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북

연구원들이

  • 서은경
  • 조회 수 2724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3년 7월 21일 20시 50분 등록
 

<북리뷰 3-4주차>                                                                2013.07.21.

 *** 두 번 읽기1/2 ***                                                            글: 서 은 경



(1) 15도 각도로 기울어진 글귀가 두 번 읽기하여 첨가한 부분입니다

(2) 50개 이상  해석 달기는 파란 색으로 표기하였습니다.

 




 (No. 13-2) 


고운기 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현암사 (2012)




                                 책표지.jpg

                                    @ 2002년 4월 초판 @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머리말

 

혁명의 나그네-손문(孫文), 광동성 궁벽진 어느 후원자 집에 남긴 글

 

安危他日終順    편안함이나 위험이 어떤 날에는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고

甘苦來時要共    즐거움이나 고통이 닥치거든 두루 맛보아야 하는 것

 

이글을 곱씹었다. 안위(安危)와 감고(甘苦)의 어느 한 쪽이 아닌, 슬픔과 기쁨의 정반합으로 이르게 되는 변증법적 합일의 세계가 있다. 벌써 이십년 가까이 나는 삼국유사를 맴돌았다. 이는 분명코 13세기 무렵 이 땅에 살았던 한 혁명가가 내게 던져 준 화두였다.

 ---> 혁명가가 던져준 화두였다. 20년 가까이 삼국유사에 이 저자가 맴돌고 있는 이유. 누구나에게 자신의 인생의 화두가 되는 말, 화두로 꽂히는 한 장면, 화두가 되는 몸의 어떤 느낌이 있다. 그런 말, 장면, 느낌에 즉각 반응한다는 것은 그 화두가 자신의 무의식 속 어둠, 꼬임? 갈등과 바로 닿았다는 것일 게다. 화두가 생기면 그 퍼즐을 풀어야 한다.


사마천의 화두, “착한 이가 곤경에 빠지는 것이 하늘의 도인가”.... 이 화두를 만났을 때 슬픔이 밀려온다.  전국시대 시인 굴원의 말, “모든 사람이 다 취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다...” 그렇게 깨어 있다가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 조금 더 착해서, 조금 더 솔직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어떤 일을 하다가 보복 당하는 사람들. 그게 세상의 이치일 수 있다.  즐거움과 고통은 두루 맛보는 게 인생이니.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착한 일을 하고도 복을 받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착한 일, 정의로운 일을 하고 재앙을 입는 사람들이 더 많다? 모르겠다. 나는 마음이 아리고 슬프다. 그래서 글을 써야한다. 이야기해야 한다.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비슷한 빛을 모아야 한다.

  

<삼국유사>를 방금 따낸 과일이나 방금 캐낸 채소

<삼국사기>가 사대주의라는 방부제를 친 통조림


모름지기 <삼국유사>는 시대마다 좋은 요리사를 만나 좋은 요리가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재료인지 모른다.

---> 잘 쓰여진 고전은 좋은 재료다. 요리사들에게는 채소, 과일, 육류 등이 재료라면 학자, 작가에게는 잘 쓰여진 옛 지혜, 고전이 재료이네...  그럼 책의 레시피는 ‘옛 지혜 담긴 고전’+‘현재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책 쓰는 작가 자신의 세상 보는 프리즘과 개인 경험!! 레시피에 충실해서 잘 버무려 내면 따끈한 책 나오고.  독자님, 요리 나왔습니다~!

      

나는 여기 서툰 요리사로 나섰다. 그래서 조금 요리가 되었다면 그 공을 앞서 내보인 손문의 글에 돌리겠다. 내게도 닥쳤던 안위와 감고의 세월을 곱씹어 보는 동안 세상 보는 눈이 조금 열렸고, 그 때문에 내 혁명가의 화두 또한 보이기 시작했기에 그렇다.


혁명가는 그 스스로 안위와 감고의 거친 세월 속에서, 도리어 피와 살이 되는 어떤 기제를 찾아 뒷사람에게 남겨 주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틀에 기대어 삼국유사 읽기의 한 방법을 내놓은 것인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 자신을 낮추면서 조곤조곤 겸허하게 이 책을 쓴 이유를 비유와 정의 내림으로 풀어가는 작가의 글쓰기. 그의 마음결이 묻어나는 매력적인 머리말이다.  



들어가며

 [2] 

<삼국사기>의 ‘史’는 사이고 <삼국유사>의 ‘事’는 사라는 사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논의하지 않을 수 없고, 그 둘은 분명한 차이가 사(史)와 사(事)에 있다는 점.

 

[4]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려 인종23년(1145년)

그리고 100여 년이 넘게 흘렀다. 무인들의 집권, 세계관의 변화를 주었다. 고정관념이 깨진 새로운 세계를 맛보게 된다. 무인 정권 이후, 고려는 전반기와는 아주 다른 분위기.

삼국사기로 대표되는 전기 지식인의 세계 인식은 사대주의였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송 멸망과 원 성립, 무너진 한족의 자존심.

.

<삼국유사 탄생(1290년) 배경>

1.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

2. 세계관의 변화(역사관의 변화)


[5]

1206년에 태어나 13세기를 온전히 살다 간 일연

세계에 태한 새로운 인식은 그가 승려였다는 점에서 보다 적극적이었다. 유학을 기본으로 선비들이야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고 한들 분명한 한계. 승려들은 처음부터 중국 중심에 서 있지 않았으므로 보다 빨리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cf) 이규보 동명왕의 사적 발굴하여 <서사시> 작성  이후,

   이승휴 <제왕운기>에 단군조선 실림   이후

   일연의 <삼국유사> 첫머리에 단군조선  실림.......


이것은 지식인들의 우리 역사를 주체적으로 바로보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일련의 작업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 자신에 대한 성찰과 세계관, 역사관의 변화는 늘 혼돈의 시기에 온다. 2013년 지금도 바로 성찰의 시기이다. 특히 교육과 교육 방법에 대한 우리만의 한국인의 교육 방법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미국 따라하기가 아니라, 우리의 고전과 옛 지식인의 지혜에서 우리의 주체적인 방식과 철학을 연구해야 한다. 꼭 필요하다.


[8]

일연은 <삼국유사>를 쓰면서 <삼국사기> 같은 역사서로만, <고승전> 같은 불교서로만 만족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우리 고대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어떤 틀을 만들어 냈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기이(紀異)


1. 이 땅의 첫 나라


@ 뿌리를 찾았던 첫 세대의 상징

[12] 

큰 나라야 제 일을 제 방식대로 쓰면 된다. 예나 이제나 작은 나라는 거기에 그다지 자유가 없다. 늘 큰 나라가 만든 규범을 좇아가야 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일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사실의 기록만이 아닌 ‘상징’이 자리 잡는다.

--> 그래서 작은 나라는 글로 자료를 많이 써서 남겨야 한다. 그리고 교육시키고 알리고 해야 한다. 유대인들의 교육 방식처럼. 우리만의 것을 잘 축적하고 아이들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도록 어른들 스스로 자신과 우리 문화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도 미국도 아닌 우리이기 때문이다.

 

사실을 그대로 써서 저촉되는 것을 상징으로 포장해 놓으면 규범이 만든 규제의 그물망을 벗어난다. 13세기의 일연 같은 이는 그 점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한편 비애스러운 그러나 풍부한 이야기의 세계가 거기서 만들어 진다. 상징으로 그리는 역사를 옳게 읽자면 독자는 상상력을 써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다른 한편 즐겁기도 하다.

 

[13]

(사진) 공룡의 흔적, 석기인의 그림, 신라 화랑의 낙서(울산 천전리)

---> 쿵쾅 쿵쾅 뒤뚱 뛰뚱 아기 공룡 발자국, 그 위에 찍히는 엄마 공룡 발자국.

     왕왕 우우 콰이 콰이 워워...  석기인, 동글동글 삐뚤삐뚤 그림 하나 그려 넣고 미소 짓네.

     너럭 바위 위에서 무술 수련하던 신라 화랑들, 함께 우정 다짐 시 하나 지어 넣고...

     울산 천전리, 역사 타입캡슐 바위에 나는 무얼 집어넣을까?

 

@ 세 부분으로 된 ‘고조선’조

 

1.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인용, 나라 세움 주요사항 

2. <고기> 인용, 단군 신화의 몸통 내용

3. 당 자료 <배구전> 인용, 단군 즉위와 후일담


[18] 

곰은 뜻한 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런데 단군을 낳게 되는 과정까지 유심히 읽다 보면 재미있게도 곰이 세운 치밀한 계획에 환웅이 한 발 한 발 말려들더니, 드디어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곰은 여자가 되는데 목적이 있지 않았다. 최후의 주인공 단군의 출생까지 커다란 하나의 각본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것을 움직여 나간 주체는 바로 어머니 곰이다. 단군은 그렇듯 현명한 곰 부족 출신의 어머니를 두고 태어나 이 땅의 첫 왕이 되었다.

 ---> 둔한 곰이 아니라 곰의 탈을 쓴 현명한 여우다. 움직여 나가는 주체로서의 여성. 그 점이 단군신화의 또하나의 매력. 다른 하나는 홍익인간 사상.  

 

@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20]

일연은 기자가 다스린 조선이 어떻게 되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거니와, 아예 ‘기자조선’이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있다. 단군 조선 이후 곧바로 위만 조선으로 넘어가 버린다. 여기에 <삼국유사> 첫 부분을 제대로 읽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21] 

우리는 먼저 단군 신화의 성격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곧 신화 중에서도 단군 신화는 창세 신화인가 아니면 건국신화인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단군신화는 건국신화이다.

 

건국이나 창세냐 구분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네 관념의 소산이고, 그것은 특히 서양식 사고방식 아래서 그렇다......단순히 현재 살고 있는 인류만을 기준으로 창세를 말하기가 조금은 우습지 않은가? 지금 세상과 사람들이 지구의 처음은 아닌데 말이다.

---->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단군 자손도 더러 있지만, 이미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가 단군을 왕으로 모신,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자손이다. 여러 부락 연합적 공동체의 크고 작은 문제 해결 위해 그들을 제어하는 힘이 하늘에서 나온다고 믿어, 하늘의 힘이 구체적으로 이 따에 어떻게 이르게 되었나 설명. 단군신화는 그것을 상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23]

우리의 실종.

중국의 사고방식을 따르자니 <삼국사기>는 한반도 역사를 한 나라가 세워진 한참 후인 기원전 57년에 와서야 떨렁 시작한다. 신라의 건국이다.


<삼국사기>는 바로 그 첫 부분에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울 무렵, “이보다 앞서 조선의 유민들이 산과 골짜기에 나눠져 살고 있었다”고 적었다. 일연을 아쉽게 한 대목은 바로 거기였다. 김부식조차 언급한 그 조선은 어디로 갔을까?


@ 13세기의 시대적 분위기


[24]

왜 민족의 주체성이던가? 어떻게 민족이라는 각성이 가능했던가? 잘 알려져 있듯이 몽고는 중국의 변방에서 일어나 중국 본토를 삼키고, 거기에 나라를 세운 최초의 민족이다.

---> 그래서 몽골에는 짜릿한 매력이 있다. 무신 정권에겐 복음, 원 건국. 새 질서의 대의명문.


중국이 자주 변방의 침입을 받자 그 근심을 덜려고 만리장성도 쌓았지만 전체를 송두리째 내놓은 적은 없었다. 북위가 안방을 차지하는 기간이 200여 년이라 해도 한족의 중국은 남쪽에서 근근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천자의 나라며 그러기에 모든 변방은 중국에 복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인에게 아니 우리나라 같은 옆 민족에게까지 강고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체가 무너졌다. 아니 하늘이 무너진 것이다.


중국의 자존심을 하루아침에 땅바닥에 떨어뜨린 몽고의 원 건국, 남의 불행한 일에 잘됐다고 박수칠 일은 아니지만, 한편 변방의 나라들로서는 숨통이 트일 일도 되었다.


문장가 이승휴, 시로 쓰는 이 나라의 역사,<제왕운기>에서 단군신화부터 시작.

이승휴는 일연과 함께 시를 지으며 즐긴 가까운 벗. 그런 이들이 줄을 잇는 13세기. 

