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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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나무를 좋아한다.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익숙해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우리 고장에는 사과 과수원이 많았다. 아랫마을만 해도 사과 밭은 기본으로 있었지만 우리 집이 있는 골짜기에는 사과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다. 뒤뜰에, 집 옆에, 건너편 밭 비탈에 심심찮게 보이는 게 감나무였다.
감나무는 과일나무 중에서 모양도 다양하고 키도 크다. 어린 감나무는 잎이 유난히 커 보이고 나무의 껍질도 부드럽다. 잘 성숙한 감나무는 줄기와 잎과 열매가 충실하며 서로 조화도 잘 이룬다. 늙은 나무는 나무껍데기가 거칠고 마른 키다리아저씨 마냥 키가 삐쭉 크고 잎은 윗부분 가지에만 작게 달린다. 열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늙은 나무의 감은 홍시가 될 때까지 두게 되고 새들의 식사거리가 되는 게 일쑤이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온 감나무는 그 아름다움이 나도 모르게 나에게 각인 되었다. 감나무에 대한 예찬으로도 입안에 침을 마르게 할 수 있다. 그 예찬이 식물도감에 나오는 감나무의 특성이나 학술적인 내용은 절대 아니다. 그저 내가 보고 내가 느끼고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자리한 그 감나무의 모습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에게 감이라는 열매를 먹어보게 했던 우리동네 감나무 친구들의 모습이자 추억인 셈이다.
감나무는 이른 봄에 입이 나지 않는다. 봄이 무르익을 무렵 나온다. 은행나무의 잎이 아이 손바닥만큼 자랄 때 감나무를 떠올리며 잎을 내밀 때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마 그 때쯤인 것 같다.
감나무 잎은 두껍다. 계절이 무르익을수록 더 두꺼워지고 반질거린다. 또 여느 과일나무보다 잎사귀가 넓다.감나무는 잎사귀가 내 손바닥만하게 자랐을 때 꽃을 피운다. 잎사귀는 수줍음 많은 감꽃을 가려주고 여름의 비바람 속에서 작은 감을 보호한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은 꽃이 피었는지도 모른다. 잎이 넓어선지 그늘도 풍성하다. 그렇지만 감나무 아래서 이마에 땀을 식히며 쉬기란 쉽지 않다. 자라는 파란 감들이 무슨 연유인지 줄곧 떨어져 물컹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나무 아래는 늘 지저분했던 것 같다.
감나무 진가는 가을에 더 빛난다. 새색시 치마자락처럼 곱게 물든 감나무 단풍잎은 그 빛깔이 너무 고와 저절로 감탄하게 한다. 어느 것이 감이고 어느 것이 단풍인지 알기 어렵다.
감 꽃은 작은 항아리가 활짝 웃는 모습이다. 신기한 건 사각형의 꽃이었다. 감 꽃은 꽃받침도 네 장, 꽃잎도 네 장으로 갈라져 있다. 감꽃은 한 몸이다. 그래서 동백꽃마냥 통째로 떨어진다. 꽃이 흰색이라 연약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감나무 잎만큼이나 두꺼워 쉽게 시들지 않는다. 떨어지지 않은 꽃은 감이 모양을 갖추고 어느 정도 커질 때까지 오래 머물며 서서히 말라간다.
감나무 꽃은 큰 꽃받침 덕분에 언제 피었는지 잘 모른다. 바닥에 하나 둘 하얗게 떨어진 꽃들을 발견하고서야 나무를 쳐다보게 된다. 떨어진 꽃잎을 길다란 풀에 꽂아 목걸이를 만들어 하고 다니곤 했다. 꽃잎을 주어 먹기도 했는데 그 맛이 달큰하면서 떫다. 익지 않는 감맛과 같다.
우리 동네에는 모두 보통 감나무다. 단감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어렸을 때는 단감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다. 단감을 사먹으면서 단감 꽃은 떫지 않고 단맛만 나는지 그게 궁금하기도 했다. 우리동네 감은 진홍색으로 익어도 홍시가 되기 전까지는 떫다. 그렇지만 주홍빛이 돌면 따 먹곤 했다. 너무 떫어 단물만 빨아 먹고 뱉어야 했다. 입안에 텁텁한 기운이 가득해도 떫으면서도 아삭하고 단 그 맛이 좋았다. 감물은 옷에 베면 누렇게 변하게 하여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지만 그게 맛이었다. 보다 못한 엄마는 침수를 담가 줬다. 침수는 떫은 감을 소금물에 담구어 떫은 맛을 빼는 것이었다. 색깔이 약간 바래긴 했지만 떫은맛 없는 단단한 감이 정말 맛있었다.
감은 고은 잎이 낙엽으로 떨어지고 나서도 익고 있다. 홍시를 따기 위해 조심스럽게 나무 위에 올라 억지로 손을 뻗어 아슬아슬하게 따 먹던 기억도 아련하다. 나중에는 잠자리 체를 이용하기도 했다. 홍시가 되면 감은 투명한 진홍빛이 된다. 어린 아기의 볼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야 한다.
