든 세상 위에 달빛만이 빛나고 있을 때, 쇼팽의 녹턴은 고요하고 부드러운 사랑의 터치로 마음을 울리고, 내 마음도 달빛처럼 어둠 위에서 빛나게 해준다. 쇼팽의 야상곡에 대한 나의 느낌과 비슷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리스트의 눈물’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리스트는 쇼팽보다 한 살 적은 같은 시대의 음악가다. 리스트가 쇼팽을 초대한 어느 날, 리스트는 쇼팽의 야상곡을 자기방식으로 변형하여 멋지게 연주를 하였다. 잠자코 리스트의 연주를 듣고 있던 쇼팽이 리스트에게 다가가서 “내 작품을 내가 연주할 수 있을까요? 쇼팽만이 쇼팽의 작품에 변화를 줄 수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 리스트가 쇼팽에게 자리를 내주고 피아노에 앉자마자 나방 한 마리가 램프 속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램프의 불이 꺼져버렸다. 리스트가 다시 불을 켜려하자 쇼팽은 “켜지 마세요. 대신 다른 모든 촛불도 꺼 주세요. 내겐 달빛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며 희미한 달빛 아래서 피아노에 영혼을 불어 넣으며 연주를 했다. 쇼팽의 연주는 시간이 흐름을 멈추는 듯 했고 리스트도 몰아의 경지에 빠져 쇼팽의 녹턴을 듣다가 눈물이 가득 고이게 되었다. 쇼팽의 연주가 끝난 후 리스트는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피아노의 시인이며, 나는 하찮은 어릿광대였습니다.”라고 말했다. 당대 피아노의 거장들인 쇼팽과 리스트는 라이벌이면서 진정한 동료였다는데 이 일화도 둘의 사이를 잘 말해주는 것 같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하루의 경계는 죽음과 재생의 순간이다. 무엇이 죽고 무엇이 탄생한다는 말인가? 십자가는 죽음과 재생의 상징이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마리아의 슬픔을 노래한다. 한마디로 ’애도‘의 음악이다, 애도는 사랑이 떠난 빈 곳을 메우는 슬픔이다. 죽음은 사랑이 떠나버린 것이다. 사랑했기에 사랑이 떠난 빈자리에 슬픔이 가득고인 것이다. 가득고인 슬픔은 새로운 사랑을 만나 다시 기쁨으로 변형된다. 사랑이 없던 죽음은 그동안의 날들이 삶이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애도가 없기 때문이다. 삶의 영혼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자식 중 하나는 애도일 것이다. 삶은 자식을 낳지 않던가! 애도는 사랑의 자식이다.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석양은 치열하고 찬란했던 오늘 하루 삶의 자화상이다. ’얼음‘하며 오늘 이 하루가 이대로 멈춰지길 간절하게 열망했던 적은 언제였던가! 찬란했던 하루이든 우울했던 하루이든 죽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갈망하는 충만한 삶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다가온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는 순간 사랑이 떠나는 것도 함께 온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만남과 이별, 죽음과 재생이 삶의 얼개인데 만남만이 삶인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니 이미 죽어 칙칙해진 사랑의 주검만 붙들고 하루하루를 맞이했다. 애도가 없으니 오늘 새롭게 주어진 날에 대한 새로운 사랑이 들어설 틈이 없었다. ’스타바트 마테르‘와 ’녹턴‘은 내게 하루의 죽음과 재생을 일깨우는 음악이다. 나는 오늘도 두 곡의 음악을 듣는다. 자정이 되기 전에 오늘 하루의 사랑을 다 털어내고 사랑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달빛을 타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가 끝날 즘 페르골레시의 ’스타바트 마테르‘의 선율과 쇼팽의 ’녹턴‘이 흘러나오길 기대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http://jsksoft.tistory.com/2745
페르골로지 <스타바트 마테르>
저만 들어보고 싶은 건 아닐겁니다.
하루가 죽고 또 다른 하루가 태어나는 자정에 들어보고 싶지만, 저는 초저녁에 자므로 불가능함다-_-
하루에도 죽음과 재생이 있다는 생각이 신선해요.
0시에 태어나 24시에 죽는다는 거요.
삶과 죽음이 주 관심사 중 하나라 하시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