이 같은 분위기가 일연으로 하여금 우리 역사의 더 먼 곳에 관심을 갖게 했고, 거기서 단군이 발견되었음은 당연하다.

 ---> 13세기에는 민족 주체성 각성, 그리고 역사 속에서 단군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2013년 현재는 무엇을 해야 하나? 분단에서 통일을, 그리고 간도 땅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 자기 이익에 몰두한 자들이 남한만이 우리나라인 양 좁은 시각으로 나라를 세일즈 할 때, 더 넓은 시각과 시야, 그리고 더 넓은 땅의 모습, 과거의 역사 속 교훈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연을 통해, 내 꿈속의 한 장면이 더욱 명확하게 풀린다. 넓게 보자.


@ 위만조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cf. 전한서의 <조선전>

[28]

앞서 나는 고조선조와 위만조선 조를 나란히 두고 읽어야 한다 했다. 그럴 까닭이 충분하다. 기자조선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죽은 자식 무엇 만지듯 있지도 않은 인용처를 대가면서 단군을 그려낸 일연의 의도를 알자면, 열쇠는 이 위만조선 조에 있다.

 

[29] 

두 가지 의문을 종합해 보면 위만이 조선 출신의 연나라 사람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일찍이 중국의 전국시대에 연나라는 기자가 다스리고 있던 조선 지역을 복속시켰다. 조선의 유민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여기저기 흩어져 살았을 터인데, 위만처럼 연나라의 본토에 들어가 자리잡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연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타서 옛 땅을 회복해 조선인만의 나라를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다.

 

약간의 억측이 가능하다면 일연은 같은 민족이라는 전제 아래, 위만조선을 단군조선의 후계로 여겼으리라 생각했다. 중국에서 직접 책봉한 기자를 애써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위만조선을 그 다음 조에 이어 놓은 일연의 생각은 여기서 조금씩 드러난다.

 

고조선과 위만조선을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

 

[33] 

여기까지 위만조선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의 설치과정은 중국 쪽 사료 <전한서>에 의거해 있다. 이것이 앞서 고조선과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다. 신빙성을 높이자면 가급적 중국 쪽 사료를 내세워야 한다.


고조선에 관한 중국 쪽의 사료는, 아직 찾지 못한 <위서>의 단군 관련 기록과, 고조선에 관해서는 직접 언급하지도 않은 <배구전>이 전부일 만큼 옹색하다.

[34]

그런데 두 조를 잇대어 놓으니 단군조선 부분이 보완되면서, 조선이라는 국호의 공통성 아래 어떤 끈이 분명해 보인다.


일연은 단군 한사람에 그치지 않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처음과 끝을 설명하고자 한 데 더 힘을 기울였다고 보아야 한다.

---> 일관성과 근거 마련에 성공. 고조선, 위만조선를 나한히 두고, 이 땅의 첫 나라인 조선에 관한 대부분을 갈무리했다. 중국쪽 자료 모두 찾아보고 그가 정리해낸 첫 나라의 역사...... 역사가의 관점. 주체적 시작.


2. 고구려와 북방계

 

@ 한반도의 전국시대와 삼국의 정립

[35]

조선의 시대, 곧 고조선과 위만조선이 끝나고 한반도에는 여러 나라가 군웅할거 하는 시대를 맞는다.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물리친 자리에 이른바 4군을 두는 때와 같이 하는 시기인데 나는 이것을 앞서 한반도판 전국시대라 부르기로 했다.

 

일연은 그런 여러 나라를 일일이 소개하고 있다. 이 점 또한 <삼국사기>와 다르다. 비록 짤막짤막한 기사들이지만, 대방 말갈 발해 이서국 가야 등을 소개하고, 한나라의 4군이 2부로, 다시 70여개의 나라로 갈려졌음도 서술하고 있다. 이른 바 전국시대의 여러 나라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삼국사기가 단군조선부터 여러 부족국가를 무시한 것이 사대주의적 역사관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김부식과 관찬 사학자들의 관심은 책의 표제대로 신라, 고구려 백제 세 나라의 역사만을 충실히 쓰는 데만 있었다.


[36]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말하듯이 고대 왕권 국가란 곧 율령의 반포가 분명한 기준이 된다. 율령에는 국가 조직의 정비도 포함된다. 그런 면에서라면 한반도의 고대 왕권 국가가 위 세 나라 밖에 없음이 자명하다.

---> 민족의 처음 시대를 쓰면서 인색했던 김부식, 반면 일연은 혼란기의 크고 작은 나라들을 거쳐 새로운 질서 잡혀가는 것을 자연스럽게 언급. 이와 같은 김부식의 모습은 일제에 의해 우리가 근대화 되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 안병직 교수의 인색한 모습이 서로 닮아 있다. 우리 역사 속민초의 삶에 대한 애정보다, 역사를 그저 하나의 잣대, 해석의 틀에 맞추어 보려는 모습. 민초들의 이야기가 있고 그것이 역사로 쓰여 졌거늘.... 역사 서술의 기준과 잣대가 먼저 있고 민초의 삶은 거기에 맞는 것만 넣고 아닌 것은 거짓, 또는 필요없다고 빼버리고 부정하는 그의 태도와 닮아있다. 그는 왜 그럴까?  김부식이 부족국가 무시한 것이 꼭 사대주의적 역사관 때문만은 아니라고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안병직의 태도는 꼭 일본 숭상만이 아니다. 역사 판단 기준의 잣대!

그것을 너무 중시하여 사람들의 삶을 보지 못하는, 틀에 갖힌 학자가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안병직 그를 생각하면 한편으로 마음 아프고 한편으로는 화가 난다.


@ 북방계의 시작, 부여

[37]

부여에서 고구려, 백제로 흘러간다. 


 cf) 하느님 ‘해모수’(북부여), 해모수 아들 ‘부루’(동부여), 북부여 이은 동명왕 ‘고주몽’(졸본부여)


단군신화와 다른 점이 분명히 보인다.

하늘님인 해모수가 직접 내려와 나라를 만들고 왕이 되었으며.......


부루는 아들이 없었다.......말이 곤연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마주서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 금빛 나는 두꺼비 모양의 아이가 있었다. 금와(金蛙)

 

@ 동명왕 기사, 사기와 유사의 차이점

[43]

일연의 <삼국유사>에 와서 주몽은 <삼국사기>에서보다 더 확실히 하늘님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삼국사기>가 금기시하는 것들이 이미 무너졌을 때, 그 존재를 회복한 것은 단군만이 아니다. 이렇듯 주몽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동명성왕의 위대한 탄생

[43]

주몽이 알에서 나왔다는 신화는 다음에 살펴볼 신라의 박혁거세 신화와 비슷하다. 다만 주몽은 하늘님으로 이어지는 부계와 신이한 존재로서 모계를 두로 갖추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그러나 이런 난생 설화의 핵심은 결국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리라. 첫 출발의 의미를 문학적으로까지 보이게 하는 이 표현은 곧 그 옛날 왕을 맞이하는 어떤 의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 하다.


[45]

일연은 이 이후의 이야기를, “졸본주에 이르러 비로소 도읍을 정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은 없어, 다만 비류수 웃편에 띠집을 짓고 머물렀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 때문에 고를 성씨로 삼았다.

---> 지금은 중국땅, 비류수가 흐르는 졸본 땅, 띠집을 짓고 살았던 그곳에 가보았다. 높은 산에 나라를 세웠더랬다. 지금도 그 주변에는 사람도 거의 살지 않고 땅이 그렇게 넓은 데, 왜 그렇게 산꼴짜기에 올라 도읍을 정했는지 의문이 들었었다. 금와의 아들과 신하들의 해코지 때문에 숨어 들어간 걸까?


@ 북방계의 다른 흐름, 백제의 성립


[46] 

삼국사기의 백제본기를 인용한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인데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다. 그 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셋 있었는데, 주몽을 보더니 범상치 않다 여겨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있지 않아 부여의 왕이 돌아가시자 주몽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비류요 다음은 온조였다. 이들은 나중에 태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 마려 등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때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48] 

주몽이 북부여를 떠나기 전에 이미 아들을 하나 낳았었다. 아들은 신표를 남겨두고 떠난 아버지를 찾아오고, 그가 고구려의 2대 유리왕이 된다.

   

비류는 미추홀(인천),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에 도읍.

이후, 위례성의 도읍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 이름 고쳐 백제라고 했다.

 

일연 왈

백제는 조상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를 성씨로 삼았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는 ’부루‘라 한 부분이다. 일연의 끈질긴 고집을 읽을 만 하다.


@ 북방계 이동의 끝

[52]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는 그 선조들의 경험을 그대로 살려 다시 새로운 땅의 주인이 되었다.



3. 신라와 남방계

 

@ 남방문화 속의 신라

[53]

신라의 건국에 관한 일연의 기술은 <삼국사기>보다 훨씬 자세하며, 적어나가는 태도 또한 매우 자신에 넘쳐 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 온 것일까?

---> 고운기 선생의 이 질문을 접하면서 나는 여기에 2013년 현재, 우리가 풀어가야 할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 자존감을 높이면 보다 너그로운 시각에서 통일문제, 해외 동포 문제를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국토가 지금의 형태만 우리 국토일까? 과거 2000년, 변화무쌍하게 나눠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간도 땅의 조선족들, 러시아 땅의 고려인들. 그들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중국인이고 러시아인이지만, 그들까지 내다보면서 우리 민족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 아이들에게 만주 땅을 보여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백두산에 오르게 해야 한다. 중국 땅 단동에서 압록강쪽을 바라보며 바로 앞에 보이는 북한 땅을 보여 주어야 한다. 역사는 느끼는 것이다. 부모의 땅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땅에서. 그리고 고정되지 않는 것임을 알고 주체적으로 자신있게 끌고 나가야 한다. 일연이 주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신 있게 신라의 역사를 썼듯이 말이다. 우리의 정답은 미국의 모습도 일본의 모습도 유럽의 모습도 아니다. 우리의 정답은 우리 안에 있다. 우리 역사 속에 우리 선조들의 지혜 속에 있다. 이것에 대한 동의와 설득을 끌어내는 것. 그리고 함께 변화의 빛이 되어 바닥을 치고 올라 상승하는 것. 한반도 땅에 사는 우리들의 과제다.  나는 절실하다. 이 일에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슨 행동을 할 것인가?  


@ 신라 여섯 부족은 또 다른 오리지널


@ 혁거세의 탄생과 신라 건국

[59~62]] 

박혁거세, 기원전 57년에 신라가 섰다. 삼국시대를 열었던 세 나라 가운데 가장 먼저 세워진 나라.

동명왕, 기원전 37년, 고구려가 섰다. 온조왕, 기원전 18년에 백제가 섰다. .

 

@ 혁거세 탄생, 또 하나의 이야기

[62] 

신모(중국 황실의 딸, 이름은 사소)는 이 산(서연산)에서 오래 머물며 나라를 지키고 도왔거니와 신령스런 이적이 무척 많았는데 나라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세운 혁거세와 그 부인도 낳았다고 한다.


@ 선도산 신모에서 신라 왕실의 성격

 [66] (주목 내용)

선도산 성모는 누구이며 어떻게 보아야할까? 우리는 이 대답을 위해 우리들의 민간신앙에 묻어 있는 신모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의 여신 신화 성모천왕 전승성거산의 여신 정승이다. 먼저 지리산의 성모천왕 이야기다. 갑자기 산 개울이 비도 오지 않는데 넘쳐흘렀다. 한 스님이 이상히 여겨 천왕봉 꼭대기에 올라가 보자 그곳에 키가 크고 힘센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했다. 두 사람은 부부가 되고 딸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들은 전국팔도에 흩어져 무당이 되었다. 이 같은 지리산 성모천왕 전승 무당이 처음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를 무조신화라 한다.