늦가을 잎은 떨어지고 감들만 옹기종기 달린 채 마을을 밝힌다. 모든 추수가 끝나갈 무렵, 서리가 내리기 전 감을 땄다. 우리 집에 감 따기 선수는 엄마였다. 엄마는 집안에서는 다소곳하고 조용하신 분이셨지만 사냥도 잘하고 나무에도 잘 올라가셨다. 한번은 계단식 논 옆에 있는 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다가 밟은 나뭇가지와 잡은 나무가 가지 모두 쳐지는 바람에 논바닥에 떨어진 일도 있었다. 감나무는 겉모양이 거북이 등처럼 거칠게 우둘투둘 덮여 있어 강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쉽게 잘 쳐지는 결이 여린 나무이다. 잘 쳐진다는 것은 꺾었을 때 잘 꺾인다기 보다 나뭇가지의 마디마디가 잘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나뭇가지에서 본체와 가까운 쪽 부분으로 밟아야 힘을 견딜 수 있다. 엄마는 푹신한 논에 떨어져 다행이라며 다시 일어나 나무에 올라갔다.
그렇게 상처 나지 않게 딴 감은 사과 궤짝에 켜켜이 짚을 깔고 가지런히 줄을 맞춰 담아 그 감나무 밑에 두었다. 한겨울이 되면 그대로 얼어 자연산 감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흰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바가지에 땡땡 어른 진홍빛 감을 담아왔다. 방 한 켠에 적당히 녹을 때가지 두었다가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었다. 그 산골에 그 만한 아이스크림이 또 있겠는가. 얼음 서글서글한 그 맛이 그립다.
말이 나온 김에 떠오르는 것은 다 써야겠다. 상처 난 감들은 어찌했을까 궁금도 할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처 난 감들은 껍질을 잘 깎아 내 곶감을 만들었다. 이 곶감들은 제수용이다. 감이 나오는 이듬해 가을까지 이때 장만한 곶감을 잘 보관 해 주었다가 제사에 쓰곤 했다. 곶감은 늘 나의 유혹이었다. 감의 물기가 빠지고 말랑말랑한 것을 넘어 하얀 분이 피면서 누굴누굴해 질 때 정말 맛있는데 이 때를 그냥 넘기기가 가장 힘들었다. 우리 동네는 감을 싸리나무에 꿰어 말렸는데 개수를 맞춰 놓아 손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면 빼먹을 수 있을까 늘 고민했다. 혼자 혼나기는 싫어 언니와 작당을 하여 감행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시렁에 잘 쌓여 보관 된 곶감이 먹고 싶어 몇 번씩 만져보곤 했었다. 간혹 곶감을 꿰지 않고 깎아서 대나무 채반에 올려 그냥 말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건 채 마르기도 전에 사라졌다.
많이 깨진 감들은 여덟 등분으로 잘라 말렸다. 곶감을 만든 때 깎은 껍질도 다 말렸다. 한 겨울 동안 이렇게 말린 감과 껍질을 과자처럼 먹었다. 껍질은 쫌 거칠긴 하지만 꼬들꼬들한 것이 단 맛이 있다. 많이 먹으면 변비 기운이 있어 화장실에 가면 힘들어 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천연 감 껍질, 건조 감은 분명 영양이 풍부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도 있으면 먹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나이가 들수록 단백한 그 때 먹었던 것들이 그리워진다.
감나무에서 이렇게 직접 감을 따먹고 자라선지 도시의 시장에서 마트에서 파는 홍시는 잘 사게 되지 않는다. 신선도에 나도 모르게 의의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홍시를 먹지 않고 살고 있다. 그 이면에는 어젠가는 마당에 감나무를 심어 꽃 피는 것, 열매 맺는 것, 익어가는 것을 직접 보고 따먹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나무 꼭대기에 몇 개의 감을 달고 겨울을 나는 겨울 감나무를 본적이 있는가? 감나무는 그 자태만으로도 아름답다. 나는 장담하건대, 감나무처럼 가지가 멋지게 뻗어나간 나무는 없다고 생각한다. 요란하지 않으면서도 평범하지 않는 나무 가지의 뻗침은 마디마디 눈길을 뗄 수 없게 한다. 절대 그냥 하늘을 향해 있지 않다. 가지마다, 마디마다 약간의 비트가 있다. 아주 작은 차이가 큰 차이로 느껴진다 하지 않는가. 디테일에 승부를 걸라는 말도 있던데 이 감나무가 그렇다. 디테일이 다르다. 미묘한 아름다움을 머금은 나무다.
나는 감나무가 되고 싶다. 감나무의 한해 살아지는 모습이 내 일생의 모습과 같아도 좋다. 그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몇 백 번의 변신으로 자신다움을 뽐내겠지만 그것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않을 테다. 다만 나는 한번이라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단 한번의 이 인생을 감나무의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뜨거운 태양과 거센 비바람을 이겨낸 대견한 감나무이다. 이제 탐스러운 감으로 익혀야 한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뜨거운 태양을 더 끌어와야 하고 주황색의 색소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생성해야 하지만 두려워 말자. 감나무는 매년 하지 않는가! 누구나 한번쯤 쳐다보는, 누구나 유혹할 수 있는 홍시로 잘 익혀야 한다. 나를 덥석 삼켜 혀와 이빨로 씨를 몇 번 굴려 얇은 막까지 벗겨 멀리 훅 불어 날려 준다면 더 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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