 

[66] 

성거산개성 근처의 우병현에 있다. 여기서 호경이 여신의 도움으로 산의 대왕이 되는 과정은 혁거세가 선도산 신모에게서 태어나 왕위에 오르는 과정과 무척이나 닮았다. 한 쪽이 부부관계라면 한쪽이 모자관계라는 것이 다르면 다른 점이다. (고려 왕족 관련)

 


4. 탈해왕을 둘러싼 갈등 (주목절)-인간적인/권력/불안/내것이아닌

 

@ 시골 출신의 벼락 출세


@ 탈해의 등장

 

[76] (탈해의 인간됨)

간사스럽지만 꾀를 내기로 하였다. 집 곁에다 숫돌과 숯을 몰래 묻었다. 다음 날 아침 그 집에 가 짐짓 꾸짖는 투로 말했다.

“이 곳은 우리 선조 때 집이오.”

호공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말다툼이 일었으나 해결을 보지 못하자 관아에 아뢰었다. 관리가 물었다.

“무엇으로 네 집임을 증명하겠느냐?”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는데 잠시 다른 지방에 가 있는 사이 남이 들어와 산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따라 해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다. 탈해는 이 집을 차지해 살게 되었다.

 

[78]

주몽이 동부여 왕실의 좋은 말을 차지하려 썼던 꾀보다도 더 심하다.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인간냄새가 나는 이야기도 없다. 하늘과 땅이 부리는 조화로 자신의 신성성을 포장하는 시대를 지나, 이제 인간 대 인간의 투쟁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목적을 달성하려는 매우 정치적인 모습이 나온다. 신화가 설화로 돌아서는 지점이다.

우리 집이 본디 대장간을 했다.”.....탈해의 출신지가 야철술이 발달한 곳. 선진된 문물을 가진 이 집단이 신라 중심지로 이동했다는 증거로 해석 가능.....어쨌든 문물의 발달이 신화시대를 거둬내고, 실질적인 힘으로 정복과 지배을 영위해 나가는 시기가 이 한반도에도 도래한 셈이다.


cf. 탈해가 일본 출신?


@ 탈해왕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

[81]

뜻밖에 이야기는 수로와 왕위 다툼을 벌이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그려진 탈해는 용렬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이기지도 못할 내기에서 톡톡히 창피만 당하는 것도 그러려니와, 머리 둘레가 한자요 키는 석 자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 외모에서도 그렇다....어째서 탈해가 이토록 못난 인물로 그려지고 있을까? 

---> 고려조 문인이 쓴 <가락국기>에서 일연이 옮겨 적음. 그러다 보니 수로를 추켜세우려고 수로의 입장에서 전해져 온 이야기가 조금 과장& 발전.


[82]

<가락국기>의 탈해 이야기가 터무니 없어 보여도, 그를 이해하는데는 어떤 시사점을 준다.


@ 탈해왕의 고민

[82] 

탈해는 여섯 부족의 신임을 얻기에 그 근본이 너무 약했다. 그런 어려움을 물리치는데 5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그나마 그가 타고난 재주에다 출중한 지략을 갖추었기에 가능했다.

 

탈해가 일본과 우호조약을 맺는 것은 그들로부터 침략의 위협을 해소하고 자신의 후원자를 얻는 이중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

---> 그러나, 탈해는 일본 외교의 실패하고, 김알지 출현으로 탈해는 더욱 초조


[86]

알지, 이 지방말로 어린 아이를 가리킨다. 황금 궤짝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을 김씨로 하였다.


“마치 혁거세의 옛일과 같았다”는 대목이 주목을 끈다. 일연이 김알지의 탄생을 혁거세에 비견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 결국 그가 잠시 탈해에 의해 끊어진 박씨 계열을 이어나가는 적통자로 본다는 것일까? 알지가 성을 김으로 삼았다지만 성이 무언가는 별다른 의미가 없다.

  

머나 먼 이역, 아니 어느 시골 마을에서 올라 와 입신양명한 탈해..... 기존의 서력에 둘러싸여 늘 불안해했던 것 같은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권력의 자리란 차지하기도 이어 나가기도 어려운 것인가? 탈해의 고민이 깊었음은 분명하다.

---> 권력의 맛. 누구도 놓지 않으려하고,  가득 차오르면 반드시 망하니.... 탈해는 비주류의 설움을 안은 권력이구나. 기득권이 아닌 탈해의 고뇌. 기득권들의 온갖 중상모략이 상상이 된다. 신화에서 설화로 내려온, 신에서 인간의 투쟁으로 내려온 이야기는 탈해에서부터 시작되는구나. 그동안 별로 관심 없었던 석탈해라는 인물에 애정이 간다. 남 같지 않다.

  

일연 왈

석(昔)옛날 이곳이 내 집‘이라 하여 남의 집을 제 것으로 만들었기에 성을 석씨로 하였다. 또다른 견해, “작(鵲) 곧 까치가 울어 궤짝을 열었으므로 조(鳥)자를 떼어내고 석씨로 하고.....

---> ‘석’에 대한 해석이 재미있다. 남의 집을 제 것으로 만들었기에... 성에서 석탈해 자신의 운명이 드러낸다. 권력을 제 것으로 하고 늘 불안에 떨며 고뇌해야 했던. .



5. 연오랑 세오녀 첫 설화의 주인공

 

@ 일본의 여자 프로레슬러 히미코


@ 고대 일본의 여왕 히미코

 [90]

히미코라는 이름을 삼국사기에서 다시 본다. 신라본기의 아달라왕 조 20년(서기 173년)에 ‘왜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인사했다’는 짤막한 기록이다. 여기서 비미호는 하자가 조금 다를 뿐 히미코다.

 

[90]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지의 왜인전에서 풀린다. 그 무렵 일본은 성무왕의 시대지만 지방에는 3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서 있었다.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는 야마일국(나라시대를 여는 야마토 정부의 전신일 가능성 크다)이다. 그는 여왕이었다. 비록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고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보낼 정도였다. 신라에 사신을 보낸 지 60여년 뒤의 일이다. 같은 히미코인지 아니면 히미코가 왕을 일컫는 일반명사인지는 의문이어도 실재하는 나라요 왕이었음을 부정하기 어렵겠다.

 ---> 신라시대에도 여왕이 있었고 일본에도 여왕이 있다. 신라시대, 고려, 조선... 여성관을 좀더 자세히 공부해 봐야겠다. 그 속에서 연구하여 앞으로의 우리 사회 여성관의 방향성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언제 할래? 교육과 여성 파트는 꼭 책 목록 뽑아서 정리해야 너의 키워드들이 풀릴 것이다. 기억해라.


[91] 

일본에서 히미코 신드롬이 벌어졌다는 이야기도 소개했다. 1990년대 초반의 일이다. 오래도록 남성에 복종하며 살아온 일본의 여성들이 자신의 일을 찾고 자기의 삶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적인 인물이 여왕 히미코라는 것이었다. 프로레슬러 히미코도 그 무렵에 이 같은 분위기를 타고 생겼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1993년에 일본을 방문한 불가리아의 어떤 여성 초능력 치료사가 ‘히미코의 조상은 한반도에서 건너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지금 학계에서는 거의 수용되지 않고 있다. 대체로 그가 내세우는 주장에 대한 근거가 미흡하기 때문이다.

---> 역사적 근거를 떠나서 왜 그 시대에 여왕이 있었는지, 그 시대의 여성의 지위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물론 귀족 여성의 지위는 높았을 것이다. 조선, 일제 시대처럼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히미코와 같은 시대의 연오랑 세오녀


[94]

아달라왕 때의 일이다.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것은 바로 이 왕 때,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다는 아달라왕 4년에서 16년 뒤다. 일본에 가서 자리잡은 세오녀는 히미코가 되어, 금의환향하듯 자랑스레 본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출정할 만하다.


@ 해와 달을 섬긴 사람들 이야기

[96] 

일연은 승려다. 승려생활을 구름이나 강물처럼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 운수행각이라고 한다…오랫동안 여러 군데 옮겨 다니는 생활 속에서 일연은 남다른 일 한 가지를 했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빠뜨리지 않고 모은 점이다.

---> 이야기를 모으자, 이야기를 모으자... 어떤 이야기를 모으나? 내가 모을 이야기는 대중적인 재미가 없는 이야기다. 대중적으로 재미가 없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방법. 그것만이 살 길이다. 이야기도 살고 나도 사는. 현 시대의 어떤 코드랑 맞춰야 하나?

 

[97] 

무당들이 모시는 가장 높은 신은 해와 달 별 곧 일월성신이다. 고대 삶의 모습을 지금까지 충실히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서 우리는 고대인이 지녔을 사유방식의 틀을 읽는다. 

---> 무당, 고대의 사고 방식, 우리 나라 고유의? 도대체 우리나라 고유라는 것이 있는가? 불교가 들어오고 유교가 들어오고 해서 모두 비빔밥이 되었는데? 무당이 궁금하다.


[98] 

해와 달이 빛을 잃으면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그러나 빛이 있다고 다 보는가? ‘눈 뜬 소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본다는 것은 그 정령(빛)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을 해와 달로 볼 수 있는 그 정령이었다.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

 

@ 아름다운 설화 속의 정령

[101] 

정령의 의인화야말로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이 사는 세상의 사람으로 바뀐 아 같은 이야기 구조는 삼국유사 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곰이 사람으로 바뀌는 단군신화에서 시작하여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로 바뀌는 김현의 전설까지 다양하게 퍼져있지만 여기 해와 달의 정령을 사람으로 설정한 데서 아름다움은 극치를 달린다.


[102]

문득 그 정령은 먼 다른 나라로 갔다. 그런데 정령의 존재를 알고 서둘러 따라온 신라 사람들을 우리의 아리따운 정령들은 맨손 쥐어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런 것이 우리 설화의 기본적인 구조다. 그리고 그것은 누천년을 이 땅에 자리 잡고 살아온 우리네 사람들의 심성이기도 하다

---> 신라는 토착신앙이 강한 나라다. 해와 달의 정령의 심성이 우리네의 심성이고, 우리네 이야기들의 기본적인 구조다. 곰이 사람이 되고 해와 달이 사람이 되고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 신화 속에도 큰 싸움은 없다. 극기와 통과의례가 있을 뿐. 지정학적으로 늘 공격받는 땅 한반도에서 왜 우리는 이런 심성이 생겨난 걸까?



6. 신라는 왜 일본과 앙숙일까?

 

@ 일본어와 비슷하게 들리는 한국어

@ 일본에 간 신라 왕자 천일창

[107] 

실제 일본열도에 단일국가로서 고대 왕조가 성립된 때를 대개 4세기 이후로 보고 있다. 그 이전은 각 지역마다 작은 부족으로 이루어진 크고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삼국사기와 같은 우리 쪽 역사서는 이를 통칭하여 ‘왜’라고 불렀던 것 같다. 신라를 괴롭혔던 왜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일 가능성이 있다. 어떤 왜는 친교를 하고 어떤 왜는 침공을 했다.


[108] 

일본 역사서 <고사기> 중

붉은 구슬은 곧 아름다운 여자로 변했다. 왕자(신라왕자:천일창)는 이 여자와 결혼했다.  여자는 정성스레 왕자를 모셨는데, 왕자는 늘 거만하고 꾸중만 했다. 이에 여자는 자신이 왕자의 부인이 될 만하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바다 건너 제 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왕자는 곧 여자의 뒤를 쫓아 바다를 건넜지만, 여자의 나라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웃한 항구에 내려 그 곳의 여자와 결혼하고 자식을 낳았다.


<일본서기>에서는 이 일이 벌어진 해를 기원전 27년으로 적고 있다. 신라 혁거세왕 31년이다. 왕자의 이름이 바로 천일창, 여자가 바다를 건너 돌아간 곳은 나니와 곧 지금의 오사카다.

---> 이 이야기는 신라가 왜와 그만큼 가까웠다는 증거다. 그런데 신라왕자는 아주 거만하다. 그리고 붉은 구슬이 변해 태어난 여자는 제나라 여자다. 다시 제나라로 돌아가지만, 왕자를 탓하지 않고 자신이 부인이 될 만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아주 지혜로운 여자인 듯하다. 여자와 왕자 둘 다 왜에 찾아온 타지의 사람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서에는 나오지 않는단다. 


구슬 속에서 나온 여자도 왜의 여자가 아니라 제나라 여자인지 궁금하다. 신라 왕자도 외국에서 유입된 인물인데.... 신라왕자를 거만한 인물로 묘사한 것은 신라 또는 백제계에 대한 불만이 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109]

@ 박제상 사건으로 터진 감정의 폭발


가까운 사이라고 함부로 대하다 보면 틀어지기 마련이다. 왜의 잦은 침략을 받는 신라로서는 더 이상 그들을 가까이 하기 힘든 존재로 굳혀 갔으리라 보인다.


[110]

그러나 일연이 쓰는 박제상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과 눌지왕 사이에 있는 실성왕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삼국사기>가 설정하고 있는 내물왕과 실성왕 사이 그리고 실성왕과 눌지왕 사이의 갈등 구조는 사라지고 말았다.


박제상의 장렬한 죽음에다 양쪽 모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에 큰 차이는 없다. 그리고 그 죽음은 신라와 일본의 오랜 갈등 속에 빚어진 가장 비극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이다. 박제상이 첩보원 같은 신분으로 일본에 들어가고, 왕자를 구출한 다음 모진 고문을 박으며 끝내 목숨을 잃는 사건의 전말 거기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쪽에 있다.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일연의 기술에서 그것은 더 명료해진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그래서 쌓이고 쌓인 감정의 폭발이라고나 할 까, 좀체 흥분하지 않는 일연의 붓끝이 여기서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 군신유의의 의리를 지킨 자가 바로 박제상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박제상은 신라와 일본의 오랜 갈등의 정점이며 실성왕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며 기록한 일연의 삼국유사는 일본에 대한 분노라고 저자가 말한다. 역사서가 쓰여지는 시점의 왜의 관계도 아마도 여기 숨어있지 않을까>


[111]

@ 박제상, 그 빛나는 충혼의 인물


박제상 답하기를...

“저는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보고,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쉽고 어려움을 따진 다음에 행한다면 충성을 다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을 가린 다음에 움직인다면 용맹스럽지 못하다 할 것입니다. 저는 비록 불초한 몸이오나 명령을 받들면 행하겠습니다.....” 

---> 이건 정말로 박제상이 한 말을 옮긴건가 아니면 일연이 역사적 상상력으로 쓴 말인가?


이런 대목이 <삼국사기>에는 없다. 그러나 이렇듯 비장하고 정연한 결의에다 무슨 해설을 더 붙이겠는가? 그대로 읽어 마음에 간직할 밖에 아무런 췌사가 필요치 않다.


[115]

박제상 왈 to 왜왕

“차라리 신라 땅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을 것이오. 차라리 신라 땅에서 갖은 매를 맞을지언정 왜나라의 벼슬은 받지 않겠노라.”

---> 세종의 삼강행실도에 박제상의 충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옛날 그 시대, 유교사상이 지배한 세계에서는 충이 참으로 중요한 덕목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박제상이 좀더 꾀를 부려 도망을 치거나 했으면 어떻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집에 있는 아내와 가족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가? 유교사상은 정말 그러한가?


[116]

문제는 박제상의 일 이후 신라와 왜의 관계가 다시 회복하지 못할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때는 왜도 고대 왕권 국가의 틀을 확실히 갖추고 비록 지금의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히로시마 지역에 한정하지만 중앙 집권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 왜는 이제 한반도의 백제, 신라에서 독립하여 고대 왕권 국가를 갖추었고 그 힘을 상징하는 사건이 박제상 사건. 적대 관계 수립이다. 박제상을 충효사상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관점을 확대하여 여러 측면에서 보는 시야 확장이 필요하다. 일연을 통해서 그러한 지점을 알 수 있었고, 아이들과 수업할 때 이 지점을 한번 말해 주어야겠다. 충에 대해서만 말하지 말고 왜와 신라의 관점에서도.


한반도의 가장 가까운 신라가 그들과 적대 관계로 정착되는 상징적인 사건, 나는 그것을 박제상의 죽음으로 본다.


@ 일본에 대한 적개심

[118]

(눌지왕과 김제상 조)

일연이 박제상 이야기를 가져온 원본은 반드시 <삼국사기>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묘사가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박제상에게 초점을 맞추되, 보다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묘사를 추구했던 의도가 드러나 보인다. 그가 일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신라가 왜 일본과 앙숙이 되어야 했던가 설명해 보이는 데도 유용하다.


신라 왕실 내부의 갈등이 아닌 왜의 비인도적인 처사 쪽에 더 치중한 일연의 기술에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까? 고구려 사람들은 화살촉을 뽑아 내고 쏘는 시늉만 한데 비해, 발바닥 거죽을 벗기고 갈대 위를 걷게 하는 왜왕의 고문은 처참하기만 하다. 이렇듯 처참한 장면을 집어넣은 일연의 의도는 무엇인가?

---> 역사 서술에 있어서의 일연의 의도, 그리고 그의 역사적 상황 묘사!

나는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연은 고려시대, 현재의 시점에서 역사책을 썼으며 그런 면에서 왜에 대한 일연의 서술은 현재적이다. 또한 그는 한문으로 역사적 상황을 묘사했을 것이다. 그 문장을 한번 보고 싶다. 한문으로 묘사되는 문장은 어떨까? 이 책의 저자가 인용하는 일연의 본 글은 저자가 한글로 풀어서 보다 다듬어 정리했겠지?  한번 더 다듬어졌을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묘사, 상상력을 더 자극한다. 사실을 더욱 사실적으로 만든다. 그런데 그 상상력의 선은 어디까지 설정해야 할까? 예전에 송지나 작가는 말했다. 드라마 속에서 역사적 상상력은 자유롭다고. 맞다. 드라마는 허구니까. 하지만 역사서에서의 역사적 상상력은? 그것은 사실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상징과 비유가 가득한 이 책은?

역사서라고 보아야 하나? 아.... 이 부분에서 막힌다. 사실과 허구...


나는 무엇을 쓸 것인가?

나의 개인사(?)가 상징과 비유로 담긴 성장소설을 쓰고 난 후, 한바탕 굿을 하고 난 후...나는 38선으로 뛰어들 것이다. 만주 벌판으로 훨훨 날아다닐 것이다. 1인칭으로? 3인칭으로? 인물의 캐릭터를 살려야 한다. 모든 인물을 살려내야 한다. 3인칭으로. 아직 모르겠다. 나는 알랭 드 보통 식의 글쓰기가 좋다. 또 나는 박경리, 조정래의 글쓰기가 좋고 사람의 인생을 다룬 전기가 좋다.

몰것따 몰것따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일연이 삼국유사를 쓴 시점을 떠올리게 된다. 바로 몽고와 고려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나섰던 때와 시기를 같이 하고 있다. 연합군의 1차 정벌이 충렬왕 즉위년(1274년)이고 2차 정벌이 5년 (1279년)이다. 일연은 충렬왕이 즉위한 해부터 왕의 특별한 관심을 받고 있었다. 2차 정벌 때는 경주 행재소에 와 있는 왕을 곁에서 모셨고, 두 차례의 정벌 사업이 끝날 즈음, 개성으로 돌아가는 왕을 따라가서 국사의 자리에 오른다. 그의 나이 77세 때의 일이다. 삼국유사는 이 무렵을 전후로 씌어졌다. 전쟁은 적개심을 필요로 한다. 비록 고려가 자원하여 벌인 것이 아닌, 몽고의 눈치를 보며 ‘울며 겨자 먹기 식’이었다고는 하나, 전쟁은 전쟁이었다. 고려는 개국 이래 오랫동안 일본과 그다지 교류를 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전쟁을 벌려야 하는 이 황당한 교류로 인하여 새삼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떠올리게 하였고, 먼 옛날 신라와의 관계 속에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서 임박한 전쟁에서 반드시 쳐부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그려야하지 않을까? 박제상의 이야기는 거기 적절한 감이었을 거다.

 문무왕이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다’고 한 데서도 굳이 적을 따지자면 일본만이 아니었고, 아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절 감은사에 대해서 일연은, “문무왕이 왜적을 막기 위해 이 절을 짓다 돌아가시자 아들 신문왕이 공사를 마쳤다”는 절의 기록을, 본문이 아닌 주석에다 인용해 놓는 데 그쳤다. 더 나아가 만파식적에 대해서는, 이 신령스런 피리가 단순히 외적을 막는 데만 쓰이지 않고,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고,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연의 이 같은 기술을, 단순히 일본을 적으로 만들자는 협소한 목적에 마감시켜서는 곤란하다........일연의 눈은 보다 더 크고 궁극적인 데로 향하여 있다.

---> 일연에게는 방향성이 있다. 목적이 있다. 역사서술의 3번째 방법. 그걸로 썼다. 일연은 사마천과 비교해보면 스님이라서 그런지 담담하게 역사를 서술한다. 사마천은 한이 서려있지만 일연은 담담하되 무언가 진취적이고 긍정적이다. 삶은 이러하기도 저러하기도 하니 집착하지 않아서 인가?


7. 밤에 찾아오는 손님

 

@ 야래자 설화의 전통

[120]

무릇 큰 강은 어느 지류도 마다 않고 받아들여 함께 흐르고, 그러기에 거꾸로 생각하면 큰 강이 된 것과 다르지 않게, 사람도 큰사람이 있는 법이고, 큰사람이 이룬 일에 대대로 많은 이들이 도움을 받는다.

 

설화문학에서 말하는 밤에 찾아오는 손님이 소재가 되는 야래자 설화가 있다. 그 밤손님은 물건이나 훔치는 도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는 남녀 관계에서 남자 쪽을 가리킨다. 남자는 당대의 영웅이거나 기이한 인물이면서도 사랑하는 여자를 밤에만 남몰래 찾아들어야 하는 운명이다.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사랑을 받아들인 여자는 거기서부터 시작될 실제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야래자 곧 밤에 찾아오는 손님(진지왕)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낳게 하는데서 일차 역할이 끝난다.

 

cf) 도화녀+진지왕=비형랑


@ 복사꽃처럼 어여쁜 여자

@ 사람을 돕는 귀신

[130]

(인간적인 냄새) 오랜 역사를 두고 이런저런 기구한 운명을 타고 태어났던 크고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출발점을 삼는 것 같다. 비형은 그런 영웅 중의 한 사람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던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진평왕과 비형은 사촌 형제 간이다.

반은 사람이니 낮에는 사람처럼 살고, 반은 귀신이니 밤에는 귀신처럼 살았다.


아무리 귀신인들 그들이 곧 사람을 이롭게 하는 존재로 그려진 이상 그다지 두려울 일은 없다. 신라 사람들에게 귀신은 그렇게 다가왔다. 그러나 비형의 활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32] 사진자료 (관심 대목)

옛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보다는 귀신과 조금 더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귀신을 항상 같이 지내는 존재로 여기며 위하기도 했다가, 어르고 달래어 하인처럼 부리기도 했다.

---> 무서운 귀신이 아니라 귀엽고 친근한, 사람을 이롭게하기도 하는 귀신. 이런 인식이 좋다. 장난꾸러기 도깨비........^^ 우리나라 귀신이 좋다.


---> 이러한 사고방식은 불교적인 것인가? 토속신앙적인 것인가? 무식하니 궁금한 것이 왜 이리 많으냐.... 해학적이고 친근한 느낌... 둥글 둥글한 우리네 산의 모습과 닮았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조선 백자도 이런 느낌과 통하는 듯.... 나 역시 지극히 신라적인가? 


(길달)-비형이 추천한 귀신

“귀신들 가운데 세상에 나와서 조정을 도울 만한 이가 있겠느냐?”

“길달이라는 자가 국정을 도울 만 합니다.”


임종(양아버지)은 길달(양아들)에게 흥륜사 남쪽에 정자를 짓게 했다.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자므로 길달문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해 숨어 달아났다. 비형랑은 귀신을 시켜 잡아와 죽였으므로....


길달은 끝내 사람 사는 세상에는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다.....달아나는 길달을 비형이 죽였다는 마지막 대목에서 우리는 또다시 귀신 세계를 보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를 알 수 있다. 귀신은 사람을 돕는 존재이면서, 그것을 어겼을 경우 엄정한 벌을 받는다는 데까지 나가 있는 것이다.

---> 귀신을 바라보는 당시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하자.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을 돕는 존재, 그 역할을 못 했을 경우 벌을 받는 존재. 이러한 사고관은 어디서 오는 걸까? 서양의 무서운 귀신과 참 다르다. 소설에 써 먹을 것.


---> 인간이 귀신보다 더 위에 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출발한 우리나라, 귀신보다 살아있는 인간이 더 높은 존재였는데........... 조선시대 유교가 정착하면서는 어떻게 된 것이냐? 우리나라의 제사....??? 조상신도 여기에 해당하나?

 

[134]

진지왕....현실에서는 실패한 왕을 다른 역할로 복권시켜주고 있는 느낌이 든다....특이한 아들을 낳게하고....그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못다 이룬 일을 (그 아들을 통해) 보상하게 했던걸일까? 몸으로 못하면 혼으로라도 말이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떤 조화다. 조화를 부리는 것은 귀신이다. 그러므로 귀신을 마음대로 부릴 수만 있다면 공포는 사라진다. 어쩌면 귀신의 세계를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듯한 이 이야기가 역설적으로 귀신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는 듯하다.

---> 신라의 귀신에 대한 사고는 연구대상감이다. 그 이후는 어떤 인식으로 변했을까? 조선시대까지도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그런데 정말 요즘 아이들은 영어동화를 많이 보아서 서양 귀신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아이들에게 우리 이야기를 많이 들여 주고 싶다.  우리는 결코 서양인이 아닌, 우리이기에.


@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 밤손님

[134]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후백제 견훤의 이야기에서 다시 한번 등장한다. 기이 편의 후백제와 견훤조에서다.

 

옛날 광주 북촌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딸 하나가 있었는데 자태와 얼굴이 단정했다. 하루는 딸이 아버지에게 말했다.

“자줏빛 옷을 입은 사내가 잠자리에 들어 정을 통하곤 한답니다.”

“그러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의 옷에다 꽂아 두어라”

딸이 그 말대로 했다. 다음날 북쪽 담장 아래에서 그 실을 찾았다. 바늘은 커다란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뒤에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 다섯살에 스스로 견훤이라 불렀다.  

---> 딸이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길 수 있는 분위기. 신라 때는 아주 쿨하다.

 

cf) 일본 미와야마 전설, 오키나와 전설


[137] 

밤에 찾아오는 손님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것은 적어도 왕의 권위를 가지고 더 크게는 신탁의 임무를 띠고 나타나, 구물구물 살아가는 이 땅의 중생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간다.


[138] 도표

태종의 아버지 이름은 용수, 그는 아직 어린 나이이기도 했으려니와 비운의 왕을 아버지로 두었기에 왕위를 4촌형에게 빼앗긴 듯하다. 그러면서 왕의 딸인 조카 천명부인과 결혼한다. 거기서 아들 김춘추(태종무열왕)을 낳아 결국 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운 태종으로 키워낸다. 진지왕의 혼은 거기서도 살아 있다. 그렇다면 비형랑은 용수의 동생인 셈이다.

---> 신의 도움 받아 임금된 태종. 기구한 영웅의 이야기.


 

8. 신라가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

 

@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

[140]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은 옛 유대 성인의 입을 통해 나왔지만,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그것은 진리다. 신라는 그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한 나라였다. 


@ 불교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내고

@ 토착신앙, 불교, 그리고 화랑

[149]

“내 이름은 미시입니다.......”  진지왕은 공경하며 추대하여 국선으로 삼았다. 여러 무리들과 화목하며 예의와 의리를 펼치는 모습이 일반사람들과는 달랐다.


일연 왈

“.......부처님은 유독 진자의 정성에만 감은하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땅에 인연이 있기에 자주 나타나 보이셨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이는 미시를 분명히 불교적 존재로서 미륵으로 보려는 뜻일 것이다. 그런 한편, “지금 나라 사람들이 신선을 ‘미륵선화’라고 부른다”는 말도 함께 붙여 놓아, 도교적 민간신앙의 흔적을 지우지 않았다.


미시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조재다. 그만큼 신라의 화랑이, 더 나아가 신라의 불교 수용 후의 역사가 복합적임을 말해준다.

---> 국선의 전통은 ‘국선도’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화랑들의 심신 수련법인 국선도는 편안하고 효과적인 심신 수련 명상법이다. 하지만 국선도법은 남자들 수련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도법이다. 신라시대에 화랑은 남자만 있었던 것 같지 않는데, 그 시절의 수련법은 어땠는지 남녀 관계는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 신라의 호국불교적 성격

[152]

원광(불교적이라 할 수 없는 세속오계를 만듦)-자장(황룡사 구층탑 짓는데 결정적 역할/왕실안녕)-원효(송아지와 난새 해독, 김유신 도와 삼국통일)-의상(당나라의 신라침공계획 급히 알려줌)

신라의 고승 세 사람이 모두 국가의 중대사에 참여하고 있다. 신라인의 사상적 무장은 이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은 곧 국력의 신장으로 이어졌다.

--->토착신앙+유교+불교 등이 짬뽕된 신라 불교. 신라 불교는 아주 현실적이다. 실질적이다. 이 당시의 고승의 모습은 대승불교적이다. 지금의 법륜스님과 닮았다.


@ 외교가 중요하다는 사실



9. 문희 그 아름다운 여자의 이름

 

@ 추억의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

@ 통일의 운명을 타고난 사나이

[162] 

역사는 충신들이 만들어 낸 역사인지 모른다. 신라의 전반기가 박제상과 이차돈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면, 그 중반기가 김유신이라는 충신이 만들어 낸 역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61]

일연은 ‘김유신’조 또한 자신의 특유한 필법으로 써 내려갔다. 간단한 출신 배경만 남기고 번거로운 이야기는 <삼국사기>쪽으로 돌리면서, 거기에 없는, 그 자신 어디서 들었는지 정확히 출전을 밝히지 않았지만, 흔히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이야기에 거의 전면을 할애했다. 바로 백석이라는 고구려 첩자와의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 우리나라에 있어서 통일을 이루어낸 것은 신라, 김유신. 앞으로 통일이 과제인 우리나라. 과연 지금 시대의 통일의 운명은 누가 이끌어갈 것인가?  일연의 특유한 필법은 또 무엇이더나? 일연은 틀이 있지만 자유롭게 역사를 기술한 듯 하다.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가능했겠지?


(유신이 백석이라는 고구려 첩자의 꾀임에 빠졌을 때...)

이에 여자들과 함께 들어가니 문득 신의 형상으로 나타나 말하였다. “우리는 나림, 혈레, 골화 등 세 군데의 호국신이다. 지금 적국 사람이 그대를 꾀어 이끌었으나, 그대가 모르고 나아감으로 우리가 그대를 머물게 하도록 여기에 이르렀노라” 말을 마치자 사라졌다. 유신은 이를 듣고 놀라 엎드려 두 번 절하고 나와 골화관에서 잤다.


[164]

결국 이야기는 김유신의 탄생 설화로 매듭된다. 전체적으로는 환생 설화로 불교가 가진 인연의 법칙에 따른 구조이고, 다른 예가 <삼국유사> 안에서도 더러 보인다고 하나, 왠지 불교적으로만 보기에는 괴이하기 짝이 없다. 김유신을 구해 준 세 군데 호국신은 신라의 민간 신앙과 관련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연이 보고자 한 김유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특색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김유신은 호국신이 지켜 주는 존재이고, 삼국 통일의 선봉에 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을 암시하자는 것일까? 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해석은 김춘추와의 대비를 거쳐 내려 보자.


@ 꿈을 사서 얻은 행운

[167]

그러나 사실이 무슨 상관이랴, 사실을 더 그럴듯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배경에 깔리면 그 사실은 더 힘을 얻는 법이다.

---> 사실을 그럴듯하게 해주는 이야기가 배경에 깔리면.......?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 민족의 결혼

[169]

김유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두 편의 소설 중 하나가 <민족의 결혼>이다. 최재서는 이 소설에서 김유신이 의도적으로 자기 동생을 김춘추와 결혼시키려 한 것으로 그려나갔다. 그것은 분명 앞에서 소개한 일연의 기록을 참고할 때 사실에 기초했다 할 수 있다. 그 곳에서 신분상의 차이 때문에 결혼이 불가능할 것을 안 유신의 아버지 서현공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유신의 갈등이 매우 확대되어 자세히 묘사된다. 사실 김춘추가 신라의 그렇고 그런 귀족으로 머물 사람이면 두 사람의 결혼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춘추는 여자인 선덕과 진덕의 명맥을 이어나가는 당시 성골 왕실에서 다시 남자 왕을 추대하고자 할 때 가장 유력시되는 후보였다. 그런 그가 본래 신라 사람도 아닌 가야 출신 지방 관리의 딸과 결혼한다면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170]

문희와의 결혼이 이뤄졌을 때라야만 신라와 가야는 진정한 한 나라가 된다는 생각이 그(유신의 생각) 밑에 깔려있다. 그것이 최재서가 말하는 ‘민족의 결혼’이었다.

---> 일제시대 친일행각을 한 평론가인 최재서, 그가 <국민문학>에 4편의 소설 발표하는데 ㄱ딤유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민족의 결혼>이다. 그는 김유신을 망국민의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가는 번민에 찬 지식인으로 보았다. 곧 최재서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분신이었다. 그래서 일본과 조선과의 결혼, 결합이 민족의 결혼이고 그래야 망국민의 콤플렉스가 벗어진다는?


누구나 자신이 필 받는 역사적 사건이 있을 수 있다. 나에게는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최재서같이 살고 싶지 않다.


@ 진골 출신 왕의 탄생

@ 화려한 무대 뒤의 여인

[176]

문희는 오라비의 어떤 계획에 따라 춘추와 맺어진 사이가 아닐까?

[177]

동생의 처지가 처량해서만 그랬을 리 없다. 일은 제가 벌여놓고 길길이 날뛰는 유신의 노한 목소리에 묻혀 한 여자의 여린 일생이 가려졌다.



10. 만파식적 만만파파식적


@ 문무왕 법민

[178]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라 해야 옳은지 모른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이 문무왕 3년이요,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문무왕 8년이다.

물론 통일을 위한 모든 기반을 김춘추와 김유신이 마련했으므로, 문무왕은 다만 그것을 이어 마무한 정도로 볼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태자 시절에도 문무왕이 아버지 못지 않은 활약을 벌리는데 있다.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통일 후의 마무리 작업 특히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해결해 낸 점 등은, 통일 위한 전쟁보다 더 어려웠던 일로 보인다.

---> 당의 힘을 빌려 통일을 하였으니 당과의 외교 관계 해결이 또 하나의 과제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늘 외교의 문제가 큰 이슈다. 서희 장군의 담판 등 외교적 관계의 정수를 보여준 사건들이 있다. 현재의 우리나라 통일문제, 중 미와의 관계 등은 주체적 시각을 가지고 과거 우리 역사의 교훈을 참고하며 풀어가야 할 것이다. 늘 쉽지 않는 지점이지만.... 우리나라의 통일 문제를 해결하는 대통령이 역사에서 아마도 문무왕 이상의 대접을 받지 않을까?


문무왕 법민은 김춘추와 문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앞서 잠시 그런 분위기를 비췄으나 문희 이전에 춘추에게 자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가야국 출신의 어머니에게 뿌리를 두고 태어난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법민은 줄곧 당나라에 머물며 외교적인 업무에 종사하는데, 이는 국내에서 당할 정치적 견제를 피하고 당나라 조정과의 친분을 쌓아 등극하는 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김춘추나 김유신의 뜻도 들어 있지 않았을까 한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만 초래했다고 비판받지만, 기록을 자세히 살피자면 당나라에 전부 뺏기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한반도 땅 전체를 집어삼키자는 것이 당나라의 속셈이었기 때문이다. 문무왕 법민은, 좀더 적극적으로 평가한다면,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사람이다.

--->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늘 나눠지기 마련이다. 문무왕이 통일을 위해 당을 끌어 들인 것이 잘 한 것인지 아닌 지, 그나마 최대한의 땅을 지켜 낸 것인지 쉽게 이렇다 결론 내리기가 힘들어 보인다. 역사를 볼 때 우리 나라의 영토는 계속 변화해 왔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토를 지킨다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길이다. 자존을 지키는 길이다. 참으로 눈물겹고 고통스런 생존의 노력이 필요하다. 역사를 보면서 후세들은 늘 정신무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 

  

@ 사천왕사로 지켜낸 땅

[181]

문무왕이 보낸 답신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오랜 전쟁에서 신라와 당나라가 맺은 협약이며 합동 작전을 자세히 기술하고, 그 과정에서 당나라 군대가 무리하게 요구한 것들이며 위약을 자세히 들여, 문제의 책임은 결코 신라에 있지 않을을 완곡하나마 강하게 말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린 이 답신을 읽다 보면 문무왕의 당당한 면이 잘 드러난다.


사실 그 이후로도 문무왕은 끝까지 당나라와 살얼음을 밟는 듯한 관계를 계속했다. 싸움은 거의 그칠 날이 없을 정도다. 삼국 통일 이후 신라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투했는가가 <삼국사기>에서는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 신라가 자기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투했는가!

 

@ 죽어서는 나라를 지키는 용으로

[185]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 하겠다고 한다. 용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축생도 곧 지옥이나 다를 바 없는 곳에 떨어지는 일이다. 지의 법사가 이를 걱정해서는 한마디 거들지만, 왕의 신념은 비록 축생도에 떨어진들 변함없어 보인다.

---> 바로 문무왕이 지장보살인 것이다. 축생을 마다하지 않는 거룩한 마음. 이 마음은 아들 신문왕에 이어져 더욱 아름답게 꽃핀다. 신문왕은 정명. 법정과 정명.... 신라 천년 역사에서의 전성기. 정치와 법이 밝고도 바르게 이루어지기를 이름에 넣어 소망하였기에 둘은 이름 값 하는 왕이다.


(감은사&용)

문무왕이 왜병을 무찌르고자 이 절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다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셔서 바다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개요2년(682년)에 일을 마치고, 금당의 아래를 밀어 동쪽으로 구멍 하나를 뚫었거니와, 이는 용이 절에 들어와 돌아다니게 마련한 것이다. 유언대로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이라 이름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다. 뒤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라 이름하였다.

--->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흥미로 왔다. 초등시절 내가 보았던 대왕암, 그 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마치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바다에 있는 듯 한 착각에 빠졌었다. 든든했다. 정말 멋진 왕이라고 생각했다. 대학시절 감은사 터에 답사를 갔다. 휑하니 넓게 남아있는 절터, 그리고 남성스럽고 기품 있는 탑의 모습, 감은사 터에 섰을 때 나는 만주 벌판에 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무왕은 용이 되어 이곳을 돌아 다녔으리라..... 경주를 가면 꼭 가게 되는 감은사 터, 그리고 황룡사 터... 신라, 신라인을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장소다. 이곳에 쓰면 전율이 흐른다.

   

@ 더할 수 없는 선물, 만파식적

[187]

그러나 일연은 (김부식과) 다르다. 절이며 피리며,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그는 떳떳이 쓰고 있다. 일연도 정말로 믿지 못할 구석이 없기야 했겠는가? 다만 그는 이 모든 일들을, 요즈음 말로 하면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터이다.

---> 역사와 신화 속에 녹아있는 상징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의문이 풀리고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정도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특히, 아이들에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이러한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 만파식적은 어디로 갔을까?

[189] 

상징의 핵심은 고장난명이었다고 해야 할까? 천하를 상서롭게 다스리고 화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같다. 그런 소망의 결정이 피리로 상징되어 나오는 것이다. 문무왕은 바다를 지키는 용이, 김유신은 하늘을 지키는 별이 되어, 신라와 거기 사는 백성을 영원토록 평안히 해준다는 믿음 또한 거기 가세한다.


그것이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인들 어떠랴.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그 믿음 위에서 마음을 하나로 하여 살아가는 일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값으로 칠 수 없는 큰 보배’인지 모른다. 일연은 마지막에 이렇게 첨가한다.


일연 왈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치료되며, 가뭄에는 비가 내리고 홍수 때는 맑아지며,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지는 것이었다.’

---> 모두가 하나 되어 똘똘 뭉치는 믿음. 그 믿음을 위한 상징성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럴 통해 사는 힘을 얻고 안정감을 가질 수 있으니.... 이런 점에서 일연은 김부식과 다르다. 역사적 사실보다 그것을 넘어선 더 높은 지평에 관심이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11. 권력의 끝

 

@ 토사구팽, 그 비정한 원칙

[196]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요리해 먹는 다는 말에서 유래한 권력의 비정한 뒤통수치기를 나타내는 이 말은 이미 비유도 아니다. 권력을 잡은 자의 마무리 과정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 한마디에 쓸쓸한 제 인생을 깊은 한숨과 함께 무상한 세월로 돌려보냈다.

 

197 혜공왕 때였다. 대력 14년은 기미년(779년)인데 4월에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김유신의 무덤에서  일더니 거기서 장군과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뒤따라 갑옷에다 무기를 든 40여 명이 좇아 나와 죽현릉으로 들어갔다. 얼마 있다 능 안에서 크게 우는 소리처럼 울리고 호소하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197 김유신은 문무왕 13년(673년)에 죽었다. 삼국 통일의 위업이 달성된 5년 뒤의 일이다. 그로부터 100년 뒤에 이 사건이 벌어졌다. 죽어서도 100년동안 김유신의 자손들은 그 영화를 누렸으되 언제나 가시방석이었다.

 

@ 김씨 성을 가진 첫 왕

[201] 

죽현릉의 주인공이 바로 미추왕임이 드러났다.


@ 김유신과 미추왕

@ 효소왕대의 죽지랑

[210] 

이 일화의 내면에는 한낱 종이호랑이로 변해 버린 화랑 출신들의 쓸쓸한 노년이 숨어 있다.

[211] 

더욱이 죽지랑은 성골, 진골 귀족 가운데서도 특별한 집안 출신일 뿐 만 아니라 삼국 통일의 전쟁터를 숱하게 누빈 역전의 영웅이다. 그런 그에게 아간 벼슬아치가 대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화랑 출신들의 투사구팽이다. 신라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과 그의 아들 신문왕을 거쳐 효소왕이 이르면 이는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 영원한 흥함은 없다 가득차면 반드시 망하고 겸허하면 반드시 존경받는다. 스스로 높다고 여기면 남이 끌어내리고 스스로 낮다고 여기면 남들이 끌어 올려준다. -다산 정약용.

정약용의 이 문구가 여기에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늘 겸허하게, 스스로 낮추는 자세가 필요하다.


@ 임 그리는 마음이 가는 길

 


12. 수로부인, 미시족의 원조


@ 왕비를 둘 두었던 왕

[214]

경문왕. 그는 헌안왕의 사위로, 그의 딸 둘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아 두 사람의 왕비를 둔 경우인데...


@ 3대에 걸친 출궁사건

[219] 

신문왕에서 출발한 출궁 사건은 중간에 일찍 죽은 효소왕과 효성왕을 제외하고 3대에 걸쳐 내리 일어났다. 공을 다투는 이는 많고, 새로운 통일국가의 이념은 아직 잡히지 않은, 몸집만 비대해진 신라의 허둥대는 모습이다. 끝내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은 바로 그 반역의 칼날에 목숨마저 잃는다. 신문왕 즉위년에서 시작해 혜공왕 폐위에 이르는 동안 그치지 않는 반역의 칼날, 그것은 김춘추 직계 후손의 쓸쓸한 종말을 가져왔다.

 

@ 왕의 이혼 위자료는 얼마?

[220]

성덕왕의 출궁 사건에서 우리는 재미있는 기록을 하나 발견해 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성덕왕 조 15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서려있다.


성정왕후를 내보내면서 비단 500필, 밭 200결(지금가치 20만 평), 조 1만석(을 세금으로 거둘 권한), 집은 강신공의 옛 저택을 사서 주었다.


이런 정도라면 왕비가 반역 사건에 연루되어 쫓겨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러나 다른 이유를 딱히 댈 수 없는 상황에서....

---> 조선시대 왕비가 궁을 나올 때는 어떻게 했을까? 왕의 부인이었는데 품위 유지는 시켜주지 않았을까? 신라시대에는 백성들의 재혼이 가능했다고 들었다. 고려시대도 마찬가지. 그런데 왕의 부인이었던 왕비는 재혼이 가능한가?~물론 조선시대에는 철저히 금지 되었지만.... 여성의 지위에 대해서 좀더 찾아 보아야겠다.


@ 꽃과 여인 그리고 사랑의 노래

[224]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수로부인이다. 그의 아름다운 용모는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이 조의 마지막에 수로부인의 자태와 얼굴이 너무도 뛰어나 매번 깊은 산과 큰 연못을 지날 때면 여러 차례 신물들에게 끌려갔다고 적은 데서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미색을 갖춘 여자였으니 혈기왕성한 청장년만이 그녀에게 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사는 초라한 노인까지도 어떻게 하든 그에게 잘 보여 점수 좀 따려고 설친다.


[226]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꽃을 꺾어 바치는 노인의 다음 행동이다. 자긍심을 가지고 부인 앞에선 노인은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노래를 함께 지어 바쳤다.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손 암소를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은 꽃이라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선물은 노래다. 손에 잡은 암소도 놓고 그렇게 정중히 꽃을 바치는 노인의 태도야말로 헌신하는 자의 상징이다.

 

꽃을 탐내는 여자의 마음도 아름답지만, 모름지기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 바꾸는 사랑이라면 최고의 가치를 지니지 않겠는가?

---> 그런가? 예전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아닌가? 사랑 말고도 바쳐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랑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세상은 넓고 하고자 하는 일의 뜻은 높다.


@ 함께 부르는 노래의 힘

[227] (자료 그림)  (주목 그림)

용의 우리 옛말은 미르이고, 미르는 물과 같다. 용은 물에서 살며 바다의 왕은 용왕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에서도 숱하게 나오는 용은 항상 바다, 연못, 천둥번개 등 물과 관련돼 있다.(포항 오어사의 용 그림)

---> 해학적인 그림이다.. 그림을 필히 갈무리 할 것!


[228] 

(수로부인 찾기 위한 ‘해가’를 미르 향해 부르며)

한 마다로 ‘여론의 힘’이었다. ‘뭇입은 쇠라도 녹인다는 말은 원문에서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 표현되어 있다. 

---> 중구삭금. 여론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뭇 사람의 입들 때문에 소문이 소문을 낳아 피해를 보는 사례도 허다하다. 늘 입을 무겁게 하고 자신의 생각만 이야기 하여야 한다. 남이 이러할 것이라는 추측으로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아야 하며, 또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이야기는 일단 그 사람의 필터 속에서 나온 이야기로 그 사람의 감정과 욕구를 관찰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쉽게 믿고 쉽게 이야기하고 쉽게 실망하는 어리석음은 자기 스스로에게서 오는 것이다. 타인이 아닌.



@ 동해 바다, 그리고 국도 7호선

[232]

이쯤에서 부인을 잡아간 용과 용이 사는 바다의 의미를 생각해 볼 만하다......한반도의 동쪽 사람들에게 바다는 무엇이었을까 정도에서 소박히 생각하자.


[233]

수로부인은 한번 산 쪽으로 눈을 돌려 꽃을 보았고, 한 번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려 용궁을 보았다.

어디인들 수로부인에게 이 여행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예쁜 꽃과 함께 노래를 선물 받았는가 하면, 용궁에 들어가 진기한 경험을 하고 나왔다. 수로부인처럼 아름답고 천연덕스럽게 살아가는, 거기서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산과 바다는 그런 곳이다.

---> 주어진 자연환경의 아름다움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그것에서부터 피어난 아름다운 이야기   


13. 첫 성전환증 환자

 

@ 일연이 그리는 경덕왕의 존재

[234]

경덕왕을 전후로 한 왕대에 벌어진 사건을 기록한 <삼국유사>의 이야기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게 읽힌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경덕왕 때 인상적인 일들이 줄을 잇는다. 실명한 딸을 위해 향가를 지어 간곡히 기도하는 희명, 자기 손바닥을 뚫어 새끼줄에 꿰고는 필사적으로 염불하는 욱면이 그 시대 사람인가 하면 땅 속에서 사방불을 캐내고, 황룡사에 종을 만들어 건 이가 경덕왕이다.


[235]

거기에다 한 가지 더 이유를 붙이자면, 경덕왕 때 두 사람의 뛰난 향가 시인이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물론 충담사와 월명사다.


이 왕이 일연에게는 각별히 다가온다. 경덕왕을 다루는 일련의 양상을 들여다 보면, 일연이 어떤 인물의 무엇을 선호했는가가 짐작된다.

 

@ 아들을 바랐던 왕

[235] 

경덕왕에게는 비원이 있었다. 아들을 얻어 자신의 뒤를 이를 일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첫 왕비를 출궁시키고 두 번째 왕비까지 맞았건만 경덕왕은 10년이 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237] 

표훈(대사)이 하늘님께 아뢰고 돌아와 왕에게 대답했다.

“하늘님께서 딸은 되지만 아들은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딸을 바꾸어 아들이 되게 해주시오.”

표훈이 다시 이를 하늘님께 청하자 말하였다.

한다면 할 수 있노라. 그러나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워져.”

표훈이 내려가려 하자 하늘님이 다시 불렀다.

하늘과 사람은 어지러워져선 안 되느니, 지금 그대가 마치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노라. 이제 이후로는 다시 통하지 못할 것이야.”

표훈이 와서 하늘님의 말씀을 깨우쳐 아뢰자 왕이 말하였다.

“나라가 비록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을 얻어 뒤를 잇는다면 충분하오.”

이때에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았다. 왕은 무척 기뻤다.


표훈(의상의 10대 제자, 성인)이 하늘님과 만나는 곳이 토함산이었다. 그는 하늘님과 직접 대화를 나눌 만한 세상의 단 한 사람이었기에 경덕왕은 무리한 부탁을 하고 있었다.


록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한들 아들(혜공왕)을 얻겠다는 경덕왕의 비원은 차라리 비극에 가깝다.

---> 아들에 대한 집착. 우리 할머니도 정말 그랬지. 아들에 의지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조선 여자의 운명처럼 경덕왕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무엇을 낳았는가? 표훈은 하늘님께 중대한 경고와 처벌까지 받으면서 이 일을 했다. 경덕왕은 아이가 2돌 되었을 때 태자로 책봉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그가 아들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 재앙을 극복하는 길

@ 죽은 누이를 위해 부르는 노래

@ 최후의 시도


@ 여자 같은 남자

 [249]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돌아가시고 태자가 자리를 이었는데, 이가 혜공왕이다. 매우 어리므로 태후가 조정에 나가 있으나, 조리가 고르지 못하고 도적이 일어나니, 나라를 지킬 겨를이 없었다. 표훈의 말이 증명된 것이다.


어린 왕(혜공왕)은 여자아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부터 왕위에 오르기까지 늘 부녀자들의 놀이를 하였고, 비단 주머니 차기를 좋아하였다. 도사 무리들과 놀았으므로 나라에 큰 변란이 일어,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우리나라에 혜공왕 같은 인물은 없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의 흥미로운 소재이다. 드라마를 만들면 어떨까?


<삼국사기>에서는 “장성하자 음악과 여색에 빠져들어, 돌아다니며 노는 것을 절제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일연은 이를 해석하여, ‘여자 아이일 것이 남자가 되었으므로’ 그렇게 되었다 했으나,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건대 이는 성전환증을 가진 사람의 증세다.


[250]

그들은 남성이면서 여성처럼 놀고, 성인이 되어서는 화장이나 옷차림을 아예 여성의 모습으로 바꾸어 버린다. 물론 여성은 반대다........

혜공왕은 성전환증 환자였을 것이다. 그는 정식 왕비만 둘이었는데, 16년간 재위하였으므로 24세에 죽었지만, 아들을 두었다는 소식도 없다.


혜공왕의 성전환증은 신라 왕실이 오랫동안 근친혼을 했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지만, 한 직계가 6대에 걸쳐 8명의 왕을 내었으니 할 만큼 했다고도 하겠다.

----> 사기에는 여색에 빠졌다고 하지 않았나? 여색에 빠졌다는 것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왜 성전환증이라는 건가? 유사에 나오는 표훈과 하늘님, 경덕왕 아들갖기 스토리는 흥미롭지만 무언가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 좀 더 이야기를 제대로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연의 혜공왕 스토리로 드라마를 만든다면 현재의 양성, 트렌스 젠더 등의 문제를 과거 역사를 소재로해서 다룰 수 있지 않을까? 아주 흥미로워지는 대목이다.

 

 ---> 근친혼을 하면 성전환증이 생기는가? 저자의 혜공왕에 대한 해석이 신빙성이 없다. 과학적 측면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근친혼과 성전환증 문제를 이야기 해야 하지 않을까?\


 

14. 왕이 되는 자


@ 야심가의 등장

@ 왕이 되느냐 죽느냐

@ 꼼꼼하면서도 과감했던 왕

@ 왕이 되는 자의 금도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266] 

유복해 보이는 경문왕에게도 겉으로 보아 뜻하지 않은 내면이 있었다. 왕의 침소에 저녁마다 뱀이 모여들었다. 궁인들이 놀랍고 두려워 쫒아내려 하자 왕이 말하길 “내가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자지 못하는구나. 막지 말아라”라고 하였다. 매번 침상에선 혀를 날름거리며 가슴 가득 덮었다.

 

[267] 

그 자신 아무리 덕을 갖추었다 한들, 이미 시대가 급격한 소용돌이 속에 빠졌는데, 늘 행운만 따르기를 바랄 수는 없었다. 대단한 능력을 타고 나서 어떤 고난이라도 헤쳐갈 사람이라도 시대의 운이 뒷받쳐 주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결과는 비극을 향해 간다.


그래서 운명적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던져진 사람은 그 세계관이 비극적이다. 경문왕이야말로 그런 비극적 세계관의 주인공이다.


뱀을 이불 삼아 자야했던 사람, 시중드는 내시뿐만 아니라 부인도 모르게 감추어야 했던 긴 귀를 가진 사람, 그것은 곧 자신의 고민을 오직 혼자 지고 가야 하는 고독한 이의 슬픈 초상이다.    

 ----> 불쌍한 경문왕이여... 시대를 잘 타고 나는 것은 누가 내리는 것인가?  일연은 비극적인 인물에 대한 묘사를 많이 하였다. 경덕왕도 그렇고 혜공왕도 그렇고..... 하지만 일연의 비극적 인물을 묘사하면서 아름답고 신비롭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상징을 더해간다. 일연은 세련된 이야기꾼이다. 일연이 동자승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들 들려주었을까? 유사같은 이야기를 쓸 정도면 자신이 정리해내는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안 들려주고는 못 배겼을 듯 하다.  일연은 고려의 승려인데 나는 그가 신라 황룡사 앞길을, 유채꽃 가득한 그 길을 거닐고 있는 느낌을 받는다. 맞다. 그는 고려 사람이지만 분명 황룡사를 갔을 것이고 과거 신라 땅을 거닐었을 것이다. 그가 살던 고려에는 보다 많은 신라의 흔적이 남아 있었을 것이고......아 생각만 해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른다.  신라의 문무왕이, 경덕왕이 국선들이 거닐었던 그 길 위를 일연이 거닐면서 신라 속으로 뛰어들고.... 대한민국의 나 역시 봄에 유채꽃 가득한, 가을에 갈대 가득한 그 길을 거닐며 신라의 품 속에 안긴다.


밤 2시가 가깝다. 지금 문무대왕릉 앞 감은사지 터의 석탑은 어떤 모습일까? 오늘은 달이 환하게 떴을까? 스르르 문무 미르가 나타나 감은사지 터를 용트림하며 거닐고 있지 않을까? 탑신을 타고 탑의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았을까?


나는 한글을 창제하여 백성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 세종대왕을 존경하였다. 하지만, 문무대왕의 나라지킴에의 의지는 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답니다. 일연은  우리네의 왕들, 백성들의 이야기를 참으로 감동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일연같은 역사소설, 현재가 담긴 과거의 역사, 비극일지라도 아름다운 카타르시스가 있는 묘사와 해석. 아마도 사부님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그것을 보였을 것 같다. 그래서 역사의 3 장면을 묘사하라 하지 않았을까?


나에게 의미 있는 3 장면은 현재의 나와 분명 연관성이 있고 현재의 나에서 출발하여 과거의 역사는 다시 쓰여지는 것이다. 어떻게? 현재에 다시 살아나는 생생한 묘사로....^^

      

   


15. 나라가 망하는 징조

 

@ 달도 차면 기운다.

@ ‘이른 눈’으로 상징한 것

[271] 

일연은 ‘기이’ 편의 신라사를 마감하면서 이 혼란기의 신라 왕실을 착잡한 심경으로 써내려 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그리고 이채로운 제목을 달고 다가오는 조가 ‘이른 눈(早雪)’이다.


“제 40대 애장왕 마지막 해는 무자년(808년)인데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제 41대 헌덕왕 원화 13년은 무술년(818)년인데 3월 14일에 눈이 많이 내렸다. 제 46대 문성왕 기미년 (839) 5월 19일에 눈이 많이 왔으며, 천지가 어둡고 깜깜해졌다.”

 

[272] (주목할 것!)

이는 어떤 메시지를 표면에 내세우기 보담 객관적 사실만 나열해놓고 읽는 이들에게 그 의미를 생각해보게 하는 일종의 상징적 기술임을 알 수 있다. 무엇을 상징하는 가는 명약하다. 자연의 이상 변동을 기록하는 사관의 뜻은 그것이 사람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는 정치의 불안정이겠지만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어려움이 닥친다는 경고에 있을 것이다. 

---> 어떤 비슷한 객관적 사실만 나열함으로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복선을 까는 것. 문학적이다. 무엇을 상징하는가는 명약하다, 정말.


[272]

일연이 한 조로 묶어 전하고 있는 이 왕대는, 헌덕왕에게 살해된 애정왕, 민애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라 1년도 재위하지 못한 신무왕과 같이, 혼란의 극치를 달리는 때였다.


이 같은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연은 사건의 기록보다는 ‘이른 눈’이라는 이상 징후를 통해 한 사회의 종언을 증언하고 있다.

---> 일연은 천재이던가? 아마도 언어적 재능이 뛰어났을 것이다. 역사 기록의 다양한 시도! 그 역시 사마천의 사기를 보았을 것이며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들도 정독하였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마천 대로 역사 기록의 원칙을 정해서 그만의 방식에 따라 사기를 썼다. 사마천이 다큐멘터리적이라면 일연은 상징이 높은 문학에 가까운 역사기술을 한다.


나는 이들의 방식을 배운다. 오랜 과거가 되었던 현재가 되었던 간에 글을 쓰는 작가는, 역사가는 자기만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고 그 방식은 자신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나의 방식은 이들을 통해 영감을 얻고 참신하게 태어나야 한다.


나의 재능소설에 일연의 상징 기법과 사실 나열 기법으로 상황 예언 복선 깔기를 도입해 볼 것이다. 사마천의 인물:인물도 재미있는 방식인데? 신라 달밤으로 날아가, 사마천과 일연과 내가 함께 만나 잎차 한 잔 마시며 역사기술 기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구나. 아......경주에 가고 싶다.

 


@ 권력다툼 속에 인재는 죽고

@ 빛나는 조연, 처용

@ 나라가 망하는 징조

 


16. 지는 해 뜨는 해


@ 마지막 희생자

[287] 

신라 멸망 원인 가운데 무엇이 선두에 설까? 나는 무엇보다 골품제의 동백경화현상을 내세우고 싶다. 중앙과 지방의 중요한 관직을 성골과 진골로만 채우는데 그들이 나라 일을 맡아 해낼 능력도 의지도 부족해졌을 때, 신라는 탄력성을 잃고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새로운 피가 수혈되지도 못했다. 원성왕의 독서삼품과가 실패로 돌아간 데서 우리는 그 같은 현상을 목격한 바 있다. 수도인 경주가 통일된 한반도의 동남쪽에 치우쳐 있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겠다.

  

@ 준비되는 새 나라

@ 김부대왕이라는 칭호

@ 비운의 왕자

[302] 

경순왕이 항복할 때 향기롭게 장식된 마차가 30여리를 가득 채우고 태조는 바깥까지 나가 맞이하여 동쪽 한 구역의 궁을 내려주었으며 큰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는 대목에 이르면 두 아들의 출가는 한층 측은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인 경순왕은 새 나라 고려의 부마가 되어 40여년을 더 살다가 죽었는데 말이다.


 @ 천 년 사직은 막을 내리고

 

 

17. 백제와 일본, 그 근친의 거리

 

@ 아쉬운 백제의 역사

@ 백제 고도의 대표는 부여가 아니다

[309] 

정말 백제의 고도가 부여(사비)일까? 물론 백제가 부여를 도읍으로 삼아 120년이나 지냈고, 거기서 나라의 최후를 맞이했으니 중요하기는 하겠다. 공주(웅진)에서 도읍했던 63년까지 합한다면 그 183년의 백제 역사는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백제의 전 역사를 통틀어본다면 이 기간은 전체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311] 

웅진, 부여 천도 뒤의 백제 역사는 특히 그것이 왕실과 관련된 것일수록 늘 일본과의 교섭 관계 속에서 보아야 한다. 


@ 따뜻했을 것 같은 백제의 풍속

@ 곤자왕자로부터 시작하는 백제와 일본의 왕계

@ 백제가 어떻게 일본 왕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 일본의 독립선언

 [325] 

왕실로만 놓고 본다면 일본은 분명히 백제의 식민지였다. 그런데 7세기 후반에 들어 중주국 백제가 멸망했다. 어느 정도 힘이 쌓이면 내심 독립할 요량이었던 일본 왕실로는 어쩌면 복음과 같은 소식이었을지 모른다. 백제가 망할 무렵, 일본의 구원군은 적시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렇게 늦장 부리다가 싸우려는 시늉만 하고 돌아가고 말았다.

 

중주국 백제의 멸망후 7년 국호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백제에 대한 일본 왕실의 독립선언으로 보인다. 

 

[326] 

사실 그 이후 일본 왕실에서 백제의 흔적 지우기는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14세기에는 신황정통기에서는 8세기 말 환무왕이 일본과 삼한은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을 불태웠다고 했다….나는 그것을 일본의 자기정체성에 대한 부정이라기 보다는 독립의 비원으로 본다.

 


18. 서동은 정말 선화공주를 꾀었을까?

 

@ 맹랑한 눈에 맹랑한 자가 보인다.


@ 한편의 완벽한 드라마 (주목 이야기)

[329] 

일연이 적고 있는 남쪽 연못가의 용이 사실을 비유한 것이라면 용은 왕위에 오르기 전의 법왕(서동의 아빠)일 것이다. 왕족이긴 하나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닌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 여자는 떳떳이 자신을 드러내 놓고 살지 못했으리라. 더욱이 과부의 신분으로 말이다.

 

[330]

서동은 공주를 따라가게 되고 몰래 정도 통하였다. 그런 후에야 공주는 서동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노래대로 이루어지는 기묘한 체험에 흠칫했다.


영웅은 자기가 타고난 비범한 재주로 고난을 극복해 낸다. 서동은 이웃 나라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이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것으로 그 첫발을 내딛고 있다. 첫발치고는 통도 크다.

---> 고조선 이후, 석탈해부터의 영웅들은 인간적이다. 아니, 인간적인 치사함과 살짝 사기꾼 기질이 묻어있다. 공주를 속여 아내로 삼았으니.... 칭송받을 영웅이 아니라, 성공하여 위로 올라가는 자, 그들은 대부분(?) 그러하다....


평강공주와 바보온달, 선화공주와 서동... 평강공주와 선화공주는 ENFJ유형이 아니었을까? 씨앗이 좋은 남자에 길을 열어주고 성공에 이르게 하고 또한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여자들. 생명을 품은 여자가 키워내는 최고의 조련이 아닐까? 남자를 최고의 왕처럼 대접하며 기분 안 나쁘게.....^^


[332]

“금..... 이런 것이 흙처럼 쌓여있소“

금을 모아 진평왕에게 보내어 서동은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서동은 비범한 재주를 타고난 사람이지만 귀하고 중요한 것의 가치를 아직 모른다. 공주를 꾀어내는 꾀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동물적 감각에서 나왔을 것이다. 후천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여기서 발휘된다. 공주는 가치를 발견하는 눈을 키워주었다. 그런 면에서 두 사람의 결합은 완전한 어떤 것을 지향하고 있다.

---> 이럴 때 이야기는 아름답다. 남자의 능력과 여자의 지혜의 결합. 비범한 재주의 강한 남자...품으며 헤아릴 줄 아는 여자의 현명함. 제 3의 조력자 ‘지명법사’  .


@ 서동과 무왕 그 아슬아슬한 연결

[335] 

일연이 쓴 무왕조를 사실로 보아 무왕(아버지, 법왕)의 출생이나 왕위 등극의 과정을 설명하자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법왕이 아직 왕자일 때 그것도 등극과는 서열이 먼 상태에서 만난 여염집 여자 더욱이 과부에게서 얻은 아들을 떳떳이 자기 집 안으로 거두지 않았을 것이고, 왕위계승은 큰아들이 아니라 누구든 뛰어든 왕자가 차지하는 당시 관례로 보아, 어떻든 왕족인데다 비범한 서동의 발군으로 곧 그것으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점 인정된다.

 

진평왕 셋째 딸이 있었는지, 그 딸의 이름이 선화공주인지 사실적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이것이 선화공주가 설화적 인물일 가능성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이유다.


[336]

cf. 바리공주, 선화공주, 일본의 숯 굽는 부자 이야기, 중국의 자기 복 자기가 타고났다고 말한 공주 이야기 ,

--> 박대 받았던 딸 아이, 오히려 어버이를 더 챙긴다는 모티브. 4째 딸인 내 이야기? ㅋㅋ

[338] 

실제 무왕은 설화 속에서는 장인인 진평왕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르며 백제를 지켜낸 오왕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의자왕대로 늦추어진 것도 무왕의 강고한 힘 때문이었을 것이다. 

 

@ 미륵보살 쟁탈전 속의 선화공주


[342]

미래불로 오시는 미륵보살의 세상이 이렇기에 시대가 혼란해질수록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신앙이 만연하게 되었다.......후백제의 견훤이 자신을 ‘미륵의 하생’이라 선전한 것도 같은 맥락.


대체적으로 미륵불은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미륵이 본디 남자였지만 이렇게 바뀌는 것은, 미륵불자비와 영원불멸의 생산을 의미하는 여성적인 성격을 가진 데다 남성인 석가불에 대응하려는 사람들의 의지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다. 미륵은 자비의 부처다.  


[345] 

백제에 주재하던 미륵보살을 신라에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진다. 나는 그 부분을 앞서 신라의 화랑 제도 성립과 관련해 소개한 바 있다. 바로 미륵선화와 l미시랑 그리고 진자사 조의 미륵선화다.

.............미륵은 다시 백제로 갔고, 서동은 그 덕분에 왕이 될 수 있었다고, 최완수 선생은 말한다.  

 


19. 견휜, 비운의 영웅

 

@ 백제 땅에서 나온 마지막 왕

@ 3대에 걸친 물고 물리는 불화


@ 호랑이가 키운 아이

[352] 

견훤에게는 망해가는 신라보다 더한 강적이 있었다. 바로 북쪽의 왕건이었다. 왕건이 철원경에서 고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353] 

오랜 싸움은 민심을 얻는 자가 이기는 법이다. 견훤은 제 힘만 믿고 오만스럽기 짝이 없어, 갈수록 민심을 잃는 편이었고, 왕건은 그렇게 떨어진 민심을 주워담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능했다. 아마도 그 결정적인 사건은 견휜의 경애왕 살해일 것이다.


@ 편지로 싸운 한 판

@ 가엾은 완산 아이


@ 라이벌에게 의지한 마지막 생애

 [361] 

왕건은 그가 지닌 성품대로 부하들을 보내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자식에게 당한 배신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온 이 노장이 도착하자 자기보다 10년 위라고 해서 그를 높여 상보라고 했다. 상보는 경순왕에게도 주었던 직함이었다. 이 와중에도 살길을 찾은 이는 용케 그 길을 간다. 그런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견훤의 사위 영규다.

 --->  왕건의 사람됨과 견훤의 치사함이 들어나는 내용이다.


20. 신비의 왕조, 가야

 

@ 인멸된 가야사

[364] 

일연의 삼국유사에 실려 있기에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게 된 ‘베스트 3’을 꼽으라고 한다면 무엇을 들겠는가? 내가 존경하는 어떤 선생님은 단군신화, 향가, 가락국기 이 세 가지에다 점을 찍었다.


그런데 왜 가락국기일까? 일단 표면적으로는 지금까지 전하는 가야사에 관한 유일한 사료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400년 가까이 존속된 나라의 역사치고는 철저히 외면되어 있다.   


[365] 

가야를 그냥 건너뛸 수 없는 이유가 일연에게는 있었을 것이다. 허황옥이라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로부터 멀리 시집 온 여자, 이 땅에 불국토의 신성함이 서려 있다고 믿는 일연으로서는 이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은 소홀히 대하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든 좋은 자료가 바로 가락국기다.

 

 

@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노래 속에 내려온 왕

@ 왕의 밀월여행은 4일간?


[375] 

왕이 처음 신부(허황옥)를 맞으러 나간 날이 7월 27일 나흘을 보낸 다음 8월 1일에 궁궐로 돌아왔다고 가락국기는 전한다. 두 사람의 꿈같은 밀월여행은 짧기만 하다.

---> 최초의 국제 결혼


@ 바사석탑으로 풀어보는 왕후의 정체


@ 슬픈 수로왕의 그림자

 [382] 

(문무왕 왈, 수로왕에 제사 계속 지내라. 내 조상이다...)

김춘추와 문희 민족의 결혼이 낳은 아들 문무왕, 삼국통일을 완성그는 신라와 가야 두 민족 간의 결합으로 태어났다. 그러기에 민족 간 결합에 의욕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민족 간은 결합해야 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신념과 경험을 가진 그라면 나아가 신라 백제 고구려의 세 나라를 한 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두번읽기2 로  이어짐..........)

IP *.58.97.12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272 (No.14) 하워드 가드너[열정과 기질]북스넷-9기 서은경 file 서은경 2013.07.15 3616
1271 열정과 기질/ 하워드 가드너 file [1] 오미경 2013.07.15 4789
1270 [7월 3주] 열정과 기질_하워드 가드너 (박진희) file [1] 라비나비 2013.07.15 2430
1269 [그림책] 괴물들이 사는 나라 / 고 녀석 맛있겠다 한정화 2013.07.20 12192
» (No.13-1) 두번읽기1: 고운기 [삼국유사]현암사-9기 서은경 file 서은경 2013.07.21 2724
1267 (No13-1) 두번읽기2: 고운기[삼국유사]현암사-9기 서은경 [2] 서은경 2013.07.21 2565
1266 #12. 사기열전(두번읽기) / 사마천 file 쭌영 2013.07.22 3635
1265 두번 읽기_사마천 사기열전 file 유형선 2013.07.22 3132
1264 #12. 두 번 읽기 - 사기열전(상) - 사마천,민음사 [1] 땟쑤나무 2013.07.22 3349
1263 (No14-2)두번읽기-사마천 사기열전1 file [2] 오미경 2013.07.22 7842
1262 <사기열전> 사마천 지음 ( 2회 읽기 ) file jeiwai 2013.07.22 2903
1261 [7월 4주차] 사기열전 1_ 두번읽기 file 라비나비 2013.07.22 2447
1260 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한정화 2013.07.27 4627
1259 [2-9] 더 보스, 쿨한 동행 - 구본형 콩두 2013.08.01 8548
1258 [2-14] (소설) 허삼관 매혈기- 위화 한정화 2013.08.07 3189
1257 [2-10] 떠남과 만남 - 구본형 콩두 2013.08.08 3248
1256 [2-11] 마흔 세 살에 다시 시작하다 - 구본형 콩두 2013.08.11 2425
1255 [2-12] 낯선 곳에서의 아침 - 구본형 콩두 2013.08.12 4419
1254 [2-15] 농가월령가 - 정학유 타오 한정화 2013.08.13 4156
1253 #14,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file 쭌영 2013.08.19 4616